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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이제는 더 이상 내려가지 말아야 합니다/룻 1:1-5
1.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유하더니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거기 거한지 십년 즈음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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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고일성목사
시인 노천명은 인간과 고향의 끊을 수 없는 관계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가리
마지막엔 돌아가리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조밥이 맛있는 내 본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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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 가리
나중엔 고향에 가 살다 죽으리
메밀꽃이 하-얗게 피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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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고향을 그리는 마음처럼 고향은 우리들의 삶과 죽음을 포용하는 곳이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곳입니다.
고향은 마치 어머니와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야곱의 유언에서 우리는 고얄을 그리워하는 인간의 공통된 심정을 찾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죽을 때에 아들들에게 자신의 시신을 고향산천에 묻어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습니다(창49:29-31).
모든 사람에게는 고향이 있습니다. 싫든지 좋든지 누구에게나 고향이 있습니다. 때로는 기억하고 싶지 않는 일들도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고향은 언제나 우리에게 쉼을 주며 향수를 느끼게 합니다.
어느 심리학자는 고향을 어머니의 마음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고향은 어머니의 가슴처럼 아늑하고 포근한 감정을 불러 일으킵니다. “물고기도 저 놀던 물이 더 좋다”는 속담처럼 고향을 그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은 말에 불과합니다.
정들면 고향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내가 태어난 곳, 부모가 있고 형제자매가 있는 곳, 어릴 때 같이 놀던 친구들이 있는 그곳 고향만큼은 하겠습니까?.
‘소소이향노대회 향음무개빈모 아동상견불상식 소문객종하처래’(少小離鄕老大回 鄕音無改貧毛 兒童相見不相識 笑問客從何處來)- (賀智章/回鄕偶書)
“젊어서 떠난 고향 늙어 돌아오니/고향 사투리는 그대로인데 머리카락만 빠졌구나/애들은 나를 알턱이 없어/웃으며 어디서 오는 나그네냐 묻는다”
‘G, 워싱톤’은 “나를 고향으로 데려가줘, 나는 남부에서 나고, 남부에서 살고, 남부에서 일했다, 나는 남부에서 죽고 싶으며, 거기에 매장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사전에 보면 고향이란“자기가 태어나 자란 고장”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부모님의 고향이 자기 고향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자란 곳을 고향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는 고향이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태어가기가 무섭게 부모님을 따라 이사를 다니다 보니 아무데도 고향이라고 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고향이 없습니까? 사람은 누구에게나 고향은 있습니다.
지금은 객지에 힘들게 살아도 부모님 슬하에서 세상 물정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뒤어다니면서 자라난 고향은 그립고 마음 끄는 그런 곳입니다. 성년이 되고 반백이 되어 옛 고향의 추억을 돌아본다는 것은 여간 흐믓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세상이 많이 변하여 오솔길이 포장된 마을 길로 바뀌고, 동무들과 어룰려 오르던 산등성이에 거대한 아파트가 자리 잡고 있어도, 시냇가에 앉아 물장구치던 냇가가 세월따라 복개천으로 변해도 그래도 고향은 언제나 그리운 곳이며 내 마음이 있는 곳입니다.
이 시간 정든 고향을 떠났던 한 가정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베들레헴이란 동네에 조상대대로 살아온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있었습니다. 저들은 고향 산천을 떠나 낮설고 산설고 물설은 모압이라는 곳에 가서 살게 됩니다.
조상의 뼈가 묻혀 있고, 가족과 친구들이 있고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터전인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살기 위해서 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고향을 떠난다고 할지라도, 뼈를 깎는 아픔과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본문의 주인공들은 어려운 일이지만 정든 고향을 떠나 모압으로 갔습니다. 왜냐하면 살기 위해서 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당시에“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1절)는 말씀은 있습니다. 살기가 힘든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굶어 죽을 정도의 어려움 때문에 모압으로 간 것은 아닙니다. 그 증거로.
첫째는-엘레멜렉의 가족이 모압으로 이사갈 때 빈손으로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많 은 재산이 있었습니다(21절).
둘째는-당시에 베들레헴에는 자기들만 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살고 있었지만 저들은 이사하지 않 았습니다. 베들레헴에 살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굶어 죽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고 향을 떠났습니다.
