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드바르트 뭉크( Edvard Munch, 노르웨이, 1863-1944 )
- 죽음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 지옥에서 나온 그림들을 그리다.
노르웨이 화가·판화가. 뢰텐 출생. 의사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버지는 이상성격 소유자이고 어머니와 누이를 일찍 여의었으며 그 자신도 병약했다. 이러한 환경과 병약한 육체가 그의 정신과 작품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1881∼1884년 오슬로미술학교에서 공부한 직후에 그린 유화 《병든 소녀(1885∼86)》에서 볼 수 있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응시(凝視)가 그 후 그의 작품을 일관하는 기조가 되었다. 1889년 여름을 해변에서 지내며 신비한 밤의 불안을 묘사한 《별 있는 밤》 《백야》 등을 그렸다. 1890년 파리로 가서 일본 목판화에 매력을 느꼈고, C. 피사로·H.T. 로트레크·E.H.P. 고갱·V. 고흐에게 매료되었다. 1892년 베를린미술협회전에 초청되어 출품하였는데, 초기의 서정적인 화풍을 더욱 내면화해 삶과 죽음, 사랑과 관능, 공포와 우수 등을 강렬한 색채로 표출한 그의 화풍은 큰 물의를 자아냈다. 작품으로는 《절규(1893)》를 포함, 《삶의 프리즈》라는 연작(連作)을 완성했다. 1894년부터 판화를 시작해 회화와 똑같은 모티브를 반복하여 다루었다. 1908∼1909년 신경병을 앓은 후 색채는 밝아지고 문학적·심리적 정감이 점점 뚜렷해졌다. 1937년 나치스는 독일에 있는 그의 작품 일체를 퇴폐예술이라 하여 몰수했다. 나치스 점령하의 1944년 고독하게 오슬로에서 죽었다. 그 밖의 대표작으로는 《봄》 《질투》 《다리 위의 소녀들》 《사춘기》 등이 있다. 판화가로서, 표현주의 회화의 선구자로서 높이 평가된다.
뭉크의 이야기
나의 모친의 가계는 농부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들은 강한 의지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 뿌리까지 어지럼병을 일으키는 박테리아에 감염되어 있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아버지의 선조들은 천재적인 소질을 갖춘 시인었지만 이들도 이미 타락의 징조를 보이고 있었다. 나는 태어났을 때 곧 죽을 것 같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둘러 세례를 받게 했다. 그때 이미 어머니는 죽음의 씨앗을 몸 안에 갖고 있었다. 6년 후 어지럼병이 다섯 어린 아이들에게서 어머니를 앗아갔다. 그렇게 병과 정신착란과 죽음이 마치 검은 천사처럼 내 요람을 지키고 있었고 일생 동안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을 동시에 하려 애썼다. 그러나 아버지는 우울하고 신경질적이 되었다. 부담에 겨워 핼쓱해졌고 주기적으로 종교적인 발작을 보였는데, 그것은 하루 종일 방 안에서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며 신을 불러대는 광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도 일찍 이 지상의 삶의 비참함과 위험요소들을 알아버렸고 또 죽음 이후에 오는 삶과 죄진 인간을 기다리는 지옥의 영원한 고통에 대해 들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이러한 종교적 발작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우리와 장난치고 놀며 우리에게 동화를 들려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로서는 아버지가 우리에게 벌을 줄 때 그 영혼의 고통을 감내하기가 두 배나 더 어려웠다. 나는 아버지의 신경증적인 광포함을 그대로 물려 받았다. <에드바르트 뭉크>
1. 불안
뭉크의 분열증 증세는 1890년 도라 라우젠 과의 연애로 고민과 알콜에 의해 더욱 심화되어지면서 신경 쇠약 상태가 한때 계속 되어지기도 하는데, 공허한 듯하면서도 무엇의 의미를 찾으려는 기묘한 눈을 크게 뜨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검은 옷의 군상(群像)의 표정은 뭉크의 자주 다루어진 주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면성(正面性)에 대하여 혹간 말하기를 분열병 심리에서의 표현성, 친화성(親和性)이라고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나, 뭉크의 근원적인 위문이나 불안이 이와 같은 일련의 작품을 창작토록 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저녁놀을 배경으로 하여 나타난 산과들에서의 곡선적 효과는 불안한 감정을 더욱 강하게 느끼도록 한다. 유화에서 뿐만 아니라 목판화에서도 동일한 내용의 표현을 많이 남기고 있다.
