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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복과 저주, 개념부터 알자>의 줄거리:
복은 원하고 저주는 피하려 함이 인지상정입니다.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그래야 하지요. 문제는 복도 저주도 개념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개념이 잘못되었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하나님도 예수님도 성령님도 천사들도 그리고 심지어 귀신들까지도 다 알고 있는 복과 저주의 개념. 귀신에게 속은, 사람만 모르고 있는 중입니다.
복과 저주, 개념부터 알자
(누가복음 11:24~28)
24.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25.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26.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27.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복과 저주, 개념부터 알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복과 저주, 개념부터 알자’
제목과 연관하여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서 보아야 할 구절은 27~28절입니다. 27절을 보면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당연히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아서 기른 마리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28절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대답은 쉽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는 구절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사실은 무척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면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아들입니다. 그렇지만 그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이 세상에 오고 오는 세대와 마지막까지 구세주가 되실 그리스도이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자면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그리스도라는 것조차 복의 내용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기로 합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수태고지를 받고 성령으로 잉태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낳고 젖 먹여 키웠습니다. 마리아는 얼마든지 “예수는 내 아들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마리아에게는 조금도 복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같은 아들도 복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 복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는 곧 마리아가 예수님을 아들로 생각하는 한 예수님을 낳고도 저주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저주의 자리를 피해서 복의 자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를 낳은 마리아조차도 예수님을 아들이 아닌 그리스도로 믿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이루실 연쇄 사건을 따라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 말씀의 요지입니다.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조차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서 믿고 그 연쇄 사건을 따를 때만 복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낳은 것도 복으로 여길 수 없기에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복으로 여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과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내용들을 근거로 하여 복과 저주의 개념을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떠올려봅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서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들렀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은 온갖 보석으로 밖에는 비유될 수 없는 가장 좋으신 분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과 그 보좌를 성령에 감동되어 보고 인간의 말로는 차마 표현할 수가 없어서 자신이 아는 가장 값진 보석들을 비유로 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무지개를 떠올리며 동원하고 있습니다.
진짜 복이란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갖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 받기는 하나님을 소원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만을 소원할 수 있다는 것부터 이미 엄청난 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갖는다는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아들로 여기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복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갖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연쇄 사건을 따라 부활의 자리에 설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부활의 자리는 보석이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소원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이와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저주란 가장 좋으신 하나님이 아닌 세상에 있는 것을 갖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소원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넘치는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을 소원하는 사람이 실제로 돈을 많이 벌게 되었습니다. 소원을 이루었으니 복을 받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돈은 마음을 채울 수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마음을 채울 수 없기에 돈은 소원할수록 마음을 해치는 독입니다. 따라서 소원대로 실제로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면 마음이 독으로 충분해진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승진을 소원하는 사람이 실제로 승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돈과 마찬가지로 승진 또한 본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에 저주가 넘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직장에서의 지위는 올라갔을지 몰라도 영혼은 저주를 받은 단계를 넘어서 저주가 넘치는 상태로 강등당하게 되었습니다.
혹은 목사님이 수적인 부흥을 소원하다가 실제로 교인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모임은 교회가 아닌 멸망동호회가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을 아들로 가져도 복이 아닌 이 세상에서 목회 현장에 사람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복으로 여겨 소원했다는 것은 저주받은 상태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원이 이루어져 실제로 사람이 모이게 되었다는 것은 저주가 넘치는 상태가 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형통을 소원하였고 원하던 대로 자녀가 형통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형통이 아니라 지옥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질주하게 된 것입니다. 건강이 안 좋아서 마음에 건강을 소원하였습니다.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아들로 가지는 것도 복이 아닐진대 건강한 것이 복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건강을 소원하는 것 또한 여전히 저주 가운데 있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육신의 부모와 형제들이 있었고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아들로 갖고, 예수님을 형제로 갖고, 예수님을 친구로 가질지라도 그것은 결코 복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서 받아들이고 그 연쇄 사건을 따를 수 없다면 저주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건강이 안 좋은 상태에서도 소원해야 할 대상은 건강이 아닌 하나님입니다. 몸은 하나님의 주권에 넘겨드리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뛰어난 의사도 없고 하나님보다 더 완벽하게 나의 건강을 지키실 분도 없습니다. 마음은 하나님을 소원하고 나의 몸은 하나님의 주권에 넘겨드릴 때 어느 병원에 가서 어떤 의사에게 진료를 받을지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지게 될 일입니다. 결코 우리가 소원해야 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건강을 소원한 끝에 건강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오히려 영혼은 불치병에 걸리고 암에 걸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아들로 가져도 복이 아니라는 복의 개념을 기준으로 본다면 복이란 하나님을 소원하는 것이고 저주란 하나님을 소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소원하는 상태에서 돈이 주어졌어도 그것은 기쁘거나 만족할 일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심해야 될 일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을 때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0장 20절에서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며 경계토록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만 소원일 때에 돈이 주어진다면 혹시나 돈으로 기뻐하게 될까 조심해야 합니다. 수중에 들어온 돈은 나의 기쁨과 만족을 위한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사용하시기 위한 재료이기 때문입니다. 내게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쓰시려고 잠깐 돈을 몰아오신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소원인 상태인데 승진을 하게 되고, 하나님을 소원하는 중에 수적인 부흥이 이루어졌습니다. 다 조심해야 할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쓰실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복이 아니며 기쁨과 만족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행사를 위한 재료들일 뿐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소원하는 중에 돈이 벌리지 않고 승진도 못하고 부흥도 이루어지지 않고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 것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조심해야 될 대상이 그만큼 적은 상태입니다. 오히려 하늘에서 승진하고 하늘에서 부자가 되는 하늘 형통의 가도를 달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복과 저주의 개념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저주받는 일은 마음으로 세상을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것이 너무나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서 그것만 있으면 너무나 기쁘고 행복할 것 같다면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영적 사실을 직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의 가치들로 마음 공백을 채울 수 있다고 믿어서 세상을 소원하는 상태는 저주입니다. 하늘의 천사들은 인간의 언어로는 보석으로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이 좋으신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좋으신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당신 자신을 주고자 하심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천사들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소원하는 인간의 모습을 내려다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요?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하였습니다. 배설물이라는 표현은 직설적이지만 아직도 점잖은 표현이기에 영적인 상황을 직시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예의나 교양을 걷어버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세상을 소원하는 삶이란 똥입니다.
