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0-19 13:14
지금 시점에 생각해 보면 그사람이 내게 해준것중 가장 점수를 높이 줄것은 여행이다
멀미쟁이라서 탈것에 오래 실려 다니는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해
여행하는 것을 피했던 것 같다
오죽하면 수학여행도 엄마에게 경비는 타서 내 포켓에 넣고 불참했다
그런 내가 이제는 변해
늘상 비협조적에도 불구하고 함께 여행하기를 적극 독려했던 그의 배려가
내게 해준 선물중 가장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기껏 마음 써 어딘가 가자하면 짜증이 나기도하고
가상한 마음에 울며 겨자먹기로 간 적도 있고
어느땐 무거운 걸음으로 골을 내며 가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누가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냐고
설문지에 물을때 여행이라고 답하는 날 보았다
인생후배들에게 젊은 시기에 여행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
요즘 들어서는 가지도 않은곳의 여행지 정보를 듣는것 만으로도
감흥이 설레고 치과에 가서 기다리는 동안도 기행지 소개하는 책을
꼼꼼히 살피다 오는 나를 보고 많이 달라졌다 생각이 든다
변한것이 나이탓인지 마음에 여유가 생겨 그런지
그리고 이제는 멀미를 거의 안하는것도 이유일것 같다
앞으로는 여행하며 지내고 싶다
그래서 먼지속 창고에 넣어둔 나의 여행했던 기억을 끄집어 내보려한다
지금와서 보니 소중하고 행복했었단 생각에 ..
1991년 걸프전이 시작된것도 아랑곳없이
미국 산호세 실리콘 밸리에 연수를 받아야하는 그가
먼저 떠나면서 며칠후 혼자 뒤따라 가야할 내게
대형 샌프란시스코 공항의 평면도(?)를 그린 안내지도를 자세한 설명을 곁들여 두장에 걸쳐 적어주었다
왜냐하면 내가 영어를 못하는데다 길치였고 초행길에 방안퉁수 아줌마였기 때문이었다
국내선 비행기는 타보았지만 해외로 나간것은 처음이었던 여행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적어준 꼼꼼한 안내 설명서는 내가 보기에 뭐가뭔지 더 어렵기만하고 그냥 부딪혀 헤쳐나갈수밖에 없는 형편였다
<으이그 해주면 뭐해...도움이 안 되네....>
언제 그옷을 다 입는다고 가방안에는 내옷들로 거의 채웠졌고
패션쇼 할것 아닌데 옷 많이 가져온것을 갈아타고 이동할때 제일 후회했다
산호세는 바로 가는 노선이 없고
외국사람들이 많은 미 샌프란시스코발 비행기안에서 행인지 불행인지
내옆자리는 직장일로 산호세 간다는 한국남자가 앉게 되었다
영어소통이 안되는 나는 행운이라 생각되며 그에게 혹시 정보도
얻을수 있지 않을까 내심 생각했다
우리나라 승무원처럼 예쁘지 않아
색다른 퉁퉁한 미국항공 승무원이 기내에서 음료를 뭘 들겠냐고 묻는것 같아 내가 얼른
<콜라~!> 그랬더니 옆자리 한국남자가
<콕~!>이라 해야 콜라를 주는거라면서 빙긋 웃는것을 시작으로
자존심 쪼끔 상하는 영어소통의 어려움으로 점철된 나의 여로이었다
옆자리 남자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중 기억에 남는것은
<아이들과 여자의 천국인 미국이라서 구경시키면 안 된다는 말이 있어요....>
벌써 15년전이니 그때는 아이들이나 여자들이 한국과 비교해 살기 편한
선망하던 선진국 미국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나타내는 말이었다
혼자 겁도 났던 비행기 갈아타기도 용케하며
청명한 날씨에 산호세 작은 공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는 아침에 출근하듯 그사람이 나가면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내야했다
안내할 그가 일정이 빡빡해 산호세를 많이 둘러보지 못해 아쉬웠다
난 벙어리 같아서 어디든 나가 쇼핑도 할수 없는 처지이고
차가 없으니 갑갑한 시간에 다운타운 구경할까
한참을 걸어가 봐도 겨우 건물 몇개만 지나친것 같았던 넓기만한 도시였다
그래도 못견디게 심심하면 혼자서 잘 포장되어진 딱딱한 길을
걷고 걸었다 딱 다시 찾아 돌아올만큼만
그때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으례껏 <하이~!> 선한 얼굴로 웃으며
아는체 인사를 한다
한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에게 굳은 얼굴을 하던 습관의 나는
신선하고 기분좋은 일이어서
처음엔 조금 어색하게<하이~!> 대답하다가
나중에는 길이 나서 그사람들처럼 미소까지 띄어가며 아무에게나 신나게 <하이~!>를 했다
한국에 와서도 계속하고 싶었던 좋은 습관이었다
홀리데이 인이라는 빌라가 숙소였는데 한국의 콘도처럼
씽크대도 있어 계란 후라이를 하려고 보니 소금이 없었다
히스페닉계 청소부직원에게 소금을 부탁하니 그도 영어가 나같이 신통치 않은지 서로 못알아 듣기만 한다
한참을 실갱이 하다 운좋게 소금을 얻어 후라이를 해먹었지만
난 더 말하기에 자신을 잃었다
돈을 찾아야해서 그가 점심시간에 틈을 내 날 데리고 은행에 갔다
한국처럼 북적이지 않고 직원 몇명에 아담하고 한가로운 곳이었다
시간이 없어 기다리지 못하고 그 사람이 신청한 돈을 창구에서 받으라 하며
할머니 은행직원에게 내게 줄 것을 당부하고 갔다
아마 모자란 사람이니 잘 부탁한다 했을 것 같다
벽에 걸린 그림들이 좋다는 생각을 하며 기다리는데
은발에 후덕해 보이는 백인 할머니 은행원이 나를 불러 아기에게 하듯 웃으며
천천히 알기 쉽게 돈을 세어보인다
<원달러> <원달러><원달러><언더스탠?>
숫자도 둘 이상은 모르는 줄 아는지...
그래도 따스하고 친절한 미소가 나까지 미소짓게 했던 할머니였다
노인이 은행직원으로 일 할수 있는 나라가 부럽기도했다
여행이란 참 묘한 것이다 당시에는 아이들이 어려
떠나기 전에는 근 이십일이나 집을 비운다는 것이 염려스러워 전전긍긍했었다
그래서 가지말까 고민도 많이 했는데
막상 여행지에 와 그곳에 심취하다 보면 집 생각이 안난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떨어져 있어 본적 없고
극성엄마였는데 한가한 산호세에서 집생각이 안나다니..
가라고 인심썼던 아들녀석이 전화에 대고
<엄마 ...언제와...그냥 오면 안돼?> 그러는 상황인데..
조용하고 깨끗하게 정돈된 지적인 인상의 산호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