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 초기 한성시대 도읍지 하남위례성
이재익
하남 위례성의 후보지
우리 고대사에서 가장 연구가 부진한 분야 중 하나가 백제 초기사이다. 관련 사서에 남아 있는 기록이 너무도 빈약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를 보더라도 백제에 관한 서술은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양과 내용 면에서 빈약하기 짝이 없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돌파구는 고고학적 자료의 활용밖에 없다.
일반 시민들에게 백제와 관련된 지역을 떠올리라면 대개는 공주와 부여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700년 가까운 백제 역사 중에서 공주와 부여에 도읍을 정하였던 시기는 합해서 185년에 불과하다. 그 나머지 기간은 현재의 서울이 백제의 도읍이었다.
백제의 시조 온조가 십제(十濟)라는 이름으로 한성(漢城)에 도읍 했던 한성백제(BC 18년~AD 475년)의 도읍 터이자 왕성은 '하남위례성'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백제 침략에 의하여 백제의 개로왕도 전사당하며. 불타고 파괴되었다.
이 위례성은 정확한 위치가 '삼국사기'를 집필했던 고려의 김부식조차도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 동안 학계에서는 서울의 몽촌토성, 이성산성, 충남 직산, 경기 광주 등의 주장이 분분한 가운데, 가장 유력한 후보지는 서울 강남구-송파구 일대로 압축되었으며 88올림픽을 전후하여서는 몽촌토성이 곧 위례성으로 인정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최근 고고학적 성과에 의하여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 위치한 풍납토성이 위례성의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떠오르고 있다.
풍납토성의 재발견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풍납토성의 성벽 한쪽이 무너지면서 중국에서 만든 청동 자루솥이 발견되었다. 당시로서는 매우 귀했을 중국제 수입품이 출토되는 성은 왕성을 빼놓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아유카이(鮎貝房之進) 같은 일부 일본학자는 1934년에 이곳이 바로 '삼국사기'가 말한 하남위례성이라고 지목하기도 했다. 어떻든 이곳의 중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풍납토성은 1936년 고적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풍납토성은 곧 잊혀졌다. 왜냐하면 1939년 역사학자 이병도(1989년 작고)가 '진단학보'에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이라는 아유카이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풍납토성은 백제가 초기에 고구려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사성(蛇城)이라고 주장했고 이것이 이후 통설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풍납토성=사성'이라는 이병도 학설이 근거가 박약한 언어학적 지식을 기초로 했다는 점이다. 이병도는 하남 춘궁리 일대를 하남위례성 터로 비정하면서, 풍납(風納)의 경우 그 지명을 순 우리말로 풀면 '바람드리'가 되니 사성(蛇城)의 순 우리말인 배암드리와 비슷한 고로 풍납토성이 곧 사성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즉 풍납=바람드리=배암드리=사성이라는 논리였다.
'사성'이라는 단어는 백제본기에서 딱 두 군데 등장한다.
그 첫째가 책계왕 원년, 즉 서기 286년에 '고구려 침입에 대비해 아차성과 사성을 쌓았다'는 대목이요,
둘째가 한성백제가 멸망하던 개로왕 21년(475) '사성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까지 강을 따라 둑을 쌓았다'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 보아 사성은 286년에 처음 축조된 것이다.
풍납토성은 1963년 당시 남아있던 성곽(길이 2, 680m, 폭 50m) 이 사적 11호로 지정됐지만 정작 토성 내부(22만6천평~43만8천평) 는 문화재 지정에서 제외됐다.
풍납토성은 그 동안 이병도 김원룡 등 학계 원로들에 의하여 애써 무시되었고 따라서 한 국정신문화연구원이 편찬한 본책 25권, 부록 3권의 방대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오르지 않는 등 형편없는 대접을 받아왔다.
서울시 강남에 위치한 백제 초기 유적에 대한 조사와 보존대책은 전무하였다. 그런 가운데 1970년대부터 본격화된 강남개발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용케 살아남은 백제 유적을 집단적으로 학살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1500년 이상을 버텨온 유적들이 중장비에 밀려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80여기에 달하던 석촌동 고분군은 4기밖에 남지 않았다.
