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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것들..
 
 
 
카페 게시글
누정 이야기 스크랩 감로루 이야기
아라 추천 0 조회 20 14.09.07 13: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감로루(感露樓)
소 재 지 :  용문면 원류리 105
(원소재지 : 예천군 용문면 원류리 105)
건축시기 :  1600년대
문 화 재 :  시도유형문화재 제292호(경북), 1995. 12. 01. 지정

건축 배경
감로루(感露樓)는 함양박씨(咸陽朴氏) 정랑공파(正郞公派)의 묘하재사(墓下齋舍)이다.

건축 구성
정면 5칸, 특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건물인데, 막돌쌓기를 한 기단 위에는 자연석 주초를 놓고 원주를 세웠다. 누하층에는 어간에 양개판대문을 재실로 통하게 하였으며, 하층통로의 좌우칸에는 마구간을 두었다. 전면에만 널벽을 치고 안마당쪽은 개방되어 있으며, 양 협간은 상층온돌의 함실 아궁이와 구들을 설치하였다. 누상에는 중앙 3칸에 우물마루를 깔아 대청을 꾸몄는데, 전면에는 각 칸마다 문얼굴을 낸 후 판벽을 설치하였고 안마당쪽은 개방시켰다. 전면의 문틀은 온연귀하였으며, 문은 양개 울거미띠장널문을 달았다. 양 협간에는 통간 온돌방을 설치하였는데 대청쪽으로는 각 칸마다 양개 들어열개문을 달아 누상공간을 확장시킬 수 있게 하였다. 누상의 4면에는 계자각을 세워 헌함을 둘렀다. 주상에는 초익공을 내밀었으며 내단에는 보아지를 만들어 대량을 받치고 있다. 오량가로 대량 위에 운두가 낮은 각형 화반과 첨차를 직교 배치하여 종량을 얹었으며 제형판대공의 윗몸에 소로를 기워서 마룻대장여와 마룻대를 받게 하였다. 누상의 현판은 당대의 명필인 청풍자(淸風子) 정윤목(鄭允穆)의 글씨라 한다.

 

문중 이야기
- 함양박씨
박습(朴習)은 원렴(元廉)의 손자로 태종 때 전라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김제의 벽골제를 쌓아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으나, 세종 즉위년 병조판서로 ‘강상인(姜尙仁)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사되고, 그의 아들 박의손(朴義孫)은 자결하고 말았다. 이로부터 함양박씨는 한동안 쇠운을 맞이하는 듯하다 조선조 중기에 ‘향오린(鄕五鱗)’, ‘경팔립(京八立)’이 나와 활기를 되찾는다.

‘향오린’이란 함양군(咸陽君) 박전(朴琠)의 6대손 눌(訥)의 다섯 아들인 거린(巨鱗), 형린(亨鱗), 홍린(洪鱗), 붕린(鵬鱗), 종린(從鱗)을 말하고, ‘경팔립’은 박세영(朴世榮)의 세 아들 대립(對立), 사립(私立), 희립(希立)과 박세무(朴世茂)의 세 아들 소립(素立), 응립(應立), 성립(成立), 그리고 박세옹의 두 아들 정립(定立), 명립(名立)의 8종항간을 말한다. 이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문과에 급제하여 각각 현직에 있으면서 가문을 크게 빛냈다. 그중 박대립은 의손(義孫)의 현손으로 선조조에 부제학, 대사헌, 형조, 호조, 이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을 지냈다. 그리고 대립의 아버지 박세영은 중종 때 돈령부도정으로 글씨를 잘 썼고, 세영의 아우 박세무는 군자감정을 지냈으며, 초학자가 읽는 『동몽선습(童夢先習)』을 편찬했다.


관련이야기
- 감로루
감로루(感露樓)는 용문면 원류리에 있다. 용문면은 예천군의 1읍 11면 중 하나로 군의 서북쪽에 위치한다. 이곳은 본래 예천군 북삼면이었는데, 북삼면은 ‘맛질’의 옛 이름인 ‘저곡’에서 이름을 딴 저곡면(藷谷面), 저고면(藷古面), 유리면(流里面)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합 때 ‘용문사’의 이름을 따서 ‘용문면’이라 하였다. 용문면의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는 감천면과 예천읍, 서쪽으로는 유천면과 문경군 동로면, 남쪽으로는 예천읍과 유천면, 북쪽으로는 하리면과 상리면에 접한다. 원류리는 용문면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3km 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은 원래 예천군 유리면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신원리’와 ‘본류동’의 이름을 따서 원류리라 하고, 예천군 용문면에 편입되었다. 원류리는 ‘새터’, ‘팔적’, ‘허리골’, ‘문촌’, ‘신원’ 등의 자연 촌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감로루가 위치한 곳은 ‘허리골’이다. 허리골은 ‘희리(希夷, 希里)’ 또는 ‘유리(流里)’라고도 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정감록』의 ‘십승지지’가 바로 이곳이라고 주장한다. 한길에서 안 보이는 마을이므로 피란처로 알맞다. 조선시대에 이 마을 이름을 따서 ‘유리동면(流里洞面)’이 되었고, 마을 뒤에 방아 살개처럼 생긴 형제봉이 있으며, 그 봉의 낮은 목의 지형이 허리처럼 생겨서 ‘허리골’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감로루(感露樓)는 1600년대에 건립한 박종린(朴從鱗)의 묘하 재사(墓下齋舍)이다. 전면에는 2층 누각형(樓閣形) 건물인 감로루가 남향하여 자리 잡고 있으며, 뒤쪽에는 문간채와 외양간채, 희이당(希夷堂)이 감로루와 더불어 ‘튼 ㅁ’자형의 배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감로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다. 누하층(樓下層)에는 어간에 대문을 내어 재실로 통하게 하였으며, 좌우에는 마구간과 함실아궁이를 설치하였다. 누하층은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이며, 가구는 오량가의 초익공 집이다.

