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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26:1 유다 온 백성이 나이가 십육 세 된 웃시야를 세워 그의 아버지 아마샤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으니
[대하]26:2 아마샤 왕이 그의 열조들의 묘실에 누운 후에 웃시야가 엘롯을 건축하여 유다에 돌렸더라
[대하]26:3 웃시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십육 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이 년 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골리아요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웃시야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나의 힘'이다. 웃시야는 열왕기서에 보면 아사랴라고 불려진다. 솔로몬이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두 개의 이름을 사용했었던 것 같다. 하나는 본명이고 하나는 공식적으로 쓰는 이름이었다.
웃시야 왕의 어머니는 예루살렘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골리야의 뜻은 ‘여호와께서 강하게 만드신다.’이다.
웃시야 왕의 어머니에 대한 내용은 저자가 특별히 넣은 문구로, 하나님을 섬기는 도시 예루살렘 여자였기 때문에 왕을 잘 교육했다는 것이다.
옛날부터 자녀의 교육은 어머니의 책임이었다. 수렵 채집을 주로 하며 살던 시절 때도 그랬고, 농경 문화 시절 때도 그랬다. 남자들은 사냥을 가거나 먹을 것을 구하려 나갔다가 동물과 싸우거나 자연 재해를 당하거나 적들과 싸우다가 죽는 경우가 많았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고부터는 농한기 때 습관적으로 나라들끼리 서로 뺏으로 가고 빼앗으러 오는 것을 막는 전쟁이 반복되었다.
전투에 나가면 남자들은 승리하여 빼앗은 탈취물을 가지고 기쁘게 돌아오거나, 아니면 패배해서 전쟁터에서 비참하게 죽고 돌아오지 못했다.
우리나라도 바다에 사는 마을에는 남자가 여자보다 적었다. 남자들은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닷가에는 무당집이 많다.
인생은 전쟁과 같고 남자들은 언제나 전쟁터의 최전선에 가 있었다. 남자들은 전쟁터에 나갈 때나 사냥을 나갈 때나 혹은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나가기 전에 부인에게 자신이 돌아오지 못하면 자녀들을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나갔다. 여자들은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라며 기도하다가 돌아오지 못하면 과부가 되고 자녀들을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든 잘 키워내야 했다. 그래서 고대에는 과부와 고아의 문제는 상당히 심각한 사회적 문제였다.
유대인들 역시 교육에 있어서 어머니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오늘 날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팔레스타인에 세우고 전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불러 들일 때, 누구를 유대인으로 볼 것인냐에 대한 기준으로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자녀들은 무조건 유대인으로 보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교육은 어머니의 영역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대하]26:4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대하]26:5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이라는 말은 다른 성경들을 보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가르치는'이라는 말로 번역이 되어 있다. 번역이라는 것은 완전할 수는 없어도 오해가 생기지 않게 본래의 의미에 가장 가깝게 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사람에게 가장 귀한 보석은 선생님이다. 사람은 교육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훌륭한 사람에게는 훌륭한 선생님이 있다.
웃시야의 곁에는 두 명이 있었다. 신앙의 어머니와 선지자 스가랴였다. 그들이 웃시야의 곁에서 그를 키웠기 때문에 아버지 왕이 북쪽 이스라엘로 포로로 끌려가서 사는 어두운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잘 견뎌내고 훌륭한 왕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대하]26:6 웃시야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고 가드 성벽과 야브네 성벽과 아스돗 성벽을 헐고 아스돗 땅과 블레셋 사람들 가운데에 성읍들을 건축하매
블레셋은 근동 지역에서 당시 가장 강한 족속이었다. 이집트 역사 속에도 블레셋 족속과의 전쟁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집트 사람들도 도전해 오는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서 겨우겨우 방어만 할 수 있었지 완전히 이길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은 철기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지금의 그리스 지역에서 이주해 온 이주민들이었다. 그곳에 있었던 고대 문명의 이름을 에게문명이라고 한다.
삽질 하루 종일해 봤자 표도 나지 않는데, 저녁 무렵 되어서 포크레인이 오더니 포크로 한 삽 푹 파서 옮겨 놓으니 삽질 하던 사람들의 노력이 무색하게 되었다. 장비가 최고이다. 강도가 들어와서 칼로 위협해도 총 하나 꺼내면 게임이 끝난다. 총 아무리 쏘고 수류탄 아무리 던져도 탱크 하나가 밀고 들어오면 도무지 이길 수 없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주산을 잘 하는 사람이 인정을 받았다. 주판이 살아가는 무기였다. 그러나 고등학교 2학년 정도 되었을 때 컴퓨터라는 것이 미국에서 들어왔다. 컴퓨터가 들어왔을 때 주판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다. 주판이 하루 종일 해야 할 일을 컴퓨터는 단 몇 초만에 끝내 버렸기 때문이다.