2. 절규
뭉크의 작품에서는 항시 사랑, 죽음, 불안 등이 내재되어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정신 분열적 두려움에 대한 자신의 고백이면서 또한 생활과 심리학적인 발전의 사건들과 깊은 관계를 의미하고 있다. 이 작품은 뭉크의 대표적인 것 중 하나로서 원근법적인 방법을 구사한 중에 화면 구성을 대담하게 사선으로 구획하였으며, 강렬한 색채의 대비는 의외적이라기보다 상호 관계에 의한 다이내믹한 효과를 보여 주고 있다.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과 입을 크게 열고 있는 것은 절규하고 있는 상태로 느껴오기도 하지만, 사실은 자연을 통해 크게 부르짖는 소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유연한 곡선과 강직한 직선과의 대비는 아아르 누보의 장식의 한 형태이며, 붉은 구름은 마치 불타고 있는 것처럼 일몰의 빛남과 동시에 공포의 화면을 나타낸다.
3. 절규
뭉크는 판화를 회화 못지 않게 중시하였으며 회화만큼 판화 작품을 많이 제작하였다. 유화에서의 테마를 판화로 옮기기도 하였으며, 제목을 바꾸기도 하고, 석판이나 목판으로 변화시켜 표현하였다. 뭉크는 판화의 기법적인 면에 여러 가지 혁신을 가져다 주었는데, 동일한 작품 속에 몇 가지 기법의 판종을 병용하기도 하고, 합성 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혁신을 실행하였다. 1895년부터 1897년까지 파리에 머무는 동안 판화에 대한 기술을 크게 연마하였는데, 이 작품도 이 때 제작되어진 석판화로서 부드러운 모필(毛筆)에 의한 풍요로운 곡선은 장식적인 윤곽을 지니는 한편, 동세에 의한 조형적 화면 구성은 긴장된 가운데 현대인의 불안한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하여 주고 있다. 유화에서와 같이 동일한 구도를 채택하였는데 석판화에서는 더 한층 힘있게 표현되어지고 있다.
4. 마돈나
'여자의 사랑은 육체적인 것이 아닌 정신 적인 죽음과 동등시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듯이 뭉크에게 있어서 여자의 헌신적인 사랑이란 수태(受胎)하여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이러한 바탕을 발전시킨 모티브가 <마돈나>이다. 작품에서 보여지듯이 마돈나 상(像)을 둘러싸고 정충을 그렸으며 왼쪽 아래 부분 구석에는 뼈만 앙상한 태아가 웅크리고 있다. 풍만한 육체에 자유 분방한 머리카락의 곡선의 의미, 여기에서 사랑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때마저, 죽음에 대하여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 사랑과 죽음은 서로 공존하며 동시에 나타나고 여자는 남자뿐만 아니라 자신까지도 위험케 하는 죽음에 지배되는 동물로서 표현되어지고 있다. 이 '사랑'의 연작은 확대되어 '이것은 사랑과 죽음에 관한 것이다.' 라고 하면서 평생 다루었다.
5. 마돈나
뭉크는 여자를 세 가지 상으로 보았는데 하나는 꿈꾸는 여인, 또 한편으로는 삶을 갈망하는 여인, 또 체념하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이 <마돈나>에 나타난 여인에 대하여 '몸을 바치는 여자-성모의 고통스런 아름다움에 싸인다.' 라고 쓰기도 하고, '모든 세계의 움직임이 정지하는 순간, 너의 얼굴은 지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포함하고 있다. 익어가는 과일처럼 새빨간 너의 입술은 고통 때문이기도 한 것처럼 달싹 벌어진다. 그것은 시체의 미소이다. 바야흐로 삶이 죽음에게 손을 내민다. 죽어서 사라진 무수한 세대와 미래의 세대와의 사이에 인연이 맺어진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뭉크의 나이 30세이던 1893년 12월, 베를린에서 <생의 프리이즈> 연작, <흡혈귀>, <절규>, <입맞춤>, <질투> 등의 연작을 발표하였는데 중심이 된 것은 이 <마돈나>였다.
