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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오스카 와일드의 삶과 문학
1) 새로운 유미주의자의 등장
시인, 소설가, 극작가, 평론자, 댄디(dandy), 그리고 유미주의(aestheticism)의 전도사로서 일세를 풍미했고, 시대의 이단아로서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규범을 조롱하며 19세기 후반 영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오스카 와일드는 1854년 10월 16일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윌리엄 로버트 윌스 와일드 경(Sir William Robert Wills Wilde)은 아일랜드 왕실 아카데미 회원이었던 저명한 의사이자, 여행기,의학, 고고학, 민속학 등의 분야에 걸쳐 여러 저작을 집필한 저술가였다. 그리고 어머니 제인 프란체스카 엘지 와일드(Jane Francesca Elgee Wilde)는 결혼 전에는 팸플릿을 만들어 아일랜드의 자유를 위해 투쟁할 것을 촉구한 열정적인 민족주의자였는가 하면, 나중엔 젊은 예술가 및 지식인들이 모이는 살롱을 열기도 하고 독일 작가 빌헬름 마인홀트(Wilhelm Meinhold)의 소설 <<시도니아 폰 보르크, 수도원의 마녀 Sidonla von Bork. die Klosterhexe>> (1847)를 영어로 번역하고 스페란자(Speranza)란 필명으로 시인으로 활동하기도 한 문인이었다. 이러한 문예적인 집안 분위기 속에서 오스카 와일드는 자연스럽게 시와 그리스 고전을 읽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성장하면서 점차 미와 예술을 사랑하게 되었다.
와일드는 에니스킬렌(Enniskillen)의 포토라 왕립학교(Portora Royal School)를 다닌 후, 1871년에 장학생으로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한다. 대학에서 그는 존경하는 인물인 고대사 교수 존펜틀랜드 마하피(John Pentland Mahaffy)를 만나게 되고, 그의 영향을 받아 고대 그리스 문화에 심취한다. 그는 1874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하고 옥스포드 모들린 칼리지(Magdalen College)에 입학한다.
와일드는 옥스퍼드에 들어간 이후에도 마하피 교수와 계속 각별한 친분 관계를 유지하며 1875년과 1877년 사이에 함께 이탈리아와 그리스로 여행을 다녀왔고, 1878년에는 마하피 교수와 방문했던 이탈리아의 도시 라벤나에 대한 사적인 인상을 그린 시<라벤나 Ravenna>로 뉴디게이트 문학상(Newdigate Prize)을 수상한다. 이어 그는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 시험에 합격하고 문학사 학위를 받는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마하피 교수를 만나면서 가졌던)고전문화, 예술과 미에 대한 관심을 심화시켜 유미주의에 심취하기 시작한다. 특히 당시 문화 예술계의 저명한 인사였던 존 러스킨(John Ruskin)과 월터 호레이쇼 페이터(Walter Horatio Pater)의 문예 예술론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는다.
오스카 와일드가 문화의 혁신자라고 말했던 미술사가 러스킨은 비록 예술과 도덕의 연관성을 강조했고 1860년을 기점으로 사회개혁가로 변모했지만, 예술의 상업화에 반대하고 미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유미주의의 길을 열었다. 그리고 오스카 와일드의 유미주의와 문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페이터는 19세기 영국 유미주의의 선언 역할을 한 <<르네상스 역사 연구 Studies in the History of the Renaissance>>를 통해 '미를 위한 미', 미 그 자체를 숭배하며 유미주의 이론의 길을 열었다. 그는 미는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개별적이고 감각적인 인상, '고립된 개인의 인상'을 중시하며, 보편적이고 도덕적인 예술론을 부정했다. 이처럼 빅토리아 왕조의 지배적인 사회적 이념에 정면으로 대립했던 페이터는 자신의 이념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내용보다는 형식을 우선했다. 그에 따르면 "문체가 곧 문학이었다."
옥스퍼드에 입학했을 때 이미 유포되어 있던 이와 같은 유미주의에 심취하게 된 오스카 와일드는 곧 유미주의의 전도사가 된다. 옥스퍼드를 졸업하고 런던으로 이주한 그는 사회 및 예술 클럽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친분을 쌓으며 유미주의자로서 재기 넘치는 발언과 파격적인 의상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종교개혁보다 의상개혁이 중요하다"는 말에서 엿볼 수 있듯 그는 댄디나 유미주의자답게 그만의 화려하고 독특한 의상(반바지 차림에 까만 비단 양말, 비단 조끼, 넓은 칼라의 하얀 와이셔츠에 초록색 넥타이, 그리고 단춧구멍에 꽂은 백합이나 해바라기)을 입고 다녔다. 그렇게 새로운 유미주의자가 등장했다.
