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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4장 1-6절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 자신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을 맨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으로 나타내셨습니다. 발을 씻기신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몬 베드로와의 대화 속에서 밝히신 것처럼 죄를 씻는 것입니다. 특히 10절에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지만 여전히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제자들의 모습이요, 신자들의 모습임을 드러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으로만 있는 게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부패성과 그들의 연약함을 따라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죄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그 일을 막을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발을 씻기신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본을 따라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길 것을 권면하기도 하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하여 용서해 주라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 사랑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고 사랑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자가 아닐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는 반드시 그 사랑을 나타내는 자로 있게 되는데, 너희가 그런 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옆에 있는 제자들 모두가 여기에 속하는 자로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친히 발을 씻기실 때도 말씀하셨고, 또 너희가 그렇게 하라고 할 때도 말씀하셨지만, 이어지는 내용에서 예수님은 좀 더 분명하게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 자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그가 누군가? 가룟 유다입니다. 비록 그가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이요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그는 택하신 자기 백성에 속하는 자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런 그조차 예수님께서는 발을 씻기셨습니다. 사랑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발만 씻었을 뿐이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받는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가룟 유다는 온 몸을 씻지 않는 자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가룟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은 온 몸을 씻었습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죄를 짓습니다. 그만큼 부패함이 있다는 것이요, 연약함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약함을 따라 그들도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할 것입니다. 특히 베드로와 관련해서는 네가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할 것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를 것이라고 장담하지만, 베드로의 경우는 더욱더 자신 있게 말하지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요13:36)는 말씀으로 베드로를, 그리고 나머지 제자들을 위로해 주십니다.
이러한 위로는 오늘부터 살필 요한복음 14장에서도 계속됩니다. 먼저 1절에 보시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내가 너희를 떠나게 되는 일이 있지만, 그리고 그 일은 한 사람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겠지만, 또한 내가 너희를 떠난 이후 많은 환난을 받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말 번역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매튜 풀 주석은 우리말 번역 그대로가 가장 좋은 해석으로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제자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였지만 아직까지는 연약한 믿음을 소유한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나 또한 믿으라는 명령으로 이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지금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자신의 신성을 다시금 역설하여 말씀하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말 성경 각주에 보면 ‘하나님을 믿으니’라는 부분에서 각주로 ‘믿고’로 번역이 가능하다고 소개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번역이 더 낫다고 여기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 것은 곧 나를 믿는 것이요, 나를 믿는 것은 곧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배척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메시아로 보내신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 번역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는 번역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하나님을 믿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다고 말하려면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를 영접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 한명의 제자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도 참되다는 것입니다. 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배척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저들 스스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에 사실은 하나님도 믿지 않고 있는 겁니다. 말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참된 믿음으로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고 강조할 수 있다는 겁니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강조만 있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분리할 수 없다는 쪽의 강조가 더 낫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지만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 제자들의 믿음은 매우 연약합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가시는 그 길을 그들이 함께 갈 수 없습니다. 다 주를 버리고 도망하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부활 이후 승천하여 더 이상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로 말씀하시는 것이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때 근심하다는 이 표현은 요한복음 13장 21절 심령이 ‘괴로워’라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13장 21절을 ‘민망하여’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보기 답답하고 안타깝다는, 그래서 마음이 복잡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마음의 복잡함이 죄로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부패성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 그리고 연약함이 있는 제자들은 죄로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저들에게 예수님은 근심하지 말라, 괴로워하지 말라, 민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너희는 하나님을 믿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에게는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있고, 또한 중보자가 있기 때문에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단순히 제자들에게 끝까지 인내할 것을 권면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이 어디서 힘과 용기를 얻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들의 힘과 용기는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근심되는 일이 있을 때, 괴로운 일이 있을 때, 민망하고 복잡한 일이 있을 때 참된 신자라면 누구에게로 달려가야 하는가? 