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聞神之言者)
시편 85:8, 로마서 10:13-끝
상동(尙洞)교회. 정동(貞洞)교회
1930. 11. 9.
神常發言于人間, 而人間不能聽之, 總合新舊約而看之, 則神常發言于人間. 其辭甚微, 若不細心傾耳, 則不能聽. 若又不能聽之, 則神之所以爲神不能窺知也. 故吾人當淸心淨耳, 銷盡一切妄念, 傾聽神之誘話可矣. 然日日接觸吾心耳者, 皆塵世之喧擾, 俗界之噪擾而已也. 故吾人之心耳, 由此等煩擾, 而充塞者皆汚聲醜音也. 奚特外來之汚醜已也? 吾自身常穢我心也. 時時如是日日如是, 功名心, 權利心,肉慾心, 自負心等 充植我心內, 如此不潔之心耳, 焉聽至聖之神言哉? 當屛去靜聽可也. 以下可聽神言者之心, 得列錄如下, ◇欲遵旨而生者聽之, 요한七章十七節. 如苦物不能入口者, 口不欲受苦, 吾聞主言, 吾心苦之則不能聽之, 亦不能受之. 主之言如芻豢之悅口然後, 聲入心通, 聞通心悅, 其受益三十倍, 六十倍, 百倍之多也. 古者有黃叔度, 爲人淸介, 人以爲時月之間不見黃生, 鄙吝萌, 故人不厭接之. 吾人若不聞神言, 則雜念萌于中, 不能除去也. 欲在不安生活則已, 如欲克己生活, 則不聞神言而何也? 入信者之家庭, 琴聲與讚美和之, 以聞笑語洋洋, 家庭禮拜可以模擬敎堂禮拜, 人見其美而欲化之, 則必欲悅聞主言禮拜, 必往復興會, 不擇遠近必參也. 此何故也? 欲遵旨而生也. ◇其次擧主而後能聽, 요한 八章二十八節. 人不崇拜則不欲聞其言. 擧者高之也. 人不欲崇主則, 不欲聞主之旨也. 又不欲學其理也. 非徒不欲聞, 反欲斥之, 又甚則欲殺之也. 猶人釘主亦以此也. 某信主生徒, 寄宿人家敎其子主曰, 我請子欲得學問, 不欲天主學黜, 其生徒不欲崇主, 故如是黜之, 故擧主而後能聽主言也. 主在十字架上發言, 何其聖嚴也? 主乎彼無知故釘我, 願赦之云, 千古使人感淚, 使人銷磨諸惡念者, 此聖言也. 歐洲某長官有寃讐, 每欲殺之, 一日懷劍而往入牧師館, 牧師請祈禱, 與誦主祈禱文, 至赦免人罪之句, 不能誦, 牧師問其故, 長官乃擲劍自服, 實告主之言如是感人, 此皆出於崇主之言也. 我欲高於主則不能聽也. ◇其次愛主而後能聽, 요한十四章二十四節. 無愛主之心則不能聽. 子不欲聞父訓者, 以不愛父也, 徒不欲聞師訓者, 以不愛師也. 日前聞某女生之言則, 曰我愛洗于某牧師, 其說敎無不誦之云, 此敬愛其牧師故也. 禮拜時有敎友之座席, 或橫坐, 或正坐, 或反坐, 其知其聽道之如何也. 十二徒從主, 各受充滿而惟猶大反之, 故賣主也. 如太陽之於地球, 地球冬則背太陽不近故寒冷. 吾心之向主亦然, 吾心冷時此遠主也. 心熱時此近主也. 故吾等熱心愛主, 如主愛我, 我亦能愛主, 孔子愛讀周易韋編三絶, 此證其多讀. 諸位愛聖書如孔之愛周易焉. ◇其次有靜心者聽. 摩西在西乃山, 保羅在沙漠, 요한在曠野, 皆欲靜心故也. 吾等常在奮鬪中, 何暇如三聖之靜心也? 然主曰入洞房祈禱, 此敎人靜心也. 不靜心而能聽者未之有也. 靜夜思之萬物無不汨入心內, 淸晨聞工場之汽笛則尤易聽也. 惟聽主訓, 其受恩實多, 葡酒異蹟, 요한二章九節. 何等優閒? 主不廣告而造酒, 人皆不知之, 惟下人知之, 故主說聖神之恩如風, 不知自何方而去來也. 吾等日日勞碌, 只望前而走, 若無片暇之修養, 則其生活凡俗, 蘇氏曰士俗不可醫, 人雖無暇, 擇之則有, 有飮茶之暇, 有喫飯之暇, 有對客之暇, 無暇云者, 皆推諉也. 願僉位常靜心而聽主訓焉. ◇其次有靈耳者聽, 太十三章九節. 此甚不易之訓也. 自古有靈耳者甚稀, 而主曰有耳者聽之云, 눅十章四二節, 롬十章十七節.