6. 그랑 카페의 입센
이 작품을 그린 1906년(43세)에 베를린에 서 공연한 입센의 '유령', '헤다 가블러' 를 위한 무대 장치의 밑그림을 제작하였다. 당시 32세이던 1895년 오슬로의 브롬 쿠비스트 화랑에서 개인전이 개최되었는데 이때에 보이콧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논란의 대상이 된 후 전시 일주일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이 때 개인전을 방문한 입센의 지지와 격려를 얻게 된다. '이러한 작업은 내게는 매우 즐겁군, 나를 믿게. 사태는 내 편을 든 것과 같이 틀림없이 자네 편을 들게 될거야. 적이 많을수록 친구도 많은 법이라네.'하고 입센은 격려를 하여 주었는데, 이 때 뭉크의 마음에 강한 용기를 갖게 하였다. 전체의 구성이 불안정한 어지러움을 특성있게 주입시켜 주고 있다. 석판화 작품에서는 뭉크의 섬세한 소묘의 우수성을 발견할 수 있다.
7. 사춘기
뭉크는 소녀의 모습을 통하여 성(性)에 눈 뜬 청춘기의 첫 반응의 특징인 성적인 자 기 암시와 또 한편으로는 움츠러드는 애틋하면서도 청순한 사춘기 소녀를 표현하려 했다. 이 모티브는 뭉크가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한 작품에서 선택하여 등장시키고 있다. 유화로 처음 제작한 것은 1886년인데, 1890년 공교롭게도 불에 타 없어지므로 해서 다시 이 작품을 제작하였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뭉크의 여성 초상화나 또 일반적인 여성을 표현한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여성 내면을 감추려는 듯 손을 앞에 가지런히 놓고 있는 것이다. 여기 이 작품에서 표현되어진 소녀는 사춘기 특유의 감수성이 강한 동경과 불안이 혼합되어 진 내면 세계를 풍부하게 나타내고 있다.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는 얼굴과 불안을 상징한 듯한 그림자가 인상적이다.
8. 누이동생 잉게르의 초상
당시 29세 때 잠시 귀국하여 9월에 오슬로의 토스톨프고렌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갖게 되는데 이때 발표한 초기의 대표작이다. <검은 색과 자주색의 하모니>라는 제목으로 출품되었던 초상화로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눈에서 외부로부터 내면 세계를 투영하려는 의지를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정면성에 의한 시선의 초점은 뭉크 세계의 특색이기도 하다. 인물의 표현을 정교하게 나타내고 있는 듯하면서도 특징적인 것 외에 불필요한 요소는 생략하였고, 간결한 형태와 조화를 갖춘 색채는 조형적 균형을 이루고 있다. 구도적인 면에서 좌우 대칭으로 이루어진 형태는 강인하면서도 엄숙한 고전적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인물 하단부에 바닥을 가로지르는 수평선과의 관계는 화면의 긴장을 강하게 느끼게 하면서 순수한 감동을 더 한층 주고 있다.
9. 입맞춤
이 주제는 목판화, 유화 등에서도 잘 표현 되어지고 있기는 하나, 동판화에서 볼 수 있는 간결한 선에 의한 담백한 효과를 특징있게 나타내고 있다. 사랑에 향한 눈과 마음은 상식성을 벗어난 인간화된 깊은 존재의 엄숙한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창가에서 밝은 빛을 받으며 애무하고 있는 나체상은 매우 정성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동일한 모티브를 다양한 기법을 통하여 추구한 가운데 각각 다른 개성적인 면을 개척한 영역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두 연인이 포옹하고 있는 상황은 에로틱한 장르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이러한 에로틱한 행동에서 개별성을 제거한 상태로 변화시켜 양성의 만남의 보편적 상징을 만들어 내고 있다. 다양한 판법에 의한 기법으로 드라이포인트, 에칭, 애쿼틴트 등을 결합한 혼합 방법에 의한 표현 효과를 갖고 있다.
