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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각종
비로자나 부처님의 진리는 바로 우리 생활 속에 있다. 시방세계의 삼라만상이 모두 수행처요, 그 활동들이 곧 부처님의 불법이다. 재가(在家)불교로서 한국밀교를 대표하는 진각종은 어떤 종파인가. 밀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삼밀관해(三密觀行)의 의미는 무엇인가. 회당(悔堂) 대종사의 불교사상을 받들어 한국불교 4大종단으로 교세를 늘려온 진각종의 법맥(法脈)과 교리사상은 무엇인가?
1947년 진각종을 개종한 회당(悔堂) 대종사는 진각종의 교주인 비로자나 부처를 단순히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실현의 대상으로 보았다. 그는 내세 왕생성불(往生成佛)이 아닌 이몸 이대로 부처를 이루는 즉신성불(卽身成佛)과 현실에서의 정화(淨化)를 수행 목적으로 삼는 새로운 불교관을 펼친 것이다.
한국 밀교(密敎)의 중흥조로 불리는 그는 조선조의 숭유억불정책의 결과 5백년 동안 통불교(通佛敎) 안에서 잠들어 있던 밀교를 깨웠다. 법신 비로자나불을 다시 전면에 부각시켜 밀교의 본불로 독립시킨 것이다. 회당 대종사의 불교사상은 오늘날 진각종을 이끌어 가는 유훈(遺訓)이기도 하다.
“깨닫고 깨달아 더이상 깨달을 바가 없는 것, 부처와 내가 하나되는 큰 깨달음이 바로 진각(眞覺)이라.” 그의 법문 곳곳에 나타나는 것처럼 진각종은 한국불교에서 생활불교·실천불교의 이념에 가장 충실한 불교종파로 꼽힌다. 승속일여(僧俗一如)의 재가불교로서 포교활동에서도 단연 적극성을 띠어왔다.
일반 선(禪) 불교를 일컫는 현교(顯敎)와 구분되는 밀교는 법신 비로자나불의 경지, 곧 우주적 진실의 비밀한 경지를 체험으로 자증(自證)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생경한 이 용어를 대하면 일반인들은 은밀한 ‘신비주의’나 남녀간의 ‘성’(섹스)을 먼저 떠올리기 십상이다. 이러한 선입견은 사실 그동안 한국 밀교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종단 관계자들은 이러한 잘못된 인식이 티베트·네팔 등을 중심으로 번성한 ‘잡밀’(雜密)과 우리 밀교를 구분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정신적인 깨달음을 통한 현세정화(現世淨化)와 불국토(佛國土) 건설을 목표로 하는 한국 밀교의 목적과 달리 잡밀은 일반적으로 소승불교적 주술신앙의 일종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밀교가 정신적 깨침을 수행의 목표로 삼는 데 반해 잡밀교는 육체적인 쾌락과 환희를 불교적 깨달음의 순간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제약구조 속에서도 진각종은 개종 이래 비약적 발전을 일구어 냈다. 78만명(종단 집계)의 신도 수에서도 나타나지만 무엇보다 진각종은 최근 들어 ‘미래불교’의 대안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진각종으로 싹튼 한국 밀교는 그뒤로 총지종(總指宗)·진언종(眞言宗)이라는 새로운 밀교 종파를 낳기도 했다.
한국밀교 대표하는 ‘재가불교’
진각종이 개종 51주년이란 짧은 기간에 4대 불교 종단으로 부상하게 된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그 뿌리는 어디인가.
인도 불교에서 발생한 밀교가 한반도에 전래된 것은 일반적으로 7세기로 알려져 있다. 신라 진평왕 27년(605) 서역승들이 황룡사에 머무르면서 “전단향화성광묘녀경”을 배포한 것이 최초다. 그 뒤를 이어 명랑(明朗)·의림(義林)·밀본(密本)과 같은 밀교대덕들이 배출된 것이다.
신인종(神印宗)을 개종한 명랑법사가 문두루비법으로 당의 10만대군을 물리친 것이나 총지종(總持宗)을 개종한 혜통(惠通)스님이 진언밀법으로 선덕왕의 난치병을 고친 것도 바로 신라 밀교였다.
