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5: 13 미치거나 온전하여도 - 고후 5: 15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고후 5: 13 미치거나 온전하여도 -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
본 구절은 바울 자신이 결코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의 유익을 위하여 일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에 대해 자부심을 품어도 된다.
그런데 본 구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미쳤어도'와 '정신이 온전하여도'란 표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란 사실에 있다.
열심 있는 성도는 때때로 세상 사람들 보기에 미친 것같이 보인다. 그들은 성도의 열심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아무리 성도가 열심을 낸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요구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라고 명하셨지만(신 6: 5),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힘의 70퍼센트, 아니 50퍼센트도 하나님을 사랑치 못할 때가 많을 것이다.
1]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미쳤어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세스테멘'(*)은 '황홀경'(ecstasy)의 뜻을 가지고 있는 '엑스타시스'(*)에서 파생된 말로 종교적 무아경의 상태를 가리키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정신이 나간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 막 3: 21 -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열심 있는 성도가 미친 것같이 보여도 실상 그는 미친 것이 아니다. 성도는 결코 미쳐서는 안 된다. 온전한 정신은 모든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정신이다.
기독교는 비정상적이거나 비상식적인 종교가 아니다. 정상적인 인격은 바른 정신을 가진다. 성도는 하나님을 섬길 때나 인간관계에서나 바른 정신을 가져야 한다.
* 행 26: 24-25 – 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5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바울의 간증을 듣던 베스도가 크게 소리지르며 한 말이다. 바울만 그런 말을 들은 것이 아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는 사람은 언제나 미쳤다는 말을 듣게 되어 있다.
2]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정신이 온전하여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프로누멘'(*)은 '분별력 있는', '자제하는'의 뜻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은 언어적 분석을 배경으로 학자들은 위의 두 문구가 지니는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을 제시한다.
먼저, 전자는 개인적인 황홀경의 체험 중에 방언으로 말하는 것, 또는 환상을 보는 것 등을 가리킨다.
* 고전 14: 18 -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 고후 12: 1-7 –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후자는 정상적인 상태에서 이성으로 깨달은 바를 말하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본다(Barrett, Kasemann, Denny, Harris).
이 해석을 취하면 전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후자는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유익한 것으로, 이 둘은 결국 하나님과 고린도 교인들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와 달리 혹자는 '미쳤어도'란 표현이 바울의 영적인 긴장(stress of great spiritual emotion) 상태를 가리키는바 항상 지니고 활동했던 긴장이라고 본다(Tasker).
그러나 본 구절에서 이 표현은 그 상태가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의 한 특수한 사건을 가리킨다고 보는 편이 무난하다.
그래서 알로(Allo)는 '엑세스테멘'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을 가리키는지는 밝히지 않으나 적어도 그것이 과거의 한 특정한 사건을 가리킴에는 틀림없다고 단정한다.
바크만(Bachmann)은 이것이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건'이거나 12: 7에 나타난 '계시'를 말하기도 하고 혹은 바울이 고린도에 가슴 아픈 방문을 했을 때 일어났던 '분노'를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기독교를 박해하던 바울이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데로 변화된 것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
고후 5: 14 그리스도의 사랑 -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
성도의 미친 것 같은 열심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強勸)함 때문이다.
보통 사람은 흔히 돈이 되는 일이나 명예나 지식, 출세를 위해 그리한다.
성도는 그 사랑 때문에 핍박 중에도 낙심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홀로 있어도 외로워하지 않으며, 물질적 가난과 궁핍 속에서도 위축되거나 그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주의 일에 열심히 충성한다.
1]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強勸)하시는 도다.
여기서는 바울이 자기 중심성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과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 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언급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십자가 대속(代贖)의 사랑이다. 그것은 한 사람이신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 죽으신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희생적 사랑이다.
그것은 그가 자신을 십자가 위에 희생제물로 내어주신 사랑이다. 그것은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다. 예수께서는 그 사랑 때문에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십자가의 고통스런 죽음에 내어주셨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신 헌신적인 사랑이며 동시에 그리스도를 통해 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뜻한다.
* 롬 8: 39 -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강권하시는 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케이'(*)는 '둘러싸고 밀어낸다', '붙든다'는 뜻으로 이는 바울의 헌신적인 행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불가항력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바울이 다메섹 길을 가기 전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부름을 받고 그리스도께서 메시야시며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의 형상을 입으심을 알게 되었다.
3년 동안 우리와 동고동락하다가 마지막에는 만민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나가셨던 죽음을 알았다. 이러한 예수를 알고 그 사랑을 깨닫게 된 후로는 그의 사랑을 잊을 수 없었다.
2]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이 표현은 롬 5: 15-16과 매우 유사하다.
* 롬 5: 15-16 –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 원리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상기시킴으로써 자신이 그 원리에 따라 살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 여기에 ‘모든 사람’이란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죄가 다 해결되어 마지막 심판이나 지옥 형벌이 남지 않게 되었을 것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모든 사람만이 그의 구원의 은혜를 받는다.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실제로 죽은 것과 같은 의미가 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속죄 개념이다.
속죄는 속죄물이 실제로 죄의 형벌을 대신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2천 년 전 유대 땅 예루살렘 성 밖에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 위에서 실제로 우리의 모든 죄의 책임을 담당하셨고 실제로 우리의 모든 죄의 형벌을 받으셨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그와 함께 실제로 죽은 것과 같다.
고후 5: 15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
본 구절에서는 바울의 그리스도 중심사상이 잘 부각되어 있다.
이 사상이 그의 사역의 원동력이며 또한 최종적인 목적이기도 하다.
1]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구원받고 새 생명 얻은 자들이 이제는 자신들을 위해 살지 않고 그들을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것은 죄짓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성도의 삶의 목표이다.
* 롬 12: 1 -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 고전 6: 19-20 –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2]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살아있는 자들'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표현이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도 역시 동참한 자이다.
그의 부활에 동참한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운 자이기에 '산 자'이다.
* 요 5: 24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3]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따라서 이 체험이 있는 성도는 마땅히 아담 이후 창조자를 거역하고 자기가 스스로의 주인 행세하던 삶에 대해선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으로써 하나님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여기서 이로써 바울은 자기중심적 삶을 사는 거짓 사도들과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하며 동시에 자신은 하나님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섬기는 그런 삶을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