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 이정립 형제의 교권탈취와 역사왜곡해방이후 운산 안흥찬 총사수가 일으킨
2변을 이상호 이정립이 조직을 탈취해 판갈이 한 후 <증산교사>를 통해 왜곡한 부
분. 해방이후 동아흥산사 사건으로 60이 다되어 늙고 맹인인 된 이상호는 해방과 더
불어 출옥해 정읍에 방한칸을 얻어 머물고 있다가 안운산 총사수를 만나 총사수의
직계간부 배동찬의 배려로 용화동으로 거처를 옮기고 이정립은 45년 7월 대구에서
출감해 서울 동생 이순탁 집에 있다가 서울 합정동 최위석 집에서 만난 안운산 총사
수를 만나 역시 명을 받은 배동찬의 소개로 결혼을 하게 되어 용화동에서 신혼생활
을 하게 된다. 이런 관계로 24세의 젊은 총사수는 이정립과 가깝게 지내면서 6.25당
시 한강철교가 끊어지면서 이들 부부와 이정립 처의 동생 장상달 등과 함께 한강을
건너 온양까지 차와 도보로 운명을 같이 하기도 한다.
배동찬, 김종렬 등 2변 교운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안흥찬 총사수의 직계연비로
안흥찬 총사수의 명을 받들어 집행 된 것으로 이정립은 정작 그 핵심인 안흥찬이란
인물은 쏙 빼놓고 기술했다. 최위석 집에서 치성드린 인물이 10여명 참여했음에도
이정립이 <증산교사>에 간부만 백 수십명 기록한 것도 가공된 허위며 조직도 모두
이정립이 조작한 명백한 거짓이다.(안운산 총사수 증언)
대법사의 교서 간행과 성전 건축
대순전경(大巡典經)은 일제(日帝)시대 기사(己巳 1929)년에 동화교(東華敎)에서 간행할 때 일제(日帝)에 불리한 구절은 모두 빼고 혹은 삭제당하기도 하여 국한문(國漢文)으로 간행하였고 또 계유(癸酉 1933)년에 순 한글본으로 간행하였는데 해방 후 병술(丙戌 1946)년에 남주(南舟)가 빠진 구절을 전부 거두어 증보(增補)하고 크게 정리하며 한자현역(漢字態譯) 한 국문본(國文本)의 원고를 완성하였고 또 교의서(敎義書)인 대순철학(大巡哲學)을 저술하여 원고를 완성하였다.
정해(丁亥 1947)년 9월에 남상기(南相銷)가 유태효(柳泰孝)로 하여금 남주(南舟)를 방문케 하고 출판비의 조달(調達)을 자청하며 대순전경 간행을 요청하고 또 삼덕교(三德敎)에서 서상학(徐相學)을 남주에게 보내어 출판비의 일부 조달을 자청하였으므로 남주는 태효와 상학 두 사람을 데리고 상경하여 대순전경과 대순철학을 각 300부씩 간행하였다. (甑山敎史 338쪽)
무자(戊子 1948)년 9월 대순절(大巡節) 교인대표대회에서 대순전경을 교경(敎經)으로 대순철학을 교의서(敎義書)로 사용하기로 하여 대량(大量)으로 출판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동짓달에 배동천(裵東燦)이 경북(慶北)지방에서 포교운동을 일으키면서 안동(安動의 조극규(趙極奎)와 의성(義城)의 여교인(女敎人) 김옥경(金玉卿) 두사람에게서 90만원을 차입(借入)하여 출판비로 조달하였으므로 출판을 시작하여 기축(己丑 1949)년 음력 1월 15일 대순전경과 대순철학을 각 4천부씩 간행하니 대순전경은 제4판이요 대순철학은 제2판이었다. (甑山敎史 338쪽)
*기축(己丑 1949)년 3월에 김종렬(金鍾烈)이 충남(忠南) 서천(針川) 보령(保寧) 등지에서 대순전경을 발매(發勳한 대금 일부와 교인들에게서 모집한 특별성금으로 용화동 본부의 기지에 성전을 건축하여 이해 6월 화천절(化天節)치성부터 신축된 성전에서 거행하게 되었다. 성전은 정서향(正西向)으로 남북 5간, 동서 3간 모두 15간인데 목공(木工) 신진균(申音均)과 이병수(李內壽)의 보수없는 공역(工投)으로 화천절안에 준공이 되었다. (甑山敎史 339쪽)
안운산 총사수와 이상호의 조직 강탈의 내막!!