믿음의 주요 또한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과 그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려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이심을 믿으라고 가르칩니다. 그것도 많은 창조주가 있어서 여럿 가운데 한분 하나님이란 의미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심을 가르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6:4)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신명기 4장 39절입니다. “그런즉 너는 오늘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이사야 44장 6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45장 21절에서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신약 고린도전서 8장 4절에서는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5절에서는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라고 표현하지만, 이때 ‘많은 신과 많은 주’라는 말은 실제로 신과 주라고 칭하는 자들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늘과 땅에 신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들을 신이라고 불렀는가? 사람이 불렀을 뿐입니다. 많은 종교가 있고 종교에 신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다 사람이 다 만들어낸 것입니다. 사람 안에 종교성이 있는데, 종교성이 그것들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로마서 1장으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
성경은 유일하신 참 신은 하나님 외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시간과 공간이 창조되기 전의 상태를 우리는 무(無)의 상태라고 하는데, 그런 상태에서도 유일하게 존재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시편 90편 2절은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모든 피조세계는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세계를 만드시되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실 만큼 창조하셨습니다. 거기에 죄의 창조가 있는가? 없습니다. 그러나 천사 중 일부의 타락함으로, 그리고 타락한 천사의 유혹을 받아 인간이 타락함으로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거룩과 반대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모든 사람을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영원 전부터 모든 사람 가운데 일부를 택하여 구원을 베풀기로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가 우리의 창조주일 뿐만 아니라, 그가 우리의 구원자이시기도 하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또한 믿습니다. 창조하신 모든 만물을 친히 다스리시되 인격적인 피조물의 의지까지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지 않은 죄까지 다스릴 수 있다는 것도 믿습니다. 죄는 사람으로부터 나오지만 그 죄를 얼마든지 다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죄로 완전히 뒤덮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나마 사람에게 착한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본성을 악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런 악한 본성이 절제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죄를 다스린다는 것은 죄를 짓지 않도록 만들거나 죄를 짓도록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타락 이후 그 본성 자체가 죄를 향하는 자로 있습니다. 죄를 향해서만 나아갑니다. 그런 우리가 죄를 향해서만 나아가도록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국가를 세워 법을 재정하시고 그 법 아래 있게 하심으로 죄가 관영하지 않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고 할 때 하나님의 모든 섭리는 결국 자신의 선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있는데, 그의 선함은 언제나 교회를 향해 있습니다. 주의 몸 된 교회의 유익을 위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하기도 하는 겁니다(롬8:28).
여러분,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부패성과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쉽게 동요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일들로 인하여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왜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는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그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창조주이십니다. 모든 만물을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처음에만 구원하시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한번 사랑하기로 하셨다면 죄조차 막을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는 분으로 있습니다. 너희는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나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비록 근심되는 일이 없을 수 없지만, 괴로운 일이 없을 수 없지만, 복잡한 일이 없을 수 없지만 하나님과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힘과 용기를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있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 그를 믿는다는 것은 근심하게 되는 일이 없을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심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와 함과 능력이 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근심하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근심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근심하지 않을 수 있는 힘과 능력도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밖에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두려워하지 말 것을 알리신 다음 예수님은 자신이 제자들을 떠나셔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시는데, 2절과 3절입니다. 우선 2절을 보시면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간단히 말하면 내가 너희를 떠나야 하는 이유는 다 너희를 위해서라는 겁니다. 이때 너희를 위한 것으로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씀하시는데, 잘못 이해하면 ‘내 아버지 집’이라는 곳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25:31-34) 41절에서는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위 영광의 나라는 창세로부터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예비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하기 때문에 아직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나라가 아닙니다. 창세로부터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예비되어 있는 나라, 그래서 구약 백성들도 그 나라에 있는 것이고, 우리보다 앞서 죽은 믿음의 선배들 역시 그 나라에 있습니다. 우리 역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죽으면 바로 그 나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럼 오늘 본문에서는 왜 준비되지 않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가? 장소적인 측면보다는 우리의 완성과 관련되어 있는 듯 합니다.
