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회고록 3막 16장 (5부)
사연도 많은 마포구 생활을 청산하고 우리 가족은 한강다리를 건너 관악구 봉천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였다.
강북에서 생활을 하고 학교를 다녀서인지 서운하기도 하였다.
안산을 넘어 하교한 추억. 꼬방동네 아이들과 뛰어놀던 삼선교의 골목길,자전거를 타고 다닌 마포경찰서의 신작로. 주인의 간곡한 부탁으로 담장을 넘어 대문을 열어준 북아현동의 주택. 신문배달 한다고 인왕산을 넘나들던 추억, 영화 포스터를 붙힌다고 배회한 이대입구 근처의 골목길.
새집을 짓고 이사간 신수동의 주택.
모든것이 내앞에서 사라지고 만것이다.
한강다리를 건너 노량진을 지나 상도동을 지나 봉천고개를 넘을시면 신천지가 전개되였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판자촌들과 허름한 집들이 봉천고개 왼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빈민촌이라해도 무색할 정도의 낙후된 동네였다.
물론 지금은 재개발되여 아파트촌으로 형성되었으나 그당시만 하여도 볼품없기 그지없었다.
지금으로치면 서울대사거리(봉천사거리)는 포장은 되였으나 차량이 뜸하였고 봉천사거리에서 관악구청을 지나 서울대 정문까지는 비포장도로였다.
마치 시골의 풍경을 보는듯 하였다.
나는 이사오고 얼마후 관악구청을 지나 서울대정문옆 동산에 가서 수풀에서 놀다 추워서 불을 지피다 산불을 낼뻔도 하였다.
바람에 의해 퍼지는 산불을 끄기란 슆지 않았다.
낮은 수풀은 잔불 확인에도 어려움이 있었고 물이 없는지라 발로 밟고 나무가지를 들고 휘저은 것이외에는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불은 진압되여 산불은 나지 않았었다.
지금도 관악구청 건너편을 지나시면 그당시를 회상하며 웃고 만다.
우리 가족은 봉천고개를 지나 봉천사거리 못미쳐 2층 주택으로 이사를 갔다.
마치 시골에 온듯한 느낌의 한적하고 조용한 동네였다.
새들이 날아다니고 구름의 흰색이 또렷이 보이는
맑은 공기가 일품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관악 구민이 되여 결혼때까지 봉천동에서 살게 되였다.
어떻게 보면 봉천동이 나의 고향처럼 느껴지기만 한다.
지금은 오피스텔로 가득차고 고시촌이 형성되고
순대타운이 생기고 낙성대가 생길거라곤 상상도 못하였다.
그당시 진흙 벌판이던 관악구청 인근에 땅이라도 갖고 있었다면 지금은 빌딩주인 행세하며 살았을지 모른다.
봉천동은 빈민촌과 어울려 살다보니 미아리고개
판자촌과 더불어 서울의 낙후된 동네로 낙인 찍혀진 것이었다.
봉천동 산다면 못사는 동네 산다며 무시당하기도 하였다.
그후 나는 333번 버스를 타고 등교하고 하교하는 반복적인 생활을 하여야 하였다.
151번(광화문 행)
92번(창신동 행)
333번(우이동 행)
내가 기억하는 그당시의 버스노선이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운행을 하는 버스도 있으니
세월을 비겨간 생명력에 찬사를 보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