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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께 역겹기만 피하자>의 줄거리: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이 구절에서 가증한 것이란 '하나님이 악취로 인해 역겨워서 구토를 일으키는 상태'를 뜻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기특한 질문은 사실 주제 넘는 것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나님께 역겹게 되는 것만은 피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역겹기만 피하자
(마태복음 24:15~28)
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20.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께 역겹기만 피하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께 역겹기만 피하자’
오늘 본문은 신약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이나 목사님들도 해석하기 쉽지 않은 내용입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과 성전의 멸망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언대로 AD.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깡그리 파괴됩니다. 이 사건은 이제는 20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일입니다. 다만 이 말씀에는 역사적으로 일어나게 될 사건과 인류의 종말에 대한 내용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말씀은 오늘날에도 적용할 수 있으며 예수님이 재림하실 종말에 관한 내용으로도 풀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혼재되어 있기에 해석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셨던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하셨던 것일까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예수님께서 초점으로 삼으신 내용을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시간을 따라 진행되는 역사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예언하시고자 하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초점은 인간 자체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을 중심에 놓고 말씀하시되 필요하다면 역사적으로 나타나게 될 사건도 언급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초점으로 삼으신 인간이란 성전과의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성전과 연관된 공통된 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멸망은 선민의 잘못된 결과로 인해 선포되었습니다. 이 선민의 잘못은 모든 인간에게서도 나타나는 속성이며 인류의 종말까지 이어지게 될 일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연관성을 배제한 채 예수님의 말씀을 역사적인 사건의 예언으로만 이해하려 한다면 해석에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께서는 파괴될 성전과 인간의 속성을 오버랩 시켜서 동일시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관점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이 말씀을 하신 시기가 바로 십자가 사건을 앞둔 때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이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전하신 마지막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마지막 말씀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크게 부각되어 나타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문의 말씀은 성전으로 대표되는 구약성경 전체의 내용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선민의 역사는 성전중심이었습니다. 성전에 대해 갖는 마음가짐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정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중심의 역사라고 해도 좋을 구약 전체의 이야기를 십자가 사건과 직접 연결시키십니다.
본문에서는 성전이 파괴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하나님께서 역겹게 여기시는 사람들의 모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파괴는 곧 목적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선민들에 의해 성전의 존재의미가 상실되었기에 성전은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전을 상실한 선민들의 마음 상태는 하나님이 역겹게 여기시는 인간의 상태와 일치합니다.
15~16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니엘 9장 27절, 11장 31절, 12장 11절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가증하다는 것은 “악취로 인해 구토를 일으키다”라는 뜻의 헬라어 브델뤼소마이(βδελύσσομαι)를 어원으로 합니다. 거룩한 곳에 악취가 나서 구토를 일으키는 것이 서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학자들 간에 이견이 분분합니다.
다만 여기서 많은 학자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15절 마지막 부분을 보면 괄호로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이 괄호로 되어있는 이유는 말씀을 기록하던 마태가 성령의 감동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해 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염두에 둔다면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만 말씀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해석이 불완전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역사적 사건을 연구하는 자들을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에는 읽는 모든 자들이 즉각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성전은 인간의 마음 상태를 형상화시킨 상징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만드실 때에 지성소와 성소를 만드셨듯이 마음의 구조를 형상화시켜서 만드신 것이 성전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서는 기쁨과 만족을 주리라 믿어지는 대상의 이름을 붙잡는 곳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으로 또 어떤 사람은 배우자가 그 대상이 됩니다. 자녀의 형통이나 연금 받아서 오래오래 잘 살 것이라고 믿는 것들이 모두 이러한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쁨과 만족을 주리라 믿어지는 대상의 이름을 붙잡는 곳이 마음의 지성소입니다. 한편 성전의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하는 법궤가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곧 마음의 지성소에 기쁨과 만족의 대상으로 반드시 하나님의 이름이 담겨야 함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성소에는 분향단과 떡상과 금촛대가 있습니다. 분향단은 추구함을 상징합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어떤 대상의 이름을 담게 되었으면 삶에서 실제로 추구하게 됩니다. 자녀의 형통을 마음에 담았다면 자녀가 형통하게 되기를 바라며 여러 가지 일들을 할 것입니다. 돈이라는 이름을 마음에 담았다면 돈을 많이 벌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분향단이 상징하는 구하고 두드리고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떡상은 배부름을 상징합니다. 하나님만으로 마음이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금촛대는 하나님을 더 먼저 보고 더 크게 보는 것을 상징합니다. 삶을 하나님의 빛 아래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전의 구조로부터 드러나는 마음의 구조이자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지셨던 기대입니다.
그러나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곧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 외에 다른 이름을 붙잡은 상태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돈이 나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리라 여겨서 마음에서 돈이라는 이름을 붙잡게 되었다면 돈이 멸망의 가증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돈이란 본래 마음에 담을 수가 없는 대상입니다. 담을 수 없는 것을 담았고 심지어 그것에 애착을 가짐으로써 하나님을 밀쳐내게 되었으니 하나님께서는 그 인격전체를 역겨워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가짐이 당시 유대사회에 만연해있던 것을 보시고 성전의 파괴와 연결 지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한편 21절을 보면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나타난 여러 환난 중에 대표적으로 노아 홍수를 생각해보면 이보다 큰 환란은 없을 것 같습니다. 노아 홍수가 일어난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그 원인이 성전의 파괴와 일치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것을 한탄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인간의 마음이 영이신 하나님이 들어가실 수 없는 고깃덩어리로 변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생각의 고깃덩어리, 감정의 고깃덩어리, 의지의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렸기에 물로 쓸어버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노아 홍수보다 더 큰 환난이 있으리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가 바로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대상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자녀의 형통을 붙잡은 부모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본래 자녀는 하나님이 만드시고 허락해주신 대상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녀를 역겨워하실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 대신 자녀를 붙잡게 된다면 자녀는 악취가 나고 구토를 일으키는 가증한 대상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또한 그 가증한 것을 붙잡고 있는 부모도 가증한 것이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이 가지시는 마음은 노아의 홍수보다도 더한 진노의 환난이 임하리라는 것입니다.
