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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수 목사
어리석은 자녀는 부모를 잊고 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녀는 부모를 기억하며 삽니다. 어리석은 부모는 하나님을 잊고 자녀만 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부모는 자녀를 보기 전에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자녀를 양육합니다.
우리 모두는 지혜로운 부모, 지혜로운 자녀가 되어야 하지만, 또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만 위해 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뿌리를 생각하고, 자기 근원을 생각하고, 자기 도리를 생각하며 삽니다.
고독하게 살던 한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변호사를 불러 유언장을 썼습니다. 유언의 내용은 십 수억 원이 되는 그의 모든 재산을 함께 살았던 개에게 물려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개를 정기적으로 목욕시켜 주며 잘 돌보아 주게 하고, 개가 죽으면 그 재산을 아들에게는 절대로 물려주지 말고 사회복지센터에 기증하라고 했습니다.
할머니의 외아들과 며느리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을 하기 위해 어머니의 집으로 왔습니다. 변호사를 통해 어머니가 십수억 원의 재산을 물려주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은 그들은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어머니의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어서 재산을 개에게 유산으로 준 것이니 어머니의 결정은 무효다. 어머니의 모든 재산을 되돌려 달라.’
판사가 그 아들과 며느리를 법정에 앉혀 놓고 물었습니다.
“당신 어머니의 생일이 언제요?”
아들도 며느리도 묵묵부답이었습니다.
“당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즐기던 음식이 뭐요?”
아들도 며느리도 유구무언이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어머니의 건강 상태가 어떠했소?”
역시 대답이 없었습니다.
“어머니를 일 년에 몇 번이나 찾아뵈었소?”
두 사람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전화는 얼마나 자주 드렸소?”
역시 대답이 없자 판사가 분개하면서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개에게 유산을 물려준 것이 유효하오. 그것을 확정하오.”
그 아들 며느리는 개보다 못한 자식이 되었습니다.
부모를 잊고 사는 사람은 개보다 못한 자식입니다. 부모를 잊고 사는 것은 큰 악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악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뿌리, 우리의 근원인 창조주를 기억하지 않고 멋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 중의 악입니다.
부모를 통해 내가 세상에 태어났어도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셨습니다. 이사야 45장 18절 말씀대로, 이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오직 지구별 하나에만 오곡백과를 무르익게 하시고 벌과 나비들이 춤을 추게 하시고 좋은 공기를 주셔서 사람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으신 공기를 마시며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을 보고 사는 인간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산다면 짐승보다 못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제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이는 우리를 만들어 살게 해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젊을 때는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다가, 죽기 전에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으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심사가 나쁜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이 얼마나 빨리 가는지 모릅니다. 시간은 언제나 변함없이 째깍째깍 가지만 느끼는 감은 나이에 따라 다릅니다. 시간이 십대 소년들에게는 걸어가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십 대 청년들에게는 마차를 타고 가는 것처럼 느껴지고, 삼사십 대에 접어들면 자동차를 타고 달리듯이 속도가 빨라지고, 육십이 넘어 칠십이 되면 비행기로 가듯이 빨라지는 것입니다. 어제 설을 지냈다 싶은데 오늘 연말을 맞는 것이 노인들의 생활입니다. 그러면서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해와 빛과 달과 별이 어둡기 전에’
이 말은, 해가 지면 하루가 막을 내리듯이 사람이 태어날 때는 밝은데 늙을수록 어두워져 인생도 어두움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12장에 보면, 사람의 늙음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이것은 손에 힘이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집은 사람의 손으로 지킵니다. 문을 닫아 걸 때도 손으로 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손이 덜덜덜 떨리게 됩니다. 그래서 국을 먹을 때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이는 허리가 굽어지는 것과 다리에 힘이 없어지는 것,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힘은 허리에서 나오니 허리가 굽어지면 힘이 없어지게 됩니다. 또 다리는 온 몸을 버티는 부분으로 몸 중에서 가장 강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다리에 힘이 없어지면 똑바로 걸을 수가 없습니다.
