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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섬’ 군함도의 하루
노기 카오리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빽빽하게 늘어선 고층 아파트를 자랑하는 해저탄광의 섬 하시마(일명 군함도). 주거환경과 전망이 좋은 아파트 위층에는 일본인 엘리트들이 살았고 가장 높은 지대에는 하시마 신사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반면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골짜기 밑바닥과 같은 최하층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아침이 와도 어두컴컴한 곳이었습니다. 미쓰비시가 경영하던 하시마는 주거공간부터 일제 식민지 지배의 차별구조가 드러난 곳이었습니다.
“바람도, 햇빛도 없는
지옥이었습니다
1943년 하시마로 끌려간 최장섭 할아버지에 의하면 당시 조선인 약 40명이 북쪽 중앙부에 위치한 9층 건물 지하 1층의 방 3개에 나뉘어 수용되었다고 합니다. 같은 해에 끌려간 고 서정우 할아버지는 한 사람당 0.5평도 안 되는 협소한 방에서 7~8명이 같이 살았다고 합니다.
강제동원된 조선인이 수용된 곳은 바람이 통하지도 햇빛이 들지도 않았습니다. 파도가 거칠어지면 바닷물이 스며들어왔습니다. 늘 악취가 나고 습도가 높은 너무나 비위생적인 곳이었습니다. 최장섭 할아버지는 밤에 눈을 붙이려고 해도 땀이 멈추지 않아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1941년 사할린에 끌려갔다가 1944년 하시마로 ‘이중징용’된 문갑진 할아버지는 밤새 벼룩에게 뜯기고 빈대에게 뜯기면서 죽을 고생을 했다고 하시마의 밤을 기억했습니다. 날이 밝아도 그들이 맞이해야 할 아침은 늘 어두컴컴했습니다.
“‘쉬고 싶다’고 말하면
몽둥이로 맞아야 했습니다
강제동원된 이들은 몸이 아파도 반드시 일어나야 했습니다. 노무 관리자가 조선인의 감기를 병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아파서 병원을 찾아가도 진단서를 써주지 않아 쉬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합니다. ‘쉬고 싶다’고 말 한마디 잘못하면 몽둥이로 맞았습니다.
서정우 할아버지는 빈약한 식사 탓에 심하게 설사를 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져서 일을 쉬려고 했는데, 그러자 관리 사무소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고 합니다. “네! 일하러 나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할 때까지 두들겨 맞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시마의 하루는 극심한 차별과 모진 고문으로 시작되었고, 그것이 일상으로 이어졌습니다. 사할린에서 ‘이중징용’된 강도시 할아버지는 노무 사무소 앞 광장에서 관리자가 손이 묶인 조선인 3명을 군대용 가죽 허리띠로 때리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다른 조선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밖에서 고문했고, 의식을 잃으면 바닷물을 퍼붓고 지하실에 집어넣었다가, 다음 날 다시 일을 시켰다고 합니다.
밥은 식당에서 주는 대로 먹어야 했습니다. 주먹 크기의 감자에 약간의 베트남 쌀을 섞어 지은 밥, 또는 콩깻묵에 약간의 현미를 섞어 지은 밥이었습니다. 정어리 조림 부스러기나 된장국이 나올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강제동원된 이들은 가축 사료나 다름없는 밥이라도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배식량이 적었을 뿐만 아니라 노무 관리자가 식량을 빼앗아가서 가뜩이나 적은 양이 더 줄어들었다고도 합니다. 이중징용 당한 황의학 할아버지는 아침에 같이 주는 점심까지 다 먹고 난 후 해저탄광에 들어갔다 나오면 배는 이미 등가죽에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늘 굶주림에 시달렸고, 모두 영양실조로 굶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군함도에끌려온 조선청년들
“누운 자세로
석탄을 캐야 했습니다
해저탄광으로 들어가는 입구(갱구)는 조선인 수용소에서 하시마 신사 너머 남쪽에 위치했습니다. 평생 농사만 짓다가 갑자기 탄을 캐는 일에 강제동원된 이들은 도대체 탄광이란 어떤 곳인지 본 적도 없었거니와 깊은 바닷속에 탄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하시마에 끌려온 후 훈련도 받지 못했습니다. 제대로 된 지식 하나 없이 난생처음 들어가는 해저탄광은 공포 그 자체였다고 합니다.
