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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을지문덕
한시가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국가대사와 관련을 가진 경우이다.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與隨將于仲文) 시가 바로 그런 것이다. 을지문덕은 무장이면서 한시 창작에서도 능력을 발휘했다. 전투능력으로 외적의 침입을 막으면서 한시를 이용한 심리전을 곁들였다. 혼자 우뚝했다고 하는 것보다 고구려의 문화 역량을 잘 보여주었다고 하는 편이 타당하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갖추고 있는 한시 능력을 특별하게 활용한 덕분에 가장 오래된 한시를 남길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612년(영양왕 23)의 일이다. 고구려를 침공한 수나라 군대가 평양성근처까지 와서 병사들이 굶주리고 피로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자 을지문덕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보냈다. 적장에게 자기 생각을 전달하는 최상의 방법이 한시였다. 겉으로 내세우는 말과 속뜻이 다를 수 있는 문학작품의 이점을 몇 마디 되지 않는 시구에서 충분히 살렸다.
神策究天文 신비한 계책은 천문을 다하고 妙算窮地理 교묘한 꾀는 지리에 다했네 戰勝功旣高 싸움에 이겨 공이 이미 높으니 知足願云止 족함을 알아 원컨대 그침에 이르소 |
아직 중국에서 근체시가 생겨나지 않은 시기에 짜임새를 잘 갖춘 5언시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겉에 드러난 말로는 적장의 전공을 치하하고 이제 물러가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했다. 칭송의 이면에 강한 기상이 느껴지게 하면서 상대방의 허세를 비꼬았다. 시를 써 보낸 것은 일단계 작전이었다. 적이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일제히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2. 최치원
최치원은 신라 헌안왕 1년(857)에 출생하였는데 삼국사기 최치원전의 기록을 보면 최치원은 왕경(王京) 사량부(沙梁部) 사람으로 자(字)는 孤雲(고운) 해운(海雲)이며 시호(諡號)는 문창후(文昌侯)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에 가서 빈공과에 급제하고 문명을 떨치다가 돌아온 육두품 출신의 문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다. 후에 <격황소서>를 대필해 능력 발휘의 기회를 얻었으나 그 이상의 활동은 하지 못했다. 외국인을 불러들여 진출의 기회를 허용하고는 명백한 한계를 두어 계속 머무르지 말고 돌아가 문화 이식을 위해 노력하도록 만드는 것이 당나라가 세계제국을 경영하는 방법이었다. 그는 귀국해서 나날이 어지러워지는 정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글을 올렸으나 허사였고 외직으로 나아가 몇 고을을 돌아다니던 끝에 난세를 비관하고 가야산에 들어가 은거하다가 마침내 신선이 되어갔다는 전설을 남겼다. 최치원이 지은 글은 아주 많은데 그는 글을 쓰는 데 힘쓴 동기는 재능을 발휘해서 인정을 받고 영달하자는 데 있었다.
그러나 최치원은 당나라에서뿐만 아니라 귀국해서도 항상 영달의 기회를 찾고 재능을 발휘하고자 했다. 그 때문에 현실감각을 계속 가지기 어려웠고, 후삼국의 쟁패가 벌어진 역사의 커다란 전환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발견하지 못했다. <추야우중>에 무엇 하나 이룬 것 없다고 신세타령한 최치원의 시는 실패의 증언이라는 점에서 소중한 가치를 가진다.
秋風唯苦吟 가을바람에 오직 괴롭게 시를 읊으나 世路少知音세상에는 뜻을 알아주는 친구 적구나 窓外三更雨 창 밖에는 삼경(밤 11~새벽1시)의 비가 오는데 燈前萬里心 등불 앞에 만리의 마음이여 |
가을바람에 괴롭게 읊조리기만 한다는 것은 만년의 처지를 잘 나타내주는 말이다. 세상에서 격리되어 할 일이라고는 시를 짓는 것뿐이지만 시를 알아주는 사람은 드물다. 홀로 고매한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니고 방아네 들어앉아서 역사의 현장을 외면하면서 스스로 고독을 택한 탓이다. 한밤중에 비가 온다는 말로 밖이 험난하기만 하니 나갈 수 없다는 생각을 암시한다. 등불이 커져 있어 밝은 방안에다 자기 설계를 설정하고 만리를 오고가는 행적을 마음속으로 그릴 뿐이다.
자기의 고독을 동정해달라고 지은 시인데 독자는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앉아서 만리를 보고 만고흥망의 내력을 소상하게 훑을 수 있다 해도 자지 스스로 역사 창조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지식이 오히려 번거로움 짐이 죄도 번뇌의 원인이 되고 만다는 것을 획인할 수 있다. 무엇 하나 이룬 것이 없다고 신세타령한 최치원의 시는 실패의 증언이라는 점에서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3.김부식
본관 경주. 자 입지(立之). 호 뇌천(雷川). 시호 문열(文烈). 신라 왕실의 후예로서 경주의 주장(州長)인 위영(魏英)의 증손자. 국자좨주 좌간의대부(國子祭酒左諫議大夫) 근(覲)의 셋째 아들. 네 형제가 모두 과거로 진출하였으며, 그 가운데 부일(富佾)·부식·부필(富弼)은 문한(文翰)으로 이름을 날렸다.
1096년(숙종 1)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의 사록참군사(司錄參軍事)에 임명되었다가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거쳐 중서사인이 되었다. 인종 초에 이자겸이 왕의 외조부이자 장인이라는 이유로 권력을 마음대로 하자 이를 저지하였으며, 이자겸이 제거된 뒤 1126년(인종 4) 어사대부가 되었다가 호부상서 한림학사승지를 역임하였다.
1130년 정당문학 겸 수국사로 승진하였고 이어 검교사공 참지정사가 되었으며, 1132년에 수사공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守司空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당시에 묘청(妙淸) 등 서경세력이 천도를 주장하면서 난을 일으키자 원수로서 삼군(三軍)을 지휘하였으며, 출정하기 전에 먼저 개경에 있던 정지상(鄭知常)·김안(金安)·백수한(白壽翰) 등을 죽였다.
장기전을 벌이면서 1년 2개월 만에 반란군을 진압하였고, 그 결과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에 책록되고 검교태보·수태위·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감수국사·상주국 겸 태자태보(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監修國事上柱國兼太子太保)에 승진하였다.
1138년에 검교태사·집현전대학사·태자태사(檢校太師集賢殿太學士太子太師)를 더하였다. 이어 함께 전공을 세운 윤언이(尹彦頤)와 개인적인 불화가 생겨 그가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주장한 것을 탄핵하여 양주방어사(梁州防禦使)로 쫓아냈다가 뒤에 사면되자, 정치적 보복이 두려워 1142년에 사직하였다.
인종은 그의 사직을 허락하면서 동덕찬화공신호(同德贊化功臣號)를 더하여 내렸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인종의 명령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체재를 작성하고 사론(史論)을 직접 썼으며, 1145년에 완성하였다. 한림원에 있을 때에는 사륙변려문체(四六騈儷文體)에서 당·송 시대의 고문체(古文體)를 수용하려 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의 저자 서긍(徐兢)은 그를 고금에 밝고 글을 잘 짓는 박학강식한 사람이라고 평하였다. 의종이 즉위한 뒤 낙랑군 개국후에 봉하고 《인종실록》을 편찬하게 하였다. 죽은 후 1153년 중서령이 추증되었으며 인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문집 20여 권을 남겼으나 전하지 않는다.
東宮春帖 曙色明樓角 새벽빛은 다락의 끝에 밝고 春風着柳枝 봄바람은 버드나무 가지 닥쳤네 鷄人初報曉 닭사람이 새벽을 처음 알리는데 已向寢門朝 이미 침문(寢門)에 아침이 다가오네. |
동궁은 황태자 또는 왕세자가 사는 궁전이다. 계인은 궁중에서 날이 밝는 것을 알려 잠을 깨우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모두가 궁궐과 관련된 어휘들이다. 제목인 동국춘첩이란 말부터가 ‘태자가 사는 궁궐에 입춘방으로 붙인 글’이란 뜻이니 시 전체가 궁궐과 관련이 있다. 역시 당대 최고 문벌의 한사람다운 소재 선택이다. 시의 내용도 그렇다. 미명의 새벽빛과 봄바람과 같은 잔잔한 분위기에 이어지는 구절은 개인적 정서가 아니다. 계인이 새벽을 알리고 조회하러 떠났다는 일상사를 그냥 진술하고 있다. 앞의 두 구절은 계인의 그런 행동과 필연적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 그저 일상적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절실한 마음의 소리는 찾아볼 수 없다. 마음에 절실함이 없으니 시에도 절실함이 없게 된다. 반대파를 제거하고, 절대권력을 누린 사람이니 굳이 절실한 마음도 안타까운 번민도 필요하지 않아서일까? 그래서인지 그의 시에는 대개 개인적 감정을 드러낸 것보다는 고사나 전거를 인용하여 읽는 이를 깨우치려고 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런 시들은 독자와의 공감의 공간을 협소하게 만든다. 쓴 사람이 읽는 사람의 위에 군림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그런 자세, 그것이 바로 김부식이라는 개인의 삶의 자세가 아니었을까?
