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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소비문화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맺어야 할 열매(요 15:8-10, 눅 6:32-36)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를 소비사회라고 부릅니다. 소비사회의 문화는 당연히 소비문화입니다. 그 특징은 바로 자기이익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게 하는 자기중심적인 문화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소비문화가 얼마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고, 또 사랑의 대상인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을 비뚤게 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주부에게 유치원에 다니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딸아이가 소풍 가는 날, 딸의 가장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아이의 엄마가 직장일로 바쁜 것 같아 그 아이 것까지 도시락을 함께 싸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그 엄마가 고맙다는 뜻으로 자기 딸에게 돈 천원을 들려 보내 왔더랍니다. 천원을 받은 주부가 느꼈을 황당함은 상상이 가시죠?
어떤 박람회가 열렸습니다. 독특한 아이디어로 발명한 물건들만 선보이는 박람회였습니다. 여기에 기발한 기계가 출품되었습니다. 기계 이름은 ‘배우자 자동판매기’입니다. 돈을 넣고 자기가 원하는 이성을 고르면 며칠 후 그를 만나 파트너로 삼을 수 있는 장치입니다. 어느 결혼 중개업체에서 개발한 기계였습니다. 이 기계가 당연히 우승을 했겠죠? 그런데 놀랍게도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다른 기계가 우승을 차지했는데,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배우자를 집어넣으면 현금이 나오는 반납기’였습니다.
우스갯소리이지만,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발상만은 아닙니다. 2009년에 골프의 황제라 불리는 타이거 우즈가 불륜 사건으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한두 명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건에서 가장 관심을 끈 것은 타이거 우즈의 복잡한 여성 편력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혼을 하게 될 경우 그의 부인이 받게 될 위자료 액수가 얼마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2010년 그의 아내가 이혼을 하며 받은 액수는 5억 달러(6천억 원)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호주의 언론 재벌 머독이 치른 위자료 17억 달러(2조 260억 원)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습니다. 그들의 아내의 입장에서는 남편을 반납하고 엄청난 거액의 돈을 받은 셈입니다.
다소 극단적인 예를 들긴 했습니다만 마음을 담은 작은 관심과 가장 내밀한 부부관계 조차 돈으로 환산하려는 요즘 세태를 반영해주는 이야기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사람에 대한 순수한 마음과 부부관계 같은 깊은 관계조차 돈으로 셈이 되는 세태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며 키워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키워가려면, 그 사랑을 방해는 요소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우리의 문화 속에서 찾아보고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키우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요소들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세 가지로 생각해봅시다.
먼저 “자기이익을 부추기는 문화”를 들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에게 전문적이든 아니든,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 경제입니다. 경제라고 할 때 학문적인 의미에서의 경제보다는, 돈에 대한 관심을 말합니다. 돈이 갖는 힘이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커 보입니다. 돈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우리 생활 중 돈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로 커져 있습니다. 돈으로 물건/서비스를 사고파는 시장중심의 경제 행위는 우리의 사고방식마저도 지배합니다. 가장 위험한 특성은 바로 자기이익을 추구하라고 부추긴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랑의 대상인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을 비뚤어지게 합니다. 모든 인간관계를 자기이익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바라보게 합니다. 즉 다른 사람들을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가진 사람으로 보기보다는, 자신의 드라마에서 자기 이익을 위해서 잠시 등장했다 사라지는 주변인물(엑스트라)로 보게 합니다. 아니면 내가 먹고사는데 나의 이익을 위협하는 경쟁자 정도로 봅니다.
이러한 시대, 우리에게 주는 만큼만 남들에게 관심을 갖도록 만드는 사회 속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대상으로 본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사랑을 키우지 못하게 하는 요소는 바로 모든 가치를 돈으로만 매기려는 문화입니다.
상품은 물론이고 사람까지 돈으로 값을 매기는 거래관계는 하나님의 사랑을 키우는 일에 큰 걸림돌이 됩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숫자로 사람의 수준과 가치를 매기는 일에 익숙해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여러 가지 숫자들을 댈 때, 설득력이 높아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아이 이번에 1등 했어요!’ 이 한 마디로 자식 자랑 판에서 한방으로 끝내버립니다. 우리나라 남성들이 4, 50대가 넘으면 전립선에 문제가 생긴다는 뉴스에는 별 신경 안 쓰다가, 직접 병원에 가서 PSA 수치가 6.3이라는 결과(3.0 이하가 정상)를 보고는 조심하게 됩니다. 마트에 가서 살 생각이 없었는데, ‘반값 대박 할인’이라고 붙은 상품을 보면 ‘사는 게 절약하는 것이다.’하며 사게 됩니다.