갱구에 도착하면 승강기를 타고 바닷속 깊이 한없이 내려가야 했습니다. 최장섭 할아버지는 승강기의 하강 속도가 너무나 빨라 온몸이 움츠러들 정도였다고 기억했습니다. 지하 수백 미터 아래로 내려간 다음에 개미집처럼 퍼진 굴속으로 더 들어가야 했습니다.
1944년 하시마로 끌려간 박준구 할아버지는 “각기 조마다 굴속으로 들어가면 일본인이 우리를 지휘하며 일을 시켰다. 한국인이 지시할 때도 있었다. 그 사람은 군대에 가본 사람이었고 회사에서 명령을 받고 있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일본인 갱부들은 천장이 높아 채탄하기 쉽고 비교적 안전한 곳에서 일한 반면, 조선인은 가장 위험하고 고된 막장일을 해야 했습니다. 높이가 50~60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비좁은 막장에서 곡괭이를 들고 계속 누운 채로 탄을 캐야 했습니다. 10분도 채 안 돼 하반신이 저려오고 등뼈가 점점 변형될 만큼 고된 중노동이었습니다.
“조센진은 탄광 안에 흐르는
물이나 마셔라
굴을 파는 일도 조선인들의 몫이었습니다. 박준구 할아버지는 “굴착기를 뒤에서 밀고 탄층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해 폭발시키고 삼나무 막대기를 세웠다”라고 위험천만한 작업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해저탄광 안에는 가스 냄새가 심했습니다. 숨쉬기 힘들었고 산소 부족으로 쓰러지기 직전이었다고 합니다. 또 하시마의 탄은 손에 잘 잡히지도 않는
밀가루와 같아서 흩날리는 탄가루에 눈을 뜨기도 힘들었다고 합니다. 탄가루로 인해 온갖 질병에 노출되었음은 물론입니다. 게다가 해저탄광 안의 온도는 마치 ‘열대(熱帶)’처럼 뜨거웠다고 합니다. 물통을 챙겨가도 항상 목이 말라 금방 바닥이 났다고 합니다. 일본인 갱부가 “조센진은 탄광 안에 흐르는 물이나 마셔라”하고 막말을 내뱉으면서 물통을 훔쳐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방에 흐르는 지하수는 갱부들의 배설물로 언제나 오염이 되어 있었습니다. 해저탄광 안에는 화장실이 없어 아무 데서나 볼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단층이 있는 곳은 천장에서 지하수가 집중호우처럼 쏟아질 때도 있었습니다. 염분이 많아 계속 맞다가는 피부가 심하게 헐었습니다. 워낙 차가워서 감기에 걸리거나 심하면 폐렴을 앓았다고 합니다. 고열이 나고 의식이 몽롱해지면 다치거나 사고를 당할 위험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악순환의 연속이었습니다.
“저항할 힘조차 없었습니다
하시마에서는 중국인도 혹사당하고 있었습니다. 1944년 ‘포로’ 명목으로 끌려온 이들 대부분은 납치당한 농민들이었습니다. 중국인은 가장 가혹한 작업장에 투입되었고 일상적으로 학대당했습니다. 어느 날 일본인과 분란이 있었고, 중국인 모두가 해저탄광 일을 거부하고 단식투쟁을 벌였습니다. 이때 미쓰비시는 군대를 끌어들여 무력으로 그들을 진압했습니다.
조선인의 경우 하시마에서 집단으로 저항했다는 기록이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최장섭 할아버지가 “그럴 여지는 없었다.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고, 살고 싶지도 죽고 싶지도 않은 마음이었다. 형무소에 갇혀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라고 말한 것처럼 ‘감옥섬’이라는 하시마의 또 다른 별명은 괜히 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시마에서 북동 방향으로 2.5킬로미터 떨어진 같은 미쓰비시가 경영하던 다카시마 탄광의 경우는 1944년 3월 1일 극심한 중노동과 굶주림에 시달린 조선인 13명이 파업을 일으켰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미쓰비시는 수시로 차별과 폭행, 모진 고문을 가하면서 조선인을 비인간적으로 대하고 중노동을 강요했기 때문에 조선인들의 반격과 저항의 가능성은 늘 잠재했고, 미쓰비시 역시 늘 경계했습니다.