요새 “동학개미”라는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개인 투자자들의 돈이 주식에 몰리게 되었는데 동학혁명 때에 개미떼처럼 무리지어 다니는 모습 같다고 해서 동학개미들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한편 옛날에 제주도에서는 흑돼지를 키웠다고 합니다. 재래식 뒷간 밑에서 돼지들을 키웁니다. 사람들이 똥을 싸면 돼지들이 그 똥을 먹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주식하는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주식 사놓고 자나 깨나 오르기만 기다립니다. 천사들이 보기에는 이 모습이 똥을 먹고자 기다리는 돼지와 다름없이 보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비난하실 때에 ‘화 있을 진저, 저주를 받을 진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개인적으로 미워하셔서 하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사랑하실 수 있는 방법이 이렇게 지독한 언어를 통해서라도 그들이 처해있는 저주와 멸망의 상황을 직면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소원한다는 것은 보석으로밖에는 표현될 수 없는 가장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가 들어오셔야 될 자리에 이 세상가치들을 담게 된 것입니다. 세상가치의 특징은 마음을 채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들로 가진 것조차도 복이 될 수 없는데 어떤 세상가치도 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몸이 살아서 만날 수 있는 대상 중에 저주의 상황을 복으로 바꿔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전도사 목사 시절에 여름과 겨울에 교인들을 모시고 수련회를 떠났습니다. 집회를 하면 찬양도 많이 하고 말씀을 전하고 통성기도하고 마지막 날은 캠프파이어도 합니다. 그 시절의 저는 전도사나 목사로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얼빠진 인간이었습니다. 수련회에 필요한 것은 그러한 행사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수련회를 한다면 저주가 무엇인지부터 집중할 것입니다. 종이에 세상에서 소원하는 것들을 다 쓴 다음에 거기에 똥을 받아오라고 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돈, 건강, 승진, 자녀의 형통 같은 세상의 가치들을 소원하는 것이야말로 똥을 만지는 것처럼 더러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소원하는 자리는 지옥으로 향하는 멸망과 저주의 자리입니다. 이와 같은 저주의 안방에 마음이 머물고 있는데 어떻게 온전한 찬양이 나오고 통성기도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 또한 그 상태를 묵인한 채로 행사를 인도했었습니다.