저들 부부가 가족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모압으로 이사를 갔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크나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베들레헴을 떠난 것은 그 가정의 신앙의 타락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은 어떤 곳입니까?
예루살렘의 남서쪽 성읍이며 ‘에브랏’혹은‘에브라라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창48:7). 그곳은 다윗왕이 태어난 곳이며 그의 고향입니다. 그곳에는 전능자의 성막이 있는 곳이며(시132:5-6). 메시야의 탄생지로 예언된 곳입니다(미5:2. 요7:42).
인류를 구원할 구주 예수님의 탄생지이며(마2:1). 그 땅은 계시된 것입니다(눅2:4.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위에 있는니라”(신11:12)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는 땅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웅장한 궁궐이 있는 수도요, 하나님께서 온 인류에게 오랫동안 자신을 나타내신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이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는 지금도 가장 오래된 교회 건물인 그리스도 탄생교회가 있는 곳입니다.
베들레헴이란 말은“떡집”“빵의 집”이라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즉 생명의 떡집이요. 은혜의 떡집이요. 말씀의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땅은 축복의 땅이요. 은혜의 땅입니다.
베들레헴의 영적인 의미는 교회를 말합니다. 또한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와같은 베들레헴을 떠난다는 것은 곧 신앙의 타락을 의미합니다.
교회를 떠나 세상과 야합함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축복의 뿌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혜의 보좌를 떠나 세속에 파묻혀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저들에게 더 큰 문제는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갔다는 사실입니다. 모압은 교만의 땅이며(사16:6-7). 멸망의 땅입니다(사15-16장). 모압은 롯의 자손입니다(창19:30-38). 우상숭배자들입니다.
그들은 선민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한 사람들입니다(민22:1.4). 대대로 이스라엘 민족을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모압은 선민의 백성인 저들이 갈 곳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성도들이 갈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그곳으로 갔습니다. 가서는 안될 것으로 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1. 왜 저들은 베들레헴을 떠났습니까?
저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온 자들인데, 왜 은혜의 떡집을 떠나 이방 땅 모압으로 갔습니까?.
저들이 고향을 버리고 모압으로 내려간 이유는?
1) 먹고 살기 위한 일에 더욱 칩착한 것 같습니다.
그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그런 일에 지나치게 염려한 것 같습니다.
엘레멜렉은 가족들의 신앙에 대하여 염려하기 보다는 우선 육신적인 문제에 대하여 우선 순위를 둔 것 같습니다.
저들은 한 그릇 팟죽 때문에 귀한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에서와 같이 먹는 것 때문에 신앙도 저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작은 것을 움켜쥐기 위하여 도리어 큰 것을 잃어버린 어리석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눈 앞의 것을 얻기 위하여 보이지 않는 영원 것, 소망을 포기한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조금만 지나면 없어져 버릴 땅의 것을 위하여 하늘의 귀한 기업을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모압과 같은 세상의 풍요로움에 속지 마십시요.
모압과 같은 세상 유혹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요.
이런 것들은 잎만 무성한 나무일 뿐 열매는 없습니다.
모압과 같은 세상적인 것은 잠시 잠깐일뿐 영원한 것은 되지 못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하늘 나라의 영원한 축복은 아닙니다. 밉습니까?
2) 베들헴의 흉년을 극복할 만한 신앙이 없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어떤 고난과 시련도 이길 수 있습니다. 저들이 믿음의 사람이었다면 흉년 때문에 베들레헴을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평소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면 생명의 양식이 있고, 은혜가 있으며, 말씀이 역사하는 베들렘을 포기하고 모압으로 내려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을 버리고 저주의 땅 모압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었더라도 어느정도의 불편 때문에 베들레헴을 등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혹시 우리에게 지워진 십자가가 우리의 가는 길을 가로 막는다고 하여 그것을 피하려는 성도가 있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장소를 바꾼다고, 피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세움받은 자리에서 충성하는 것이
믿음이요, 어떤 일이라도 감당하겠습니다 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굳센 믿음으로 모든 시련을 이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은 포기가 아닙니다. 신앙은 위축 되어도 안됩니다.