백제 초기의 국가형성과정과 그 실체에 대한 연구는 안개 속을 헤맬 수밖에 없었다.
이성산성이 기대했던 백제의 흔적 대신 신라 유물을 대거 쏟아내면서 하남위례성 후보군에서 탈락해버리자 백제왕성 제1후보로 몽촌토성이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몽촌토성은 유례가 없는 대규모 발굴 작업에도 불구하고 백제왕성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쏟아내지 못했다. 더구나 출토된 목탄과 목재에 대한 탄소연대측정 결과로도 3세기 이전으로는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이 관련학계의 지배적인 견해다.
그리하여 '몽촌토성=백제왕성'이라는 주장은 의문시되었다
한국판 폼페이, 유적 유물
풍납토성을 재평가하게 된 계기는 역사고고학자인 이형구 교수(선문대)에 의해서였다.
이미 1994년에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임이 확실하다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는 이 교수는 1997년 1월1일 신년 연휴에 풍납토성에서 실측조사 작업을 벌이던 중 토성 안쪽 현대아파트 공사장에서 백제 유적과 유물이 파괴된 채 나뒹구는 것을 목격하고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신고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공사장 2300여 평에 대한 문화재연구소의 긴급 본격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기적이 일어났다. 완전히 파괴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던 백제 초기의 유적이 현재의 지표면보다 4m 아래에 고스란히 살아있음이 확인된 것이다. 뇌사판정을 받았던 풍납토성은 한국판 트로이나 폼페이로 부활하였다.
1997년이래 수년째 진행중인 발굴조사 결과 토성 내부에는 마을을 방어하기 위한 세겹의 도랑(환호)이 있었다.
풍납토성을 하남위례성의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인 것은 바로 성벽 발굴이었다. 발굴단은 원래는 3.5㎞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성벽 중 일부가 남아 있는 동쪽 성벽 두 군데를 10m 간격으로 골라 잘라 보았다. 성벽 바닥의 폭이 40m , 남아있는 높이만 하더라도 9m 에 이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성벽을 쌓은 방법은 진흙을 수십겹 다져 올리고, 안팎의 끝부분에는 깬 돌과 강돌을 4단에 걸쳐 쌓아 올렸다. 어림짐작에도 수십만명의 인력이 동원되어야 한다. 3~4세기경 이 정도의 공력을 들여 쌓았다면 왕성임이 틀림없다.
총 19기의 건물터 중 상당수는 일반 민가로 보기 힘들었다. 규모가 가장 큰 건물터는 실 평수가 25평에 달했고 기와와 전돌, 주춧돌까지 나온 것으로 보아 일반 민가가 아닌 관공서 같은 공공건물이 분명했다. 어떤 건물터는 기둥과 서까래, 보같은 목조건물이 고스란히 불타 내려앉은 상태로 발견됐다. 탄소연대측정 결과 대부분 축조 시기가 기원 전후로 나왔다.
풍납토성 한 가운데쯤 되는 경당연립재건축아파트 건축 예정지(2300평중 1000평 가량이 한신대박물관에서 발굴)에서는 보존을 우려한 경당연립재건축아파트 예정지 조합원들이 굴착기를 동원해 발굴현장을 밀어버려 일부가 파괴되었다.
문화유적 훼손사건직후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풍납토성이 정말로 하남위례성이라면 돈은 얼마가 들든지 이를 보존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하였고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풍납토성은 학계에서 팽개치는 바람에 지금은 토성 안쪽에 아파트 41개동을 비롯해 각종 고층빌딩이 들어서 있으며 이곳 거주 인구만도 4만 명을 헤아리고 있어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곳에서는 200여 기의 유적이 확인되고 450상자 분량의 각종 초기백제 유물이 출토됐다.
대부(大夫) 명, 정(井) 자명 토기편 등의 수백상자분의 유물과 함께 석렬(石列) 유구가 발견됐다. 이 유구는 50×50㎝의 다듬은 판석을 깐 구조물로 현재 16m만 확인됐지만 전체로는 여(呂) 자형 모습을 가진 백제초기 건물로 추정되고 있다.