관련인물
- 박종린
박종린(朴從鱗)은 용문면 상금곡리 사람으로, 자는 자룡(子龍), 본관은 함양이다. 박눌(朴訥)의 다섯째 아들로, 금당실 사람 문숙손(文叔孫)의 사위이다. 1516년(중종 11)에 진사가 되고, 1532년(중종 27)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 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예문관 검열로 옮기고, 승정원 주서에 기용되었다. 그리고 홍문관에 들어가 정자, 박사(1534년), 수찬(1535년)으로 승진을 거듭하였다. 그 후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을 거쳐 다시 홍문관에 들어가 교리(1536년)로 세자시 강원사서 및 문학을 겸직하면서 세자에게 글을 가르쳤다. 또 사간원헌납을 거쳐 이조정랑에까지 벼슬이 이르는 동안 경연의 시독관(1536년)을 겸직하여 중종 임금의 정치 자문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권세가 김안로의 횡포가 심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용문면 상금곡리에 숨어서 정신 수양과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면서 후진 양성에 여생을 보냈다. 무덤은 용문면 원류리 희이동(希夷洞) 형제봉 아래에 있고, 상금곡리의 추원사(追遠祠)와 영사정(永思亭)에 제향되었다. 박종린은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거린(巨鱗), 형린(亨鱗), 홍린(洪鱗), 붕린(鵬鱗), 그리고 종린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기 때문에 아버지가 병조참판에 추증(1533년)되기도 하였다. 박종린은 경연의 시독관으로서 중종 임금께 사림파의 입장을 건의하여 허락을 받아 낼 만큼 임금의 사랑을 받았다.

1537년(중종 32) 1월 21일에 박종린이 임금께 아뢰기를, “궁궐의 일이 밖으로 흘러나가는 사례가 많은데, 이는 궁궐의 규율이 엄하지 않은 소치라고 생각합니다. 또 제가 듣기로는 이달 15일에 어떤 사람이 개성의 어느 절에서 큰 불교 행사를 하였다는데, 이도 단속이 해이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또 사대부 집에서 무당이 거리낌 없이 성행하니, 이런 일들은 엄하게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고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아뢴 말이 지극히 마땅하다”고 하였다.

예천 > 용문권 > 원류리
- 원류리.
원류리는 용문면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3㎞ 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은 원래 예천군 유리면(流里面)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신원리’와 ‘본류동’의 이름을 따서 원류리라 하고 예천군 용문면에 편입되었다. 원류리는 ‘새터’, ‘팔적’, ‘허리골’, ‘문촌’, ‘신원’ 등의 자연촌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감로루가 위치한 곳은 ‘허리골’이다.

허리골은 ‘희리(希夷ㆍ希里)’ 또는 ‘유리(流里)’라고도 불린다. 이 마을 사람들은 정감록의 ‘십승지지(十勝之地)’가 바로 여기라고 주장한다. 한길에서 안보이는 마을이므로 피란처로 알맞다. 조선 시대에 이 마을 이름을 따서 ‘유리동면(流里洞面)’이 되었고, 마을 뒤에 방아 살개처럼 생긴 형제봉이 있고, 그 봉의 낮은 목의 지형이 허리처럼 생겨서 ‘허릿골’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새터는 ‘신기(新基)’ 또는 ‘초간정(草澗亭)’이라고도 불린다. 원류동(院流洞)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을로 100여 년 전 새원[신원(新院)]에 살던 사람들이 옮겨와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앞 냇가에 초간정(草澗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이 마을을 그냥 ‘초간정’이라고도 한다.

팔적(八積ㆍ八賊)은 ‘팔찌기’라고도 불린다. ‘문촌’의 동쪽에 여덟 사람의 부자가 살고 있어 여덟 노적가리가 있었으므로 ‘팔적’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또 도둑골에 8명의 도둑이 있었다하여 ‘팔적’이라 부른다고도 한다.

문촌(文村)은 현재 큰 길가가 되는 ‘허릿골’ 남쪽에 위치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350여 년 전에 문씨(文氏)가 개척하여 문씨의 마을이란 뜻으로 ‘문촌’이라고 하나, 지금은 모두 떠나고 각성촌(各姓村)이 되었다.

신원(新院)은 ‘새원’이라고도 불리는데, 조선 때 원(院)이 있던 마을이다. 명나라의 지시로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임진왜란 때 종군했다가 명행상(名幸相) 약포(藥圃) 정탁(鄭琢)의 구함을 받아 귀화한 두사충이 구명의 보은은 대감에게 명당(明堂)을 여럿 잡아주는 것이라 하여 부근 산천을 돌다가 이 곳 원(院)에서 쉬면서 새원[신원(新院)]이라 하면 더욱 좋겠다고 지어 준 이름이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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