2) 문학 활동의 시작
그는 1880년 (여배우 엘렌 테리(Ellen Terry)에게 헌정한) 자신의 첫 희곡<배라, 혹은 허무주의자들 Vera:or, The Nihilists>을, 1881년 첫 시집 <<시집 Poems>>을 출간하고, 이듬해인 1882년에는 미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유미주의에 대한 강연을 한다. 길버트와 설리번의 오페라<인내Patience>의 등장인물인 번손(Bunthorne)이 여러모로 오스카 와일드를 연상시켰기 때문에<인내>의 제작자가 미국에서 공연을 홍보하기 위해 와일드를 활용하려 한 일이 그 계기가 되었다.
아무튼 그는 세관원에게 "내가 신고할 건 내 천재성밖에 없소"라는 말을 남기고 미국에 입국해, 1882년 1월 9일 뉴욕의 치커링 홀에서 '영국 예술의 르네상스(The English Renaissance of Art)'를 주제로한 강연을 성공적으로 마친다. 그 이후로 미국과 캐나다를 누비며 유미주의에 대한 강연을 통해 '예술을 위한 예술'을 역설한다. 그리고 이러한 강연에 힘입어 1883년에는 그의 첫 희곡 <베라. 혹은 허무주의자들>이 뉴욕에서 연극 무대에 올랐으나, 일주일 만에 막을 내리고 만다.
미국 순회강연을 마친 그는 그곳에서 번 돈으로 파리에서 3개월간 체류하면서 베를렌, 빅토르 위고,에밀 졸라, 알퐁스 도데, 말라르메 등을 만나 친분을 쌓고, 미국 체류 중에 만났던 인기 여배우 메리 앤더슨(Mary Anderson)을 염두에 두고 쓰기 시작한 희곡<파두아의 공작 부인 The Duchess of Padua>을 완성한다. 이 작품은 10여년 뒤인 1891년에 '구이도 페란티(Guido Ferranti)'라는 제목으로 뉴욕에서 공연된다.
3개월간 파리에서 생활할 때는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나름 풍족하게 지냈지만, 1883년 봄에 런던으로 돌아온 이후로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돈을 벌기 위해 '아메리카에 대한 개인적 인상(Personal Impression of Amwrica).' '현대 생활에서의 예술의 가치(The Value of Art in Modern Life).' 의복(Dress)' 등을 주제로 순회강연을 하고,<<팔 말 가제트 Pall Mall Gazette>>.<<드라마틱 리뷰 Dramatic Review>>,<<월드 World>>등의 잡지에 예술, 문학, 미술,연극,의상 등 다양한 문화 영역에 걸쳐 리뷰와 에세이를 기고하고, 1887년에는 자신의 뜻에 의해 '더 우면스 월드(The Woman's Woeld)'로 제목이 바뀌는 <<더 레이디스 월드 The Lady's World>>의 편집장을 맡는다.
이렇게 강연과 저널리즘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던 사이 명망 있는 법률가 가문 출신인 콘스턴스 메리 로이드(Costance Mary Lloyd)와 사랑에 빠지고, 마침내 1884년 5월 29일에 그녀와 결혼한다. 그리고 1885년과 1886년에 두 아들, 시릴과 비비언을 차례로 낳는다. 이처럼 가정을 꾸리고 한동안 행복한 듯 보였지만, 친구인 로버트 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백했듯이 천성적으로 구속당하는 것을 싫어했던 와일드는 단조로운 결혼 생활에 몹시 싫증을 느끼고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와 점차 소원해지기 시작한다.
3) 전성기
지금까지 비평이나 시, 희곡을 발표하긴 했지만, (유미주의를 표방하는) 오스카 와일드의 본격적인 창작 활동은 1887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1887년에 유머러스한 풍자와 해학이 돋보이는 우스꽝스런 유령 이야기 <캔터빌의 유령 The Canterville Ghost>과, 인간이 예속되어 있는 운명의 아이러니와 허식적인 상류사회를 풍자적으로 그린 <아서 새빌 경의 범죄 Lord Arthur Savile's Crime>를 <<더 코트 앤드 소사이어티 리뷰 The Court and Society Review>>에 발표하고,1888년 어두운 사회적 현실에 슬퍼하며 동상으로 서 있는 왕자와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제비의 이야기를 아름답고 섬세한 문체로 그린 표제작 <행복한 왕자 The Happy Prince>외 4편으로 구성된 동화집 <<행복한 왕자와 그 밖의 이야기들 The Happy Prince and Other Tales>>을 출간한다. 그리고 1890년에는 그의 유일한 장편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The Picture of Dorian Gray>>을 <<리핀콧 먼슬리 매거진 Lippincott's Monthly Magazine>>에 연재하고, 이듬해인 1891년에는 수정 보완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단행본을 비롯해 단편소설집 <<아서 새빌 경의 범죄와 그 밖의 이야기들 Lord Arthur Savile's Crime and Other Stories>>과 동화집 <<석류의 집 A House of Pomegranates>>을 출간한다. 또한 최고의 비평은 창조하는 것임을 강조한 에세이 <예술가로서의 비평가 The Critic Artist>가 수록되어 있는 문학예술 에세이집<<의향 Intentions>>을 발표한다.