4. 이인로
자 미수(眉叟). 호 쌍명재(雙明齋). 초명 득옥(得玉).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 난을 피한 후 다시 환속하였다. l180년(명종 10) 문과에 급제, 직사관(直史館)으로 있으면서 당대의 석학(碩學) 오세재(吳世才) 임춘(林椿) 조통(趙通) 황보항(皇甫抗) 함순(咸淳) 이담지(李湛之) 등과 결의 함께 어울려 시주(詩酒)를 즐겼다. 이들을 죽림7현(竹林七賢)이라고 한다.
신종 때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고종 초에 비서감(秘書監)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었다. 시문(詩文)뿐만 아니라 글씨에도 능해 초서(草書) ·예서(隸書)가 특출하였다. 저서에 《은대집(銀臺集)》 《후집(後集)》 《쌍명재집(雙明齋集)》 《파한집(破閑集)》 등이 있다.
題天壽僧院壁 待客客未到 나그네를 기다리나 나그네 오지 않고 尋僧僧亦無 중을 찾아가도 중이 또한 없네 唯餘林外鳥 오직 수풀 밖의 새만 남아서 款款勸提壺 짹짹 거리며 술병 들기를 권하네 |
지은이 李仁老와 亦樂(趙通), 子眞(咸淳)은 吳世才, 林椿, 皇甫沆, 李湛과 더불어 이른바 竹林七賢의 멤버들이었다. 忘年友를 맺고 함께 詩酒를 즐겼으니 友情도 남달랐을 것이다. 이 글에 드러난 지은이의 삶이 아름답다. 친구를 餞別하려고 새벽길을 달려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가? 친구가 한낮까지 오지 않으면 짜증도 낼 법한데 오히려 담담한 心境으로 詩를 쓴다. 그 詩가 또한 여유롭다.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친구를 전별하려고 새벽길을 달려가는 사람이 지금도 있을까? 혹 있다 하더라도 한낮까지 기다리지는 않을 것이다. 바쁜 세상에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만은 좀 그랬으면 싶다.
山居 春去花猶在 봄은 지났지만 꽃은 아직 남아있고 天晴谷自陰 하늘은 개었지만 골짜기는 절로 어두컴컴하네 杜鵑啼白晝 두견이 대낮에 우짖으니 始覺卜居深 비로소 깊은 곳에 사는 것을 깨달았네 |
시인은 산 속에 살고 있습니다. 봄이 갈 무렵이니 지금 이맘때가 아닌가 합니다(이 글 쓴 것은 5월 말이었습니다). 꽃이 남아있음은 다른 곳에 비해서 봄이 더디 간다는 이야기겠지요. 다시 말하자면 서늘하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맑지만 골짜기에 그늘이 진다는 것도 그가 있는 곳이 깊은 산중임을 드러내는 구절입니다. 게다가 밤에 우는 두견새 소리가 대낮에 들립니다. 그늘이 져서 두견새도 낮인지 밤인지 헷갈리는 것이지요. 드디어 시인은 자기가 사는 곳이 첩첩산중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인의 감각을 따라 가보겠습니다. 날자로 보면 봄이 갔는데 여전히 꽃이 피어있음을 봅니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보니 맑기만 한데 주위는 산 그림자로 그늘이 져서 어둑어둑합니다. 그리고 어디선가 두견새 울음이 들립니다. 문득 여기가 깊은 산 속임을 느낍니다. 시인이 자기 집이 깊은 산속임을 몰랐던 것은 물론 아닐 것 입니다. 경물을 보고 들으면서 새삼 느끼고 그것을 절묘하게 오언절구로 엮어낸 것이겠지요.
5.김구
본관 부령(扶寧: 전북 부안). 자 차산(次山). 호 지포(止浦). 시호 문정(文貞). 초명 백일(百鎰). 어려서부터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 정원부사록(定遠府司錄) ·제주판관이 되었다. 원종 때 유경(柳璥)의 천거로 예부시랑이 되어, 원나라에 대한 문서관계를 맡아보았다.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다녀온 후 《북정록(北征錄)》을 지었으며, 1263년(원종 4)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이어 정당문학(政堂文學) ·중서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하였다. 1274년 첨의부지사로 있다가 참문학사(參文學士) ·판도사판사가 되어, 통문관의 설치 및 궁내의 연소자들에게 한어(漢語)를 배우도록 건의하였다. 이장용(李藏用) ·유경 등과 함께 신종 ·희종 ·강종 3대의 실록을 찬수하고, 충렬왕 때 《고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문집에 《지포집》이 있다.
洪原邑館 地僻雲煙古 땅이 궁벽하니 안개도 예스럽고 原低壽木平 언덕 아래로 나무들 평평하네 長安知幾至 그 어느때 장안에 다닿을까 回首不勝情나그네 서러움 견디지 못하겠네 |
홍원에는 뛰어난 경치가 없다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6.이규보
본관 황려(黃驪:驪興). 자 춘경(春卿). 호 백운거사(白雲居士)·지헌(止軒)·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초명 인저(仁氐). 시호 문순(文順). 1189년(명종 19) 사마시(司馬試), 이듬해 문과에 급제, 1199년(신종 2) 전주사록(全州司錄)이 되고 1202년(신종 5) 병마녹사 겸 수제(兵馬錄事兼修製)가 되었다.
1207년(희종 3)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권보직한림(權補直翰林)으로 발탁, 참군사(參軍事)·사재승(司宰丞)·우정언(右正言)을 거쳐 1219년(고종 6) 좌사간(左司諫)으로서 지방관의 죄를 묵인하여 계양도호부부사(桂陽都護府副使)로 좌천되었다.
1220년(고종 7) 예부낭중(禮部郞中)·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를 거쳐 30년 위위시판사(衛尉寺判事)가 되었으나, 팔관회(八關會) 행사에 잘못을 저질러 한때 위도(蝟島)에 유배되었으며 1232년(고종 19) 비서성판사(書省判事)에 승진하고, 이듬해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정당문학(政堂文學)·참지정사(參知政事)·태자소부(太子少傅) 등을 거쳐 1237년(고종 24)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감수국사(監修國事)·태자대보(太子大保)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호탕 활달한 시풍(詩風)은 당대를 풍미했으며, 특히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그 감상을 읊은 즉흥시는 유명하다. 몽골군의 침입을 진정표(陳情表)로써 격퇴한 명문장가였다. 시·술·거문고를 즐겨 삼혹호 선생이라 자칭했으며, 만년에 불교에 귀의했다.
저서에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백운소설(白雲小說)》 《국선생전(麴先生傳)》 등이 있다.
旣望 李杜啁啾後 이태백,두보 시를 읊조린 후에 乾坤宿寞中 하늘과 땅은 적막한 속일세 江山自閑暇 강과 산이 절로 한가하니 片月掛長空 한 조각 달 만이 긴 허공에 걸렸네. |
보름이 지나가고 세상의 조용함을 나타낸 시이다.
詠井中月 山僧貪月色 산중이 맑은 달빛 탐내어 幷汲一甁中 물과 함께 한 항아리 담뿍 떠갔으나 到寺方應覺 절에 이르면 바야흐로 응당 알게 되리라 甁傾月亦空 항아리 기울면 달빛 또한 공허함을 |
이 시는 어린 아이와 같은 순진한 발상이 담겨져 있다. 하늘의 달을 절간으로 가져오고 싶은 동심을 표현한 것이다. 천재 시인 이규보의 시적 감각이 담겨져 있다. 옛 사람들은 이처럼 순진한 어린 아이의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났다. 자연은 언제나 무언의 위안과 평화를 주는 대상이었다. 그리고 시인 이규보의 발상은 참으로 멋스럽다. 하늘에 뜬 달이 우물에 비치고 그 달을 다시 절간으로 퍼 오겠다는 발상은 조선 중종 때의 기녀 황진이가 동짓달 긴 밤을 베어다가 춘풍 이불 속에 고이고이 접어 두었다가 사랑하는 임이 오신 밤에 고이고이 펴서 임과 함께 오래오래 사랑을 속삭이고 싶다는 발상과 비슷하다.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다루겠다는 발상이 이렇게 표현된 것이다.
7. 고조기
본관 제주(濟州). 초명 당유(唐愈). 호 계림(鷄林). 예종 초 문과에 급제하여, 인종 때 시어사(侍御史)를 지냈다. 이자겸(李資謙)이 실각하자 그의 일파로서 환관과 결탁하여 계속 벼슬자리를 누린 봉우(奉佑)를 탄핵하다가,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으로 좌천되었다. 뒤에 다시 대관(臺官)이 되어, 앞서 이자겸의 난 때 동조한 조신(朝臣)들의 파직을 누차 상소하다가 예부낭중으로 전직되었다. 1147년(의종1) 수사공상주국(守司空上柱國)을 지냈다. 1151년 중군병마판사(中軍兵馬判事) 겸 서북면병마판사를 역임하였으나나 폐신(嬖臣) 김존중(金存中)에게 아부한 일로 탄핵을 받아 상서좌복야(尙書左
僕射)로 전직되었다. 수개월 뒤 중서시랑평장사로서 치사하였다.
