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요일
성동구청 신우회 예배 설교
시리즈 주제: 하나님의 경륜 6
제목: 그리스도인의 관용과 포용
https://youtu.be/mVYyDa3eLmM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빌립보서 2:13~14
설교를 위한 묵상
예수님은 서로 너그럽게 용서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래야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6:15, 18:35).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순종하셨듯이 서로에게 인자하게 대하고 존중하며 서로의 짐을 지라고 권면했다(빌 2:4). 그 이유는 우리 안에서 그런 마음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 중에 하나는 그 삶이 옳기에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 것이라고 성도들을 일깨워준다.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으로부터 나온다. 신전의식이라고 부르는 이 개념은 라틴어로 코람데오(CORAM DEO)라고 표현된다. 그런데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으로 표현된다. 아담 부부가 살았던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걸으셨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묘사를 보면 마침내 하나님이 인간들 가운데 거하신다고 되어 있다(계 21:3). 코람데오는 성경이 그려주는 인간의 이상적인 생활이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는 것일까?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며 사는 삶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 기쁨과 자유를 누리는 삶이 있다. 시편 16편 11절에는 하나님 앞에 기쁨이 충만하고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좀 거리가 있는 것 같다. 우리들은 조상 대대로 하나님 같은 신 앞에서는 좀 조심하고 경건하며 엄숙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런 엄숙주의가 신앙과 종교에 있어서 동양적인 특징이다. 아마 오랜 세월 동안 유교의 영향권 아래서 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무녀의 춤사위는 이런 것에서 벗어난 듯하다.
우리의 언어에 있는 ‘신명난다’ 또는 ‘신난다’ 등과 같은 표현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실 때 우리가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그려주는 표현이다. 신난다는 말은 우리 속에서 신령한 기운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어떤 기쁨이나 염원 또는 확신 같은 것이 솟아나 나를 완전히 삼킬 것 같아서 나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상태다. 그것은 모든 억압과 염려가 사라진 상태이며 그것은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 것 같은 체험이며 동시에 그것은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경험이다.
우리는 개인의 기도 시간이나 예배 시간에 성령의 감동을 받고 깊은 깨달음을 얻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희열을 느낀다. 은혜 받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체험이 성령충만이나 그리스도와 하나됨 또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경험, 또는 하나님을 만남 등의 용어로 표현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인으로서 우리가 느끼는 신에 대한 체험은 개인적인 경험에 머무르지 않고 반드시 공동체의 경험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신명나게 놀아보자는 말을 한다. 그것은 다같이 한 마음으로 뛰고 춤추며 노는 모습을 그려주는 말이다.
나에게 넘쳐나는 이 기운과 즐거움이 신명이며 신나는 것이며 성령충만이라고 할 때, 그것은 내 안에서 지금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 신명이 나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고 즉각적으로 나의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감동을 주고 그들을 붙들어 함께 기뻐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유무상통하고 대동단결하며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왔다. 하나의 신이 우리를 하나로 엮어 주고 다양하고 많은 개인들을 ‘우리’로 느낄 수 있게 했고 우리로 만들었다.
신명난 삶 가운데 만들어진 우리는 모든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포용력을 갖지만 신명이 아니라 인위적 요소에 의해 만들어진 우리는 즉각적으로 배타성을 띠게 된다. 그래서 지역에 기반을 둔 우리 의식은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로 남을 상정하면서 우리의 울타리를 세운다. 그것은 신명이 아니라 퇴폐적이고 자폐적인 즐거움이다. 그것은 반드시 피해자를 만들며 나중에는 희생양을 만들고 종국에는 우리가 뭉쳐 남을 공격하는 싸움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에도 이런 병폐가 나타날 수 있다. 예수님이 오셔서 주로 하신 일을 보면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신 일이다. 오죽하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먹기를 탐하는 자라고 말했을까(마 11:19, 눅 7:34)! 그런데 예수님의 삶 그 자체에 신명이 있다. 즐거움이 있다. 그것이 진짜 경건이며 신앙이 아닐까? 엄숙주의의 두꺼운 옷을 입은 사람들 속에는 살의와 혐오, 그리고 배제가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오늘의 기독교회는 어떨까? 기독교회의 신앙이 천상을 지향하는 것에 치우친다면, 땅에 발을 딛고 더불어 신명나게 살아가는 세상을 구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천상으로 들어가는 길이 오직 하나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상과 현세에서 우리가 사람들과 누리는 삶에 최고의 가치를 두기보다는 예수를 통하여 천상에 들어가서 누리는 삶에 최고의 가치를 둔다. 현재 기독교인들에게 일반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구원론은 이미 배제와 차별을 내재하고 있다. 이것은 구약성경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매우 왜곡된 형태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신우회는 어떤가? 신우회에서 우리는 구청에서 받은 직함으로 서로를 부른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정에서 부자관계에서 아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그런데 어떤 부자관계는 왜곡되고 너무 멀다. 구청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우리들도 하나님의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신명나게 살아간다면 우리는 직함을 뛰어넘어 하나 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하나 된다는 말은 모든 차이가 없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런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반드시 노래방에 가고 술을 한잔 걸쳐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역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암송하는 구절인 시편 16편 8절에는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라는 고백이 나온다. 그리고 그 시의 마지막은 이렇게 종결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11절)’ 신명나는 삶은 하나님을 앞에 모시고 사는 삶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주님의 인도를 받아 그 앞에 있는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을 맛보기까지 주님을 모시고 따르면 우리는 신명나는 삶, 성령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 (로마서 14:17)
그렇게 사는 삶이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삶이며,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므로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할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미래를 상속할 것이므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이곳에 모인 이유는 바로 이런 삶을 연습하기 위함이 아닐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