설령 예수님을 아들로 끌어안고 있어도 저주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는데 세상의 가치들은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끌어안을 가치가 전혀 없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끌어안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본문 말씀을 통해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조차도 예수님을 아들이 아닌 그리스도로 끌어안을 수 없다면 저주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에 대해 어머니의 입장이고자 한다면 절대 저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그리스도로서 믿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연쇄 사건에 나를 동일시함으로 따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집중되어 나타난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따라 걸을 수 없다면 마리아조차도 저주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소원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똥을 주무르는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것을 소원하는 것이 저주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소원하기에 주저함이 없고 세상 것을 얻는 것을 복이라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들이 제주도 흑돼지처럼 똥을 주무르고 먹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세상을 소원하는 상태가 유지된다면 가장 비참한 상태입니다. 본문 말씀 24~26절에 기록된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하나님을 소원하지 못한 채 세상을 소원한다면 한 번 쫓겨났던 귀신이 일곱 귀신을 데리고 돌아온 것 같이 일곱 배나 되는 저주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애초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으며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귀신이 한 마리씩 들어있다고 해봅니다. 그런데 예배당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마음에서는 여전히 세상을 소원하는 사람들에게는 귀신이 일곱 마리씩 들어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일곱은 특정한 수치가 아닌 완벽함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그 사람에게 임할 수 있는 모든 귀신과 모든 저주가 모조리 임한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이렇게 최악의 상태가 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은 적어도 하나님의 좋으심을 발견하게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고 소원하게 될 때에 마음에 있던 한 마리의 귀신은 쫓겨나가게 됩니다. 귀신이 나갔다는 것은 저주의 사슬에서 벗어나 복의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24절의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장 좋은 분이시라는 것은 하나님도 아시고 예수님도 아시고 성령님도 아시고 천사들도 알고 있으며 심지어 사탄과 귀신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귀신이 거짓말하는 이유도 이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모른다면 거짓말도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귀신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최고의 복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세상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속입니다. 사탄은 아담에게 접근해서 마음 공백의 흡입력을 세상으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마음을 하나님 대신에 스스로 선택한 세상의 가치들로 얼마든지 채울 수 있다는 것이 사탄의 거짓말이었고 아담은 그 거짓말에 넘어간 결과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원죄의 상태에 놓여 살아가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을 믿게 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귀신은 이 사람이 하나님을 소원하게 되리라 여기고 자포자기하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된 이상 바보천치가 아닌 다음에야 그 좋으신 하나님을 소원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귀신의 역할은 세상 것을 소원하게 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으니 이제 망했다고 여기고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쫓겨나간 귀신이 떠돌다 거할 곳을 찾을 수가 없어서 다시 돌아오니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고막이 터지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데 소원하는 것이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전보다 더욱 세상을 소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치 제주도 흑돼지가 사람들이 와서 똥 싸기만을 기다리듯이 교인이라는 사람들이 흑돼지처럼 모여서 이 세상의 똥 덩어리가 떨어지기만을 기대하며 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은 이제 그곳이야말로 자신들의 낙원임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안 불렀을 때는 하나님을 소원하게 될 가능성이 존재하였지만,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세상을 소원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소원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귀신은 이 낙원을 혼자 누리기가 아까워 다른 귀신들까지 다 불러들입니다. 한 사람의 마음을 귀신으로 충만한 저주의 영역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경험하거나 혹은 들어서 아시겠지만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세상에 대한 집착이 더 강합니다. 그리고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강단에서 더욱 부채질을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배경으로 삼아 돈이나 건강 혹은 합격과 출세나 형통이라는 똥을 더 열심히 만지고 먹으라고 부추깁니다. 이러한 상황이기에 코로나 사태조차 필연적인 결과로 여겨질 정도입니다.
사도 바울의 빌립보서 3장 8절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이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함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 즉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이러한 서신을 남길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아직 존재하지 않던 때였습니다. 구약성경은 양피지에 기록되어 바리새인이나 율법사나 서기관 같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성경이 없었던 당시에도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글자로서의 말씀이 아니라 그 말씀이 나타난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을 따라 나를 동일시하여 자기부인을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부활에 자리에 이를 수 있다면 말씀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로부터 하나님으로 마음이 채워지고 우리의 몸과 지정의가 하나님의 장갑으로 쓰임 받는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져 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란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을 따라 부활에 자리에 이르는 것뿐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층이었던 사도들은 무식한 어부 출신이 많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지도층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사도들처럼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을 이루어나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제가 해석하고 말씀을 드릴 테니 성경을 읽어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러분은 누가 뭐라 하더라도 변함없는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을 붙잡고 따라갈 수 있으면 됩니다. 이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생활화하며 날마다 죽었음을 고백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기에 아담의 원죄의 체질이 존재합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생활하다 보면 어느덧 돈이나 건강이나 형통 같은 세상의 가치들을 소원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한다는 것은 이러한 세상의 가치들을 똥으로 여기며 싸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소변을 보기 위해 하루에 몇 번이고 화장실을 갑니다. 대변은 한두 번 보고 소변은 여덟 번에서 열두 번까지는 정상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마음에서 배설할 대상이 생겨나면 십자가를 생활화하여 하루에 열두 번이라도 배설해야 합니다. 돈도 자녀도 마음에서 소원하게 된다면 마음의 배설물이 된 것입니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대변을 보듯이 싸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에 마음에 승진에 대한 갈망이 생긴다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승진을 똥으로 여기며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열두 번 싸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저주의 자리를 벗어나면 부활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마음에 세상의 가치를 소원하지 않는 상태가 되고 온전히 하나님만을 소원하게 될 때에 진정한 복은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세상을 소원하고, 십자가 생활화가 좋다고 하면서도 어느덧 멀어지게 된다면 마음은 이전보다 더 큰 저주의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세상을 소원하고 심지어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자 말씀이 사건으로 나타난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을 붙잡았다가 놓아버린다는 것은 귀신들에게 낙원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복과 저주는 받고 피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개념을 분명히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리아라도 예수님을 아들로 여겨서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을 따를 수 없다면 여전히 저주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생각하고 계신 복과 저주의 개념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서 끊임없이 이 세상 것의 이름을 붙잡고 있음이 배설물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루에 열두 번이라도 똥을 싸듯 배설해버리고 깨끗해진 마음으로 부활의 자리에 이르게 하여 주시고 아버지만 소원함을 통하여 저주를 벗고 진정한 축복의 문으로 들어가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