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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kbi Art
 
 
 
카페 게시글
nokbi-미술이야기 스크랩 김광우의 <고갱의 모자를 쓴 자화상>
녹비 추천 0 조회 39 13.03.22 09: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고갱의 모자를 쓴 자화상

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고갱은 프랑스로 돌아가고 싶었다.
고독이 그를 짓눌렀고 유럽에서 돈이 오지 않자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지난 18개월 동안 작품 한 점 팔지 못한 것이 절망감을 주었다.
끊임없이 옹호하고 그를 “상징주의의 왕자”라고 추켜세운 평론가 오리에가 스물일곱 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고갱은 과거 자신을 후원해준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그 속에서 자신의 위상을 알려야 했다.
그를 스승으로 따른 퐁타방 서클의 젊은 마술가들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고, 베르나르는 나름대로 상징주의의 왕위를 놓고 감히 고갱과 경쟁하고 있었으며, 라발과 드 한은 1894년과 1895년에 각각 세상을 떠나게 된다.
고갱은 몽프레에게 “돌아가면 그림을 때려치워야 할까 봐” 하고 넋두리를 적었다.
그는 가족에게 돌아가 프랑스 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가졌다.
프랑스로 돌아가는 것으로 테하마나와는 이별하는 것이다.
테하마나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모르지만 어린 소녀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는 지나친 흡연과 문란한 생활로 시력이 나빠져서 자신이 그린 그림의 강렬한 색채마저 흐릿하게 보일 정도였다.


고갱은 1893년 6월 4일에 프랑스행 배에 승선했다.
고갱은 『노아 노아』에서 테하마나와의 이별을 적었다.


항구를 떠나 배에 오르면서 마지막으로 테후라를 보았다.
그녀는 며칠 동안 밤낮으로 울고 또 울었다. 지금은 울음을 그쳤지만 슬픔에 잠긴 채 두 발을 물에 담그고 조용히 바위에 앉아 있다.
아침에 귀에 꽂은 꽃들이 시들어 무릎으로 떨어졌다.
여기저기 그녀처럼 슬픔에 지쳐 기운 없는 사람들이 멍하니 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며 한때 연인이었던 이를 영원히 떠나보낼 차비를 했다.
섬에서 멀어져가는 배의 갑판에서 쌍안경으로 바라본 그들은 입술을 달싹이며 마오리의 옛 민요를 오래오래 읊조리는 듯했다.
‘부드럽게 내 얼굴을 쓰다듬는 그대 남녘과 동녘의 바람이여,
저 섬으로 불어가거라.
저 섬에는 나를 버린 사람이 나무그늘 아래 몸을 쉬고 있단다.
가서 그를 보거든 전해다오. 당신 애인이 여기서 울고 있다고.’


고갱이 타히티에서 마르세유에 도착한 건 8월 30일이었다.
그는 66점의 그림과 몇 점의 조각을 가지고 왔고 주머니에는 4프랑이 전부였다.
어느 때보다도 경제적으로 어려웠음을 말해준다.


나비파 그룹의 선두자 폴 세뤼지에가 스승에 대한 도리로 고갱에게 250프랑을 빌려주었으며, 몽프레가 이 돈을 전신으로 마르세유로 보내주어 고갱은 기차를 타고 파리로 올 수 있었고 당장 필요한 데 요긴하게 쓸 수 있었다.
고갱은 슈페네커의 집에 한동안 묵다가 그랑드 쇼미에르 가에 두 칸짜리 아파트를 얻었다.
고갱은 먼저 과거에 친분이 있는 뒤랑 뤼엘에게 연락했다.
뒤랑 뤼엘은 파리 미술계에 영향력이 있었고 1891년과 1892년에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의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고갱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책을 펴내기로 결심했는데, 『노아 노아』였다.
‘폴 고갱의 신작 전시회’가 1893년 11월 10일부터 25일까지 뒤랑 뤼엘의 화랑에서 열렸다.
모두 44점이 소개되었는데 몇 점은 브르통에서 그린 것을 포함시켰다.
도자기 한 점과 몇 점의 조각, 그리고 <뭐! 질투하니?>도 이때 선보였다.
사람들은 타히티어 제목의 그림을 낯설고도 매력적인 장면으로 바라보았다.


평론가들 중에는 “올바른 감각과 이성에 반하는 글과 그림들로서 가련한 정신착란자의 환상”이라고 적은 사람도 있고 “식민지 미술”이란 말로 대수롭지 않게 여긴 사람도 있었다.
일부 평론가는 고갱이 시도한 독특한 기법을 탓한 것이 아니라 과도한 문학주의와 원시-민속학주의에 낭패감을 느꼈다.
그러나 많은 평론가들은 자신들이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카탈로그에 적힌 모리스의 글처럼 원시적인 원주민들과 삶을 공유하면서 밝고 장식적이며 신비스러운 이국적 색과 주제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드가가 고갱의 작품에 호감을 나타낸 반면 모네와 르누아르는 형편없는 작품으로 간주했다.
말라르메는 “고갱이 아주 광채가 나고 신비스러운 그림을 그렸다”고 감탄했다.
피사로는 고갱의 새로운 작품을 못마땅해 하면서 아들 조르주 만자나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물론 고갱에게 재능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가 다시 자신감을 찾는 데는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
그는 늘 외국 땅을 침입하며 지금은 남태평양 야만인들의 것을 약탈하고 있단다.