신앙은 좌절해서도 안됩니다. 신앙은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믿고 행하면 안되는 것도 된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3) 엘리멜렉은 은연중 세상을 하나님 보다 더 사랑했습 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도 모르게 그들의 마음은 애굽에 연연하여 기회만 있으면 되돌아 가려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화려한 소돔성의 미련을 과감하게 뿌리치지 못했던 롯과 같습니다. 바울과 함께 동행했던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딤후4:10)는 말씀과 같이 그는 애굽을 향하여 언제나 그 마음이 열려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 요한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요일2:15). 왜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될까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는-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며
둘째는-이 세상의 것을 아무리 위하고, 애지중지 하면서 아껴도 후에 남는 것이 없기 때문이며.
셋째는-이 세상의 것은 주님 오실 때 불타 없어질 것이 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것은 잠시 우리에게 필요할 수는 있어도 영원히 사랑할 것은 못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사는 사람들 가운데는 어리석게도 영원하지 못한 세상것 때문에 귀한 신앙을 저버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4)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의 땅의 진정한 가치 를 알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엘리멜렉이 약속의 땅의 가치와 귀중함을 알았더라면 그렇게도 어리석게 모압땅으로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약속의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임을 알았더라면 그렇게 쉽게 베들레헴을 등지고 모압으로 갔을리가 없습니다.
2.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에서 살던 저들의 생활이 과연 어떠했습니까?
그들이 모압에 가서 깨가 쏟아지도록 잘 살았습니까?
약속의 땅을 버리고 모압 땅에와서 살면서 성공을 거두었습니까?. 그가 선택한 결과는 과연 어떻게 되었습니까?.
불행하게도 그들은 행복을 꿈구며 모압에 갔으나 쓴잔만 마시고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베들레헴을 등지고 모압에서 살았던 저들에게 찾아온 불행이 무엇입니까?
(1) 엘레멜렉의 죽음입니다
그는 흉년이 든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에 가면 잘 먹고 잘 살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의 희망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거기서 몇 년을 살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낭패입니까? 세상에 이런 일이 자기에게 있으리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꿈도 꾸지 않았을 일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아 보겠다고 찾아간 그곳에서 죽다니--- 그는 한이 되어 죽은 뒤에도 눈을 감고 죽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불행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야고보는 말합니다“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닐”(약5:14). 내일은 내것이 아닙니다. 생명도 내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뜻대로 사는 삶은 후회가 되지만, 힘들고 어려워도 고난이 있어도, 환난이 나를 힘들게 하여도 주님 뜻대로 살기만 하면 결코 후회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베들레헴에서 죽어야 합니다, 천하게 모압에 가서 죽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들고 어렵더라도 옥포교회에 뿌리를 두고 여기서 살아야지 한눈을 팔거나 다른 소리에 이끌려 가다가는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을 향하여 가는 날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좌절입니다. 절망입니다. 패망입니다. 그러므로 죽더라도 하나님의 집에서 죽읍시다.
(2) 두 아들들의 불신 결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백성들에게 이방 혼인을 금하고 있습니다. 노아 때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샀던 일이 있습니다(창6:6)
모세도 이방 사람과의 결혼을 금했습니다(신7:3-4).
야곱의 아들들은 할례받지 않은 자들과의 결혼은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창34:14-15). 여호수아는 이방 혼인은 하나님의 화를 자초하는 어리석은 일이므로 금하라고 했습니다(수23:12-13). 이방 사람과의 혼인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닙니다.
그런데 엘리멜렉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이방인 여인을 며느리로 맞았습니다. 그 일이 저들에게 불행의 단초가 된 것입니다. 저들의 잘못은?
1) 고향에 돌아가서 결혼하기까지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2) 고향에서가서 아내를 구하여 데리고 올수도 있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3) 이방 여인이라도 개종시켜서 결혼을 했더라면 되었을 터인데 결혼부터 시켰습니다.
이렇게 엘리멜렉은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에 감으로 인하여 결국 불신 결혼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3) 사랑하는 두 아들의 죽음입니다.
본문5절에 보면“거기 거한지 10년 즈음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피참한 일입니까? 천청벽력과 같은 일입니다.
