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무지의 발견(6)
과학을 보살피는
다정한 아빠
우리는 기술 시대를 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과 기술 속에 우리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 있다고 믿는다.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이 자신들의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면 그들이 지상에 천국을 건설할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은 여타 인간활동보다 상위에 있는 고도의 도덕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사업이 아니다. 우리 문화의 다른 모든 면과 마찬가지로, 과학은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이해관계에 의해 형성된다.
과학에는 돈이 매우 많이 든다. 인간의 면역계를 이해하려고 연구하는 생물학자에게는 실험실, 시험관, 화학물질, 전자현미경이 필요하다. 실험실 조수, 전기기술자, 배관공, 청소부는 말할 것도 없다. 신용대출 시장의 모델을 수립하려 연구하는 경제학자는 컴퓨터를 구입하고, 거대한 데이터뱅크를 마련하고, 복잡한 데이터 처리 프로그램을 개발해야한다. 고대 수렵채집인의 형태를 연구하는 고고학자는 먼 곳으로 여행을 가서, 고대 유적지를 발굴하고,화석화된 뼈와 인공물의 연대를 추정해야 한다. 이 모든 일에는 돈이 든다.
지난 5백 년간 현대 과학이 놀라운 업적을 성취한 것은 주로 정부와 기업, 재단, 민간 기부자들이 과학 연구에 기꺼이 수십억 달러를 투자한 덕분이었다. 그 수십억 달러는 우주를 기록하고, 우리 행성의 지도를 만들고, 동물들의 목록을 만드는 데 있어서 갈릴레오 갈릴레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찰스 다윈보다 더욱 크게 기여했다. 만일 이 천재들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이들의 통찰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떠올랐겠지만, 적절한 자금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난 지성으로도 그것을 보충할 수 없다. 만일 다윈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진화론을 발견한 공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라는 아이디어를 다윈과 별개로 불과 몇 년 늦게 생각해낸 앨프리드 러셀 윌리스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유럽의 열강들이 세계 도처를 누비는 지리학적, 동물학적, 식물학적 연구의 자금을 대지 않았더라면, 다윈도 윌리스도 진화론을 뒷받침할 실증적 자료를 손에 넣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정부와 기업의 금고에서 수십억 달러가 실험실과 대학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학계에는 순수과학을 신봉할 정도로 순진한 사람이 많다. 이들은 정부와 기업이 무엇이 되었든 매력적으로 보이는 프로젝트에 이타적으로 자금을 댄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 연구자금의실제를 몰라서 하는 생각이다.
대부분의 과학연구에 자금이 지원되는 이유는 그 연구가 모종의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누군가 믿기 때문이다. 예컨대 16세기의 왕과 은행가 들은 세계를 누비는 지리적 탐험대에 막대한 자원을 투입했지만, 아동심리학 연구에는 한 푼도 대지 않았다. 새로운 지리적 지식이 자신들로 하여금 새로운 땅을 정복하고 무역 제국을 건설할 수 있게 해주리라고 짐작한 데 비해 아동심리는 이해해보았자 아무런 이익이 생기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940년대 미국과 소련 정부가 수중고고학이 아니라 핵물리학 연구에 막대한 자원을 투입한 것은 핵물리학을 연구하면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지만 수중고고학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였다. 과학자들 자신이 돈의 흐름을 통제하는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이해관계를 항상 의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과학자가 실제로 순수한 지적 호기심에서 행동한다. 하지만 과학적 의제가 과학자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설사 우리가 정치, 경제,종교적 이해관계와 무관한 순수과학연구를 지원하고 싶다 해도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의 자원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초연구를 위해 국립과학재단에 1백 만 달러만 추가로 배당해달라고 하원의원에게 요청 한다면, 의원은 그 돈을 교사 교육에 쓰거나 형편이 어려운 자기 지역구 공장에 세금우대 조치를 주는 데 사용하는 게 더 좋지 않겠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이치에 맞는 말이다. 제한된 자원을 끌어오려면 우리는 "무엇이 더 중요한가?" "무엇이 좋은가?" 같은 질문에 대답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런 것은 과학적 질문이 아니다. 과학은 세상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사물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미래에 무엇이 존재할지를 설명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의상 과학은 미래에 무엇이 존재해야 마땅한지를 안다고 허세를 부릴 수는 없다.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추구하는 것은 종교와 이데올로기뿐이다.