밀교 연구가들은 불교가 민중신앙으로 자리잡은 것도 밀교의 영향으로 본다. 수행의 장소마저 사원(寺院)에 국한하지 않고, 밀교의 법신관(法身觀)이나 만다라 사상을 통해 국토 전체가 도량으로 확대된 것이다.
그뒤로 전국의 산과 들, 바위벽에도 부처가 모셔졌고, 마을과 강산의 명칭에도 부처님과 보살의 이름들이 붙여졌다. 밀교에서 말하는 우주 삼라만상이 불·보살의 당체(當體)요, 그들의 도량이 되었던 것이다.
신라 밀교는 고려시대에 들어 더욱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몽고와의 항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고려대장경의 조판 사업이나 호국인황 도량의 불사들은 바로 밀교사상이 바탕을 이룬다. 개인의 성불에 안주하지 않고 사회나 국가적인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법신불의 이상을 실천한 것이다.
고려의 대학 이제현(李齊賢)은 “금서밀교대장서”(金書密敎大藏序)라는 저술에서 직접 고려 밀교의 발전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러한 밀교가 조선조에 들어 선·교(禪敎) 양종에 흡수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밀교를 중흥시킨 이가 바로 회당이다.
진각성존(眞覺聖尊)으로 불리는 회당의 속명은 손규상(孫珪祥). 그는 1902년 경북 울릉군 남면 옥천동의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고, 한일합방 후에는 신식공부도 했다. 그는 아홉살 되던 해 서당에서 ‘心一當千萬 質白畵丹靑’이라는 한시(漢詩)를 지어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마음 하나 천만을 당해내고 흰 바탕에 단청을 그린다’는 내용의 이 한시 구절은 그가 싹틔운 불교사상의 맹아(萌芽)로 간주되고 있다. 그는 20세에 배신(裵信·진각종 3대 總印)과 혼인했다.
그러나 그의 불문 귀의는 상당히 늦게 이루어졌다. 그는 속세 나이 36세까지 평범한 가장 노릇을 하며 포항에서 포목상을 해 제법 큰 재산을 모았다. 그러던 그가 불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서른여섯살 때. 독실한 불교신자인 모친 손에 이끌려 포항 죽림사(竹林寺)에 49제를 지내러 간 것이 개안(開眼)의 계기가 된다. 하룻밤을 지새우며 사찰 주지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는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됐다. 죽림사에서 수행정진하던 그는 1년째 되던 불공회향일에 마침내 깨우침을 얻었다.
이렇게 불문에 든 그는 그 뒤로도 전국 각지의 산문을 돌며 고승대덕들과 담론을 계속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나름대로 ‘법화경’‘고왕경’ 등 경전을 인쇄해 부처님의 설법을 반포하기도 했고, 사찰마다 지장보살·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상 등 조성불사에도 힘썼다. 그러나 39세 되던 해 수행도량에서 발생한 커다란 화재로 무상법문(無常法門)을 체험한 그는 물질에 대한 집착까지 완전히 벗어 던졌다.
그러나 그는 8·15 해방 이후 한때 정치에 뜻을 두고 상경해 3개월여 해방정국에 참여했으나 지병을 얻어 좌절했다. 그는 이를 계기로 나라를 바로잡는 길은 정치보다 먼저 국민의 심성(心性)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여겨 새로운 내면세계로 회귀했다. 새로운 세계로의 개안이었다.
그는 10년간의 수행을 정리하면서 경북 달성의 농림촌에 정진도장을 세웠다. 그리고 불법의 묘리(妙理)를 얻기 위해 다시 1백일 정진에 들어갔다. 그는 이곳에서 6자진언인 ‘옴마니반메훔’과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수행 내용으로 삼아 불법을 실체험하게 되었다. 또 다른 깨우침을 얻은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철저하게 발견하기 위한 ‘참회’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종사의 참회는 곧 ‘자기비판·자기반성’을 전제로 한다. 현실(자기와 사회)에 대한 자각이 없는 한 참회가 절실할 수 없다.
반대로 참회를 통해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면 자신과 만상(萬相)의 관계를 알게 되고, 자연 자신이 만상의 은혜에 둘러쌓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은혜의 자각’이었다. 참회에 대한 그의 신념은 ‘회당(悔堂)’이라는 법호에서도 엿볼 수 있다.
