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빗속을 거닐며
올해는 마침 광복 50주년의 뜻 깊은 해라서 각계에서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행사가 열리고 있다. 나는 이런 분위기에 자극을 받았다고나 할까. 가까운 시일 안에 다시 한 번 독립기념관을 참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인데 마침 학도병 출신의 몇몇 친구들이 부추겼다.
각자 사는 지방들이 달랐으므로 8월 19일 오전 10시로 날짜와 시간을 정하고 천안 버스정류장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독립기념관이 지척의 거리나 다름없는데도 나는 자주 들르지는 못했다. 개관 직후 교수들의 모임에서 처음 다녀왔고, 두 번째로 여학생 기숙사의 사감을 맡고 있을 때 사생들을 인솔하고 단체로 참관한 일이 있다.
그때 학생들은 한결같이 기념관의 규모며 다양하게 수집된 자료들을 대하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식민지시대를 체험한 일이 없는 젊은 세대들이 선인들이 겪은 그 숱한 고통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의아스러웠다
지난날 우리는 독립운동이니 독립투사는 고사하고 예사로 쓸 수 있는 독립이라는 어휘 하나도 마음 놓고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독립을 되찾은 일이 마치 기적처럼 느껴지는데 어언 50년이 지났으니 마치 꿈만 같다.
독립기념관이 개관되고 나서 한동안은 매스컴의 보도를 보면 참관자가 글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듯싶다. 내가 처음 들렀을 때도 인파에 밀려 건성건성 돌아보고 나와 아쉬움이 남아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국민들의 열이 식었는지 지금은 입관수입의 격감으로 운영이 어려울 지경이라고 한다. ‘쉽게 더운 방 쉽게 식는다’는 속담은 우리 국민성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춘 · 하 · 추 · 동 철 따라서 관광지나 위락시설 등은 초만원을 이루는 듯싶은데 독립기념관은 푸대접을 받는다니 입맛이 씁쓰름하다
1960년 4월 초순에 나는 필라델피아의 미국 독립기관을 돌아본 일이 있다. 미국의 막강한 국력과는 달리 독립기념관은 규모나 자료 등이 별로 인상에 남는 것이 없었다. 독립 당시의 협소한 의사당과 깨진 종하나 달랑 놓여 있는데, 부강한 나라의 독립기념관으로서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깨진 종이 '자유의 종' 이라는 애칭으로서 미국민들의 심금을 울리는 역사적인 종이라니 알듯 모를 듯 한 느낌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1776년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북미연합이 독립을 선포하자 시민들이 기쁨에 겨워서 깨져라 하고 종을 두드렸다고 한다. 200년이 넘게 지난 오늘날 이 ‘자유의 종’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하여 1년에 150만 명이 없는 인파가 이곳을 메운다고 한다. 미국민들의 애국심의 척도를 짐작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들렸을 때도 많은 어린 학생들로 붐볐는데 텍사스 주에서 수학여행 차 들른 것이라고 한다. 텍사스 주에서 독립기념관이 있는 필라델피아 시까지는 어림하기도 힘든 먼 거리인데도.
우리나라에서도 되도록이면 각급학교의 수학여행 코스에 독립기념관을 포함시키면 어떨지 모르겠다. 산 교육장을 통해서 학생들이 느끼고 배우는 바가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며, 독립기념관의 운영에도 많은 도움이 될 듯싶다.
그건 그렇고 국내외에서 우리의 투사들이 항일투쟁에 목숨을 걸 때 나는 같은 또래의 학생들과 함께 일본군의 학도병으로 징집되었다. '미영격멸(美英擊滅)'의 구호를 외치며 훈련에 끌려 다녔고, 내무반에서는 ‘군인칙유(軍人勅諭)'와 '전진훈(戰陣訓)’을 줄줄이 암송하도록 강요당했다.
그런 와중에서 같은 연대의 조선 학도병은 말로만 어렴풋이 듣던 중경의 임시정부를 지향하고 망명을 모의하다가 발각이 되었다. 그때 우리의 뒤를 캐서 용산 헌병부대로 연행한 자는 같은 동족의 헌병 놈이었는데 유들유들하기 이를 데 없는 자였다.