山莊夜雨 昨夜松堂雨 어젯밤 송당에 비 내리고 溪聲一枕西 시냇물 소리 베개 서쪽이 울리더니 平明看庭樹 먼동 트자 뜰 앞의 나무를 보니 宿鳥未離栖 잠자는 새는 가지를 뜨지 않았네 |
어찌 보면 덤덤하기 짝이 없는 시이다. 간 밤 비가 와서 아침에도 새가 둥지에 틀어 박혀 있다는 것이 시인이 말하고 있는 전부인 셈이다. 그러나 讀詩를 여기서 그치면 영양의 발자취만을 따라가다 끝내는 눈 앞에서 놓치고 마는 격이다.
제목으로 보아, 시인의 거처는 속세를 떠난 호젓한 산중이다. 시인은 간밤에 비가 왔다는 사실을 처음엔 알지 못했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잠결 베개머리 서편으로 들려오던 시냇물 소리뿐이다. 시냇물 소리를 새삼스럽게 느낀 것으로 보아 계절은 봄이다. 간밤 시냇물 소리에 잠을 설친 시인은 새벽녘 들창을 연다. 여느 때 같으면 동 트기가 무섭게 조잘대며 시인의 잠을 깨웠을 새들이 오늘 따라 잠잠한 것이 궁금했던 것이다. 새들은 왜 둥지를 떠나지 않고 있을까? 간밤의 비 때문에 숲이 온통 젖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새들의 하는 양을 보다가, 간밤 꿈결에 어렴풋하던 시냇물 소리가 기실은 비 때문에 물이 불어났기 때문임을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산이 있고, 그 속에 집이 있다. 방 안에는 시인이 있고, 둥지 안에는 새들이 있다. 사방은 고요하고, 정신은 해맑다. 이른 새벽 들창을 열어 가만히 밖을 내다보는 시인의 시선 속에 떠돌고 있는 法悅의 生趣. 이것을 더 이상 무슨 언어로 부연할 수 있겠는가.
8.이제현
본관 경주(慶州). 자 중사(仲思). 호 익재(益齋) ·역옹(櫟翁) ·실재(實齋). 초명 지공(之公). 시호 문충(文忠).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했으며 1303년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 등을 지냈다. 1308년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등용되고 제안부직강(齊安府直講)을 역임했다. 이듬해 사헌규정(司憲糾正), 1310년(충선왕 2) 선부산랑(選部散郞), 이듬해 전교시승(典校寺丞) ·삼사판관(三司判官) 등을 거쳐 1312년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가 되고 성균악정(成均樂正) ·풍저창사(豊儲倉使)를 지냈다. 이듬해 내부부령(內府副令) 풍저감두곡(豐儲監斗斛)을 거쳐 1314년 원나라에 가서 조맹부(趙孟) 등과 고전을 연구하였다.
1316년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이 되고, 1320년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올라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이 되었다. 같은 해 충선왕이 모함으로 유배되자 원나라에 그 부당함을 밝혀 1323년 풀려나게 하였다. 이듬해 광정대부밀직사사(匡靖大夫密直司使)에 승진, 1325년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이 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졌다. 1336년 삼중대광영예문관사(三重大匡領藝文館事)에 오르고 1339년 심양왕(瀋陽王) 고(暠)가 원나라에 충숙왕을 모함하자 연경(燕京)에 가서 해명하고 돌아왔다. 1343년(충혜왕 복위 4) 원나라 사신이 왕을 잡아가자 사면을 요청했고, 이듬해 삼사판사(三司判事)에 복직,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1348년(충목왕 4) 왕이 죽자 제조경사도감(提調經史都監)으로 원나라에 가서 충정왕의 승습(承襲)을 요청했고,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우정승(右政丞) ·권단정동성사(權斷征東省事)가 되고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다. 이듬해 동덕협의찬화공신(同德協議贊化功臣)에 오르고 1353년 사직했다가 이듬해 우정승에 재임, 1356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그 후 사직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다가 1362년 홍건적의 침입 때 왕을 청주(淸州)로 호종,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정주학(程朱學)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조맹부의 서체(書體)를 도입하여 유행시켰다. 공민왕 묘정(廟庭)에 배향, 경주의 귀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효행록(孝行錄)》 《익재집(益齋集)》 《역옹패설(櫟翁稗說)》 《익재난고(益齋亂藁)》 등이 있다.
普德窟 金剛山 陰風生巖谷 시원한 바람 바위틈에서 생기고 溪水深更綠 시냇물 깊고도 푸른데 倚杖望層巓 지팡이에 의지하여 높은 산꼭대기를 바라보니 飛簷駕雲木 높다란 처마 구름 위에 떠 있구나. |
자연과 시인은 하나의 세계 속에서 조화되고 있는 시이다.
9.정포
본관 청주(淸州). 자 중부(仲孚). 호 설곡(雪谷). 판선공(判繕工) 책(責)의 아들. 1326년(충숙왕 13) 문과에 급제, 예문수찬(藝文修撰)이 되어 원나라에 표(表)를 올리러 가다가 마침 원나라에서 귀국하던 충숙왕을 배알하여 왕의 총애를 받고 그 길로 왕을 따라 귀국, 곧 좌사간(左司諫)에 발탁되었다. 충혜왕 때 전리총랑(典理摠郞)에서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가 되었으나, 악정(惡政)을 상소했다가 면직된 뒤 무고로 울주(蔚州:蔚山)에 유배되었다. 석방된 뒤 원나라에서 벼슬할 계획으로 연경(燕京)에 가서, 그곳 승상(丞相)에 의해 황제에게 추천까지 받았으나 병사했다. 시문(詩文)·서예에 뛰어났다. 문집 《설곡시고(雪谷詩藁)》가 있다.
江口 移舟逢急雨 배 저어가다가 급한 소나기를 만나 倚檻望歸雲 돛대에 기대 돌아가는 구름을 바라보네 海闊疑無地 바다가 넓어 땅이 없을까 의심했더니 山明喜有村 산이 맑고 마을이 나타나 기쁘네 |
소나기를 만났으나 마을이 있어 기쁨을 나타낸 시이다.
10.정추
본관 청주(淸州). 자 공권. 호 원재(圓齋). 시호 문간(文簡). 초명 추(樞). 뒤에 자를 이름으로 하였다. 공민왕 초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에 등용되고 좌사의대부가 되었다. 1366년(공민왕15)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신돈(辛旽)을 탄핵하여 살해당할 뻔하였으나 이색(李穡)의 도움으로 모면하고 동래현령(東萊縣令)으로 좌천되었다.
1371년 신돈이 처형된 뒤 좌간의(左諫議)대부로 기용되고, 이어 성균관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1374년 우왕이 즉위하자 좌대언(左代言) ·밀직첨서사(密直簽書事)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수성익조공신(輸誠翊祚功臣)에 책록되었다. 문집에 《원재집(圓齋集)》이 있다.
洛山寺 襄陽 石燈雲生袖 석등의 구름은 소매에서 생기고 松巒月入懷 소나무 봉우리는 달을 들어 품으네 要看空界闊 중요히 공허한 넓은 경계를 보니 須上寶甁臺 모름지기 세상의 보배는 단지 돈대이구나 |
낙산사의 뛰어난 경치를 읊은 시이다.
11.정몽주
본관 영일(迎日). 자 달가(達可). 호 포은(圃隱). 초명 몽란(夢蘭)·몽룡(夢龍). 시호 문충(文忠). 영천(永川)에서 태어났다.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藝文檢閱)·수찬·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냈으며,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족(女眞族)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다.
이어 전농시승(典農寺丞)·예조정랑 겸 성균박사(禮曹正郞兼成均博士)·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냈고,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 겸 성균직강(太常少卿寶文閣應敎兼成均直講) 등을 거쳐 성균사성(成均司成)에 올랐으며, 이듬해 정사(正使)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彦陽)에 유배,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九州]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79년 전공판서(典工判書)·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예의판서(禮儀判書)·예문관제학·전법판서·판도판서를 역임, 이듬해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였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 다음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對明國交)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水原君)에 책록되었다.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공양왕 2)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判事)·경영전영사(景靈殿領事)·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太宗)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矯)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개성에 5부 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大明律)》을 참작,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외교와 군사면에도 깊이 관여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丹心歌)〉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중종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포은집(圃隱集)》이 있다.
春興 春雨細不滴 봄비가 가늘어 물방울이 되지 않더니 夜中微有聲 밤중에 희미한 소리 들렸네 雪盡南溪漲 눈 녹아 남쪽 개울에 물이 불었거니 草芽多少生 풀싹은 얼마쯤 돋아났으리 |
1,2 구에서 작자는 우연한 일로 깊은 밤에 잠을 깬다. 그리고 밤비가 내리는 것을 알았다. 그 후로는 바로 잠들지 못한다. 그리고는 밤에 내리는 보슬비로 인해서 생기는 자연의 여러 변화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3,4 구에서 작자는 섬세한 감각으로 지금 내리는 이 보슬비가 이른 봄 깊은 산중에 아직도 남아있을 눈을 녹이고, 그 눈 녹은 물이 골짜기에 모여 물줄기를 이루어 작자의 고을 개울까지 내려올 것이라 생각한다. 이미 내려와 들리는 개울물 소리가 더 강해졌음을 느끼는 것이다.