사람의 가치를 가격으로 매길 수 있을까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연구소가 사람의 신체를 원소별로 분해하는 실험을 했답니다. 그랬더니 성인 남자의 몸에서 나온 것이 한 줌의 소금, 설탕 한 컵, 쇠못 하나 만들 수 있는 정도의 철분, 그리고 97리터의 물이 전부였답니다. 이 모두의 가격은 현재의 가격으로 3,300원의 가치랍니다. 2009년 대구에서는 어느 젊은 남녀가 병원비 마련을 위해 갓난아기를 병원에 200만원을 받고 팔았습니다. 만일 아이를 정상적인 과정을 통해 해외 입양을 시킬 경우(미국 가정이 한국 아이를 입양할 경우), 17,215달러를 냅니다. 한국 아이가 가장 똑똑해서 비싸게 받는 가격이랍니다.
연예인들이나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스포츠 스타들은 또 다르죠. 레알 마드리드의 간판스타인 호날두 하면 뭐가 떠오릅니까? 물론 그의 뛰어난 실력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떠오르는 것은 천문학적인 그의 몸값입니다. 2009년 당시 그의 연봉이 1,130만 파운드(약 210억 원)로, 매일 5천만 원 이상을 번 셈입니다. 물론 이것도 타이거 우즈 같은 프로 골퍼들이나, 메이저 리그의 스타플레어들에 비하면 적은 액수입니다. 빌 게이츠는 길 가다 100달러까지 지폐를 주울 필요가 없답니다. 돈을 줍는데 2초 정도 걸리는데 비해, 그가 1초당 버는 돈이 평균 150달러 정도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기술과 능력에 가격을 매기는 소비사회는 우리 삶에 세 가지의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1) 사람들의 가치를 그들이 받는 월급과 동일시합니다. 변호사가 공장 여공보다 더 가치 있고 존경받아야 한다고 자연스레 생각합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우리나라와 아르헨티나가 붙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대표선수는 바로 리오넬 메시입니다. 그를 마크한 한국 선수는 김정우. 메시의 연봉은 142억 원이고, 김정우(상무)의 연봉은 95만원이었습니다.
2) 이런 시스템은 자동적으로 가격이 매겨지지 않는 사람들과 물건들을 하찮은 존재로 여깁니다. 예를 들어, 전업주부는 그들이 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월급을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의 일(가사)과 전업주부들은 전혀 눈에 띠지 않는 존재가 됩니다. 주부들 스스로도 자신의 일을 하찮게 여겨, 가장 우울증이 많이 나타나는 직업군이라고 합니다.
3) 우리의 기술과 능력을 공동체에 얼마나 기여하는지의 정도가 아니라, 주로 돈을 얼마나 받느냐 혹은 벌게 해주느냐로 따집니다. 오늘날 직업을 선택할 때, 좋아하거나 보람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얼마나 월급을 많이 주느냐에 따라 선택합니다. 그 결과 우리의 능력과 재능, 인격은 또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사랑을 키우는 일을 방해는 요소는 바로 거래관계입니다.
자기이익 중심의 거래관계는 가장 소중한 인간관계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모든 사람 및 모든 관계를 도움이 되는 사람들과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로 나누고, 도움이 안 되는 사람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관심해 집니다. 이런 이유로, 어떤 이들은 자동차나 집을 사람보다 더 아낍니다. 모 TV에 고민의 사연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한번은 자동차 튜닝에 푹 빠진 남편의 사연을 들고 나온 부인이 1등을 했습니다. 사연인즉슨, 남편이 자동차 튜닝하는 데에는 몇 천만 원도 아끼지 않으면서 가족들을 위해서는 돈을 인색하게 쓴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면 가족보다 자동차에게 돈을 쏟아 붓는 것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어떤 관계든지 더 이상 “내 필요를 채워주지 못하면” 얼마든지, 언제든지 끝장낼 수 있다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고는 요즘 교회 안에도 가득합니다. 하나님과 교회도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지의 여부’에 따라 평가합니다. 하나님조차도 자기이익에 따라 평가한다면 어떻게 참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신자들도 예수님에 대한 헌신을 소비자가 물건을 구매하는 것과 같이 생각합니다. 교회가 자신들의 필요에 맞는 프로그램과 서비스를 준비하여 자기들에게 제공했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런 필요에 맞춰주지 못하면, 쉽게 교회를 떠나거나 문제를 제기합니다. 교회도 이런 기호에 맞춰 의도적으로 마케팅 전략을 도입하고 그런 사고에 익숙한 소비자들에게 상품을 팔듯이 여러 가지 프로그램과 서비스를 내놓고 “장사”를 합니다.