철로 무기를 만들어 쓰는 사람들과 아직 철을 모르는 사람들이 청동으로 만든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사람들과 싸우는 것은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이미 블레셋 사람들은 바다로 통해 가나안으로 건너 와서 정착해 살고 있었고, 그들은 히타이트 족속에게서 철을 만드는 법을 배워서 사용하고 있는 족속이었다. 당시 아무도 그들을 이길 수 없었다. 결국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 민족도 블레셋 족속을 몰아내지 못했다. 농사를 지을 때도 철로 된 도구가 필요했는데, 철을 만드는 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에게 가서 돈을 주고 철로 된 농사 도구를 빌려 가지고 오거나 사가지고 올 수 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나 그의 아들 요나단 같은 고위층만 철로 된 무기를 가질 수 있었지 다른 군인들은 청동으로 된 무기를 들고 싸웠다. 다윗이 블레셋에 피신해 있을 때 철을 만들어 내는 방법을 배웠을 것이다. 다윗의 부하 중 헷 사람 우리아라는 사람이 있는데, 헷이라는 말은 히타이트 족, 즉 철기를 만들어 쓰기 시작한 족속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웃시야가 막강한 블레셋 민족의 도시들을 힘으로 누르고 그들의 도시들 가운데 유다 신도시를 만들었다는 것은 철기를 휘두르며 살던 그들을 완전히 제압했다는 것이다.
[대하]26:7 하나님이 그를 도우사 블레셋 사람들과 구르바알에 거주하는 아라비아 사람들과 마온 사람들을 치게 하신지라
[대하]26:8 암몬 사람들이 웃시야에게 조공을 바치매 웃시야가 매우 강성하여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더라
아라비아 사람들과 마온(에돔 지역) 사람들도 유다 왕이 강력할 때는 알아소 조공을 바치다가 유다가 약해지면 배반하는 일을 되풀이 했다. 유다가 웃시야 왕에 의하여 강해지자 그들은 다시 유다를 섬기기 시작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함께 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다.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유익이 된다 싶으면 살살 거리다가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안 된다 싶으면 차갑게 등을 돌린다. 자신이 조금 세다고 싶으면 공격해 들어오고, 자신이 조금 약하다 싶으면 살살 거린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우리의 삶의 자세는 확실히 틀리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나보다 약한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조금 손해 보더라도 의리를 지킨다.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이다.
유다가 강해졌다는 것은 남쪽 이집트까지 소문이 났다.
[대하]26:9 웃시야가 예루살렘에서 성 모퉁이 문과 골짜기 문과 성굽이에 망대를 세워 견고하게 하고
[대하]26:10 또 광야에 망대를 세우고 물 웅덩이를 많이 파고 고원과 평지에 가축을 많이 길렀으며 또 여러 산과 좋은 밭에 농부와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을 두었으니 농사를 좋아함이었더라
[대하]26:11 웃시야에게 또 싸우는 군사가 있으니 서기관 여이엘과 병영장 마아세야가 직접 조사한 수효대로 왕의 지휘관 하나냐의 휘하에 속하여 떼를 지어 나가서 싸우는 자라
[대하]26:12 족장의 총수가 이천육백 명이니 모두 큰 용사요
[대하]26:13 그의 휘하의 군대가 삼십만 칠천오백 명이라 건장하고 싸움에 능하여 왕을 도와 적을 치는 자이며
[대하]26:14 웃시야가 그의 온 군대를 위하여 방패와 창과 투구와 갑옷과 활과 물매 돌을 준비하고
같은 군대라도 특수 부대가 있다. 웃시야는 삼십만 여명의 군대를 가지고 있었어도 선대왕이었던 아사 58만이나 여호사밧 116만 부대보다 훨씬 더 훈련이 잘 된 정예병을 만들었던 것 같다.
군사력 순위에서 일본이 6위, 한국이 7위라고 한다. 한국이 62만 명, 일본은 24만 명이고 예배군은 우리가 100배가 더 많은 데, 왜 일본이 우리보다 더 군사력이 강한 것으로 나왔는가? 그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최첨단의 무기, 또 사병들이 아니라 전부 장교와 부사관들이기 때문이다.
[대하]26:15 또 예루살렘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에게 무기를 고안하게 하여 망대와 성곽 위에 두어 화살과 큰 돌을 쏘고 던지게 하였으니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었더라
무기도 미사일 같은 것을 만들었다. 성 위에서 화살과 큰 돌을 날려 보내는 무기, 오늘 날의 미사일 같은 것을 만들어 내었던 것 같다.
교만해진 웃시야.
[대하]26:16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여호람이나 아마샤, 그리고 웃시야 왕에 대한 이야기는 같은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힘이 없었을 때는 겸손히 하나님을 잘 섬겼다가, 힘이 생기면 하나님의 종으로서 왕으로 행동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통치를 하려고 했다는 것이고, 그러다가 자기도 망치고 나라도 망쳤다는 것이다.