사실 미쓰비시는 조선인과 중국인의 연대를 더 두려워했고, 그래서 그들의 접촉을 금지했습니다. 채탄 현장도 나눴고 수용소도 남쪽과 북쪽으로 갈라놓았습니다. 절대로 서로 마주치지 못하도록 한 조치였지만 해저탄광 안에서는 중국인이 파는 굴과 조선인이 파는 굴이 우연히 연결될 때가 있었습니다. 황의학 할아버지는 그럴 때면 중국인이 와서 “산동에서 언제 왔다” “우리는 한국 사람인데 언제 여기 왔다”라고 서로 필담을 나누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고의 위험이 있는 곳에는 일본인이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경우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루 12시간
주마다 밤낮을 바꾸며
일했습니다
침략전쟁을 확대해가면서 일제는 석탄증산정책을 무모하게 강화했습니다. 이에 따라 강제동원된 조선인의 노동시간도 점점 늘었습니다. 최장섭 할아버지는 3교대 8시간 노동을 두 번 할 때도 있었고, 2교대 12시간을 일할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1944년에 하시마로 끌려간 전영식 할아버지는 “하루 2교대 12시간 노동이었다. 일주일마다 밤낮이 바뀌었다. 낮에는 그나마 버텼지만 밤에는 졸려서 다치는 이들이 많았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노동시간이 늘어날수록 피로는 깊어졌고 그만큼 다치는 일도 많아졌던 것입니다.
손가락 부상 정도는 일상이었고 다리나 허리를 다치는 큰 부상도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전영식 할아버지는 지금도 제대로 펴지 못할 만큼 심하게 손가락을 다쳤고 또 돌에 맞아 배를 다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최장섭 할아버지는 천장에서 무너져 내린 돌에 깔렸는데 그때 다친 허리가 지금도 아프다고 합니다. 조선인이 일해야 했던 곳은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낙반사고와 가스폭발사고를 당할 위험이 높았고 실제로 그러한 사고가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미쓰비시는 치료를 제대로 해주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 주사를 놓아주고 약을 처방해주는 일은 한 번 있을까 말까 했습니다. 최장섭 할아버지는 손에 부스럼이 생겨서 괴로웠을 때도 참으라는 말밖에 듣지 못하고 그냥 방치되었다고 합니다. 미쓰비시는 부상자나 환자에게까지 차별을 자행한 것입니다.
“무참한 죽음이었고
유골마저 버려졌습니다
매몰되어 질식사하거나 압사당한 조선인도 많았습니다. 조선인 사망자 수는 석탄 증산이 무모하게 감행된 1943년부터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또한 하시마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 중에는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미쓰비시와 같이 탄광을 경영하던 기업은 갱부들의 ‘가동률 향상’ ‘도주 방지’ ‘치안 유지’ 등을 목적으로 각지에 이른바 ‘기업 위안소’를 설치했습니다.
하시마에서는 ‘작부(酌婦)’로 혹사당한 조선인 여성이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에 관한 기록도 있습니다. 일본 정부와 기업은 강제노동을 시키고 또 성노예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다가 죽음으로 내몬 조선인에 대한 진상을 아직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하시마에서 북동 방향으로 400미터 떨어진 곳에 나카노시마라고 하는 작은 섬이 있습니다. 그곳에 화장터가 있었습니다. “노무 관리자 명령으로 유골을 삽으로 떠서 (나카노시마의) 폐갱에 버렸다”라는 증언도 있고, 주검을 바다에 버린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시마로 다시 옮겨져 절에 안치된 유골도 있었는데, 미쓰비시는 그 유골을 1974년 하시마 폐광 당시 다카시마로 옮겼습니다. 그러다가 1988년 다카시마를 폐광할 때 그 납골당을 파괴해버렸습니다. 미쓰비시가 저지른 만행을 알고 피해자 유족과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 수시로 진상규명을 촉구했지만, 미쓰비시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아직까지도 책임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이 섬에 발을 디딘 순간
다시는 나가지 못한다
최장섭 할아버지는 바닷속 탄광에서 간신히 기어 나오면 다리에 경련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한참 동안 콘크리트 벽에 기댄 채 주저앉아 있어야 했고, 여기저기 신음소리가 하시마를 가득 채웠다고 합니다. 모두가 당장이라도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했습니다. 최소한 이 섬에서라도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겐 그러한 자유가 없었습니다. 일본인 갱부들은 배를 타고 나가사키 시내에 나가는 등 비교적 행동이 자유로웠지만,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아무리 배가 들어와도 탈 수 없었습니다.