물소리는 자연이 주는 약동하는 힘의 노래이다. 그리고 그 물은 온갖 풀과 나무와 꽃들을 키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날이 밝으면 그 생명이 푸르고 싱싱하게 변해진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즉, 이 시는 밤에 내리는 보슬비로 인하여 <생병의 탄생과 약동과 성장을 느끼는 작가의 섬세한 감정과 ,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작가의 생명애>를 표현하고 있다.
작가 정몽주가 이 시를 지음으로써, 그가 그때 들은 <이른 봄까지도 남아 있는 깊은 산속의 눈 녹은 물의 맑은 소리>가 오늘의 우리에게 까지 들려지게 된 것이다. 그 물소리는 정몽주의 <생명애>를 담고 영원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 맑은 물소리에서 어찌 권력과 부귀영화를 차지하려는 비린내 나는 탁한 탐욕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배신의 단맛을 느낄 수 있겠는가.
12. 이색
본관 한산(韓山). 자 영숙(潁叔). 호 목은(牧隱). 시호 문정(文靖). 이제현(李齊賢)의 문하생.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진사(進士)가 되고, 1348년(충목왕 4) 원(元)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했다.
1351년(충정왕 3) 부친상(父親喪)으로 귀국,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개혁 ·국방강화 ·교육진흥 ·불교억제 등 당면정책을 왕에게 건의했다. 1353년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장원 급제하였고 135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가서 회시(會試)에 장원,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 등을 지내다가 귀국하였다.
이듬해 다시 원나라의 한림원(翰林院)에 등용되었다. 1356년 귀국하여 이부시랑(吏部侍郞) 등 인사행정을 주관, 정방(政房)을 폐지하였고, 이듬해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때는 3년상(三年喪)을 제도화했다.
1361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왕의 남행(南幸)을 호종, l등공신이 된 후 좌승선(左承宣)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1367년 대사성(大司成)이 되자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등과 강론, 성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책봉된 후에는 신병으로 관직을 사퇴했으나 1375년(우왕 l) 우왕의 청으로 다시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역임했다. 1377년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鐵嶺衛) 사건에는 화평을 주장하였고 이듬해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이 강화로 유배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昌)을 즉위시켜 이성계(李成桂)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으나 이성계가 득세하자 장단(長湍) ·함창(咸昌) 등지에 유배되었다.
1391년(공양왕 3)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책봉되었으나 다시 여흥(驪興)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조선 개국 후 인재를 아낀 태조가 1395년 한산백(韓山伯)에 책봉했으나 사양,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중 죽었다. 문하에 권근(權近) ·김종직(金宗直) ·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 학문과 정치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저서에 《목은시고(牧隱詩藁)》 《목은문고(牧隱文藁)》가 있다.
漢浦弄月 日落沙逾白 해가 지니 모래가 더욱 희고 雲移水更淸 구름이 옮겨지니 물이 다시 맑았네 高人弄明月 고상한 사람이 밝은 달을 희롱하니 只欠紫鸞笙다만 자란생(紫鸞笙) 없어 한이로다. |
이 시는 포구에서 달밤의 흥취를 읊은 시이다. 한밤의 모래사장, 달이 비친 물빛, 휘영청 밝은 달, 이 세 가지가 어우러져 이 시인의 진한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기분이야말로 신선의 기분 이리하여 즐거워하고 있다. 다만 신선들이 부는 피리인 자란생이 없는 것만이 아쉽다고 하였다
日光亭 舒川 崔嵬揷平野 험한 산은 평야에 꽂혀 있고 縹緲俯長天 아득히 아득히 긴 하늘에서 내려다 보네 翠壁僧窓小 푸른 절벽에 절간 창문 적고 佛燈空半懸 불등은 공허히 반만 걸렸네 |
일광정의 뛰어난 경치를 읊은 시이다.
31) 舟中夜吟 : 朴寅亮(?-1096)
:밤배에서 시를 읊다.
故國三韓遠 : 고국 삼한은 아득히 멀고,
秋風客意多 : 가을바람에 나그네 마음 뒤숭숭.
孤舟一夜夢 : 외로운 배에 하룻밤의 꿈,
月落洞庭波 : 동정호의 물결에 달빛만 밝다.
주제: <<鄕愁>>
☞고향 떠난 나그네가 가을 달밤 내내 넓은 호수를 건너가는 배안에서 잠 못 이루며 느끼는 지독한 향수를 읊고 있다. 고향 떠난 나그네가 타향에서 느끼는 향수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느끼는 공통의 정서다.
32) 下第贈登第者 : 李公壽(?~1137)
:하제(下第)하여 등제(登第)한 이에게 주다.
白日明金榜 : 백일이 금방에 비치는데,
靑雲起草廬 : 청운이 초려에 일어나도다.
那知廣寒桂 : 광한(廣寒)의 계수나무가,
尙有一枝餘 : 여전히 한 가지 남아 있는 줄을 어찌 알리오?
주제: <<불굴의 의지>>
☞ 이번이 아닌 다음에는 반드시 과거에 급제하겠다는 강한 뜻을 내보인 시.
33) 寄元校書松壽 : 郭稛
:원교서(元校書) 송수(松壽)에게 부침.
今朝展淸眺 : 오늘 아침 펼쳐진 맑은 조망(眺望)에,
詩興屬南山 : 남산을 보니 시흥이 일어나네.
岸幘發長嘯 : 건을 젖혀 쓰고 긴 휘파람 부니,
始知天地寬 : 천지 넓은 줄 비로소 알겠네.
주제: <<큰 세계에 대한 동경>>
☞ ‘우물 안 개구리’란 생각을 비로소 갖고 큰 세계에 대한 감흥(感興)을 노래한 시.
34) 題墨竹後 : 鄭敍(?∼?)
:묵죽 뒤에 제(題)하여- 대나무를 그린 뒤에 씀.
閑餘弄筆硯 : 여유로운 마음으로 붓을 들고
寫作一竿竹 : 대나무 한 줄기를 그려 내었네.
時於壁上看 : 때로 벽에 붙이고 바라보니
幽姿故不俗 : 그윽한 자태가 속되지 않네.
주제:<<修己>>
☞유배당함에 있어 처절하고 슬픈 마음을 접고 자기 몸을 수련하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인내심을 보여주고 있다.
35) 寒松亭曲 : 張延祐(?∼1015(현종 6))
:한송정곡.
月白寒松夜 : 한송정 밤에 달은 밝고,
波安鏡浦秋 : 가을날 경포의 물결은 잔잔하네.
哀鳴來又去 : 슬피 울며 오고 또 가느니,
有信一沙鷗 : 물가의 갈매기는 소식이 있네.
주제:<<경포의 아름다움>>
☞아름다운 곳에서의 인간의 마음, 느끼는 감정, 즉 희비(喜悲)의 교차를 노래한 시.
36) 江村夜興 : 任奎
:강촌 밤의 흥취.
月黑烏飛渚 : 달빛 침침한데(어둑한데) 까마귀 물가에 날고,
煙沈江自波 : 안개 자욱하고 깔리고 강에는 물결만 일렁이네.
漁舟何處宿 : 고기잡이 배는 어디에 머물려나,
漠漠一聲歌 : 아득히 한 자락 노랫소리만 들려오네.
주제:<<잠잠한 물결에 대한 감흥>>
☞강가의 조용하고 잠잠한 풍경을 소재로 자신을 조그만 배에 비유하여 노래한 시.
37) 詠梅 1수 : 鄭道傳(1342∼1398(충혜왕 복위 3∼태조 7))
:매화를 노래하다.
久別一相見 : 오랜 이별 뒤에 (한 번) 서로 만나니,
楚楚看緇衣 : 깨끗이 치의를 입었구나.
只知風味在 : 다만 풍미가 있음을 알고,
莫問容顔非 : 얼굴이 그릇됨을 묻지 말라.
주제:<<邂逅>>
☞오랜만에 왕을 만나 일상적인 얘기부터 시작하여 옷에까지 신경을 쓰는 작자의 마음을 보이는 시.(너무나 보고 싶음.)
38) 全州懷古 : 權近(1352∼1409(고려 공민왕 1∼조선 태종 9))
:전주에서 회고하다.
巨鎭分南北 : 산성은 남북으로 뻗어 있고,
完山最可奇 : 완산부가 제일로 기이한 곳이라.
千峯鍾王氣 : 천년 동안 왕위가 모여 있더니,
一代啓鴻基 : 일대의 큰 기업을 열게 되었네.
주제:<<전주에 대한 회고>>
☞조선 개국과 아울러 전주에 대한 회고를 노래한 시.
39) 自適 : 李詹(1345∼1405(충목왕 1∼태종 5))
:(무엇에 속박됨이 없이) 제 마음 내키는 대로 즐김.