10. 입맞춤
뭉크의 작품은 자신의 주관적 경험에서 항시 비롯되었으며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이 개인적 체험에 의해 채색과 내용으로서 표현되어졌다. 남녀가 열렬한 사랑에 빠져 한몸이 되어 키스를 하고 있는데, 사실적 소묘에서 시작하여 에칭, 석판화에서 형상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간결하면서도 장식적인 나뭇결을 갖는 목판화에 결정은 최고에 이르고 있다. 영원한 사랑을 나누고 있는 남녀의 모습이 모티브로 즐겨 이용되어지고 있는데, 합일화 되어진 전체 형태의 뉘앙스가 미묘한 감정을 불러주는 한편, 대상의 데포르마시옹에 의한 동감(動感)과 리듬을 생명감 있게 전개시키고 있다. 배경의 불필요한 묘사를 생략하고, 고운 나무결의 자국이 인물의 효과를 돋보이게 하는데, 전체적으로 요약한 단순한 형태로서의 포착은 깊은 애정을 지니게 한다.
11. 죽음과 소녀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무수한 세대와 장래의 세대와의 보이지 않는 연결을 상징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나타내고 있다. 벌거숭이의 천진한 소녀가 죽음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해골과 포옹을 하고 있다. 사랑과 죽음이 서로 공존하는 가운데 환희에 잠겨 있는 소녀는 죽음을 외면한 채 현실에만 충실하려 한다. 가장자리에는 정충(精蟲)이 그려져 있기도 하며, 태아가 웅크린 모습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사랑, 죽음이 동존 속에 같이 나타나며 남자, 여자 모두가 죽음에 지배되는 동물이다. 죽음을 느끼게 하는 테마는 후에 표현주의 회화에 간혹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 원형(原型)의 하나라 할 수 있겠다. 뭉크의 작품 중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유명한 작품으로, 유화 작품 외에도 동판화 기법으로 완성한 작품이 있다. 뭉크의 숙명관을 보는 듯하다.
12. 질투
DER NEID
1896년 석판 46.5X56.5Cm
오슬로 밍크 미술관 소장
13. 프르치비제우스카의 초상
뭉크는 이탈리아 여행 후 독일로 가게 될 기회를 갖게 된다. 1892년 베를린에서 예술적이면서도 문학적인 단체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신비주의와 환상적인 경향의 감정을 발표하고 있다. 이 무렵 제작한 것으로 실재적인 인간을 표현하면서도 공간 속에 떠 있는 듯한 인물의 묘사는 탐미적(耽美的)인 세계에 몰입되어지는 내면 세계를 느끼게 한다. 뭉크는 많은 인물화를 그렸는데, 항시 생존의 의미를 존중하며, 인간을 위한 예술을 창조하였다. 전체적으로 간결한 형태에 의한 단순한 표현은 주제를 확대시켜 주는 반면에 얼굴의 섬세한 사실성과 손, 발의 생략되어진 묘사는 상반된 조화를 강하게 느끼게 하여 준다. 주관적인 감정이 내용과 형태를 결정한다는 기조를 적절하게 나타냈으며 뭉크의 내재된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14. 병든 아이
숨을 쉬고 느끼고 괴로워하며 살아 있는 인간을 그리 기 위해 전 생애를 바친 뭉크는 동일한 내용을 반복하여 표현한 것이 많은데, 이 모티브도 가장 많이 선택 한 내용 중의 하나이다. 처음 작품의 모티브를 후에 다른 기법으로 변화시켜 표현하든가, 유화와 똑같은 내용으로 판화를 제작하고는 하였다. 그에게서는 그림의 다양한 양식에서 생기는 어떤 내용보다 중요시 처리되었던 것은 회화의 주제였다. 이 두 점의 석판화들은 같은 판에 잉크색을 바꾸어 찍어낸 것으로 색채의 상반된 표현 효과도 있겠으나, 그보다 특정한 모티브를 고집하고 거기에 종속되어진 속에 색을 바꾸어 찍어낸 판화로 보는 것이 의의가 있겠다. 병상에 누운 누나 소피에의 모습에서 찾아낸 강렬한 인상을 작품화 한 것으로 보여진다. 섬세한 선묘에 의한 얼굴 표정이 특색있다.