참회(懺悔)사상에서 진각(眞覺)사상으로 발전
“비로자나 부처님은 시방삼세하나니라. 온 우주에 충만하여 없는 곳이 없으므로 가까이 곧 내 마음에 있는 것을 먼저 알라.”
그의 법문에 나타나는 것처럼 밀교에서는 우주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의 모든 활동이 곧 법신 비로자나 부처의 당체(當體) 설법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체험이 곧 법문(法門)이고, 사실(事實)이 곧 경전이라는 것이다. 대종사의 이러한 정신은 곧 ‘세속 안에서 초월’이라는 모습을 보인다. 현실 안에 진리가 있다는 것은 곧 현실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문을 여는 것이다.
이때부터 회당은 이 땅의 풍토성과 혈지성(血智性)에 알맞은 전통종교인 불교를 우리 시대 대중들의 근기(根氣)에 맞도록 변화시키려고 시도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정신과 생활 근저에 흐르는 밀교의 부흥이었다. 큰 깨달음을 얻은 대종사는 교법을 정리하고 교화방편을 강구한 뒤 47년 6월14일 46세 나이에 교화를 시작하였다.
초기 진각종은 ‘참회사상’에서 출발해 심인사상→진각사상으로 체계적인 발전을 이룬다. 사상의 변화에 따라 종단의 이름도 참회원→심인불교→진각종으로 바뀌었다.
회당은 창종 당시 “불상 앞에서 음식을 공양하고 예배하는 것만이 불교가 아니다”라며 오히려 “자성을 밝혀 부처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이 큰 불공(佛供)”이라고 주창했다. 불교의 수행·의식·제도의 대중화와 생활화를 선언한 것이다.
사회복지사업이 현세정화 수단
결국 회당 대종사는 ▷참회하는 불자가 돼야 한다 ▷의례하는 불자보다 실천하는 불자가 돼야 한다 ▷형식공양보다 이치적 공양, 즉 법공양을 하라고 일반인들에게 가르쳤다. 이러한 그의 불교사상은 불교계에서는 일대 혁신이었다. 불교사상을 통한 국민정신의 계몽운동이었다.
그는 가난고·질병고·불화고의 해탈(解脫)을 위해 물질외도·종교외도·인륜외도의 근절을 부르짖기도 했다.
그는 당시부터 ▷노인 복지사업 ▷가정의례 간소화 ▷여성복장 간소화 ▷심학교(心學校) 개설을 통한 문맹 퇴치 ▷자성(自性)학교 개설을 통한 어린이 교화 ▷중등교육기관 개설 ▷도덕정치운동 등을 외치며 이를 실천했다.
당시 정치적 불안과 사회 혼란, 경제적 궁핍이라는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밀교사상에서 해결책을 모색했던 셈이다. 한국전쟁 전 진각종의 교화사업은 포항·경주·대구 등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는 부처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실천수행에 의존하는 신앙심의 전파 뿐만 아니라 불법의 깊은 이치를 깨우쳐 주기 위해 교육사업에 특히 주력했다. 그는 50년(진기 4) 한국전쟁이 터지기 직전 심인이라는 법구(法句)를 찾아 참회원을 심인당으로 개칭하기 시작했다. 심인은 바로 참회가 추구하는 경지, 참회에 의해 밝혀지는 내면의 세계를 일컫는 것이다. 또한 심인이 원만하게 밝혀진 경지가 진각이다.
대종사는 53년 불교종단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종헌·종법을 정립하고, 같은해 12월 대한불교 진각종으로 교명을 바꾸었다.
당시 회당 대종사와 대덕승으로 꼽히는 하동산(河東山) 스님, 이청담(李靑潭) 스님과의 불교계 정화를 위한 교류 또한 종단에서는 자랑거리다.
당시 대종사는 전통불교의 계승과 시대적인 교화방편을 병행하는 것이 한국 불교의 중흥을 위한 도리로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강하게 주장했다. 이와 함께 그는 불교계의 중앙집권적 운영을 제시했고, 생활불교의 대안을 강조하기도 했다. 바로 대종사가 교화의 기본이념으로 삼은 현세정화의 실질적인 활동이었다.
그는 58년 11월 조계종의 동산·청담·경보 스님 등과 함께 태국 방콕에서 열린 세계불교도우의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그뒤로도 종단의 내실을 기하기 위해 전국에 심인당 설립을 늘리고, 경전 편찬과 대중 교화의 방편을 찾기 위해 골몰하다 64년(진기 17) 세수 62세로 열반에 들었다.