알몸으로 나를 고문대에 눕혀 놓더니 머릿속에 박혀 있는 일본제국을 좀먹는 악성의 병균을 발라내는 수술을 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나서 물주전자를 들어서 콧구멍에 물을 붓고 가죽혁대로 급소 언저리를 사정없이 갈겼다.
헌병대에서 한 달간의 신문을 마치고 이태원의 육군 형무소로 이감된 것이 해방되던 해의 5월 중순경이었다. 처음에는 육군 구금소로 불리던 곳이었는데 뒤에 육군 형무소로 명칭이 바뀌었다는 말을 들었다.
몇 달 뒤에 우리는 이 감방에서 일본 패망의 소식을 들었다. 그때가 나의 평생에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든다.
이 대목은 다른 글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광복 50주년을 회고하는 마당에 다시 생생하게 되살아난 것이다.
당시 우리는 고초를 겪으면서도 빼앗긴 나라의 젊은이들로서 할 일을 했다는 자부심으로 흡족했었다. 함께 고초를 겪은 동지는 12~3명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지금은 생사도 불분명한 채 겨우 3. 4명만이 서로 소식을 전하고 있다. 그나마 이제는 어느 외국 가곡의 노랫말처럼 다 백발의 늙은이들이 되었지만.
이야기가 옆으로 많이 흘렀는데 만나기로 약속한 일행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거의 시간에 맞춰서 모두 천안의 버스정류장에 모였다.
독립기념관으로 막 떠날 참인데 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다른 관광나들이 같으면 날씨를 핑계 삼아서 뒤로 넘어질 친구들도 없지 않을 터인데 오늘은 다들 각오가 다른 눈치였다. 독립기념관의 참관은 이런 날씨가 도리어 잘 어울릴지 모른다라고. 사실 우리가 지난날 일제 치하에서 걸어온 길이 이런 궂은 날씨처럼 빗속을 걸으며 살아온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하여간 우리나라에서 독립기념관 건립을 구상하게 된 것은 일본의 교과서 왜곡이 그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국민적 대화합이 이루어져서 고사리 손의 저금통까지 줄을 이어 답지했다고 한다. 우리 겨레가 겪은 식민지 시대의 고초는 형언하기 어렵다. 이런 사정을 감안할 때 독립투사들의 값진 희생의 흔적을 한자리에서 음미한다는 것은 정말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궂은 날씨인데도 주말이자 광복절이 지난 지 며칠 안 된 때문인지 경내의 분위기는 듣던 것처럼 초라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시간의 구애를 받는 처지가 아니어서 모처럼 나름대로의 일가견을 피력해 가면서 느슨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거북선의 모형 앞에 이르자 마치 구령에 맞춘 듯이 다 함께 걸음을 멈췄다. 다른 전시품들과 견주어서 모형의 규모도 컸지만 거북선에는 다들 각별한 관심이 쏠린 듯하다. 이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를 실지로 고안하여 제작한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 의문이 생긴다.
어떤 문헌에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실전에 투입했다고 적혀 있다. 한 문헌에는 이순신 장군이 창안한 것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우리 일행인 C형은 이순신 장군이 해전을 지휘하며 일방 거북선을 고안하여 제작하는 거창한 일이 어떻게 가능하느냐는 견해를 밝혔다. 다들 C형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 같았다.
노생이 젊은 시절에 교원 재교육 강습을 받은 일이 있다. 그때 정신교육의 강의를 담당했던 역사 교수는 거북선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에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그분의 설명이 근거가 뚜렷하다면 오늘날 그 탁월한 발명가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것은 매우 유감스런 일일 듯싶다.
C형은 광복 후 학도병에서 돌아와서 다년간 이화학당의 후신인 이화여고에서 봉직한 바 있다. 그리하여 유관순 열사에 대해서 매우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곳에 걸려 있는 사진의 수집에도 한몫을 했다고 한다.
3·1 운동 당시 이화학당과 같은 기독교적인 정신여학교에서도 적극 이에 가담하여 학생들이 많은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주장하는 목소리가 낮은 때문인지 빛을 못 보고 묻혀버린 것을 학교 측에서는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신여학교의 학생들도 선배들의 후광(後光)을 톡톡히 받아야 마땅하다고 동정어린 말들을 했다. 우리 사회에서는 가끔 목소리 큰 사람이 덕을 본다는 말이 있지만, 이런 경우는 목소리 크기와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겪은 용산 부대의 학도병 사건도 빛을 못 보고 있는 것이 그와 유사한 경우여서 정신여학교의 불편한 심기를 조금은 이해가 된다.