-조직을 강탈한 이상호 형제의 간부직도 단체 개창자인 실권자 안운산 총사수가 임시조직해 임명한 명예직이었다.!!
젊은 총사수 안 흥찬은 이상호 형제를 처음만나 재정적으로 지원을 해 용화동에 거처를 마련해주고(이 상호), 장가도 보내줍니다(이정립) 그리고 용화동에 기거하는 장님 이 상호에게 용화동 본부에 얼굴 디밀고 대순전경의 저자로 당시 연배가 많은 신도들의 얼굴마담 역할이나 하기를 바라고 포교실무에만 모든 것을 겁니다.
그리하여 비록 그들에게 임명한 명예직이지만 조직적으로 임시 설위한 것이라 생각하고 그때그때 넘깁니다. 그러나 이미 태모님 시절부터 시대일보 사건을 위시 보천교 혁신운동으로 차 교주를 배신하고 격렬히 내치려 한 사건, 김형렬 성도 미륵불교 시절 김 형렬 성도를 기망하고 경전 자료만 취합하고 배신하고 나간 일, 동화교 통합교단 시절 태모님을 철저히 격리 고립시키고 태모님 수석 성도 고 민환 성도를 고립시켜 죽이려고 해 야밤에 도망 가게 한 경력 등을 거치며 이미 흉악함으로 잔뼈가 굵은 이상호 이정립 형제는 순수했던 젊은 총사수의 바램에 절대로 부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결국 권위성 하나로 집요하고도 끈질긴 갖가지 방법으로 당시 젊은 20대 총사수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조직을 철저히 자기 사람들로 만들며 수없이 가다듬고 재조직해 단체의 실권을 장악하고 젊은 총사수를 비밀리에 살해해 제거하도록 지령을 내립니다.
이 정립은 당시 안운산(흥찬) 총사수가 개창한 2변 조직을 이상호 이정립 형제 위주로 바꾼 위조 자료를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그 자료의 허위를 증언할 생존자들이 많아 자신 생전에 공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 가짜 자료를 가진 채 60년대 중반 모두 선화하고 그 아들 이영옥이 교직에 있다가 은퇴하여 이 자료를 모친에게 받아 증산교사라는 이름으로 발행되고 후일 홍 범초는 위조된 이 책의 2변 조직 내용을 배경으로 일개 부장으로 격하된 젊은 총사수의 존재를 이정립에 이어 줄기차게 물고 늘어지며 공격하게 됩니다.
심지어 총사수가 어린애 기르듯 기른 황 원택과 더불어 이상호 이정립 사후 용화동의 종권을 차지하고 20년 만에 들른 자신들의 연원의 총사수 큰 스승에게 자신들을 지도자로 받들어 재입도하라는 폭언과 폭력행사까지 합니다. -
*후일 6.25 전쟁 와중에 충남 부여 이 평국 신도 집에서 안흥찬 총사수 살해 미수로 현장에서 잡힌 이상호 형제가 보낸 살인청부 자객 박복만은 과연 두 형제 중에 누가 보낸 것일까요. 그리고 끝까지 젊은 총사수 안흥찬을 죽이려 했던 원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박복만은 안운산 태사부님이 얼굴을 알아보고 다정하게 여기에 왠일인가 하고 물어보는 것으로 보아 본래 안운산 태사부님이 충청도에 개척할 당시 들어온 신도임이 분명하지만 나중에 이상호 이정립 형제 위주로 조직 전체를 판갈이 하면서 신도들이 이상호 이정립에게 집중되자 이들 형제는 연원조직에서 젊은 총사수의 나이많은 도제들을 총사수보다 높은 간부직에 올리고 전국적으로 아주 교묘하고도 지속적으로 젊은 총사수를 매도하고 매타도어로 이간시킵니다. 이에 대해 안운산 總師帥는 말씀을 들어보면,
“내가 (54년 이후로) 단체에서 손을 뗀 이후에도 서천읍에 사는 김창배(金昌培), 최낙홍(崔落鴻) 등을 시켜 사기하다 철창에 갔다 병들어 누어있다는, 등으로 매타도어시키는데 사람을 모욕해도 그런 모욕을 할 수가 없다. 이상호 형제가 전국의 간부마다 다 내세워 불명예적인 모욕과 모함 이간질을 시켰다.”