舍後桑枝嫩 : 집 뒤 뽕나무 가지엔 고운 새싹 트고,
畦西薤葉抽 : 서쪽 언덕 맡에는 풀잎이 싹트네.
陂塘春水滿 : 못을 막으니 봄물이 넘쳐흐르는데,
稚子解撑舟 : 어린놈들 배 저을 줄이나 알겠는가?
주제:<<조선 개국의 왕성함>>
☞봄물, 즉 조선 개국을 뜻하며 고려의 우둔한 신하들을 비꼬는 시.
40) 送僧之楓岳 : 成石璘(1338∼1423 (충숙왕 복위 7∼세종 5))
:금강산으로 가는 스님을 보내며.
一萬二千峰 :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은,
高低自不同 : 높고 낮음이 절로 다르네.
君看初日出 : 그대는 처음 해 돋을 때에,
何處最先紅 : 어느 곳이 가장 먼저 붉는 가 보게나.
주제:<<조선개국의 정당성>>
☞금강산에 오르는 해돋이처럼 자연의 이치, 즉 나라 바뀜이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41) 柳枝詞 : 偰長壽(1341∼1399(충혜왕 복위 2∼정종 1))
:버드나무가지를 말함.
垂絲鸚來擺 능수버들은 꾀꼬리가 흔들고,
飄綿蝶去隨 나부끼는 솜은 나비가 따라간다.
本無安穩計 본래 안온할 계획 없거니,
爭得繫離思 떠날 생각을 어떻게 잡아매리.
주제:<<行雲流水>>
☞자기의 주관을 뚜렷이 갖고 집착하지 않으며 원하는 대로 움직이겠다는 뜻.
42) 漁艇 : 偰長壽
:고기잡이 배.
撒網群魚急 : 그물을 치니 고기떼가 놀라고,
回舟一棹輕 : 배를 돌리니 노질이 가볍네.
却從紅蓼岸 : 풀 우거진 강 언덕을 따라 돌아올 때,
齊唱竹枝聲 : 어부들은 죽지가를 합창하며 부르네.
주제:<<삶의 이치>>
☞세상의 자연스러운 삶의 이치를 정겹게 표현한 노래한 시.
43) 囉嗊曲 : 成侃(1427∼1456(세종 9∼세조 2))
:무정한 사람
卽如車下轂 : 당신은 수레 아래 통바퀴,
妾似路中塵 : 저는 길 위의 먼지랍니다.
相近仍相遠 : 가까워졌다가 또 멀어지니,
看看不得親 : 암만해도(만나고 싶어도) 친해질 수가 없네요.
주제:<<悲戀>>
☞이루지 못할 남녀 간의 슬픈 사랑을 사물에 빗대어 노래한 작품.
44) 又 : 成侃
:또
綠竹條條動 : 푸른 대나무는 가지런히 움직이지만,
浮萍個個輕 : 부평초는 하나같이 가볍답니다.
願郞如綠竹 : 푸른 대나무와 같은 사내가 될지언정,
不願似浮萍 : 부평초처럼 됨을 원하지 말아요.
주제: <<節槪>>
☞세상의 주어진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대나무에 비유해 그 굳은 의지를 보여주는 시.
45) 龍潭瀑 聞慶 : 魚變甲(1380~1434)
:용담(금강하류) 폭포의 경치를 듣다.
龍動盤渦折 : 용이 움직이니 소용돌이가 굽이치고,
滿天明月新 : 하늘에 가득 찬 밝은 달은 새롭기만 하네.
晴雷白虹瀉 : 우레가 그치고 흰 무지개가 쏟아지니,
怳惚孰窮神 : 황홀하도다. 누가 신묘함을 다 알리요?
주제:<<세상의 변함>>
☞현재까지의 급변(急變)함과 진정되어 안정된 세상을 용담포에 빗대어 노래한 시.
61) 伯牙(백아) - 申沆
내 스스로 거문고를 타노니 / 我自彈吾琴
소리 알아주길구하지 않는다 / 不必求賞音
종자기는 어떤 인물이기에 / 鍾期亦何物
억지로 거문고 가락을 논하려 했었나 / 强辨絃上心
신항 [1477년(성종 8)~1507년(중종 2)]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용이(容耳) 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몇해만에 “시경”을 배웠다. 열네 살 때 성종의 제1녀 혜숙옹주를 아내로 맞아 순의대부에 오르고 고원위에 봉해졌다. 1499년(연산군 5)에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하고, 1501년에 자의대부, 뒤이어 귀후서제조, 통헌대부에 올랐다. 1504년 풍원위 임숭재의 참소로 의금부에 하옥되었으며 궁궐 출입이 금지되었다. 이에 두문불출하고 빈객을 맞지 않으며 적막하게 스스로를 지켰다. 중종반정에는 가담하지 않았으나 원종공신 1등에 책봉되고 봉헌대부에 올랐다.
62) 題院壁(제원벽) - 鄭希良
새는 퇴락한 절간을 엿보고 / 鳥窺頹院冗
어떤사람이 석양에 샘물을 긷네 / 人汲夕陽泉
산수가 손님을 맞으니 / 山水爲家客
천지가 무슨 경계가 되리오 / 乾坤何處邊
정희량 [鄭希良, 1469~?] 본관 해주(海州). 자 순부(淳夫). 호 허암(虛庵). 1492년(성종 23) 1등으로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495년(연산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후 검열(檢閱)이 되고, 1497년 대교(待敎) 때 왕에게 경연(經筵)에 충실할 것과 신하들의 간언(諫言)을 받아들일 것을 상소하여 왕의 미움을 샀다.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나 이해 무오사화(戊午史禍)로 의주(義州)에 유배, 다시 김해로 이배(移配)된 뒤 1501년 풀려났다. 모친상으로 수묘(守墓)하던 중 행방불명되었다. 갑자년(甲子年)에 큰 사화가 일어날 것을 예언하였다고 한다. 시문에 능하고 음양학(陰陽學)에 밝았으며, 문집에는 《허암유집》이 있다.
63) 萬里(만리) - 朴誾
눈녹아 봄물을 더하고 / 雪添春澗水
새들은 구름걸린 저녁산을 날고 / 鳥走暮山雲
맑은 경치에 모두 취기에서 깨어 / 淸境渾醒醉
새로 시를 지어 다시 군을 생각한다 / 新詩更憶君
64) 次李擇之韻(차이택지운) - 朴誾
꽃들은 모두 달을 덮고 / ?花渾被月
매우맑아 스스로간사함이 없네 / 淸絶自無邪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 終夜不能寐
시를 살펴 더하고 풀어간다/ 解添詩課多
박은 [朴, 1370~1422] 본관 반남(潘南). 자 앙지(仰止). 호 조은(釣隱). 시호 평도(平度). 15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385년(우왕 11) 문과에 급제, 권지전교시교감(權知典校寺校勘) ․후덕부승(厚德府丞) ․통례문부사 등을 거쳐 1386년 개성부소윤이 되었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금주지사 ․좌보궐 ․영주지사 ․사헌부시사 ․춘주부지사 ․사헌부중승 ․사수감판사를 지냈다. 2번에 걸친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에 책록되고 반남군(潘南君)에 봉해졌다. 강원도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한성부윤 ․승추부제학(承樞府提學) ․계림윤(鷄林尹) ․전라도관찰사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의정부참지사 겸 대사헌을 거쳐 서북면 도순문찰리사(都巡問察理使) ․의정부지사 ․병조판서 ․대사헌 ․호조판서를 역임한 후 1412년 금천군(錦川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의금부판사를 겸직하였을 때는 신장(訊杖)의 정수(定數)를 1차에 30으로 정하여 합리적인 형정제도를 시행하였다. 1416년(태종 16) 우의정 겸 수문관대제학에 이어 좌의정 겸 이조판사를 지낸 다음, 금천부원군에 진봉(進封)되었다.
65) 鳳頭山 金提(봉두산 금제) - 李荇
오동나무잎는 시들어 떨어지고 / 梧枝己凋落
대나무 열매는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 / 竹實爲誰存
봉황의 수컷은 그리운 생각에 갈 곳 없고 / 鳳去空懷想
높은 봉우리 넓은 땅에 솟아있네 / 高罔揷厚坤
이행 [李荇, 1478~1534] 본관 덕수(德水). 자 택지(擇之). 호 용재(容齋)․청학도인(靑鶴道人). 시호 문정(文定). 1495년(연산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고 검열(檢閱)․전적(典籍)을 지냈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응교(應敎)로서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충주에 유배, 이어 함안(咸安)에 이배(移配)되고 이듬해 거제(巨濟)에 위리안치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교리(校理)에 기용되고, 이듬해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14년 사성(司成)이 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하고 이듬해 대사간이 되어 신진사류(新進士類)인 박상(朴祥)․김정(金淨) 등이 중종의 원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상소하자 이를 반대하였다. 1517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신진사류의 득세로 중추부첨지사로 좌천되자 사직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趙光祖) 일파가 거세되자 부제학이 되고, 이어 대제학․공조참판․이조판서를 거쳐 1527년 우의정에 올라 대제학을 겸하였다. 1529년 《여지승람(輿地勝覽)》 수찬당상(修撰堂上)이 되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찬진(撰進)하였다. 이듬해 좌의정이 되어 김안로(金安老)를 논박하다가 중추부판사로 전직되고, 이어 함종(咸從)에 귀양가서 죽었다. 문장에 뛰어나고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였다. 후에 신원(伸寃)되고 중종 묘정(廟庭)에 배향, 문헌(文獻)으로 개시(改諡)되었다. 문집에 《용재집(容齋集)》이 있다.