‘창들로 내어다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창은 눈을 가리킵니다. 나이가 들면 눈이 어두워지게 됩니다.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문이 닫힌다는 것은 귀가 닫힌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귀가 닫혀서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제가 어릴 때 여름성경학교에서 배운 노래 중에서 이런 노래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노래가 찬송가인 줄 알고 열심히 불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찬송가가 아니었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어디 가세요
오냐 순이 집에 있나 보더라
아니오 어디 가시느냐구요
글쎄 가 보아라 공부하나 보더라’
귀먹은 순이 할아버지가 길에 나오니 순이의 친구들이 “할아버지, 어디 가세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순이 할아버지는 순이가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 줄 알고 “순이 집에 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니오. 어디 가시느냐구요?”하고 다시 물으니 “글쎄, 공부하나 보더라.”라고 또 엉뚱한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귀가 들리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보청기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이것은 치아가 빠져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맷돌은 치아를 가리킵니다. 제 아내는 음식을 먹을 때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모릅니다. ‘바삭바삭’ 소리가 납니다. 그런데 이가 다 빠져 보십시오. 음식을 먹을 때 우물우물 하게 됩니다.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살구꽃은 흰 머리카락을 말합니다. 나이가 들면 머리가 희어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앞 머리부터 세고 뒷머리는 나중에 셉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자신의 뒷모습은 볼 수가 없으니 잘 보이는 앞머리부터 세는 것이랍니다. ‘네 머리를 보아라. 흰머리가 생겼다. 이제 네 인생은 내리막길을 걷는 거야. 정신 차려.’ 그래서 앞머리가 먼저 세는 것이랍니다.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나이가 들면 메뚜기도 짐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약해진다는 것입니다. 젊을 때는 무엇이 무겁겠습니까? 그러나 나이가 들면 숟가락도 무겁게 느껴집니다. 연세 드신 분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이것은 맑고 투명했던 목소리가 탁해지고 축 처지는 것을 말합니다. 나이가 들면 목소리가 쇠합니다.
‘원욕이 그치리니’
나이가 들면 원욕이 사라집니다. 청년들을 보십시오. 총각들은 처녀들을, 처녀들은 총각들을 따라다니며 삽니다. 하지만 90이 넘은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따라다닙니까? 원욕이 다 사라지는 그런 때가 금방 오는 것입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창조자를 기억하고 사는 생활은 어떤 생활입니까?
기뻐하며 즐겁게 사는 것입니다.
본문 11장 7절에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해를 보고 있으면 눈이 상하는데,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뜻이 무엇입니까? 해 때문에 보는 것이 즐겁다는 것입니다. 이 강단에 있는 빨간 장미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빛이 없으면 이 아름다운 장미꽃을 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 옆에 앉아 있는 사람도 볼 수가 없습니다. 빛이 없으면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도, 아들의 얼굴도 보지 못합니다. 가을 단풍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해가 지고 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해가 있으므로 단풍이 아름답고 꽃이 아름답고 사람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해를 주신 것은 우리가 보고 즐기라는 것입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보고 즐기라고 해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8절에도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라고 말씀하시고, 9절에도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18절에도 『항상 기뻐하라(Be joyful always;)……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for this is God's will for you in Christ Jesus.)』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쁘게 사는 것을 얼마나 원하시는지 모릅니다.
빌립보서 4장 4절에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세상 일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살이는 파도타기와 같습니다. 인생은 파도와 같습니다. 파도가 계속 위로만 칩니까? 올라갔다 내려가고, 올라갔다 내려가곤 합니다. 아이들도 공부를 계속 잘하면 세계에서 일등할 것입니다. 일등하다 이등하고 삼등, 팔등으로 떨어졌다 이등으로 올라갔다
또 십 몇 등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장사가 계속 잘 되면 모두 재벌이 될 것입니다. 잘 되다가 안 되다, 잘 되다가 안 되다, 크게 되다가 안 되다가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부부간에도 늘 잉꼬처럼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항상 잉꼬로 사는 부부가 있겠습니까? “여보, 여보.”하며 사랑하다가 싸우고, 또 “여보, 여보”하다가 싸우고 하는 것이 부부 사이입니다. 싸우지 않고 사는 부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희 부부도 싸우는데 여러분이 싸우지 않겠습니까? 직장 생활도 언제나 깃발만 날립니까? 어두운 날도 있는 것입니다.
본문 11장 8절에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함 날이 많으리니 그날을 생각할지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24시간 하루에도 낮과 밤(day time, evening time, night time)이 교차되는데, 우리 일생에 어떻게 밝음만 계속되겠습니까?