그렇다면 형인 청음 이 상호씨는 왜 그렇게 끈질기게 전국의 모든 간부를 내세워 젊은 총사수의 연원 신도들을 이간하고 모함하여 모욕을 주어 내치려 했을까. 청음은 왜 젊은 총사수가 문왕 유리도수인 말점도 20년 귀양 도수를 명분으로 54년 이후로 소위 자신이 만든 단체를 떠나 은퇴를 선언한 후에도 지속적으로 비밀지령 내려 청부 암살대로 살해하려 했을까?
청음과 남주는 이에 대해 해명하지 않고 자신들의 야망을 이루지 못한 채 선화해서 알 수 없지만 후일 당시 이름 안 흥찬(安興燦) 총사수(總師帥)가 언급한 다음 말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읍니다.
신앙촌 건립을 주장한 이상호
“당시 이 상호씨 왈, 차 경석 성도 태모님 떼어내듯이 ...천사님 금산도득한다 했는데 다 팔아 용화동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하여 용화동 신앙촌화 유도를 주장했다. 용화동에 인성을 쌓고 꽃밭이 이루어지니 여기가 기지니 전 재산을 팔아가지고 와야 한다고 틈만 나면 신도들을 설득했다.
나는 정당한 사람이라, 그러지 마라. 바르게 해라. 나는 내가 포교한 사람이고 그들 안녕질서를 책임 질 사람이고 당신들은 곧 죽을 사람이다. 내 몸뚱이 내가 가는 곳이 곧 본부다. 사람이 모이니 그곳을 본부로 정했을 뿐이다.”
“조직을 개창해 만든 나를 따돌리고 조직을 거머쥔 그 사람들의 재주도 비상하다면 비상하거니와 실제로는 당시 신도들이 이상호 이정립에게로 복종해 들어가 나를 등지고 지금까지 나에게 연락하는 신도들이 단 한 명도 없다.”
당시 해방이후 판을 개창한 안 흥찬 총사수의 조직을 판갈이해 인수한 야심찬 장님 이 상호는 연원의 실제 지도자인 20대의 안 흥찬 총사수가 지금은 어려서 교주에 대한 욕심이 없지만 불원간에 세월이 지나면 조직을 빼앗길 수 있는 위험한 존재로 여깁니다.
이상호 형제는 자신들이 이미 인생 황혼기로 접어들었음을 잘 인식하고 있었을 터라 이러한 다급한 상황판단은 그들로 하여금 젊은 지도자를 제거해 후환을 없애는 쪽으로 몰고 가게 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명실상부한 교주로서의 지도자 위치를 원했던 간부들과 실무진으로 포교를 통해 우선 조직을 키우려 했던 젊은 총사수의 간극을 이상호 이정립 형제는 이용했고 지도자를 선택해야 했던 당시 대부분의 연로한 신도들은 거개가 악명은 높았지만 경전편찬으로 나름 권위는 있었던 이상호 이정립 형제의 휘하에 자진 굴복해 들어간 것입니다.
그들 형제의 역할이 이선충자도 성공하고 이악충자도 성공하니 결국은 역사에 성공자의 이름으로 남겠지만 이선충자(以善充者) 역일지 이악충자(以惡充者) 역일지는 후일 역사에서 판가름 날 것입니다.