다음과 같은 딜레마를 생각해보자. 똑같은 전문성을 가진 같은 부서의 생물학자 두 명이 연구 프로젝트를 위해 1백만 달러의 보조금을 신청했다. 슬러그혼 교수는 우유 생산량을 10퍼센트 감소시키는 암소의 유선乳腺 감염질환을 연구하고 싶어 한다. 스프라우트 교수는 암소가 송아지와 떨어지게 되었을 때 정신적 고통을 받는지를 연구하고 싶어 한다. 돈의 액수는 제한되어 있으며 두 연구 모두에 보조금을 지원할 수는 없다고 가정할 때, 어느 쪽이 지원을 받아야 할까?
이 문제에 과학적 해답은 없다. 오로지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해답이 있을 뿐이다.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슬러그혼이 돈을 받을 가능성이 더 크다. 유선병이 소의 정신상태보다 과학적으로 더 중요해서가 아니다. 그저 그 연구에서 이익을 취하려는 낙농업계의 영향력이 동물권리운동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암소가 신성시되는 엄격한 힌두 사회나 동물권 보호에 전념하는 사회였다면 아마도 스프라우트 교수에게 기회가 주어졌겠지만 그가 살고 있는 사회는 우유의 상업적 잠재력을 중시하며 암소의 기분보다 인간 시민의 건강을 더 중하게 여긴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전제에 맞게 연구제안서를 작성하는 것이 그에게는 최선이다. 이를테면 이렇게 쓰는 것이다. "우울증은 우유 생산의 감소로 이어진다. 젖소의 정신세계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향정신성 약물을 개발할 수 있다. 이런 약은 우유 생산을 10퍼센트까지 늘릴 수 있다. 필자의 추정에 따르면, 소의 향정신성 약물에 대한 전 세계 시장의 수요는 매년 2억 5천만 달러에 이른다."
과학은 자신의 우선순위를 스스로 정할 수 없다. 자신이 발견한 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할 능력도 없다. 순수한 과학적 견지에서 본다면, 가령 늘어난 유전학 지식을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치 않다. 그 지식을 암 치료에 이용해야 할까, 유전자 조작 슈퍼맨을 만드는 데 써야 할까, 아니면 슈퍼 사이즈 젖통이 달린 유전자 조작 젖소를 만드는 데 써야 할까? 자유주의 정부, 공산 정부, 나치 정부, 자본주의 기업은 동일한 과학적 발견을 완전히 다른 용도로 이용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어떤 용도를 다른 용도보다 선호할 과학적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과학연구는 모종의 종교나 이데올로기와 제휴했을 때만 번성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연구비를 정당화한다. 그 대신 이데올로기는 과학적 의제에 영향을 미치고, 과학의 발견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인류가 어떻게 해서 앨러머고도와달 - 수많은 다른 목적지가 아니라 - 에 도달했는지를 이해하려면, 심리학자,생물학자, 사회학자의 업적을 조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물리학과 생물학과 사회학을 형성했고 다른 방향들을 무시하면서 특정 방향으로만 밀어붙인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경제적 힘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두 가지 힘이 우리의 관심을 끌 만하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다. 과학과 제국과 자본 사이의 되먹임 고리는 논쟁의 여지는 있을지언정 아마 지난 5백 년간 역사의 가장 주요한 엔진이었을 것이다. 이어지는 장들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살펴보자. 먼저 우리는 과학과 제국이라는 쌍둥이 터빈이 어떻게 서로 맞물렸는지를 알아보고, 그다음에는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자본주의의 돈 퍼내는 펌프에 장착되었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첫댓글
오늘과 내일 분 두 꼭지를 함꼐 올렸습니다.
사정상 이 시간 이후 컴을 못 열을것 같아서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과학은 종교나 이념과 제휴했을 때만 번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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