그러므로 그것 때문에 우리가 기뻐하면 기뻐하다가도 슬퍼하고, 기뻐하다가도 우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동일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 때문에 즐거워하면 그 사람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제가 뉴욕에 갔을 때 그곳에서 정치하는 한 분을 만났는데, 그분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분의 친구 중 잉꼬 부부로 소문난 한 친구가 있었답니다. 그 친구 부부는 늘 병아리처럼 함께 다녔답니다. 손을 잡고 다니며 함께 드라이브하고, 맛있는 음식도 함께 사먹고 아주 사이좋게 살았답니다. 그런데 남편이 59세에 갑자기 돌아가셨답니다. 그러니 짝 잃은 기러기처럼 외롭게 살던 부인도 그 해에 돌아가셨답니다.
따라 합시다.
“남편을 대충 사랑하자.”
“아내를 대충 사랑하자.”
아내나 남편을 너무 사랑하면 그 아내나 남편이 돌아가시면 자기도 죽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돌아가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붙잡으면 남편이 있으나 없으나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 37편 4절에『여호와를 기뻐하라(Delight yourself in the Lord.)』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돈을 벌지만 돈을 제일 즐거워하면 돈을 잃었을 때 죽게 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잃으면 그것 때문에 내가 죽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면 하나님을 잃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항상 즐거운 것입니다. 이것이 중합니다. 할렐루야!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에서 제일 중요한, 첫째 질문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예배만 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좋아요. 하나님, 좋아요.”하는 것, 하나님만 생각하면 좋아서 못 견디는 것,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바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없어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할렐루야! 그러니 항상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캄캄한 날이 있었습니다. 자기 조카에게 배신당하는 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조카를 구원하기 위해 318명의 가군을 데리고 가서 술에 취해 있는 사람들을 치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며 돌아올 때는 좋았지만 그 때문에 그 지역의 사람들이 모두 적이 되어 두려운 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 두려워 말라. 내가 너의 방패다.”라고 위로해 주셨지만, 그런 캄캄한 날이 있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네 아들을 내게 바치라.”라고 하셔서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갈 때도 캄캄한 날이었습니다. 아내를 빼앗기는 캄캄한 날도 있었습니다.
요셉에게도 억울하게 감옥에 가는 캄캄한 날이 있었습니다. 다윗도 억울하게 십 년간 도망을 다녔던 캄캄한 날이 있었습니다. 다니엘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게도 전쟁 포로로 끌려가는 캄캄한 밤이 있었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사니 모든 것이 합력하여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다니엘도, 요셉도, 다윗도,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빛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는 말씀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살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일만 좋은 일이 아니라 어렵고 캄캄한 일도 지나가면 다 필요했던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되고 감사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면 즐겁고 기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본문 11장 10절에 보면,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내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될 것이라고 믿지만 그래도 근심이 나를 사로잡을 때가 있습니다. 그 근심을 내 안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제가 독일에 갔을 때, 한 변호사가 뱀을 좋아하여 집에서 기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뱀은 우리의 영적인 원수입니다. 이브를 꾀어 선악과를 먹게 한 것이 뱀입니다. 지난 월요일, 서울에 집회를 하러 가기 전에 아내와 함께 어느 목사님을 모시고 잠시 산에 올라갔습니다. 우리가 산에서 내려오는데 한 곳에서 독사 새끼가 기어 나왔습니다. 독사는 머리가 삼각형이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독사지만 새끼라 측은한 생각이 들어 그냥 지나치려고 했는데, 제 아내가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함께 가신 목사님께서도 “저 마귀 새끼를 죽이자.”라고 하시더니 “뱀은 대가리를 쳐야지, 꼬리를 치면 안 돼.”라고 하시며 돌로 그 독사를 치셨습니다. 뱀이 똬리를 틀며 이리저리 피하는 바람에 목사님께서 일곱 번 만에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뱀은 마귀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이 변호사는 뱀 여러 마리를 기르면서 그 뱀들을 만지고, 자기 몸에 감기도 하며 좋아했습니다. 뱀의 몸에는 알이 붙어 있어서 뱀을 만진 후에는 반드시 비누로 손을 씻고 음식을 먹어야 한답니다. 뱀 알이 사람의 몸에 들어가면 죽지 않고 부화하여 똬리를 튼답니다. 여자들이 산에서 잠을 잘 때 뱀 알이 몸 안에 들어가 똬리를 트는 일도 가끔 있으니 조심해야 한답니다. 그런데 변호사는 뱀이 깨끗하다고 뱀을 만진 후 손을 씻지 않고 그 손으로 빵을 먹었습니다. 변호사의 몸에 뱀 알이 들어가 똬리를 틀었는데 그는 몸이 불거지니 암인 줄 알고 병원에 갔습니다. 수술을 하니 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답니다.