참조,,당시, 태사부님의 생각
“(김종렬)
선생님 이게 제가 보니 임술이, 임술생이 매듭짓는데 아무리 보아도 선생님이 임술생이시고 또 나의 선생님이시고, 그러니 이게 이 원호하고 이 상호씨 부인하고 싸우는게 못되어 먹었고 또 우리가 봐도 못되어 먹었고 여자가 저 지경이니 이상호 이정립이 거치적거리고 앉아서 저러고나 있고 그러지 말고 선생님, 나앉으십시오, 우리가 떠맬테니.... 우리끼리 그래야 부작용도 안 생길테고 그렇게 하십시오.
(안흥찬 총사수)
그런데 나는 사실이 그려. 무슨 교주를 하고 그게 뭐 그런 게 없는 사람이여. 상제님 사업해야 하니 그런 거지. 나는 무슨 감투욕이고 본래 그런게 없는 사람여. 그래서 나는 그런 걸 원하들 않지 않느냐. 그러면(교주하면) 일선에 나서서 일도 못 할테고 말여, 그러니께, 나는 그런 짐을 걸머지고 싶지도 않고. 나는 필요치 않다고... 내가 나오고 나서 우리나라에 임술교가 있어. 임술교 홍 성렬이가 <범증산교사>에 쓴 데 보면 임술교가 나와. 그게 김종렬이가 나를 사모하고 그 사람이 공부하면서 여러 해를 두고 봐야 임술이란게 나온다네. 그래서 이 세상 매듭은 임술생이 매듭을 짓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교 이름을 내가 말을 안들으니께 임술교를 만든거여. 임술교 교주가 김 종렬여.”-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배동찬, 김종렬 신도는 철저히 안운산 총사수 사람이다. 그러나 조직의 실체는 물론 안운산 총사수가 내세워 도와준 이들 인물에 대한 내막은 모두 삭제해 그 공을 가로챘다. 해방이후 안운산 총사수와 이상호 이정립 형제가 손잡으며 두 형제가 힘을 모아 안운산을 조직적으로 고립시키며 조직을 탈취하고 끊임없이 살해하려 한 시도는 그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은 증언으로 역설적으로 뒷받침할 뿐이다.
-2변에 이상호 형제는 실권이 전혀 없었고 포교도 전혀 한 적이 없다.
은행동 장기덕 사무실에서 나와 MBC(충렬탑과 성모여고 사이) 있는데로 와서 도장을 구해 <증산교회>라고 써 붙였어. 홍 성렬이란 놈이 증산교 대전지부라 써 붙였다고 한다드냐 트집도 잡고 있는디 증산교란 게 내가 한 거지 이 상호 이 정립이 한 것이 아니다 이거여. 사람도 내 사람이고 , 이름도 내가 만든거고 말여. 증산교라고 한 게 이 대한민국에서 본래 나여. 이 상호 이 정립이가 했어? 그건 정책적으로 말여 강탈해서 뺏은 거지. 뺏은 겨.
묶어서 얘기하면. 나는 뺏겼고 못나서. 장님에게 뺏겼어. 장님한티. 그러니 눈 먼 장님이 말여 나같이 사나운 사람을 말여 케이오시킬 줄을, 내가 케이오 당할 줄을 그걸 누가 알았나. 참말로 내가 아무리 큰 소리 치고 워찌고 해야 나는 이 상호한테는 두 손 들었어. 허다 허다 도리가 없어서, 야 참 나...지금까지도 허탈해서 말여, 저 쥐 새끼 같은 눈먼 늙은 놈한테 말여. 내가 전국적으로 참 세상이 넓으냐 좁으냐 하고 그 큰 일을 해가지구서 다 뺏겼다.
그러면, 이상호 이정립의 정책도 장하려니와 사실은 당시 신도들이 부응을 해 주었어. 한 놈도 나 찾아와서 용화동으로 다 팔아서 들어오라 하는디 가야 옳읍니까 하는 놈을 지금 이 시간까지 한 놈을 보지 못했고. 내가 집에 와서 누웠는디(20년 말점도 은거) 날 찾아오는 놈 한 놈 없었고.