꿈에라도 있어서는 안될 일이 저들에게 닥친 것입니다.
남편이 죽은것도 한이 되어 한숨으로 남아 있는데, 그 모든 일들이 채 가시기도 전에 유일한 희망이었던 결혼한 두 아들이 또 죽었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로마서6장23절에“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저들에게 이와같은 불행이 닥친 것은 결국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죄는 불행의 원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죽음의 화살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이 땅에는 없습니다.
죽음 앞에는 빈부귀천, 남녀노소의 차별이 없습니다.
갓 결혼했다고 면제되거나 연기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죽어 어머니니를 돌아볼 사람이 없으니 자녀들이 어머니를 지켜드려야 한다고 해서 자녀들은 죽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렇게도 하늘 같이 믿었던 남편도 북망산천으로 떠났습니다. 실날같은 희망을 가지고 자신을 지켜주리라 믿었던 두 아들마저 그의 곁을 따나고 말았습니다.
풍파많은 이 세상에 홀어머니를 뒤에 두고, 젊디젊은 두 아내를 남겨두고 무심하게도 두 아들은 어머니 곁과 아내의 곁을 흘쩍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의 행복은 기약도 없고 혹시 약속을 했더라도 믿을 수 없는 것이 인생의 약속입니다.
후회막급이란 말이 있듯이 이럴줄 알았더라면 모압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배고프게 살망정 베들레헴에 그냥 눌러앉아 살았을 것입니다. 가난하게 살망정 언약의 땅을 등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엎지러진 물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내일의 일을 알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는 모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지혜로운자 되어 후회스런 일을 하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입니다.
조금 힘들다고, 세상이 좋게 보인다고 의리도 저비리고 약속도 저버리면서까지 조금참지 못하고 등을 돌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미련은 먼저 나고 지혜는 나중 난다”고 했습니다. 지혜로운 자가 되십시요.
3.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는 신령한 교훈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이의 귀한 가르침은 소홀히 해서도 안되고, 쉽게 잊어버려서도 안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신령한 가르침의 내용은 어떤 일이 있다라도 힘들고 어렵더라도, 답답하게 괴롭더라도 절대로 내려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집을 두고 죄악이 관영한 모압으로 내려가느냐는 것입니다. 내려가면 죽습니다. 베들레헴인 교회를 등져서는 안됩니다. 언약을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신앙을 저버려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교회를 등져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베들레헴은 단순히 밥먹고 살기 위한 그런 땅이 아닙니다. 그 땅은 언약의 땅이요. 하나님이 권고하시는 땅이요, 믿음의 조상들이 살다가 묻힌 땅이요, 그곳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거룩한 땅이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곳입니다. 그곳은 영원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 곳입니다.
그러나 모압은 저주의 땅이요. 우상의 땅입니다.
겉 보기에는 화려하게 보이지만 속은 썪어 냄새가 나고 있는 땅입니다. 신앙을 잃어버러기에 적당한 땅입니다.
조금 힘들고 어렵더라도 참아야 합니다.
잠시 편하게 살기 위해 모압을 선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맙시다. 삼손이 실패한 이유는 그가 이방 땅 딤나로 내려갔기 때문입니다.
내려가지 맙시다. 내려가면 죽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내려가던 나그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한 발자국도 내려가지 맙시다. 우리에게 물려준 이 귀한 신앙의 전통을 굳게 잡읍시다. 신앙 때문에 생명도 버린 그 장한 믿음의 선배들을 보면서 지금 힘들고 어렵다고 신앙을 버리지 말고 사명을 힘차게 붙잡고 나아갑시다.
세상 살기가 힘들고 고달파도 내려가지 맙시다.
혈압도 너무 내려가면 죽습니다. 물론 혈압은 너무 올라가면 큰일이 납니다. 그러나 신앙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좋습니다. 독수라 같이 올라가는 신앙이 되기시를 바랍니다.
내려가면 망합니다. 내려가면 죽습니다. 내려가면 당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게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에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하였습니다(골3:1-2).
한 주간도 땅에 것만 찾다가 실패하고 쓴잔만 마시지 말고 힘들고 어렵더라도 위엣 것을 찾다가 풍성한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