뱀 알이 입에 들어가게 놔두면 안 됩니다. 떠나가게 해야 됩니다.
근심도 마찬가지입니다. 근심이 우리에게 들어오면 뱀 알처럼 병을 줍니다.
잠언 15장 13절에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근심이 오면 심령이 상합니다.
잠언 17장 22절에는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근심을 하면 뼈에 병이 옵니다.
욥기 17장 7절에는 『내 눈은 근심으로 하여 어두워지고』라고 말씀하십니다. 근심하면 시력이 떨어집니다.
근심이 들어오게 되면 행복도 깨어지고 건강도 깨어집니다.
그래서 근심을 떠나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근심을 떠나게 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강아지는 쫓으면 되는데, 마귀는 예수 이름으로 대적하면 되는데, 근심은 그렇게 해서 떠나가지 않습니다.
근심은 어떻게 해야 떠나갑니까?
빌립보서 4장 6절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근심은 기도로 하나님께 맡겨야 됩니다.
시편 55편 22절에도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어에 보면, ‘네 짐을 하나님께 굴려버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공을 굴리면 저쪽으로 가듯이, 내게 있는 근심의 짐을 하나님께 굴려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근심의 짐이 하루에 몇 개씩 와도 “얘, 피곤하다.”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고 우리의 걱정을 아뢰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의지하라.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시험 걱정 괴로운 짐 없는 사람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기도 드려 아뢰세」
우리에게 근심이 오고 걱정이 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기도로 굴려 맡기면 어떤 것은 즉시 해결해 주시고, 어떤 것은 3개월 후, 어떤 것은 3년 후에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걱정이나 근심이 있는 분은 이 시간에 우리 주님께 그것을 굴려 맡기시리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시편 68편 19절에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이고, 어제 하나님께 맡겼는데 오늘 또 맡기면 미안해서…….’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의 짐을 기쁘게 져주십니다.
저희 아들이 고 3때, 한 아들은 버스가 있어서 11시 30분에 저희 동네 정류소에 내려서 왔지만, 한 아들은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버스가 없어서 제가 밤에 태워 왔습니다. 아들을 태우러 갈 때 피곤했지만 아들을 위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기뻤습니다. 버스를 타고 오는 아들을 위해서는 제가 11시 30분에 버스 정류소 앞에 있다가 아들의 책가방과 도시락 가방을 받아 들고 집으로 왔습니다. 하루는 소나기가 와서 제가 우산을 쓰고 아들 우산을 하나 더 들고 나갔습니다. 고맙게도 아들이 버스에서 내릴 때는 비가 그쳤습니다. 제 손에는 이미 우산 두 개가 들려 있는데, 아들이 버스에서 내리더니 자동으로 책가방과 도시락 가방을 제게 내밀었습니다. 그래서 우산 두 개를 한 손에 들고 책가방은 어깨에 메고 도시락 가방은 다른 한 손에 들었습니다. 가다가 생각해 보니 이런 종이 없었습니다. 저는 가방 두 개에 우산 두 개를 들고 가는데 아들은 빈손으로 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제가 “나쁜 놈! 애비에게 짐을 다 맡겨 놓고…….”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뻤습니다. 아들을 위해 하는 일은 기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짐을 기쁨으로 져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근심, 걱정이 있을 때는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어서 맡기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기쁘게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본문 11장 10절에 보면,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악이 우리 몸에서 물러가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9절에 보면,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에 보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즐겨도 정당한 방법으로 즐겨야 됩니다. 내가 즐거워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오케이 하셔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을 먹고 마시고 즐겨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접시를 즐겨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접시를, 선악과를 먹는 것은 악입니다. 악은 독사가 내게 오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독사가 내게 오면 떠나가게 해야 되는 것처럼 악을 떠나가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회 명사들이 감옥에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악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없어도 사는 사람들이 마음이 약해서 슬쩍 받았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악을 슬쩍슬쩍 지으면 축복이 슬금슬금 나가고, 나중에 그것 때문에 초라하게 됩니다.
