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복음교회, 2023년 6월 4일 주일예배
♱기도로 마음을 모읍니다♱
[찬 송] 64장(기뻐하며 경배하세)
[공동체 고백] 사도신경
[성시 교독] 교독문 64번(시편 148편)
[찬 송] 190장(성령이여 강림하사)
[강 론]
“주의 영에 이끌린 사사들(삿13:1-5)”
우리의 시작은 성령이었습니다. 바람처럼, 불처럼, 혀처럼 우리 위에 임하시는 성령으로 우리는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교회는 교회당이라는 컴프렉스를 극복하고, 자본주의라는 어둠에 굴하지 않는 공동체였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우리가 성령에 이끌려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되게 하는 것은 교회당이나 회집한 수가 아닌 성령에 의함이라는 사실을 다시 되새깁니다. 우리에게 이 성령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교회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오셨고 사셨으며 죽으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행1:3).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일을 위해서죠(행1:8).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이 실천되고, 평화가 이루어지며, 생명을 추구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시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며, 귀신들리고 사망에 고통 하는 사람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심으로 이 땅에 그 나라를 이루셨죠. 그러나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이루어 갑니다. 그러다가 하나님나라의 도래(渡來)를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을 때 즉, 주의 영에 이끌려 살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사사기는 경고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경고를 듣고 더욱 성령에 이끌려 살기를 힘쓰게 되길 바랍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그 여정을 시작하죠.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위해 이주했고, 아들과 손자들까지도 거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난에 쫓겨 애굽으로 내려가 종으로 4백년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노예로 고통하며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모세라는 성령의 사람을 일으켜 그들을 출애굽시킵니다(출애굽기).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영도아래 그 땅에 분할 정착하죠(여호수아서).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백성들의 모습을 ‘사사기’는 그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힘이 없어서 가나안부족을 쫓아내지 못하거나 힘이 있어도 쫓아내지 않습니다. 힘이 있어도 쫓아내지 않은 이유는 부역을 시키기 위함이었죠(삿1:27-35). 후에 그 세력들은 이스라엘의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되었습니다(2:3).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못하면 평안은 사라지고 교회와 신앙생활이 그리고 공동체가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될 수 있음을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시작은 성령의 역사로, 교회의 지속과 성장도 성령의 충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교회당을 마련한다고 하더라도, 교회재정이 확보된다 하더라도, 회집하는 구성원이 늘어난다 하더라도,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하나님의 약속한 복을 받았다 하더라도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평화는커녕 가시와 올무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평화는커녕 가시와 올무로 고통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원자를 일으키시죠. 사사들입니다. 주의 영으로 충만한 사사들의 활동시기에는 이스라엘에 평화가 이루어지지요. 오늘은 세 사람만 살펴보겠습니다.
소심하게 주저앉아 있던 ‘기드온’이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합니다(삿6:11-16).
기드온도 미디안사람들이 무서워 숨어서 추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임합니다. 주의 영이 임한 것이죠. 그때 기드온은 이렇게 속마음을 털어 놓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습니까? 조상으로부터 들었던 “그 모든 이적이 (지금) 어디 있나이까?”(13)라고. 그래도 설득하시는 주의 사자에게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15)” 미디안과 맞설 수 있냐고 말하며 자신의 부족을 어필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를 사로잡으시니 큰 용사되어 이스라엘을 미디안과 그 연합군(메뚜기 떼 같고 모래 같은, 7:12)의 손에서 구합니다. 이스라엘은 기드온 덕분에 40년 동안이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8:28).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 걸까? 하나님이 계시면 왜 지금 여기서는 이적이 일어나지 않는 거지? 지금 나는 힘이 너무 없어!”라고 소심하게 주저앉아 있는 우리에게 성령님이 충만하게 임하시면 우리도 기드온처럼 큰 용사가 되어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사랑하는 이웃에게 주님의 평화를 선물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버림받고 쫓겨났던 ‘입다’가 가족과 이스라엘을 구합니다.
‘입다’는 ‘길르앗’사람입니다. 길르앗은 에브라임지파에서 쫓겨나 길르앗에 정착한 가문이죠(12:4). 입다는 창녀에게서 ‘길르앗’이 낳은 아들입니다(11:1). 그는 창녀의 소생이라는 배다른 형제들의 조롱을 받으며 쫓겨나 ‘돕’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암몬’의 공격을 받은 길르앗 원로들은 입다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원로들의 요청으로 돌아온 입다는 “여호와의 영(11:29)”에 이끌려 ‘암몬’으로 진격하고, 길르앗 가문과 이스라엘을 구합니다(11:33). 버림받고 쫓겨났던 입다가 가족과 민족을 구한 것이죠. 주님의 영에 이끌리면 우리도 이런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돌계집(공동번역)‘이 40년이나 블레셋에 고통 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삼손’을 낳습니다.
“돌계집”이라는 표현이 불편하죠. 그래도 효과적인 메시지 전달을 위해 공동번역의 돌계집을 그대로 차용하겠습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돌계집이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었다는 말이죠(삿13:2,3). 우리 사전에서 돌계집은 “아이를 낳기 위해 돌부처 등에게 빌러 다니는 여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정성으로 빌어서 아이를 낳으려는 여인의 간절함을 표현한 것이겠죠. 그런 여인에게 하나님의 사람이 찾아옵니다(13:6). 그리고 그 이름을 묻는 ‘마노아’에게 ‘기묘자’라고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죠(13:18). 선재하신 예수님입니다. 그 후에 돌계집 마노아의 아내는 임신하여 ‘삼손’을 낳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삼손은 대표적인 사사입니다. 삼손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자(15:14) 40년 동안이나 블레셋에 고통 하는 민족을 구원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도 돌계집처럼 도울 힘이 없는 존재에게 빌면서 살아오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신다면 놀라운 구원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우리의 도움이 되신다면 돌계집에 불가한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잉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돌계집이지만 우리의 자녀들을 성령으로 충만한 걸출한 인물로 양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한국교회는 다시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그 성령은 우리에게 권능을 주실 것입니다. 소심하게 주저앉아 있는 ‘기드온’ 같은 우리가, 중앙에서 쫓겨나 변방에서 방황하는 ‘입다’같은 우리가, 재구실 못하는 “돌계집”같은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을 떨치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우주적 교회를 떠나지 않고 기다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합니다.
[찬 송] 458장(너희 마음에 슬픔이 가득할 때)
[공동체 기도] 주기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