일단 2절을 다시 보시면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말씀합니다. 창세로부터 예비된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택자를 위해 준비되어 있고, 또 그들 모두를 수용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충분하기 때문에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오직 택자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가 보내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즉 예수님 자신의 말이 하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라고 할 때 그가 말씀하신 모든 내용은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모든 거짓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된 마귀로부터 난 것입니다(요8:44). 예수님 자신이 만약 속이는 말로 하는 것이라면 거짓의 아비를 따르게 되는 것인데, 그럴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씀합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장소적인 측면으로 보게 되면 마태복음 25장의 말씀과 모순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모순되는 일이 있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모순되는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씀 안에서도 모순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럼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3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여기서도 예수님께서 가는 것, 떠나는 것이 너희를 위함이라고 말씀하시는데,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장소적인 측면에서의 완성이 아니라 뭔가를 완성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겠다는 것입니다.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럼 장소적인 측면에서의 완성이 아니라 뭔가의 완성이라고 할 때 그 완성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세상 끝에 일어날 징조와 관련해서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3-14) 소위 최후 심판의 때는 언제냐?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는 때입니다. 이것은 그냥 외적으로 복음을 증거 하는 정도의 말씀이 아니라 예정론 근거로 말하자면 모든 민족 가운데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택하신 자들을 다 불러 모으시는 때입니다. 택자의 수가 다 찰 때, 그때가 마지막 심판의 때입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25:31-34,41)는 말씀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측면에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는 것은 주의 몸 된 교회의 완성과 관련된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그 장소의 준비가 아니라 그것은 이미 창세전부터 예비되어 있는 것이고, 지상의 모든 사역을 완성하시고 난 뒤 하늘로 올라가셔서 그곳에서 자신의 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올라가신다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너희를 위하여’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너희의 완성을 위하여 잠시 너희를 떠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처음부터 알리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택하신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죽은 자로 있었지만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을 자기 백성 된 자에게 주시기 위해 인성을 취하신 것입니다.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은 그의 말씀과 여러 가지 표적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표적 중의 표적, 다시 말해 그의 죽음으로 지상에서의 모든 사역은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부활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승천하실 것입니다. 지상의 모든 사역은 완성하셨지만,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그는 계속해서 궁극적인 완성을 위하여 일하실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오신 것도 너희를 위한 일이고, 가시는 것도 너희를 위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근심합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말씀하시자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근심합니다. 부활을 말씀하셨지만 부활 이후 승천하신다는 것, 다시 말해 그들과 함께 있지 않는다는 것으로 근심합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도 그들을 위한 것입니다. 부활하시는 것도 그들을 위한 것이요, 부활하여 승천하시는 것도 그들을 위해서입니다. 제자들 입장에서는 선생이 사라지는 것, 문제가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너희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 무엇에 대한 믿음입니까?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한 것이다. 내가 행하는 모든 일이 너희를 위한 것이라면, 나를 보내신 하나님 역시 너희를 위하여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은 결국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만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보시면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앞에서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는 것은 결코 지상나라와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영광의 나라와 관련된 것입니다. 너희를 영광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가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의 말씀처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기에 거기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도마가 묻습니다. 5절을 보시면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도마가 묻고 있지만 나머지 열 제자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는 부족하고 연약함이 있어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다 도망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외면합니다. 다시금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바로 전까지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가진 자로 반응하게 됩니다. 즉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친절히 말씀하시는데, 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부분은 다음 주에 다시금 살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도마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께로 간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너희도 결국 아버지께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영접하시는 것처럼 너희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로 가기 위한 유일한 중보자는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겁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 이 믿음 안에는 장차 우리가 아버지께로 나아가게 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언제 나아가게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거처를 다 예비하실 때입니다. 이미 창세전부터 예비된 나라이지만, 여기서는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될 택한 백성의 완성에 있습니다. 교회의 완성입니다. 택자의 수가 차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결코 불가능합니다. 왜 하나님을 믿으라고만 말하지 않고,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시느냐? 나를 믿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택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믿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예수님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배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배척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구약에서부터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부터 그리스도는 알려졌던 겁니다. 알려진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그 시기에 나타나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든 일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낸 것이지만,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습니다. 그 말은 그들이 믿고 있다고 하는 하나님도 참되게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보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말처럼 하나님은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믿지 않습니다. 여기에 어떻게 구원을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데, 그리스도를 배척하면서 어떻게 구원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구원이 없다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다는 것은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없이는 결코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충만하게 나타내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장에서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라고 말하면서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골2:2-3).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충만하게 들어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입니다. 그 그리스도께서 그의 말씀과 표적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심지어 승천하시고 난 뒤에는 그의 사도들을 통해, 또한 비상직분으로 있는 복음 전도자를 통해 드러내십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이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쓰신 것이 아니라, 사도들을 통해, 또한 비상직분인 복음 전도자를 통해 쓰신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겁니다.
다음 주 살피겠지만 예수님은 믿음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구원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의 시작도, 과정도, 완성도 없습니다. 그 말은 그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친히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지상에서만이 아니라 승천하시고도 그 일을 이루십니다. 그러하기에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행하는 모든 일은 너희를 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뒤 사도들은 성령의 특별한 역사로 말미암아 주의 말씀을 깨닫고 복음을 증거 하는 자로 있게 됩니다. 그러나 복음을 증거 하는데 있어 평탄함만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 때문에 박해를 당합니다. 박해로 말미암아 죽는 일까지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구원의 역사를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평탄하기만을 바랍니다. 평안하기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평탄한 삶만 있지 않습니다. 평안한 삶만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완성해 가십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 역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해 가십니다. 그러면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 쉽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 일을 통해서도 여전히 한결같은 사랑으로 대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라를 믿으라. 그 말은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것 되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분만을 의지하고 그분만을 소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