66) 題畵(제화) - 金淨
-그림보고 지은 시
소상강에 쏴아 비내리고 / 淅淅湘江雨
대나무 숲이 어럼풋이 보이네 / 依?班竹林
이때를 그리기 어려우니/ 此時難寫得
그날 두 왕비의 마음이니/ 當日二婢心
67) 贈僧道心(중승도심) - 金淨
비로봉꼭대기 해가지고 / 落日毗盧頂
동쪽 바다는 하늘과 멀고도 어두운데 / 東溟杳遠天
푸른암자에 불켜 잠을 청하니 / 碧巖鼓火宿
푸른연기 소매에 스며드네 / 聯袂下蒼烟
68) 佳月(가월) - 金淨
아름다운 달은 거듭 구름에 가리어 / 佳月重雲掩
멀고 멀리 아득하게 근심 빛을 띄고 / 迢迢瞑色愁
맑은 빛은 기다리지 못하고 / 淸光不可待
한밤 중에 강가의 누각에 의지하노라 / 深夜倚江樓
김정 [金淨, 1486~1520] 본관 경주. 자 원충(元). 호 충암(菴). 시호 문간(文簡). 10세 전에 사서(四書)에 통하고, 1504년(연산군 10) 사마시에 합격, 1507년(중종 2)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정언(正言)․순창군수 등을 지냈으며, 담양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과 함께 폐비 신씨(愼氏)를 복위시키고자 상소하였으나 각하되고 유배당하였다. 1516년(중종 11) 다시 등용되어, 부제학(副提學)․동부승지(同副承旨)․도승지(都承旨)․이조참판(吏曹參判)․대사헌(大司憲)․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미신타파․향약(鄕約) 시행 등에 힘썼으나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에 제주에 안치되었다가 뒤에 사사(賜死)되었다. 시화(詩畵)에 능하였다. 문집에 《충암문집》, 저서에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 등이 있다.
69) 自輓(자만) - 奇遵
-스스로 죽음을 애도한 시
해가지니 하늘은 검고/ 日落天如黑
산의 한밤중 골짜기에는 구름 속 같네 / 山深谷似雲
군신으로 천년이나 지내고자 했건만 / 君臣千載意
슬프게도 외롭게 있노라 / 怊愴一孤墳
기준 [奇遵, 1492~1521] 본관 행주(幸州). 자 경중(敬仲). 호 복재(服齋) ․덕양(德陽). 시호 문민(文愍).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514년(중종 9) 별시문과에 응시하여 병과(丙科)로 급제하였으며, 사관(史官)을 거쳐 1516년 저작(著作)으로 천문예습관(天文隸習官)을 겸했고, 수찬(修撰)을 지낸 후, 시강관(侍講官) 등에 임명되었으며, 1519년 응교(應敎)가 되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온성(穩城)에 유배되었다가 유배지에서 교살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으로 온성(穩城)의 충곡서원(忠谷書院), 아산(牙山)의 아산서원(牙山書院), 종성(鐘城)의 종산서원(鐘山書院), 고양(高陽)의 문봉서원(文峰書院)등에 각각 배향되었다. 저서에 《덕양유고(德陽遺稿)》 《무인기문(戊寅記聞)》 《덕양일기(德陽日記)》 《복재문집》 등이 있다.
70) 題壁(제벽) - 崔壽치
연못은 윤택하고 물고기와 용의 나라 / 水澤魚龍國
산림은 새와 짐승의 집이요 / 山林鳥獸家
밝은 달아래 외로운 배의 나그네 / 孤舟明月客
어디서 이 생애를 살겠는가 / 何處是生涯
71) 輞川圖(망천도) - 崔壽치
가을날의 서쪽 산봉우리는 / 秋日下西岑
먼 나무에 어두운 연기가 생기고 / 暝烟生遠樹
짧은 교량의 넓이는 수건만하고 / 短橋兩幅巾
누가 망천의 주인인가 / 誰是輞川主
72) 送白光勳還鄕(송백광훈환향) - 林億齡
-백광훈이 고향으로 감을 전송하며
강의 달은 둥글다가 기울고 / 江月圓復缺
매화가 떨어졌다가 핀다네 / 庭梅落又開
봄이 왔건만 돌아올수 없으니 / 逢春歸未得
홀로 망향대에 오르네 / 獨上望鄕臺
73) 鷺 - 林億齡
나는 물가 누각에 의지하였고 / 人方憑水欖
백로는 또한 모래여울에 이른다 / 鷺亦立沙灘
흰 머리는 비록 서로 비슷하나/ 白반雖相似
나는 한가해도 백로는 한가하지않구나 / 吾閒鷺未閒
임억령 [林億齡, 1496~1568] 본관 선산(善山). 자 대수(大樹). 호 석천(石川). 해남(海南) 출생. 1516년(중종 11) 진사가 되고 1525년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1545년(명종 즉위) 금산군수 때 을사사화가 일어나 소윤(小尹)인 동생 백령(百齡)이 대윤(大尹)의 선배들을 내몰자 자책을 느껴 벼슬을 사직하고 해남에 은거했다. 1552년 동부승지에 등용되어 병조참지를 지내고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557년 담양부사가 되었다. 동복(同福) 도원서원(道源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석천집(石川集)》이 있다.
74) 贈人(증인) - 朴繼美
떨어지는 꽃은 봄이 저물어감을 알고 / 花落知春暮
술동이 비니술이 나했음을 알았네 / 樽空覺酒無
세월은 백발을 재촉하고 / 光陰催白반
아끼는 의복 전당잡히는 일을 애석히 생각지마라 / 莫惜典衣沽
75) 春晩(춘만) - 鄭鎔
술 방울은 뒤에 봄새의 노곤한 졸음을 부르고 / 酒滴春眠後
꽃잎이 발 앞에 힘껏 나르고 / 花飛簾捲前
인생은 얼마나 능하는가 / 人生能幾許
비오는 중의 하늘을 슬퍼하면서 바라보노라 / 悵望雨中天
76) 秋懷 (가을철에 느끼어 일어나는 갖가지 생각)
․ 鄭鎔 : 이조 중종때 사람.
자(字)는 백간(百鍊) 시호는 문헌(文獻).
정용은 요절하여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허균과 친한 사이였기에 허균의 저작에 그의 일화가 많이 소개되어 있다고 한다.
菊垂雨中花(국수우중화), 국화꽃 빗속에 드리워졌네,
秋驚庭上梧(추경정상오). 가을은 뜰 가 오동잎 놀라게 하네.
今朝倍惆悵(금조배추창), 오늘 아침 마음이 더욱 서글퍼짐은,
昨夜夢江湖(작야몽강호). 어젯밤 배 띄워 논 꿈의 탓인가.
【주제 : 가을의 서글픔을 노래한 시.】
∴ 감상 : 가을의 국화꽃이 비를 맞고 빗방울을 머금은 채 드리워져 있고 이제는 가을도 깊어가 뜰 앞에 단풍진 오동잎도 뚝뚝 떨어지고 있으니 쓸쓸한 느낌이 든다. 어쩐지 오늘 아침에는 시들어 가는 국화꽃과 떨어지는 오동잎을 바라보고 있을 때 슬픈 생각이 몇 배나 더 가슴 깊이 사무치고 있는데, 이것이 어젯밤 꿈에 강호에 배를 띄워 한없이 떠가는 꿈을 꾼 탓으로 인생의 허무를 느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77) 白雲溪 統營 (통영의 백운계)
・ 崔淑生<1457(세조3)~1520(중종15)>
자(字)는 자진(子眞). 호(號)는 충재(忠齋)
대표적으로는[충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白雲間渡水(백운간도수), 백운계 사이에 물을 건너니,
有時伴我行(유시방아행). 때때로 나를 짝해 흘러가도다.
好去作飛雨(호거작비우), 잘 흘러가 날리는 비가 되어,
一世乾坤淸(일세건곤청). 이 한세상 하늘과 땅은 맑게 되도다.
【 감상 : 風流(풍류), 자연 속에서 삶을 즐겨 사는 내용의 시. 】
78) 醒心泉 統營 (통영의 성심천)
・崔淑生 위의 시에서 참조.
何以醒我心(하이성아심), 어찌해야 내 마음 맑게 할 것인가,
澄泉皎如玉(징천교여옥). 저 샘물 구슬처럼 티 없이 맑아라.
坐石風動裙(좌석풍동군), 돌에 앉으니 바람이 옷깃을 펄럭이고,
挹流月盈掬(읍류월영국). 물을 뜨니 달이 손바닥에 떠 있어라.