하나님은 항상 인간에게 말씀을 하시지만 사람들은 듣지를 못합니다. <신·구약성경>를 통 털어 살펴보면 하나님은 항상 인간에게 말을 하지만 그 말씀은 은미(隱微)하기 때문에 귀를 기울여 세심하게 듣지 않으면 들을 수 없습니다. 또 그 말씀을 들을 수 없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존재의 의를 엿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깨끗한 마음과 귀를 가지고 일체의 망령된 생각을 없애버리고 하나님께서 이끌어주는 말씀을 경청해야 됩니다.
그러나 날마다 나의 마음과 귀로 접촉되는 것들은 다 티끌세상의 시끄러움과 속된 세계의 요란함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의 마음과 귀는 이러한 번거로움과 요란스러움으로 가득 메워져 있습니다. 이것들은 다 더럽고 추한 소리들입니다. 어찌 특별히 외부에서 들어온 더럽고 추한 것뿐이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늘 자신의 마음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때때로 더럽히고 날마다 더럽히는 것은 공명심과 권리심(權利心)과 육욕심(肉慾心)과 자부심 등으로써, 이것들이 내 마음속에 꽉 들어 차있습니다. 이렇게 불결한 마음과 귀를 가지고 어떻게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이런 것들을 걷어버리고 조용히 들어야 됩니다.
아래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을 열거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려는 자가 듣습니다(요한복음 7:17).
쓴 물건을 입에 넣을 수 없는 것은 입이 쓴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내 마음이 쓰면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으며 또한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마치 쇠고기가 내 입을 즐겁게 하는 것 같이 된 후에 그 소리가 들어와 내 마음이 탁 터지고, 그 말씀은 내 마음을 즐겁게 하여 거기서 받는 이익은 삼십 배, 육십 배, 아니 백 배까지 많아집니다.
옛날 중국 후한(後漢) 때 황숙도(黃叔度)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됨이 깨끗하고 지조가 있는 진번(陳蕃)은 ‘한 시간 또는 한 달 동안 황숙도를 만나지 못하면 야비하고 인색한 마음이 싹튼다’라고 하였답니다. 그리하여 진번이라는 사람은 황숙도를 접촉하는 일을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인간이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잡념이 마음속에 싹터서 제거할 수가 없게 됩니다. 불안한 생활에 안주해 있고 싶다면 그뿐이겠으나 만일 극기(克己) 생활을 하고 싶어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자의 가정에 들어가면 거문고 소리와 찬미의 소리가 화합하고 웃는 소리가 거침없이 들려오며 가정예배를 드리게 되니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교화를 받으려고 하게 되고, 또 주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어 예배하게 되어, 반드시 멀고 가까운 곳을 따지지 않고 부흥회에 가게 됩니다.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며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은 주님을 숭배한 뒤에 능히 들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28)
사람도 존경하지 않으면 그가 한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사람이 주님을 경배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 이치도 배우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듣지 않으려고 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배척하려고 할 것입니다. 또 더 심해지면 죽이려고 마음먹기도 합니다. 유대인이 주님을 못 박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는 어느 생도가 남의 집에 기숙하면서 그 집의 아들을 가르쳤는데 주인이 이르기를 ‘나는 아들에게 학문을 배우라고 시킨 것이지 하늘의 주님을 배우라고 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고 내어보냈다고 합니다. 그 집 학생은 주님을 경배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이 쫓아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경배한 뒤에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은 얼마나 거룩하고 엄숙하였습니까? ‘주여! 저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나를 못 박는 것이 오니 저들을 용서해 주소서’ 하셨던 말씀은 천고에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악념을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성인의 말씀입니다.