오늘 날 사람들은 자존감을 높이는 것을 덕으로 알고 있다. 자기 자신을 귀중히 여기고 자기 생각대로 사는 것이 웰빙, 즉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나타난 세대는 TV방송국 같은데서 만들어낸 드라마나 영상을 보며 만족하지 않는다. 자기가 만들어낸 동영상을 인터넷으로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며 스스로 만족해 한다.
유투브나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틱톡, 기타 각종 SNS 매체는 사람들이 자기를 방송하며 사는 자랑하는 것을 부추긴다.
사람들이 자랑하는 내용을 보면 자신이 어디가서 무엇을 먹었다거나, 자신이 누구와 만나서 무엇을 했다거나, 자기가 어떤 재주가 있다거나, 자기는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이상한 것을 먹거나 마시거나 한다거나, 자기 몸매가 예쁘다거나, 자기가 얼마나 재미있게 산다거나,..... 그런 것을 자신이 핸드폰으로 찍어 영상으로 올림으로서 자기의 삶을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다고 자랑한다.
인스타그램이나 틱톡 같은 것을 보면 다들 비싼 음식을 먹고, 다들 고위층 사람들과 만나고, 다들 멋진 곳에 여행하고, 다들 나보다 행복하게 사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사실 사람들은 자기가 최고 행복하게 산다고 말하는 것 같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과 사실은 거의 다르다. 자기를 사람들에게 알리면 알릴 수록 더 고립되고 외로워진다.
진정한 행복이란 비싼 음식을 먹거나 고위층 사람들을 만나거나 외국의 어느 멋진 곳에 여행을 다니거나 남들이 안가진 몸매나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웰빙, 진정 잘 사는 것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알리거나 자랑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섬기면서 겸손하게 사는 것이다.
왕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겸손하게 살았을 때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그 겸손을 잃고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어 살게 되었을 때는 주변 사람들도 반역을 일으키고 어려운 일이 닥쳐왔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삶을 살아갈 때는 자신이 자기의 세계의 왕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수천년 전의 왕들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그들의 이야기를 엿봄으로써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려는 것이다.
웃시아 왕은 교만해지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하며 살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오직 제사장만 제사 드리고 분향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하셨다. 왕이라도 그 일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웃시야는 자신이 왕이라는 것을 내세워 오직 제사장만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했다. 왕이 성전에서 분향을 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건전한 제사장들 80명이 성소 안으로 달려 들어와 왕을 말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웃시야는 화를 내면서 분향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올바른 말을 들었을 때는 두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다. 화를 내면서 올바른 말을 하는 사람을 대적할 수도 있고, 뉘우치고 돌이킬 수도 있다. 선대왕 아사는 화를 내면서 선지자를 옥에 가두었기 때문에 망했고, 여호사밧은 뉘우쳤기 때문에 회생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책망할 때에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대하]26:17 제사장 아사랴가 여호와의 용맹한 제사장 팔십 명을 데리고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대하]26:18 웃시야 왕 곁에 서서 그에게 이르되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
[대하]26:19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화를 내니 그가 제사장에게 화를 낼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들 앞에서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긴지라
[대하]26:20 대제사장 아사랴와 모든 제사장이 왕의 이마에 나병이 생겼음을 보고 성전에서 급히 쫓아내고 여호와께서 치시므로 왕도 속히 나가니라
[대하]26:21 웃시야 왕이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었고 나병환자가 되매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져 별궁에 살았으므로 그의 아들 요담이 왕궁을 관리하며 백성을 다스렸더라
교만해진 왕은 나병이 걸려서 별궁에 갇혀서 왕이지만 왕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살다가 죽었고, 사람들은 그 시체도 선대왕들과 함께 나란히 묻지 않고, 멀찍이 외롭게 묻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께도 버림을 받지만 사람들에게도 따돌림을 받게 되어 외롭게 된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살얼음판을 걷는 것 처럼 조심해서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 교만하게 되면 욕이 오게 되어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는 완전히 친해지기 전까지는 나이가 어리다거나 나보다 많이 부족해 보인다고 반말을 하거나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내가 대하는 사람이 초등학생이든 누구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하나님을 대하듯이 대해야 한다. 이 세상에는 막 대해도 될 사람은 하나도 없다.
웃시야가 16세에 왕이 되어 52년간 나라를 통치했다고 하지만 아버지 왕 아마샤를 대신해서 통치한 기간과 아들 요담이 대신해서 통치한 기간을 빼나면 자기가 단독으로 나라를 통치한 기간은 약 16년 정도이다.
[대하]26:22 웃시야의 남은 시종 행적은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하였더라
[대하]26:23 웃시야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그는 나병환자라 하여 왕들의 묘실에 접한 땅 곧 그의 조상들의 곁에 장사하니라 그의 아들 요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