【 주제 : 성심천의 맑은 물처럼 자신의 마음이 맑아지기를 바라고 있다. 】
∴ 감상 : 어떻게 하여야 성심천의 맑은 물처럼 내 마음의 흐린 것을 맑게 할 수 있을까. 참으로 성심천의 샘물이 맑기가 구슬같이 티가 하나도 없다. 그 맑은 성심천을 돌에 앉아서 바라보고 있는데 샘물에서 바람이 일어나 내 옷자락을 펄럭이고 있다. 하도 물이 깨끗하여 두 손바닥을 펴고 손바닥으로 물을 떠서 바라보니 밝은 달이 손바닥에 괴어 있는 물에 떠 있다.
79) 題沖庵詩卷(충암의 시에)
・ 金麟厚<1510(중종5)~1560(명종15)>. 조선 중기의 학자 ・ 문신.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또는 담재(湛齋). 저서로는 [하서집]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來從何處來(래종하처래), (오기는) 어느 곳으로부터 왔다가,
去向何處去(거향하처거). (가기는) 어느 곳을 향하여 가는 가.
去來無定縱(거래무정종), 오고가는 것이 정처 없으니,
悠悠百年許(유유백년허). 아득하여라. 백년의 계획이여.
【 주제: 인생무상을 노래함. 】
∴감상 : 구름처럼 떠돌다 구름처럼 흩어지는 것이 인생이다. 백년 인생 덧없는데, 꿈만 꾸다 스러지는구나. 돌아보면 사는 일이 참 덧없고 부질없고, 뜻대로 된 일이 없다. 돌이켜보면 아쉽고, 생각하면 서운함이 드러난다.
80) 次忠州望京樓韻 ( 충주 망경루 운에 차운하다. )
・尹潔 자는 장원(長源), 호는 성부(醒夫)
遠客思歸切(원객사귀절), 먼 나그네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 간절하여,
登樓北望京(등루북망경). 누에 올라 북으로 서울을 바라보네.
還看江上鴈(환간강상안), 도리어 강가의 기러기를 보니,
秋盡又南征(추진우남정). 가을이 끝나 또 남으로 날아가는구나.
【 감상 : 향수,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지은 시. 】
81) 驪江(려강)
・ 羅湜<?~1546(명종1)>. 자는 장원(長源), 호는 장음정(長吟亭).
본관은 안정(安定), 을사년에 화(禍)를 입다.
저서로는[장음정집]이 있다.
日暮滄江上(일모창강상), 해 저문 푸른 강가에,
天寒水自波(천한수자파). 추운 이 날에 물결이 절로 이네.
孤舟宜早泊(고주의조박), 외로운 배는 일찍 대어야 하리,
風浪夜應多(풍랑야응다). 오늘 밤에는 풍랑이 많으리라.
【 감상 : 근심이 있어 마음이 심란하여 뒤숭숭함을 적은 시.】
82) 山寺 (산사)
・ 李達<1539(중종 34)~1612(광해군 4)>. 조선 중기의 시인.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
시집으로 제자 허균이 엮은[손곡집](6권1책)이 있다.
山在白雲中(산재백운중), 산이 흰 구름 속에 있는데,
白雲僧不掃(백운승불소). 흰 구름을 중이 쓸어내지 않았네.
客來門始開(객래문시개), 객이 와서 문을 비로소 여니,
萬壑松花老(만학송화노). 온 산골짜기에 송화 가루 날리네.
【 주제: 절에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사는 신선 같은 중의 생활을 노래. 】
∴ 감상 : 절이 깊은 산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어 항시 구름 속에 절이 묻혀 있다. 이 흰 구름이 감돌고 있는 절속에서 중은 먼 선경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곳에 찾아오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문이 항시 닫혀 있어 밖에 나가지 않고 있는데, 때마침 객이 찾아와 문을 열고 비로소 나가보니 골짜기에는 겨울도 지나고 봄도 지나 여름이 되어 송홧가루가 다 떨어져 가고 있지 않은가,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 도를 닦는 중이 부럽기만 하다.
83) 題金養松畵帖( 김양송의 화첩에다 씀. )
・ 李達 위의 시에서 참조.
一行兩行雁(일항양항안), 한 줄 두 줄로 나는 기러기,
萬點千點山(만점천점산). 만 점 천 점으로 산은 놓였네.
三江七澤外(삼강칠택외), 삼강(三江) 칠택(七澤)의 바깥.
洞庭瀟湘間(동정소상간). 동정호와 소상(瀟湘) 사이로 구나.
【 주제 : 병풍에 그려진 그림을 감상하면서 읊은 시. 】
∴ 감상 : 양송당(養松堂) 김시(金禔)가 소장한 그림을 보고 지은 시다. 서술어 하나 없이 명사로만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이 시를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면 하늘엔 V자 편대, 또는 일(一)자 편대를 이루어 기러기 떼가 날아간다. 기러기 등 아래로 천 점일까 만 점일까, 끝없는 연봉들이 구름 위로 떠 있다. 산만 많은 것이 아니라, 강도 많고 호수도 많다. 저 강은 어디고, 저 호수는 어디일까? 가을날 기러기들이 찾아가는 곳이니 산 높고 물 맑은 강남 땅, 동정호와 소상강 언저리쯤 될 모양이다. 생각만 해도 아련하다.
84) 舟過楮子島向奉恩寺(배로 저자도를 지나며 봉은사를 향하여)
・ 鄭𥖝 <1505(연산군11)~1549(명종4)>. 자는 사결(士潔).
호는 북창(北窓). 본관은 온양(溫陽).
그의 저서로는[용호비결],[정북창방]을 편찬했다고 한다.
孤煙橫古渡(고연횡고도), 외로운 저녁연기 옛 나루에 비꼈고,
落日下遙山(낙일하요산). 해가 저물어 먼 산에 지네.
一棹歸來晩(일도귀래만), 노 저어 늦게 서야 돌아오니 ,
招提香靄間(초제향애간). 저 절은 아득히 놀 속에 있다.
∴ 감상 : 배타고 저자도를 지나 봉은사를 향해 가며 본 풍경이다. 강 건너 나루가 잘 보이지 않는다. 한 떼의 안개가 배 앞을 막아선다. 어디다 배를 대나. 난감하다. 노 젓는 소리 삐걱대고, 배는 안개 속으로 들어간다. 고개 돌려 보니 먼 산 너머로 해가 떨어진다. 안개가 감춘 나루를 찾느라 뱃길은 자꾸만 더뎌지는데, 봉은사는 배에 내려서도 한참 길이다. 외롭고 쓸쓸한 것이 인생길이다. 즉, 자연과 벗 삼아 자연에 무쳐 사는 삶 을 지은 시.
85) 山中(산중)
․李珥 <1536(중종31)~1584(선조17)>. 조선 중기의 학자, 정치가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 재(愚齊). 그는 주자학의 핵심을 간추린 [성학집요]아동교육서[격 몽요결], 기자의 행적을 정리한[기자실기]의 대표적인 저서가 있다.
採藥忽迷路(채약홀미로), 약을 캐다가 문득 길을 잃었는데,
千峰秋葉裏(천봉추엽리). 수많은 봉우리 가을 단풍 속에 들어있네.
山僧汲水歸(산승급수귀), 스님이 물을 길어 돌아가더니,
林末茶烟起(림말다연기). 숲 끝에 차 달이는 연기 일어나는 구나.
∴ 감상 : 약초를 캐러 산에 가다가 문득 눈앞이 황홀하여 가던 길도 잃고 바라보고 있으니 산봉우리마다 붉게 물들은 단풍잎이 불이 타듯 피어 있다. 때마침 중이 물을 길어 멀리 돌아가기에 무심코 바라보니 나뭇가지에서 저녁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속에 절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1구에 나오는 길은 인간세계로 되돌아오는 길이다. 문득 그 돌아올 수 없는 유일한 길을 잃고, 티끌 하나 없는 청정세계(부처의 세계)에 놓여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오히려 그 낯선 세계에의 황홀감에 망연히 도취되어 있음이다.
86) 山城感懷( 산성에 느낀 마음. )
․李珥 위의 시에서 참조
四遠雲俱黑(사원운구흑), 사방멀리의 구름 모두 검지만,
中天日正明(중천일정명). 하늘의 해는 늘 밝다네.
孤臣一掬淚(고신일국루), 외로운 이 신하 한 움큼의 눈물을,
灑向漢陽城(쇄향한양성). 한양 성을 향해 뿌리도다.
【주제 : 충군애민(忠君愛民)】
∴ 감상 : 구름은 조정의 간신을 이름이요, 해는 임금을 뜻한다. 충군애민(忠君愛民)의 정성이 사무친 그의 심경에서 우러나온 피눈물은 한강수를 물들였을 것이다. 역사와 자신이 처한 상황을 표현한 것으로 조정을 떠나면서 임금을 향한 충신의 마음을 드러냈다.
87)南溪暮汎(남쪽시내의 황혼의 뱃놀이)
․宋翼弼<1534(중종29)~1599(선조32년)>.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운장(雲長), 호는 귀봉(龜峰).