박준구 할아버지는 끌려왔을 당시 한 조선인이 “이 섬에 발을 디딘 순간 다시는 나가지 못한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체념했다고 합니다. 24시간 감시의 눈이 사방에서 번뜩였기 때문에 하시마를 탈출하는 것은 웬만한 용기로는 엄두를 낼 수가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탈출을 결행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살기 위한 필사적인 저항이자 목숨을 건 탈출이었습니다.
“목숨 건 탈출,
잡히면 또 다른 죽음이었습니다
그들은 배설물을 운반하는 배나 물자를 운반하는 배에 몰래 올라타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뗏목을 만들거나 그냥 헤엄을 쳐 바다를 건너간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향한 육지 나가사키 반도까지는 약 5킬로미터의 장거리였습니다. 게다가 살인적인 조류를 견뎌야 했기 때문에 성공은 쉽지 않았습니다. 헤엄을 잘 치는 이들도 중간에 힘이 빠져 익사하거나 추격해온 미쓰비시 직원들에게 붙잡히기 일쑤였습니다.
탈출한 조선인을 살려주고 숨겨준 일본인도 있었고 바닷가에 떠내려온 주검을 묻어주고 묘비를 세운 육지 주민들도 있긴 했습니다. 그런데 겨우 탈출에 성공한 경우에도 대개는 주민들의 감시망에 걸려 다시 하시마로 붙잡혀왔습니다. 최장섭 할아버지는 어느 날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갔더니 탈출에 실패하고 붙잡혀온 이들이 고무 튜브로 피부가 벗겨지도록 맞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하시마에서 해저탄광 일에 종사했던 일본인 중에도 도망친 이들이 있었습니다. 자살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조선인보다 안전하고 자유로웠던 그들에게조차 하시마는 견디기 힘든 곳이었으니 조선인은 오죽했을까요. 하시마에서 일했던 한 일본인은 매일 누군가가 나무 몽둥이로 맞고 있었고 조선인 숙소에서는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증언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옥, 하시마
밤 8시가 되면 복도에 두 줄로 서서 점호가 시작되었습니다. 일본 천황이 사는 동쪽을 향해 경례해야 했고 전사자를 위해 1분간 묵도해야 했습니다. 모두 군대식 생활을 강요당했습니다.
밤에는 더욱 고향이 그리웠다고 합니다. 편지라도 써서 하시마의 실상을 전하고 싶었지만 그러한 편지는 절대 전달되지도 않을뿐더러 자칫하면 검열에 걸려 끌려갔습니다. 전달되지 않은 것은 편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미쓰비시는 용돈도 안 되는 월급을 주고 나머지는 고향에 송금한다고 했는데 고향의 가족들 대부분은 아무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미쓰비시는 저축을 강요하기도 했는데 통장을 보여주지도 않았고 나중에 돌려주지도 않았습니다. 일본인과 임금차별도 심했지만 애초에 월급이 얼마인지 설명조차 듣지 못한 이들이 많았고 아예 월급을 받지 못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강제동원된 이들은 끌려온 후 2년이면 만기가 돼서 돌아갈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고 알아도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하시마의 밤은 조선인들의 한 서린 울음소리와 무심한 파도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언제 끝이 날지도 모르는, 기한이 있어도 없는, 말 그대로 하시마는 ‘끝없는 지옥’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