흔히 소비사회로 일컬어지는 오늘날의 사회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소비하는 그것이다”라는 말처럼 우리는 우리가 소비하는 것으로 우리 자신을 확인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모 자동차 광고는 이렇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라고 묻는 친구에게 나는 ‘그랜져!’라고 대답했다.” 마찬가로 우리 그리스도인도 “기독교적 상품”을 소비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모든 사람이 우리를 예수의 제자로 알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주변 문화의 영향을 받아 특정한 기독교 음악, 책, 연주회, 세미나, 티셔츠, 물건을 소비하는 소비자가 되는 데서 우리가 기독교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요즘 신앙생활 어때?’라고 묻는다면, ‘나 요즘 무슨 교회 다녀!’라고 대답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거래관계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소비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키워갈 수 있을까요?
먼저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으로 우리는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예배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잠잠히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그분만이 영광 받으시기를 바라보는 것이 바로 예배의 핵심입니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거래관계에 오염된 사회 속에서 예배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는 영적인 시장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오는 것은 축복을 받기 위함도 아니요, 우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함도 아니요, 오로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기 위해서입니다. 오직 우리에게 한없이 관대하심으로 은혜와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께 집중하고 그분을 바라보는 이 예배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가서 다른 사람, 돈으로 값을 매길 수도 없고, 그들이 하는 일이나 능력의 수준에 따라 가치를 다르게 매길 수 도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작품인 다른 인격체들을 진심으로 주목할 수 있게 됩니다. 예배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진심을 다해 주목할 수 있는 사람만이, 눈에 보이는 사람을 진심으로 주목하여 볼 수 있습니다.
둘째는 은혜로 주고받기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요, 우리가 가진 소유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두에 언급한 주부처럼, 직장일로 바쁜 엄마를 생각해서 배려한 도시락 싸주기가 천원이라는 돈으로 되돌아왔을 때의 황당함은 우리에게 은혜 안에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다는 것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줍니다.
어떤 실험을 했습니다. 참가자들을 모아놓고 컴퓨터 화면 안에서 구슬들을 마우스로 클릭하여 옆 바구니로 옮기는 실험입니다. 세 그룹으로 나누어 각각 보상하는 방법도 달리했습니다. 첫째 팀은 다시 각각 500원 받는 팀과 5,000원 받는 두 팀으로 나눴습니다. 둘째 그룹은 사탕을 주기로 했는데, 여기도 각각 500원짜리 사탕과 5,000원짜리 사탕을 받는 팀으로 나눴습니다. 그리고 셋째 팀은 아무런 보상도 주지 않기로 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돈을 받기로 두 그룹 중 5,000원 받는 팀이 더 많은 구슬을 옮겼습니다. 돈의 액수만큼 일을 했습니다. 둘째 그룹은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사탕이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셋째 그룹은 어땠을까요? 놀랍게도 앞의 두 그룹보다 더 많은 구슬을 옮겼습니다.
비슷한 실험이 있었는데, 자동차에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데, 지나가는 행인에게 도움을 받는 실험이었습니다. 이때, 그냥 도와달라고 하는 방식과 1달러를 줄 테니 도와달라는 방식, 두 가지로 실험을 했습니다. 어느 쪽이 더 많이 도와줬을까요? 순수하게 도움을 구한 경우에는 흔쾌히 응했던 반면, 돈을 주면서 흥정하듯 한 경우에는 거의 다 거절을 당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란 쉽게 말해서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풍성하게 주셨고, 우리는 하나님께 선물을 드림으로써 감사를 표하며, 서로에게 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됩니다. 이게 신앙의 기본입니다.
마지막으로 올바른 청지기 의식을 회복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청지기 의식이란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라는 의식입니다. 청지기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신다면 어떻게 하실 것인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재산이나, 우리의 자녀들조차도 “이것(아이들)들을 어떻게 잘 사용할까?”보다는, “예수님이라면 이것을 어떻게 하셨을까?”를 묻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자기이익 중심에서 타인지향적인 사고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찢어지게 가난하여 다 굶고 있는데 예수님이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실까요?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시고, 전능하시다면, 왜 우리 주변에는 그렇게 문제투성이인 사람들이 많은 걸까? 왜 어려워하며 가난하게 사는 이들이 많은 걸까? 왜 하나님은 그들의 가난을 직접해결하지 않으실까? 왜 하나님은 그들의 어려움과 문제를 빨리 해결해 주지 않으실까?” 왜 하나님은 직접 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청지기로 삼으셨을까요? 결과만 놓고 따지자면 그런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청지기로 사용하시는 방식을 택하셨습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긍휼을 베푸시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와 오래 참음을 베푸시며, 우리를 통해 힘쓰고 애쓰는 관심을 나누기를 선택하심으로써, 그 일에 참여하는 우리가 더 깊이 더 분명하게 하나님을 닮을 기회를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벧후 1:3-8)
이렇게 하나님의 청지기, 하나님의 대리인이 되는 수고와 애씀 속에서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만 예수님 안에 있는 그 풍성한 열매, 우리가 이제 맺고자 하는 풍성하고 맛있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