저서로는 시문집인 [귀봉집]이 전한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迷花歸棹晩(미화귀도만), 꽃에 취해 배 돌리기 늦었고,
待月下灘遲(대월하탄지). 달을 기다려 느릿느릿 여울타고 내려오네.
醉裏猶垂釣(취리유수조), 술에 취해 낚시질을 하나니,
移舟夢不移(이주몽불이). 배는 흘려가도(떠나가도) 꿈은 바뀌지 않네.
【주제 : 꿈은 마냥 꽃밭을 맴돌고 있는 하루의 즐거웠던 봄놀이의 미진한 여운.】
∴ 감상 : 꽃이 피어 있는 언덕을 돌아 나오다가 꽃을 구경하는 데 눈이 팔려서 노를 젓는 것도 잊고 늦어졌다. 뿐만 아니라 달이 떠올라오는 것을 보느라고 이렇게 강을 내려오는 것이 늦어졌다. 뱃속에서 술이 만취되어 낚시대를 물에 전지고 고기를 낚는다고 하지만 고기를 낚는 데에 정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경치를 구경하는 데 정신이 빠져 있기 때문에 고기가 낚아질 리가 없다. 그러기에 배는 물결 따라 떠가지만 그것도 모르고 꿈을 꾸듯 풍경에만 취하여 뱃놀이를 하게 된 것이다.
88) 偶吟(우연히 읊조리다)
・ 李後白<1520(중종 15)~1578(선조 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진(季眞), 호는 청련(靑蓮).
저서로는 [청련집]이 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細雨迷歸路(세우미귀로), 가랑비에 돌아갈 길 아득한데 ,
騫驢十里風(건려십리풍). 당나귀도 발을 절며 십리를 가네.
野梅隨處發(야매수처발), 들매화 여기저기 피어 있으니,
魂斷暗香中(혼단암향중). 그윽한 향기에 내 마음 설레노라.
【 주제 : 매화가 핀 들길을 당나귀를 타고 가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읊고 있다】
∴ 감상 : 가랑비가 내려 안개가 끼니 돌아갈 길이 잘 보이지 않는데 당나귀도 발을 절면서 십리 길을 쉬엄쉬엄 걸어간다. 그러다가 안개가 걷히어 바라보니 가랑비에 매화꽃이 지나는 곳곳마다 활짝 피어 있어 바람결에 떠오는 매화의 그윽한 향기를 맡고 있을 때마다 마음이 끊어지는 듯 설레고 있다.
89) 秋思(가을날의 생각)
・ 楊士彦<1517(중종 12)~1584(선조 17)>. 조선 중기의 문인 ․ 서예가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응빈(應聘). 호는 봉래(蓬萊)․완구(完邱) 창해(滄海)․해객(海客). 문집으로 《봉래집 蓬萊集》, 그가 지은 <미인별곡>이 현재 연세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孤煙生曠野(고연생광야), 한줄기 연기는 넓은 들에서 생겨나고,
殘日下平蕪(잔일하평무). 남은 해는 지평선으로 지고 있네.
爲問南來鴈(위문남래안), 남쪽에서 날아온 기러기에게 묻노니,
家書寄我無(가서기아무). 우리 집에서 부친 편지는 없는 가.
【 주제 : 가을 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며 고향생각에 잠긴 노래】
∴ 감상 : 아침을 짓는 연기는 넓은 들 가운데 있는 농가에서 퍼져 흐르고 새벽달은 지금 하늘 끝 벌판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객지에 떠도는 이 몸이 고향 생각이 그리워 남쪽에서 날아온 기러기에게 묻는다. 우리 집에서 부쳐 온 내 편지가 없는가. 있으면 빨리 전해 다오. 고향 일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구나.
90) 雪後偶吟(눈 온 뒤에 우연히 읊조리다.)
․ 李純仁<1533(중종 28)~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백생(伯生)․백옥(伯玉), 호는 고담(孤潭). 문장에 뛰어나 당시 이산해(李山海)․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 등과 함께 ‘8문장’ 이라고 불렸다. 저서로는 《고담집》5권이 있다.
古郭人聲絶(고곽인성절), 옛 성곽에 사람의 소리는 끊어졌는데,
寒鴉動不飜(한아동불번). 겨울 까마귀 움직여도 펄럭이지 않는구나.
還如去年雪(환여거년설), 도리어 지난해의 눈이,
寂寞臥江村(적막와강촌). 적막하게 강촌에 누워 있는 듯 하구나.
∴ 감상 : 4구에서 나온 것과 같이 적막함과 함께 쓸쓸함을 나타낸 시.
91. 送人(송인)
一尊今夕會 오늘 저녁 모임에 술잔을 마련했으니
何處最相思 그 어디가 가장 그리운가.
古驛逢明月 옛 역에서 밝은 달을 만나니(대하니)
江南有子規 강 남쪽에 두견새 우네.
李純仁 (이순인) 1543(중종38)~1592(선조25)
조선의 문인. 자는 백생(伯生)·백옥(伯玉), 호는 고담(孤潭), 현감(縣監) 홍(泓)의 아들.
-감상 : 친구를 떠나보내며 아쉬워함.
92. 黃白菊(황백국)
正色黃爲貴 바른 색으로 노랑이 귀하지만
天姿白亦奇 천연스런 흰색 또한 기이하구나.
世人看自別 세상 사람들은 비록 다르게 보지만
均是傲霜枝 서리에 오만하게 핀 것은 둘이 같다네.
高敬命 (고경명) 1533 - 1592
본관 장흥(長興). 자 이순(而順). 호 제봉(霽峰)·태헌(苔軒). 시호 충렬(忠烈).
-감상 : 국화의 기상.
93. 湖堂朝起(호당조기)
江日晩未生 강 위에는 아직 해 뜨지 않았고
滄茫十里霧 십리나 안개 자욱하다
但聞柔櫓聲 다만 노 젖는 소리 들리는데
不見舟行處 지나가는 배는 보이지 않았네.
姜克誠 (강극성)
본관 진주. 자 백실(伯實). 호 취죽(醉竹). 강희맹(姜希孟)의 4대손이다.
94. 偶吟(우음)
花開昨夜雨 지난 밤 비에 꽃이 피더니
花落今朝風 오늘아침 바람에 꽃잎이 떨어졌네.
可憐一春事 가련하다 한해 봄 일이
往來風雨中 비바람 가운데 오고 가는구나.
宋翰弼 (송한필)
조선조 선조 때의 문인 성리학자 호는 운곡(雲谷)
송익필(宋翼弼 : 호는 구봉(龜峯))의 아우이다.
-감상 : 봄이 지나감을 아쉬워함.
95. 贈僧(증승)
白首龍驤衛 늘그막에 말직 용양위 되어
官閑晝掩扉 벼슬이 한가해서 낮에 사립문을 닫아두었네
僧從三角至 삼각산 중이 찾아와
求我五言歸 나에게 오언시 얻어 돌아갔네.
李忠綽 (이충작) 1521(중종16)∼1577(선조10)
조선의 문신. 자는 군정(君貞), 호는 낙빈(洛濱)·拙庵(졸암), 臨瀛大君(임영대군)의 후손, 唐恩 副守(당은부수) 徽(휘)의 아들.
96. 弘慶寺(홍경사)
秋草前朝寺 가을 풀 우거진 곳에 옛 절이 묻혀있고
殘碑學士文 깨진 비석엔 선비들의 글귀만 남았네.
千年有流水 천년 세월을 두고 시냇물은 흐르고
落日見歸雲 석양에 서서 떠나는 구름만 바라보네.
白光勳 (백광훈)
본관 해미(海美), 자 창경(彰卿), 호 옥봉(玉峯)·기봉(岐峰)이다.
97. 題畵(제화)
簿領催年鬢 귀밑에 털이 나이를 재촉하는데 이력이 나고
溪山入畵圖 산과 시냇물 그림에 들어있네.
沙平舊岸是 오래된 언덕은 평평해 지고
月白釣船孤 밝은 달 고깃배는 외로이 있다.
98. 天王峰(천왕봉)
請看千古鍾 청컨대, 천고종을 보라.
非大抇無聲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네.
萬古天王峰 만고의 천왕봉
天鳴猶不鳴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산.
조식(曺植) 본관 창녕(昌寧). 자 건중(楗仲). 호 남명(南冥). 시호 문정(文貞).
99. 偶吟(우음)
人之愛正士 사람들이 바른 선비를 아끼는 것은
好虎皮相似 호랑이 가죽을 좋아함과 같이
生前欲殺之 살아있을 땐 잡아 죽이려하고,
死後方稱美 죽은 뒤에 아름답다고 떠들어 댄다.
100. 夜雨(야우)
蕭蕭落葉聲 우수수 낙엽 지는 소리를 듣고
錯認爲疎雨 소나기 내리는 줄 잘못 알고서
呼童出門看 아이더러 밖에 나가 보라 했더니
月掛溪南樹 시냇물 남쪽 나무 끝에 달만 걸려 있다네.
鄭澈 (정철)
송강 정철(松江 鄭澈 : 1536~1593)은 조선 선조(14대) 때의 명신이면서 문인으로서 자는 계함, 호는 송강이며, 시호는 문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