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니(59)-General manager의 힘(1)
하네다 공항에서 열 네 시간을 날라가며 과연 이 일을 성공시킬 수 있을까 걱정도 하면서 인사말이라도 외우자는 뜻으로 일본판 프랑스 포켓 회화책을 보다가 잠도 자다가 하면서 이튿날 새벽 파리 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려 복도를 지나면서 Baggage claim(수하물 찾는 장소) 표지판을 찾았지만 전부 불어로 되어있고 영어는 한자도 없었다. 갑자기 문맹이 된 기분이었다. 무조건 같은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을 따라 가다가 원형 돔으로 만들어진 드골 공항의 아취형 에스컬레이터를 타면서 좀 불안해서 나이 좀 드신 숙녀님께 ‘유럽이 처음이라며 이 길이 베게이지 클레임으로 가는 길이냐’고 물었다. 숙녀와 함께 걷던 중년 신사가 ‘그렇다(Sure)’라고 답하며 바로 ‘어디서 왔느냐(Where are you from?)’고 물어 'Korea'라고 대답했더니 북한이나 남한이냐(North or South?)고 다시 물었다. 우리는 Korea라면 대한민국인데 이들은 엄연히 구별하고 있었다. 남한이라고 답을 드렸더니 자기들을 따라오라고 해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수하물을 찾아서 공항 출구에 나왔지만 공항에서 픽업을 하기로 되어있는 ‘Mr. AHN/Korea’라는 피켓을 들고 있는 이는 보이질 않았다. 출구를 중심으로 좌로 우로 서너 번 찾았지만 없었다. 혹시 몰라서 종이에 내 이름을 써서 들고 다니며 찾았지만 역시 아무도 돌아보는 이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도착객이 다 빠져나가고 공항직원들만 남은 것 같았다. 맥이 풀렸다. 갑자기 드골 공항에서 나 혼자 버려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비서실에서 유럽인들은 일본인들처럼 픽업을 안 나올 수도 있으니 그때는 전화를 하라는 생각이 나서 우선 은행에서 환전을 해서 몇 번이나 물어가며 공중전화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자 한국에서 온 누구라며 누구가 픽업해 주기로 했는데 만나지를 못했다고 했더니 자기라면서 혹시나 해서 사무실에서 기다린다며 ‘공장 전체가 휴업이라고 오지말라고 답신을 보냈는데 왜 왔느냐’ 는 것이다. 아마 출발후에 통신문이 도착했는지 모르지만 지금 드골 공황에 있으니 픽업을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택시를 타고 세심(Cesim, 프랑스 기계 제조 업체)본사로 와서 전화를 하라는 것이다.’
공항에서 얼마나 걸리냐 고 물었더니 한시간 넘을 거라고 해서 택시비가 걱정스러워 ‘택시비가 대략 얼마냐 나오느냐고 되물었다.’ ‘약 400프랑(당시 환율로200$)’이라고 했다. 당시 포철 부장 출장비가 숙소까지 포함해서 하루160$인데 너무 큰 거금이었다. 솔직히 사정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유럽이 처음이라 동서남북도 모르고 가난한 나라라 택시도 탈 수 없으니 픽업을 해주던지 일본처럼 택시를 보내 달라고 거듭 사정을 했다. 픽업하러 가려면 1시간 이상 기다려야 한다며 기다리겠느냐고 물어왔다. 구세주를 만난 듯 기다리겠다고 답을 했더니 게이트 No를 가르쳐 주며 기다리라 했다.
공항 로비 의자에 여행가방을 들고 앉으니 긴장이 풀려서 인지 대변이 마려웠다 화장실을 찾아갔지만 표지판은 불어로 되어있고 그림도 없어 어느 쪽이 남자용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공항에는 왁자지껄하던 도착객이 다 빠져나가고 화장실을 출입하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입구에서 기다리다가 한 여자가 들어가는 걸 보고 반대측에 들어 가려는 데 일본에서 산 포켓북에 파리에는 쓰리꾼(소매치기)이 많다는 주의 문구가 생각나서 커다란 여행가방을 끌고 들어가 볼일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럭저럭 도착 후 3시간이 지나 한 분이 ‘Mr. AHN’표지를 들고 게이트 앞으로 와서 반갑게 천년 지기를 만난 듯 손을 흔들었다. 서로 악수를 하며 명함을 주고받았다.
그는 Sales manager였다. 한참동안 내 명함을 들여다보더니 ‘Are you General manager?’하며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답했더니 왠지 모르게 그때부터 태도가 순해졌다. 당시 포항제철은 부장 영어 표기를 ‘General manager( GM)’라고 했다.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유럽에서 GM은 회사를 경영하는 최고 책임자라는 것이다.