1892년에는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풍속 희극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 Lady Windermere's Fan>가 연극 무대에 오르고, 이듬해인 1893년에는 <보잘것 없는 여인 A Woman of No Importance>이 초연된다. 그리고 같은 해에 와일드는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를 출간하고, 1891년 11월에서 12월 사이에 파리에서 프랑스어로 썼던 <살로메 Salome'>를 발표한다. <살로메>는 마태복음 14장 6-11절에 그려진 해롯 왕의 세례 요한 참수 사건을 바탕으로 쓴 희곡으로 '데카당스'적 분위기에 시적인 아름다움과 에로티즘이 돋보이는, 유미주의 문학의 정점에 오른 작품이다.
1894년 앨프레드 더글러스(Alfred Douglas)가 번역한 영어판에는 와일드가 경쾌한 우아함의 대가, 비현실적인 것을 불러내는 마법사라고 칭했던 화가 오브리 비어즐리(Aubrey Beardsley)의 삽화가 실렸는데, 그의 강렬하게 대비되는 흑백과 간결하고 섬세한 선을 활용해 병적이고 퇴폐적이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장면에 어울리게 살려내면서<살로메>에 하층 더 화려한 유미주의의 색채를 부여했다.
문학계에 충격을 던진 <살로메>는 성서의 이야기를 퇴폐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1892년에 런던에서 공연이 금지되고 와일드가 복역중이던 1896년 2월이 되어서야 파리에서 초연되기에 이른다.
4) 추락, 그리고 죽음
1895년 1월 3일 영국 상류사회를 유쾌하게 풍자한 희곡 <이상적인 남편 An ldeal Husband>이 초연된 데 이어, 2월 14일에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위선을 신랄하게 풍자한 풍속희극 <진지해지는 것의 중요성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이 런던에서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둔다. 이처럼 이 무렵 오스카 와일드는 최고의 문학적 성취를 이루며 문학가로서 창작의 절정기에 오르고 대단한 명성을 얻는다.
그러나 예술가로서 모든 것을 거머쥐고 앞으로 순탄할 것만 같았던 그의 삶은 너무나 갑자기 한순간에 나락으로 추락하고 만다.
<살로메>를 영어로 번역하기로 했던 앨프레드 더글러스 경과의 동성애 문제가 더글러스의 아버지인 퀸즈베리 후작에 의해 불거지면서 남색 혐으로 고소당하고 만다.1 결국 와일드는 두 차례의 재판 끝에 1895년 5월 25일 2년간의 중노동형을 선고받는다. 그는 그 사이에 친구들의 권유대로 외국으로 도피할 기회가 있었지만, 비겁자나 도망자라는 말을 듣느니 그대로 남는 편이 더 고귀하다고 말하며 그 기회를 마다한다. 결국 그는 2년간 가혹한 감옥 생활을 보냈고, 그러는 동안 가족과 전 재산을 잃고 만다.
수감 생활 중에 그는 앨프레드 더글러스에게 보내는 서한 형식의 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De Profundis>2 를 집필한다. 앙드레 지드는 이 서한을 가리켜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상처 받은 자의 울부짖음"이라며 "도저히 눈물 없이는 귀를 기울일 수 없었다"3 고 말했다.
1897년 5월 19일 와일드는 2년간의 형기를 마치고 출옥해 곧장 프랑스로 떠난다. 그리고 그동안 사이가 멀어졌던 더글러스와 화해하고, 한동안 프랑스와 이탈리아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1898년에 비참한 감옥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그의 마지막 시 <레딩 감옥의 노래 The Ballad of Reading Gaol>를 발표한다. 이 시를 발표한 이후 다시 재기를 노렸지만 이듬해인 1900년 11월 30일 파리의 알자스 호텔에서 뇌수막염으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파리의 교외 페르 라세즈 묘지에 묻힌다.
* 1, 오스카 와일드는 자신을 남색가로 불렀다는 이유로 퀸즈베리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했지만, 퀸즈베리는 무죄로 석방되고 오히려 와일드가 고소되기에 이른다.
* 2, 국내의 '옥중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 저작은 사후인 1905년에 유고 관리인이었던 와일드의 친구 로버트 로스의 손을 거쳐 상당 부분이 삭제된 채 출간된다. 그리고 로스는 1909년에 이후 50년간 공개되어서는 안 된다는 조건하에 원고를 대영박물관에 기증한다.
* 3, <<옥중기>>. 오스카 와일드, 배주란 옮김. 누림.1998.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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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레아님 덕분에 좋은 작품을 읽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 오늘은 오스카 와일드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게 해 주셨네요.^^ 고생 많으셨고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
급추락하며 눈물겨운 노동의 감옥생활을 하게 된 오스카 와일드...그속에서 부르던 감옥의 노래가 궁금해지네요^^ 어쩌면 그의 일생에서 가장 진실된 성찰이었을지도...
레아언니 수고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