다만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그러한 환난은 주어진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마음상태를 얼마나 역겨워하시고 싫어하시는가를 강조하기 위해서 드러내신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어떤 젊은이가 한 여성과 결혼할 수만 있다면 행복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여성은 본래 하나님이 역겨워하실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그 여성을 붙잡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는 대상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 여성에게 환난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여성을 마음으로 붙잡게 된 사람에게 노아 홍수 때의 역겨움보다 더 큰 역겨움으로 진노하셔야만 직성이 풀리실 만큼 역겨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방실방실 웃는 아기를 볼 때마다 부부는 물론이고 온 가족이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마음의 기쁨과 만족이라는 하나님의 자리를 이 아기가 차지하게 될 때에 멸망의 가증한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는 저리가라 하실 정도로 가증스럽고 역겨워하시고 구토를 일으키시는 큰 진노를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염두에 두고 마태는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라는 말을 덧붙였던 것입니다.
이제 자신이 이런 상태에 처해 있음을 깨달았다면 환난을 피해야만 합니다. 16~18절을 보면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 /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다’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세상의 가치라는 이름을 담고 추구하게 되었다면 하나님의 역겨움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노아 홍수 때에 인간을 쓸어버리실 때보다 더 역겹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임을 깨달았다면 만사를 젖혀두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도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22절에서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노아의 홍수보다 더 큰 환난의 날들을 감하셨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 외에 다른 이름을 담았을 때에 하나님의 진노는 내려올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노아의 홍수보다 더한 환난과 진노는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그 진노가 내려온 곳은 내가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으셔서 처절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비참하게 죽으셔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벌거벗김의 수치를 당하시고 채찍을 맞아 살이 찢기시고 창에 찔리시고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는 바로 나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악질이고 원수가 미워도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죽이지는 않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비참한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와 역겨움이 얼마나 컸는지를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환난의 날들을 감하셨기에 지금 이 순간도 살아있는 것입니다. 무섭고도 감사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다는 말을 쉽게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고 하고 하나님께 충성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 능력도 없고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충성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역겨워하시지 않는 상태를 유지해나가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성전의 지성소와 같이 거룩하게 유지하는 것입니다.
거룩함이란 가장 좋은 방향으로 구분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곧 가장 좋으신 하나님의 이름만을 모셔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원죄의 성향이 있기에 자꾸만 세상의 가치들을 마음에 담게 되고 실제로 그것을 갖고자 추구하게 됩니다. 세상의 가치를 많이 얻으면 기쁘고 만족하리라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부터 환난을 피하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도망가야만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예수님께서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 마음을 드려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은 부활과 승천과 보좌우편에 앉으심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피로 깨끗해지고 역겨움이 제거된 나를 맞이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겨움을 피하고 역겨움을 유발시키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정리해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 외에 다른 대상의 이름을 담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를 기쁨과 만족의 채움 거리로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 때보다도 더 큰 역겨움으로 나를 바라보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으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22절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는 말씀의 의미였습니다. 이러한 역겨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지옥에 떨어져야 하지만 그 중에서 깨닫게 하시는 자들이 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께 역겨움을 일으키는 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주님의 십자가로 도망가는 자들이 바로 택하신 자들입니다.
돈 버는 일이 급해도 돈 버는 일을 뒤로 하고 십자가로 도망가야만 합니다. 건강 문제가 급해도 건강 문제를 뒤로하고 십자가로 도망가야만 합니다. 자녀 문제가 급해도 자녀 문제를 뒤로하고 십자가로 도망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역겨워하시는 모든 상태로부터 십자가로 도망하는 자들이 택하신 자들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하여 세상에 대해 죽을 때에 하나님의 역겨움을 피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마음의 지성소에 세상의 어떤 대상의 이름도 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의 동선을 따라 마음은 하늘을 향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갔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더는 역겹게 여기시지 않고 기쁘게 여기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게 위해 할 수 있는 다른 일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역겨워하시지 않는 상태에 있어야만 합니다. 주님 안에 마음을 머물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이고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고 하나님의 주권이 펼쳐져나갈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이 아닙니다. 성공하겠다는 마음은 하나님의 역겨워하심에 불과합니다. 내가 목회를 잘 해보겠다는 소원을 가질지라도 하나님은 역겨워하실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위선자였던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해야 될 유일한 일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해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목표입니다.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는 것만이 하나님의 역겨움을 피하는 길이기 때문이며 그것만이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 외에 다른 이름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계실 때나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나 예수님이 재림하실 종말 때나 인간의 마음의 문제는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역겨워 하시는 일은 역사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 외의 다른 이름을 담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역겨움을 발생시키는 상태를 피하는 것입니다.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에 담긴 예수님의 당부의 말씀을 받아들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 외에 다른 이름을 담고 그것을 갖고자 소원하는 순간 하나님의 역겨움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겨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만사를 젖혀두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도망가야만 합니다. 내가 도망간 자리에는 이제 하나님의 주권을 통해 나라가 임할 것이고 나의 몸과 지정의를 장갑과 가면 삼으셔서 역사해나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의 역겨움을 피하는 것뿐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나 자신을 돌아보며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있는 상태가 될 때마다 만사를 젖혀두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도망가게 해주셔서 하나님께서 나를 보실 때에 역겨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