아래턱만 남은 말뼈 14마리 분이 확인됐다. 이런 유물들이 풍납토성의 성격을 결정하는데 어떤 영향을 끼칠 지 아직은 속단할 수 없다. 다만 출토 유물이나 유적으로 보아 풍납토성이 백제 당시에 대단한 인구 밀집지역이었고 대단히 중요한 성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준 것만은 분명했다.
"문화재 연구소의 탄소연대측정 결과 풍납토성은 BC1세기에서 AD2세기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풍납토성이 백제 도읍지임이 입증된 이상 백제의 기원도 이 시기로 잡아야 한다. 이것은 고대국가 백제의 건국시기를 AD 3세기로 추정해온 통설을 일거에 뒤집는 것이다" 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강유역에서 서기 전후로 밝혀진 도성과 관련한 백제유적은 풍납토성이 처음으로, 이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 온조왕의 초기 도읍 기사(서기 전 18년)와 시기가 거의 일치한다.
교과서 다시 써야
풍납토성 축조 연대는 사실 역사 교과서를 다시 쓰게 해야 할 정도로 엄청난 폭발력을 갖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국사교과서나 이기백 교수의 한국사신론을 통해 배운 백제는 서기 270~280년쯤 제8대 고이왕대에 들어서서야 국가다운 국가, 이병도식 표현을 빌리자면 고대국가에 들어섰다.
한국고대사학자 대다수는 백제가 풍납토성 같은 거대한 성을 쌓을 수 있는 고대국가가 된 것은 3세기 중․후반 고이왕대 이후라고 보고, 그 이전 시기는 '원삼국'이라는 이상한 용어로 백제와는 구별되는 다른 사회로 설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이왕 이전 백제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한국고대사학이나 고고학의 분위기는 일제 식민사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백제가 기원전 18년에 건국했고 한반도 중남부 일대를 장악한 왕권국가였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가짜라고 몰아붙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식민사학은 서기 300~400년까지 한반도 중부 및 남부지방은 변변한 국가가 없는 원시미개사회로 설정했다. 왜가 4세기 이후 6세기 즈음까지 한반도 남부 어디엔가에 임나일본부라는 조선총독부 비슷한 기관을 만들어 놓고 한반도를 식민 지배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이 나오게 된 것도 다 이런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나일본부설이 말이 되기 위해서는 고대 한반도에는 신라나 백제 같은 강력한 국가가 있어서는 아니 되었다. 신라와 백제가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고대일본이 고대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대신 식민사학자들은 서기 300년 이전 신라와 백제가 한반도 중남부 일대에 득실대던 이른바 삼한 78개 국가 중 사로국(斯盧國)과 백제국(伯濟國)이라는 이름으로 겨우 고개를 내밀고 있는 중국 역사기록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魏志 東夷傳)을 신주단지 모시듯했다. 이렇게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정하는 태도는 국내학자들에게도 이어졌던 것이다.
왜냐하면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이 성을 쌓은 주인공인 백제는 늦춰 잡아도 200년쯤에는 이미 확실한 고대국가체제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원후 200년 경에 폭 40m, 높이가 적어도 9m 이상 되는 토성을 3.5㎞나 쌓아 올리기 위해서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며 또 이런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실체가 있어야 한다.
발굴단 발표는 아울러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백제가 기원전 18년 만주지방에서 내려온 부여족 갈래인 온조집단에 의해 건국됐고, 이미 기원을 전후한 즈음에 한반도 중남부 일대를 장악한 절대왕권국가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가 늦어도 서기 200년쯤에 풍납토성을 축조했다는 것은 이런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
[ 참고한 글 ]
ㅇ'한국판 폼페이' 풍납토성 / 조선일보기사 1999.9.17 권오영 한신대 국사학과 교수
ㅇ "풍납토성은 백제 위례성" / 중앙일보기사 2000년 3월 8일 강찬호기자
ㅇ '한국의 폼페이 풍납토성 지하4m의 비밀' / 2000.3.11 KBS1 '역사 스페셜'
ㅇ '한국판 폼페이' 풍납토성의 감춰진 진실 / 신동아 2000년 7월호,김태식 연합뉴스기자
소답자한 30호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