◆진각종의 이색 용어
한국 정통 밀교 종단을 자처하는 진각종에는 일반에 생소한 용어들이 많다. 우선 ‘밀교’라는 것부터가 그렇다. 석가모니 부처를 교주로 하는 일반 현교(顯敎)와 달리 밀교에서는 법신(法身) 비로자나불을 교주로 한다. 우주적 진리를 품고 있는 부처의 비밀스런 경지를 체험적 깨달음을 통해 얻는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곧 밀(密)이란 법신 비로자나불의 심오한 경지를 일컫는 것이다.
▷在家佛敎 : 일반 불교가 산중(山中)불교인 데 반해 진각종은 ‘도시불교’라고 할 수 있다. 종단에 속한 1백20여 사찰 모두가 전국 각지 도심에 자리잡고 있다. 이는 생활불교를 표방하는 진각종단의 이념과도 맞닿는 것이다. 이와 함께 출가(出家)불교와 비교되는 재가(在家)불교의 형태를 띤다. 진각종은 보통 부부가 교직자를 함께 하며 포교에 나선다. 남자 교직자인 정사(正師)와 여자 교직자인 전수(傳授)가 하나의 팀을 이루어 민중 속에서 승속동행(僧俗同行)의 길을 가는 것이다.
▷三密觀行 : 일반 선불교에서 참선(參禪)이나 염불(念佛)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과 깨달음에 접근하는 것에 비해 진각종은 삼밀관행을 기본 수행법으로 한다. 이는 종조인 회당 대종사가 체험으로 얻어 전수한 것이다. 일반 불교에서 3업(三業)이라고 부르는 인간의 세가지 활동인 신체적 활동, 언어적 활동, 정신적 활동을 밀교에서는 3밀이라 한다. 부처님의 몸을 따르는 신밀(身密), 부처님의 말을 따르는 구밀(口密), 부처님의 마음을 따르는 의밀(意密)이 합쳐 3밀을 이룬다. 3밀관행을 통한 깨침의 경지, 즉 부처의 삼밀과 나의 삼밀이 서로 상응(相應)하는 것이 진각(眞覺)이다. 이렇게 현세에서 ‘진각님’이 되는 것이다. 곧 즉신성불(卽身成佛)이다.
▷六字眞言 : 진각종에서 본존으로 삼는 것이 바로 6자진언 ‘옴마니반메훔’이다. 진각종 법당에는 교주인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시지 않고 이 6자진언을 문자본존불로 모신다. 진각종의 수행자들은 입으로 이 ‘옴마니반메훔’의 염송을 통해 수행한다. 회당 대종사는 “6자진언을 한번 외우는 것은 80억겁의 불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공덕과 같다”고 신도들에게 가르쳤다.
▷心印堂 : 진각종의 사찰을 말한다. 심인이란 ‘내 마음을 부처님 마음과 같이 새기는 곳’이란 뜻이다. 일반 현교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승려들의 목탁·염주도 사용하지 않는다. 불공 중에 초나 향(香)을 피우지도 않는다. 재가불교인 진각종에서는 특히 교직자의 두발과 의복 등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 오직 ‘옴마니반메훔’ 6자진언을 염송하면서 삼밀수행중에는 현세에서 부처님 세계를 향하는 자세를 상징하는 금강지권(金剛智拳·손가락을 결인하는 특이한 자세)을 하면서 기도한다.
▷기타 : 교직자에 대한 품계도 남자 교직자는 정사(正師)→대정사→ 종사(宗師)→대종사의 품계를, 여자 교직자는 전수(傳授)→대전수→종사→대종사로 품계를 각각 호칭한다. 일반 신도 또한 통칭 ‘신교도’로 부르지만 남자들은 각자(覺子), 여성 교도는 일반 불교에서처럼 보살(菩薩)로 호칭한다. 일반 불교에서 종단 내 최고의 정신적인 지주를 ‘종정’(宗正)으로 부르는 것과 달리 진각종은 ‘총인’(總印)으로, 총무원장은 ‘통리원장’이라 부르는 것도 독특하다. 스님도 보통 ‘스승님’으로 바꿔 부른다.
[출처] [펌] [한국의 종교]진각종|작성자 무상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