15. 실내
뭉크는 동일한 제재를 반복하여 표현한 것이 많은데,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북유럽의 일반 가정의 실내 풍경은 주제에 있어서나 표현 양식에 있어 특유성을 지니고 있다. 뭉크의 미술 전개 과정은 초기에는 인상 주의적인 경향과 만년에 가서는 풍경화를 대할 수 있는 약간의 주제의 변모는 있을 수 있겠으나, 전 생애를 통해서 양식의 변천은 큰 변화를 갖고 있지는 않다. 맑은 색조에 의한 주관성을 지닌 빛에 대한 처리는 나중에 인상파에 매혹되어지는 관련성을 갖게 되는 암시적인 면을 나타내고 있다. 뭉크의 부친은 비정상적이면서도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뭉크가 장래 기사(技師)가 되 기를 원하였는데, 이러한 뜻에 의해 공업 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얼마 후 그만두고 화가가 되 기를 지망할 무렵 제작한 소품(小品)이다.
16. 여자의 마스크 밑의 자화상
'나의 가정은 병과 죽음의 가정이었다. 확실히 나는 이 불행에 이길 수가 없었다.' 라고 어린 시절을 말하듯이 죽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 속에 숨어 있는 것으로써 항시 의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항시 내부에는 깊은 불안 속에 잠겨져 있는 상태에서의 운명적인 것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물 배경의 붉은 벽면 위에 침통한 표정을 한 여자의 대형 마스크가 걸려 있으며, 자화상은 무표정한 채 정면을 응시한 채 간단하게 표현되어져 있는데, 아래를 내려다 보면서 곧 덮칠 듯한 마스크의 상징은 압박과 고뇌에 대한 이야기처럼 전하여진다. 그의 그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빨간색은 인상적이라기 보다 그의 몸 내부에 흐르고 있는 피에 대한 관심과 죽음을 항시 생각하는 뜻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겠다. 독특하면서도 암시적인 채색에 의한 집중적 표현이다.
17. 귀가하는 노동자들
1915년 캔버스 유채 200X228Cm
오슬로 뭉크 미술관 소장
18. 저승에서, 자화상
생에 전체를 통해 볼 때 뭉크는 훌륭한 초상화가였으며, 항시 즐겨 다루는 그 자신으로써 일생의 대 시리즈가 되는 자화상을 남기고 있다.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거친 필세에 의한 빨간 배경과 누드, 머리 부분의 강한 형태를 만든 선과 왼쪽의 검은 연기인 듯한 그림자가 대담하게 처리되어져 있는데, 명제 그대로 '저승에서'만난 인간의 실존처럼 주관성이 강하게 묘 사되어져 있다. 뭉크는 수많은 자화상을 그렸는데 초 기에는 엄격한 양식에 낭만적인 우울함에 차 있는 자 신을 나타냈으며, 젊었을 때는 자유로운 형태감 추구에서 자의식(自意識)이 넘쳐 나게 표현하였다. 이 작품에서는 저승이라는 극한적인 상황 속에서 모 든 불안과 고뇌에서 해방되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의 내면적 고백으로서의 죽음의 상징화를 수용하려는 자세가 나타나고 있다.
19. 자화상
1895년 캔버스 유채 110.5X85.5Cm
오슬로 국립 미술관 소장
Waltz For Julia - Suzanne Cian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