세상에 그냥 넘어가는 것은 없습니다. 감추인 것이 다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악을 행하면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내가 200억을 가졌다 해도 아들이 술이나 마시고 마약이나 하고 도박이나 하고 다니면 10억도 줄 수 없습니다. 그저 밥이나 먹고 살도록 몇 천만 원이나 주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신실하면 50억, 100억도 맡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악을 겸하여 살면, 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어떻게 주시겠습니까?
예레미야 5장 25절에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슬쩍 슬쩍 짓는 죄만 없으면 우리가 아주 존귀하게 되고, 큰 것을 받게 될 텐데, 때때로 약해서 짓는 죄 때문에 우리가 올라가지 못하고 내려가고, 많이 받지 못하고 받은 것을 빼앗기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악을 떠나가게 하라.”
하나님과 악이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직까지 끊지 못하고 계속 짓는 죄가 있으면 이 시간에 결단하고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거스틴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지만 못하시는 것이 있다. 거짓말을 못하시고 회개하는 자의 죄를 심판하지 못하신다.”
사람도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면 때리지 못합니다. 엄마가 아이를 때리는 것은 아이가 계속해서 고집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엄마, 잘못했어요.”라고 하는 아이를 때리는 엄마가 있겠습니까?
이번에 독일에 가서 감동 깊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영국에 수상이 있지만 영국의 상징은 여왕이듯이 독일에도 수상이 있지만 독일의 상징은 대통령입니다. 독일의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방문해서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이스라엘 국회의원들 사이에 논쟁이 많았습니다.
“아니, 우리 민족을 600만 명이나 죽인 독일의 대통령이 우리 국회에서 연설을 하게 둬? 안 돼. 안 돼.”
“독일 대통령의 연설이 듣기 싫지만 그래도 한 나라의 대통령이니 예우상 연설하게 하자.”
그래서 이스라엘 국회의원들이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대통령의 연설을 들었습니다.
독일 대통령이 겸손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히브리 말로 말했습니다. 히브리 말은 참 어렵습니다. 그러니 히브리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겠습니까? 독일 대통령이 히브리 말로 연설을 시작하자 이스라엘 국회의원들 모두 모두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너무 잘못했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무 못할 짓을 했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십시오. 정말 회개합니다.” 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그리고는 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연설을 멈추었다가 울고 다시 연설을 하다 멈추고 울곤 했습니다. 감동을 받은 이스라엘 국회의원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 때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벤츠 자동차를 타지 않았습니다. 벤츠가 얼마나 좋은 차인지 모릅니다. 벤츠는 부딪혀도 사람이 죽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견고한 차입니다. 제가 집회를 하러 미국에 가면 거의 벤츠로 태워 줍니다. 독일에 갔을 때도 목사님이 제게 “목사님, 차는 벤츠를 타세요. 벤츠를 타고 사고로 죽은 사람이 없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좋은 차인데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민족의 원수인 독일의 자동차는 타지 말자고 불매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독일 대통령이 그 연설을 한 후에 이스라엘 정부가 불매 운동을 풀고 국회의원들부터 벤츠를 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독일이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이스라엘에 가서 울고 나니 떼돈을 번 것입니다. 잘못했다고 하면 사람도 녹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성령을 받고 살면서도 이런 저런 죄를 짓고 음란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때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때리시면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가 마음 아파할까 봐 ‘저 자식, 저 자식.’하시다가 언젠가는 치시는데, 우리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하면 하나님의 마음이 다 녹아지셔서 우리를 용서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에 거리끼는 것이 있으면 오늘 이 시간에 끊어버리고, 회개하고 새롭게 출발합시다. 창조주를 기억하고 성령님을 모신 사람답게 의로운 길로 갑시다.
그러면 잘 되고 번영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한 일이 있습니다.
본문 12장 1절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조자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모를 기억하는 것’은 부모님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제 어머니께 전화를 여섯 번 드렸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 전화를 드리는데, 요즘에는 농번기라 마을에 사람들이 없어서 어머니께서 외로워하실 것 같아 여섯 번 전화를 드린 것입니다.