그를 따라 파리로 들어가는 길은 교통정체가 심해서인지 생각보다 먼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파리로 가면서 계속 어딘 가에 전화를 했다. 불어는 알아듣지 못하지만 GM소리를 하는 걸 보아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래저래 긴장한 탓인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는데 그가 깨워서 눈을 떠 보니 그의 사무실 앞이었다.
사무실 앞에는 그의 상사인 시니어 메니저 (Senior manager)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정중히 마중 나가지 못해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다. 그러며 이미 오후 3시가 지나 식당들이 Breaktime(휴식시간)이라 식사가 불가능하니 토스트와 커피 한잔으로 점심을 하고 저녁은 자기들과 하고 파리에서 하루자고 내일 쥬몽(Jeumont)공장으로 가자고 했다. 비행기에 내려 아무것도 먹지를 않아 배도 고팠지만 하루가 급해 바로 가자고 했더니 공장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는 것이다. 그럼 차 중에서 토스트를 먹을 터이니 바로 가자고 했다. 자기들끼리 한동안 전화연락을 하더니 세일스 메니즈가 사온 토스트와 캔커피를 들고 시니어 매니저와 함께 어디론 지 서너 시간을 달려 모터(전동기) 제작 메이카인 쥬몽 슈나이더(Jeumount Schneider, 프랑스 전력기기 생산업체) 공장에 으스름해서 도착했다.
공장장(Plant manager)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들 말 대로 공장은 소음하나 없는 빈집처럼 휴지 중이라 경비만 서 있을 뿐 외곽 조명등만 외롭게 켜 있고 공장 건물 내부는 희미한 보안등 불빛만 유리창으로 비치어 쥐 죽은 듯 조용해서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프랑스인들은 여름 휴가철에는 공장전체를 휴지하면서 휴가를 한꺼번에 즐긴다는 회장님 말씀 그대로였다. 하루 평균 10시간씩 일하는 우리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장장은 보시다시피 전공장을 샷 다운하고 한달동안 휴가 중이라고 설명했다. 저녁이 너무 늦어 함께 식사를 하고 그 다음 날 아침에 대책회의를 하기로 하고 정해준 호텔로 갔다. 시니어 메니저도 한 호텔에 숙박했다.
우선 뒤셀돌프 소장에게 현황을 이야기하고 대책을 구할까하고 전화를 드렸다. 당시 뒤셀돌프 소장은 공대 금속과 동기였다. 파리 드골 공항에서 픽업을 해 주지 않아 고생한 이야기를 했더니 그는 ‘야, 촌놈 먼 길을 잘 찾아왔다. 거기가 어디냐’ 고 물었다. 쥬몽 슈나이더 공장이 있는 곳이라고 했더니 프랑스의 변방 벨지움(Belgium) 국경지대라고 설명했다.
지금 같으면 스마트 폰 하나로 어디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만 당시는 프랑스의 어느 구석에 있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그는 또 개들이 네 명함 보고 놀라지 않던 했다. GM이냐고 묻더니 좀 누그러지더라 고 했더니 ‘그럴 거야, 유럽은 GM이 회사의 최고 경영자거던, 장사를 하려면 잘 대해야 하기 때문이야 절대 부장(Senior manager)라는 말은 하지 말고 GM행세를 해야 일이 풀린다’며 서양사람들을 상대하는 방법도 몇 가지 알려주었다.
혹시 서양인들의 집을 방문할 때는 꽃을 한다발이 아니고 장미꽃 한송이를 들고 반드시 현관에 들어서서 자리에 앉기 전에 부인께 선물과 함께 전하면서 말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돌이라 남을 설득하는 재주도 없고 언변이 좋은 것도 아닌데 게다가 영어까지 서툴러 걱정이 태산 같았다.