유럽[歐洲]의 어느 장관에게 원수가 있어서 늘 그 원수를 죽이려고 하다가 어느 날 칼을 품속에 감추고 목사관(牧師館)에 들어갔습니다. 목사는 그에게 기도하기를 청하고 함께 주기도문(主祈禱文)을 외웠는데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소서’하는 구절에 이르러서 장관은 외우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장관이 칼을 꺼내어 던져 버리고 자복하면서 ‘실로 주님의 말씀이 이와 같이 감동시켰다’고 하였답니다. 이게 모두 주님을 숭배하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내가 주님보다 높아지려고 하면,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은 주님을 사랑한 뒤에 들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24)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훈계를 듣지 않으려는 것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학생이 스승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도 스승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어느 여학생의 말을 들으니 ‘나는 어느 목사님에게 세례를 받고 싶습니다. 그 목사님이 하는 설교를 외우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 목사를 존경하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배할 때 교우들이 좌석에 있으면서 비스듬히 모로 앉은 이, 똑 바로 정좌한 이, 반대로 돌아앉은 이 등이 있는데, 그것을 보아 그들이 강도(講道)를 어떻게 듣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열두 제자가 주님을 따르며 주님의 교훈을 충분하게 받았지만 오직 유다는 주님을 배반하고 팔았습니다. 마치 태양이 지구에 충만하지만 지구가 겨울에 태양을 등지고 멀어지므로 추운 것과 같습니다. 우리 마음이 주님을 향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 마음이 냉정해 질 때, 이는 주님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운 때는 바로 주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듯이 나도 주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자가 <주역周易>을 하도 많이 애독하여 책을 맨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고 합니다. 이는 그 책을 다독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들도 <성경>을 사랑하기를 공자가 <주역>을 사랑하듯 하십시오.
그 다음은 마음을 고요하게 가진 자가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있을 때, 바울이 사막에 있을 때, 요한이 광야에 있을 때 모두 마음을 고요하게 가지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늘 분투(奮鬪)하는 가운데 있으니 어느 겨를에 위에 든 세 성인[三聖]과 같이 마음을 조용히 가지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이르기를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고요히 가지라는 가르침입니다. 마음을 고요히 가지지 않고 능히 듣는 자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고요한 밤에 생각을 하게 되면 만물이 마음속으로 빠져 들어가지 않는 게 없습니다. 아주 깨끗한 이른 새벽에서 나는 기적(汽笛) 소리를 들으면 더욱 잘 들립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듣게 되면 그 은혜는 실로 많습니다. 포도주의 이적은 얼마나 넉넉하고 큰 것입니까?(요한복음 2:9) 주님께서는 널리 알리지 않고 술을 만들었지만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오직 심부름한 하인만이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성신(聖神)의 은혜는 바람과 같아서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날마다 바쁘고 수고롭지만 오로지 앞만 바라보고 전진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아주 작은 시간이라도 수양하지 않으면 그 생활이 범속(凡俗)해지고 맙니다.
옛날 중국 시인 소동파[蘇氏]가 ‘선비가 속되면 고칠 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비록 여가가 없다고 하나 잘 골라보면 있습니다. 차를 마실 여가도 있고, 밥 먹을 시간도 있으며, 손님을 접대하는 여가도 있습니다. 여가가 없다는 것은 다 핑계입니다. 바라건대 여러분은 마음을 고요히 가지어 주님의 가르침을 들으십시오.
그 다음은 영적인 귀를 가진 자가 듣습니다(마태복음 13:9).
이는 매우 쉽지 않은 훈계입니다. 예로부터 영적인 귀를 가진 자가 매우 드물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르기를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셨습니다(누가복음 10:42 로마서 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