전시실의 마지막 부분에는 5.16 군사 쿠데타의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지금은 군사 혁명 대신 군사 쿠데타로 5·16 사태의 명칭이 정착되었다. 그런데 독립기념관 건립 당시는 혁명으로 통하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한 사진의 설명은 여전히 혁명군을 지휘하는 아무개 장군 식으로 적혀 있다. 지금도 그 시대가 그대로 머물러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기념관의 소장품이나 기록물들은 순전한 일제 강점 시대의 항일의 흔적만이 아니라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 걸친 다양한 내용들이다. 건립 당시 이 건물의 명칭을 놓고 독립기념관이냐 광복기념관 이냐로 많은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과 같은 내용을 감안하면 역사박물관이 더 적절한 명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독립기념관을 뒤로 하고 귀로에 접어드는데 비는 아직도 간헐적으로 세차게 퍼부었다. 돌아서는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 않은 것은 세차게 퍼붓는 비 때문만은 아닌 듯싶었다.
우리나라가 5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운운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외세의 거듭되는 침공, 추악한 당쟁, 숨도 크게 못 쉬고 눌려 살던 일제 강점 시대, 그리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한 6·25전쟁, 기타 몇 차례의 정변 등으로 역사가 얼룩졌던 것은 두고두고 가슴 아픈 일이다. 그중에서도 이 독립기념관과 가장 관계가 깊은 일제 식민지 시대만 놓고 보면 매국노, 민족반역자, 친일파, 밀정, 끄나풀 등이 앞장서서 동족들을 무자비하게 괴롭힌 사례는 헤아릴 길 없다. 지배자들은 지배자들대로, 동족의 앞잡이들은 앞잡이들대로 2중 3중으로 우리 겨레들을 괴롭혔던 것이다.
그런 치욕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가 빛나는 것은 독립투사들의 항쟁의 발자취가 너무나도 값진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선인들이 목숨을 바쳐서 찾은 조국인데도 우리의 현실이 그렇게 밝지 않아 마음이 어둡다고나 할까.
조국의 통일이 가깝게 내다보이지 않는 것은 그렇다 치고 일부기업체들의 몰지각한 환경 파괴가 큰 문제이다. 늘어나는 청소년범죄도 문제라면 문제라 하겠다.
공직자의 비리며 업자들의 부실공사가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한다. 대학에 입학하기까지는 침식을 잊다시피 하면서 학업에 열중하는데 대학에서는 엉뚱하게 딴전을 피우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니 어딘가 잘못 되어도 크게 잘못 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한편 국가나 국민은 거의 안중에 없이 그들 자신의 표현대로 이전투구 식으로 정권 다툼을 일삼는 정치꾼들이 가장 큰 문제이다. 지금의 혼탁한 정치판이 마치 조선시대의 4색 당쟁을 방불케 한다는 국민의 지탄의 목소리도 그들에게는 마이동풍이다.
한 나라를 흠집 있는 한 알의 사과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성한 부분과 다소간의 상한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우리의 경우 높은 교육열을 찬양하는 말을 자주 듣는다. 국민들은 성실하게 일하는 공직자와 근로자들에게 많은 신뢰를 보낸다. 우리의 첨단 과학 기술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해외에 진출한 기업체들은 그 나라에서 많은 칭송을 받는다고 한다. 60만 명의 막강한 국군을 우리는 믿음직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어찌 이뿐일까마는 위에 열거한 사항들은 우리나라의 밝고 건전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흠집이 결코 심상치 않은 것 같아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 것은 사실이다. 독립투사들의 값진 항쟁의 발자취를 되새겨볼 때 지금의 어두운 현실이 우리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한다.
독립기념관을 뒤로 하고 다시 빗속을 거닐며 나는 한동안 어떤상념에 사로잡혔다. 저 의연한 기념관을 우리 국민 모두가 가장 자랑스러운 전당으로 자부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항일투사들의 순수한 애국정신을 이어받아서 우리나라의 어두운 면들이 하루빨리 안개 걷히듯이 맑게겠으면 좋겠다라고.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