하지만 떠날 때 회장님이 ‘안 부장, 3기(260만톤에서550만톤 생산체제로 증산) 준공은 늦출 수 없다, 회사의 운명이 달렸다’ 는 소리만 메아리처서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약속대로 7시에 호텔 식당에서 시니어 메니저와 만나 햄과 베이컨, 토스트 한조각으로 서양에서 처음 하는 조식이라 양이 너무 적어 견딜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조금 후 공장장이 와서 함께 커피를 마시며 자기들끼리 무어라고 계속 말을 하더니 우선 공장을 먼저 보고 생각해보자고 해서 일어서는데 파리에서 함께 온 세심의 시니어 매니저는 손을 내밀며 잘되기를 바란다며 돌아간다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포스코의 원 계약자는 세심이니 남아달라고 부탁을 드렸지만 공장장이 최선을 다 할 것이라며 파리업무 때문에 돌아가야 한다며 떠나버렸다. 세사람이 그냥 모닝 커피 한잔 마시는 커피브레이크 타임으로 알았는데 어제 말한 회의가 이거였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회의실에서 회의하고 회의록에 서로 서명을 하는 일본문화와는 너무도 달랐다. 이제 죽으나 사나 공장장에게 매 달릴 수밖에 없었다.
공장은 예상대로 텅 비어 있었다. 어떤 제품은 제작하다가 그대로 기계에 물린 채 멈추어 있는 것도 있었다. 프랑스는 6-7월이 되면 모든 공장들이 샷 다운하고 전원이 휴가를 떠나서 이렇다는 것이다. 일을 하려고 해도 작업원이 없다는 것이다. 작업원을 구해도 자재창고의 자재원이 있어야 재료를 끌어낼 수 있는데 자재원도 없다는 것이다.
밤새 휴가를 떠나지 않은 마이스터(Meister, 전문 작업팀장, 일본에서는 작업장)를 찾아 포스코의 상황을 이야기했지만 그들도 곧 휴가를 남 프랑스 지중해안으로 떠난다고 해서 수리후에 떠나 달라고 했지만 확답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공장장이 직원에게 작업명령을 내리는 게 아니고 작업을 부탁한다는 게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작업원을 설득해 보겠다는 공장장의 이야기만 듣고 만 있다가는 그마저 놓치면 내가 프랑스까지 날라온 의미도 없고 포철의 3기 종합준공은 언제 될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래서 공장장에게 같이 가서 내가 직접 설득해 보겠다고 제의했더니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라며 함께 꽃가게에서 장미 한송이를 사 들고 찾아갔다.
작은 마을이라 마이스터 집은 걸어서 잠깐이었다. 공장장이 현관 벨을 누르자 부인인 듯한 여인은 프랑스어로 공장장과 인사를 하더니 거실까지 안내했 해 주었다. 덩치가 크다란 마이스터는 키가 자그마한 동양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나도 거실에 앉기 전에 동양식으로 고개를 숙이며 밤새 외운 불어로 본쥬르(Bonjour, Good morning)라고 인사를 하며 매덤(Madam, 이하 부인)에게 장미꽃과 함께 포항제철 체어맨(Chairman, 회장)이 주는 선물이라며 연수정 목걸이 상자를 전하고 마이스터에게는 내 명함을 드렸다. 그도 내 명함을 보더니 움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부인은 선물상자를 열어보더니 아주 좋아하는 표정으로 크다란 물방울 연수정 목걸이를 걸면서 감사하다고 했다. 서양여인들은 자수정 못지않게 연수정을 좋아한다는 회장님 말씀 그대로였다. 첫 관문은 통과한 듯했다.
공장장이 불어로 포철에 납품한 모터가 하역 중에 낙하되어 손상을 입어서 8월말까지 다시 납입해야 해서 포철에서 GM이 오셨다며 나를 소개하고는 휴가중이지만 작업을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나에게는 영어로 간간히 설명을 해 주었지만 그 영어조차 서툴어 답답하기만 했다. 마이스터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묵묵히 듣기만 했다.
이제는 내가 사정할 때였다. 무조건 우리식으로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포스코(POSCO, 포항종합제철 영문명칭)를 도와 달라고 했다. 제철 프로세스는 제선-제강-분괴-압연으로 제품 화되는데 이 모터가 늦어 분괴공장이 가동되지 않으면 제철소 전체가 가동이 되지 않는다고 사정하고 또 사정했다. 공장장도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서 GM이 직접 오셨다며 부하직원인 마이스터에게 부연해서 설명했다.
그 사이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가 작업원을 좀 찾아보겠다고 입을 열었다. 그만큼 진전은 되었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어 답답했지만 그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공장장은 내일은 자기 사무실에서 만나자며 직원을 보내겠다고 했다.
늦은 점심 겸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와 침대에 누우니 피로가 잦아들어 눈은 아팠지만 정신은 더 뚜렷해졌다. 그대로 눈을 감고 피로를 풀 수가 없었다. 한국 같으면 명단을 받아서 집집마다 휴가를 떠나지 않은 작업원을 찾아 나서겠지만 여기는 프랑스 변방의 시골 마을이라 가슴만 조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