“어머니, 오늘은 설교 준비가 아주 잘 됩니다. 어머니께서 기도를 많이 해주시나 봅니다.”라고 했더니, 어머니께서 “그래, 기도도 했고, 지금은 성경을 읽고 있는 중이다.”라고 하시며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릅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면 내가 기쁘고 잘 되는 것도 있지만 부모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기쁘게 사는 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지만,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의 사랑하는 친구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의 장로님 이야기입니다. 두어 달 전에 들은 이야기라 정확하게 전달할지 모르겠지만, 정확하게 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장로님이 꿈에 하나님을 만나셨답니다. 하나님께서 장로님에게 큰 종이 한 장과 펜을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 장로야, 네가 오늘까지 나를 위해 한 일이 무엇인지 이 종이에 써보아라.”
“하나님, 제가 부족하지만, 큰아들은 사장으로, 둘째 아들은 회장으로, 셋째 아들도 사장으로, 넷째도 회사의 전무로, 다섯째는 의사로, 여섯째는 대학교수로, 아이들을 모두 번듯하게 길렀습니다.”
“그래, 그것도 귀한 일이지만 그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하는 일이다. 나를 위해 한 일을 써보아라.”
“주일 예배를 드리고 주일 밤에도 빠지지 않고 예배를 드렸고 십일조도 거르지 않고 드렸고…….”
“얘야, 그건 새신자도 하는 거다. 새신자도 하는 것을 해놓고 장로가 무슨 자랑이라고 그것을 쓰느냐? 나를 위해 네가 특별히 한 일을 써보아라.”
장로님이 생각해 보아도 하나님을 위해 특별히 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무것도 쓸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섭섭하구나. 나는 너를 위해 내 아들도 주었고, 내 영인 성령도 주었고, 내가 오늘까지 너와 함께 하며 축복해 주었고, 네가 천국에 오면 살 집도 준비해 놓았는데 너는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꿈을 꾸고 나서 장로님이 며칠간 울고 또 울고 또 울었답니다. 그리고 아들들을 불러 놓고 꿈 이야기를 했더니, 아들들이 “아버님,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 하시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세요. 저희들이 밀어드릴게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장로님이 교회를 열세 개나 지었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제게 큰 종이 한 장과 펜을 주시며 “네가 나를 위해 한 일이 무엇인지 써보아라.”라고 하시면 쓸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 제가 부족하지만 이것을 했습니다.’라고 쓸 수 있는 것이 많은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창조주를 기억하라.”
내가 식당을 하든, 회사 생활을 하든, 공직에 있든, 국회의원이든, 운동선수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시카고 연합 집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 아주 감동적인 일을 보았습니다. 제가 목사님이 운전하는 옆 좌석에 앉아 있었는데 신호등 앞에서 차가 서서 앞에 있는 트럭을 보니 ‘Jesus is God(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라고 쓴 글이 크게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트럭이 아주 귀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운전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 회사 사장님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분들이 얼마나 귀해 보였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계속 알리고 다니니 얼마나 귀합니까? 창조주를 기억하는 회사이고 운전기사인 줄로 믿습니다.
고속도로를 왔다 갔다 하다 보면, “Jesus loves you(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큰 글을 볼 수 있습니다. 고려은단의 광고판에 적혀 있는 글입니다. 그것을 보면 속이 시원해집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은단을 드시는 분은 고려은단을 드시기 바랍니다.
내가 사는 목적이 주님이고, 나의 사는 방향이 주님이고, 내가 존재하는 목적이 주님이어야 됩니다. 그것이 창조주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내가 공부하는 목적이, 내가 장가가는 목적이, 내가 병원을 경영하고 약국을 경영하고 회사를 경영하는 목적이, 내가 자녀를 기르는 목적이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 주님을 위한 것이 될 때 그것이 창조주를 기억하는 생활인 것입니다. 아니면 다 헛된 것입니다.
미국의 한 철도 회사 사장, 철도 왕국을 이룬 성공자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아들과 손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이 애비는 깨끗이 실패하고 이제 이 세상을 떠난다.”
“아버지는 성공자예요. 아버지는 대성한 사람이에요.”
“아니다. 나는 예수님을 버리고 살았다. 예수님 없이 산 것은 다 실패다.”
그리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삶이 아니면 다 헛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한 것만 가치 있는, 의미 있는 삶입니다.
우리 모두 창조주를 기억하며 기쁘게 살고, 주님을 위해 사는, 값진 삶을 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