그러구서 허튼 신도만 50명도 찾아오고 뭐 30명도 찾아오고 밥만 삶아내느라고 죽을 고생하고 말여. 그러구서 간부진에 있다는 자들은 대가리도 안 디밀고. 그리고 몰래 돈도 이상호 이정립에게 갖다 바치고. 나는 인패 같은 거 준비 하려고 하는디 속으로 이상호 이정립에게 다 팔아먹고. 다 팔아먹어버려 돈 받고. 이러한 얘기를 참 다 할 수도 없고.
그럼 교체조직이 어떻게 되는냐 하면 홍성렬이 가 뭘 어떻게 해 가지고 없는 체제까지를 만들어 거기다 어쩌구 그러는디 내가 수화금목토에 내가 수주(水主)로 조직을 했지만은 내가 그 자리서 그건 미리 사전에 조직을 하기 이전부터도 얘기한 거고. 이건 다만 조직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지만 나는 이 체제를 내가 할 수 없으니께, 우선 김 종렬이 같은 사람 아니 그게 내 사람이고 내 신돈디 말여 내가 그 사람하고 동렬에서 일할 수도 없구.
당신들(이상호 형제) 내 솔직한 얘긴디 말여. 아니 배주고 속담에 뱃속 빌어먹는다는 말도 있고. 또한 내가 엄연히 보천교 신도다 말여,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걸로, 확실히는 모르지만 이 치복씨 계통이고, 헌디 내가 당신 신도가 아녀. 내가 진리도 당신보다 더 알고. 내가 지식도 당신보다 더 많은 사람이고 말여. 당신이 대순전경을 썼지마는 나만큼 그 진리를 물러.
그래가면서 그걸 조직을 했는디 조직체가 수화금목토 동서남북 춘하추동 이렇게 하구서 그 밑으로는 무슨 24절 28수 64괘 이런 등 등으로 짰다 이 말여. 시간관계로 그걸 다 자세히는 못하것는디. 그건 아주 동양 도덕으로서는 말여, 판짜는 식이 우주원리를 가지고 그렇게 짜는 방법밖에 없다 말여. 그거밖에는 없다.
그러면 토주(土主)가 이 상호 씨고, 나는 수주(水主)고, 서울에 있는 최 위석이는 금주(金主)고, 저 밀양의 이 원호가 목주(木主)고, 여기 김 종렬이가 화주(火主)고, 그렇게 됐는디. 나는 수주(水主)라는 것을 반려 했는디, 뭐 그 임첩을 말여 수리 안 하니께. 하건 말건 말여, 실권이 내게 있는 거고. 일하는 사람도 나 하나고. 나 하나지.
그건 뭐 돈 천 억 백 조를 줘도 대한민국 내에서 나와서 일하라고 해도 없어. 사람은 없으면 그만 아녀. 그건 돈 주고 맨들지도 못하쟎어. 지구를 다 줘도 사람이 없는데 지구를 주면 사람이 만들어지나? 그건 일본 시대부터 세상을 종횡무진하고 다녀봐야 내 위치에서 나 같은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어. 그런 사람이 내가 증산교에 끼여 들어가지고 말여 일을 하는디, 나를 어떻게 혀.
그런디, 이 정립이하고 서울에 가면 최 규석이라고 늙은이 있어 그때두 그 늙은이 아마 근 70였어. 옛날 사람들의 60이라고 하면 지금부터 30년인가 40년 전이라고 하면 그건 지금 90늙은이 턱 도 더 되는겨. 얘기가 되나. 그 거치적 대는 사람들이 사성(司成)이라고 해서 토주(土主:이상호) 밑에 사성이라고 해서 맡을 사(司) 이룰 성(成)이라고 해서 이 정립(李正立)이가 사성이고 최 규석씨가 사성(司成)이고 그렇게 사성(司成)이 둘 있어.
그렇다고 해서, 아니 그 사람들이 뭐 하는 것도 아니고 말여. 그러구서 홍 성렬이가 그 새에다 무슨 뭐시 조직체가하나 있었다고 그 참 머리도 묘하데. 없는 것도 만들어서 천지공사 편에 그걸 끼어 넣드라고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