전시회는 세인의 호기심을 환기시켰다는 점에서는 성공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참담한 실패였다. 작품이 겨우 열한 점 팔렸을 뿐 고갱이 기대한 것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고갱은 작품이 평균 2, 3천 프랑의 고가에 팔린 것에 만족해했다.
다행스러웠던 건 일부 평론가들이 자신의 작업을 이해해준 것으로 아방가르드 계열의 문학, 미술 분야의 권위 있는 비평지 『르뷔 블랑슈 Revue blanche』지에 글을 기고하는 타데 나탕송 같은 사람은 상징주의 시인은 아니었지만 고갱의 상징주의 작품을 호평했다.


고갱은 삼촌의 유산을 받았지만 메테와 나누지 않고 자신의 새 살림을 꾸미는 데 사용했다.
1894년 1월에 몽파르나스의 베르생제토리 가 6번지에 아틀리에를 얻고 벽을 노란색과 올리브빛이 감도는 녹색으로 칠했다.
그리고 타히티 연인이 사랑을 나누는 작품을 걸었다.
그곳은 아틀리에이면서 거처였으며, 동거녀 안나 라 자바네즈와 그녀의 애완용 원숭이도 함께 살았다.
자바 출신의 안나는 화상 암브로이즈 볼라르가 고갱에게 소개한 모델이다.
땅딸막한 키의 안나는 중국인과 폴리네시아인 사이의 혼혈이다.
그는 안나와 1893년 12월부터 1894년 가을까지 동거했다.


개인전에서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고갱은 1월에 얻은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다시금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아틀리에를 작품을 알리고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을 선보이는 일종의 개인 화랑으로 꾸몄다.
그는 작업실 창문에 “Ici faruru”라는 글을 써 붙였는데, “여기서 우리는 사랑을 한다”라는 뜻이다.
아틀리에는 크롬옐로와 올리브색으로 칠해졌다.
그곳에는 뒤랑 뤼엘의 화랑에서 팔리지 않은 작품들 외에도 타히티에서 가져온 온갖 나무 신상들이 있었으며 웨스트 인디아와 폴리네시아 토속품들도 진열되었고 그가 간직해온 인쇄된 일본 판화와 자신의 근작 수채화와 목판화도 걸려 있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화가들 크라나흐, 홀바인, 보티첼리, 퓌비 드 샤반, 마네, 드가 등의 복제화들을 벽에 장식했으며 그가 높이 평가한 반 고흐, 세잔, 르동의 원화들은 다른 벽에 장식했다.
원화들을 고갱이 파리에 없는 동안 몽프레가 보관했다.
그리고 피아노와 카메라, 트로피, 군용품, 인디언 도끼, 부메랑, 세모창, 타히티 조각품 등도 있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1893~94년에 그린 <모자를 쓴 자화상 Self-Portrait with Hat>이었다.
노랑연두와 올리브색으로 칠해진 배경의 아틀리에 벽에 <저승사자>가 걸려 있는 것이 보인다.
고갱은 아스트라카(아스트라카 지방 산의 작은 양모피) 모자를 쓰고 매우 짙은 파란색 코트를 입은 모습이다.
비슷한 시기에 그린 <팔레트를 들고 있는 자화상 Self-Portrait with a Palette>에서도 이 코트를 입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1635년 렘브란트가 그린 자화상을 연상시킨다.
<팔레트를 들고 있는 자화상>을 보면 그가 인정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는 느낌이 드는데, 이 작품을 보고 차림새와 표정에 반감을 나타낸 사람들도 있었다.


아르망 세구잉은 고갱의 개성을 회상했다.


고갱은 모든 걸 발명했다.
이젤도 손수 만들었지만 캔버스를 준비하는 방법, 물감을 이기는 과정도 독창적으로 고안해냈다. …
그는 자기 나름의 옷 입는 법까지도 고안했다.
파리 사람들은 양털 벙거지, 묵직한 감청색 외투, 정교하게 세공된 버클 등으로 차려 입은 고갱을 거대한 마자르인이나 1635년의 렘브란트처럼 꾸미려고 안달하는 사람쯤으로 간주했다.
흰 장갑에 은팔찌를 끼고 손수 깎은 지팡이에 몸을 기대며 느긋하고 여유만만한 걸음걸이로 시내를 활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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