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0동구지역산성답사후기.hwp
제10차 대전문화유산답사 “대전동구지역 산성트래킹” 후기
□ 일 시 : 2016년 4월 10일 09:00-14:30
□ 코 스 : 옛충남도청-사성동산성-점심-비파산성-옛충남도청
□ 참가자 : 이주우(강사 : 향토사연구가), 이주진, 가종린, 김긍원, 김충국, 장정숙, 안여종, 허혜경, 김미나, 초등학생 2명 총 11명
1. 사성동산성
4월 2일 사성동산성 아래쪽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바닥에 깔려 있던 낙엽더미들과 작은 나무들이 까맣게 타서 재만 남기고 없어진 상황이었고, 아직도 탄내가 많이 나고 있었다. 다행히 더 크게 번지지는 않아 큰 나무들은 살아남아 있었다.
차로 올라갈 수 있을 만큼 올라간 뒤 산을 오른 덕분에 15 분 만에 사성동산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동성왕 12년(490년) 가을 7월, 나이가 15세 이상인 북부 사람들을 징발하여 사현과 이산 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十二年, 秋七月, 徵北部人年十五歲已上, <沙峴>․<耳山> 二城.)
여기 기록되어 있는 사현성은 사성동산성을 의미하고 이산성은 비파산성으로 추정되며 그 근거에 대한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 사현을 훈으로 풀면 모래재로서, 사성동산성 아래에 있는 마을이름이 모래재 마을이다. 우리 일행도 마을을 지나며 모래재라고 표기되어 있는 이정표를 볼 수 있었다.
이곳은 조선시대까지는 문헌상 사현으로 기록되어 있고(송시열 선생의 제자가 선생의 장례를 치를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초산일기), 1919년 지도에는 사성동이라 표기되어 있으며 이 지명을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이는 현재의 사성동산성이 백제 동성왕이 쌓은 사현성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 산성을 쌓을 때 적이 오는 방향은 접근성이 어렵도록 하며 아군이 오는 방향은 접근성이 쉽도록 성을 쌓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사성동산성은 공주쪽 방향이 접근성이 어렵도록 하여 적의 방향으로 삼은 구조이다. 또한, 대전의 계족산성, 질현성, 고봉산성 등의 산성과도 대응하는 구조로 쌓은 성이다.
이러한 사성동산성의 배치구조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 성을 쌓았던 490년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 한성을 점령하였고, 중원고구려비의 기록상으로 고구려가 한반도 중부 지역까지도 영토를 확장하여 남하정책을 펴고 있는 상황이었다.
백제는 475년 고구려에 의해 수도를 빼앗기고 개로왕이 전사하여 그 동생인 문주왕(475-479)이 급하게 왕위를 계승하여 웅진으로 천도하였고, 웅진시대 3번째 왕인 동성왕(479-501)은 당시 가장 세력이 막강했던 고구려에 대응하기 위해 485년 5월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고, 486년 7월에는 우두성을 쌓고, 10월에 대궐 남쪽에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사열하였고 493년에는 신라 소지왕과 혼인동맹을 추진하였다.
신라는 486년 1월 선산 지방의 장정 3천명을 징발하여 삼년성과 굴산성 두 성을 개축하고, 8월 낭산 남쪽에서 군사를 사열한 기록이 있다.
이는 막강한 세력으로 남하정책을 펴고 있는 고구려에 대응하기 위해 백제와 신라가 협력을 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는 의미이다.
한편, 충북 청주시 부용면 부강리 남성골에서 고구려산성이 발굴되었으며(남성골산성), 대전의 월평동산성에서 고구려 토기가 발견되고 성벽의 일부 구간이 고구려 성벽 축조기법과 유사한 점 등의 이유를 들어 그 당시 대전지역은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는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성동산성은 백제가 대전지역을 점령한 고구려에 대응하고 대전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쌓은 성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이제까지 대전의 산성은 백제가 신라에 대응하기 위해 쌓았다는 관념을 깨는 것이다.
2. 비파산성(이사동산성)
490년 백제 동성왕이 쌓은 또 하나의 성인 이산성은 대전의 비파산성이다.
이산성은 현재 동구 이사동에 있으며, 윗사한리와 아래사한리가 합쳐 이사리가 되었고, 현재의 이사동이 되었다.
여기서 ‘사한’을 빨리 발음하면 ‘산’이 되는데, 유성의 ‘논골’이 한자화 하면서 ‘노은’동이 된 원리와 같이 이사리는 이산리에서 한자화 과정에서 이사한리로, 다시 이사리로 변화했다고 볼 수 있다.
비파산성도 사성동산성과 같이 공주 쪽 방향을 적의 방향으로 하여 쌓은 성인데 이 또한 백제가 대전지역을 점령한 고구려에 대응하고 대전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쌓은 성이라고 할 수 있다.
3. 오늘 답사 내용 정리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된 490년에 동성왕이 쌓았다는 사현과 이산 두 성은 각각 사성동산성과 비파산성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백제가 대전지역을 고구려로부터 탈환하기 위하여 쌓은 성으로 볼 수 있다.
또한, 498년에 동성왕이 무진주까지 남벌을 하는데 이는 이 시기에는 고구려가 대전지역에서 완전히 철수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첫댓글 처음으로 가보는 사정동 산성과 비파산성이 었답니다.
오늘 즐거운 답사였슴니다.
글 위쪽에 이정표 지나 벚꽃이라고 했던 나무는 개복숭아꽃이네요. 어쩜 강사님의 강의 내용을 이렇게 간략하게 잘 정리할 수 있나요? 대단하십니다. 허간사님 고마워요...
4월 10일 사성동산성과 비파산성 답사는 매우 의미있는 산성답사였습니다. 대전의 산성을 백제와 신라의 대치로만 해석했던 상황에서 새로운 주장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답사를 정성껏 준비해주신 이주우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의미있고, 즐거운 답사였습니다. 특히 강사님의 특별한 산성 해석에 감사드립니다.
초등학생 두명과 저도 빠른시간에 2개의 산성을 오르면서 평상시 안하던 운동도 잘 하고 맛난 점심도 좋았고 대전의 역사적 유산들을 접하면서 대전을 더 잘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네요. 대표님도 감사하고 강사님도 설명 감사하고 이렇게 잘 정리해 올려주신 간사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제가 너무 감사합니다. 저도 답사 한번씩 갈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대전을 더 깊이 알아가는것 같아 뿌듯합니다. 다음에 또 좋은 기회에 뵙겠습니다~ 카페에도 자주 놀러 오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