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이인간/유미애
잊힌 것들의 창고라 했다
망가진 심장이 고쳐지는 곳, 당신은
미메시스와 상상력이 동거하는 그곳에서 왔다
태생적으로 약한 당신은 색종이에 찍힌 부호 같은 사람
간신히 뒤집은 몸 뒤쪽은 함부로 건널 수 없는 사막이어서
당신의 등에서 내 등으로 종이 모래가 옮겨오는
그 밤 내내 나는, 당신을 안는 꿈속에 있었다
지워진 이름들은 늙은 나귀에 실려 떠났다
바람 부는 날, 당신이 무릎 속의 바다를 건너는 것은
내가 한 생애동안 깎아 온 나무의 길을 지우는 일과 같아서
팔이 찢기고 다리가 떨어져나가는 순간들이 많았지만
당신은 온몸에 풀칠을 한 채로 제 슬픔과 맞서고
나는 검지를 깨물어 붉은 지도의 빈 칸을 채워갔다
우리의 창밖에는 막 오려낸 짐승들이 달리고
장미가 피고 모퉁이 뾰족탑의 종소리가 쏟아져
아가미 열린 포구의 별처럼 뺨이 가렵기도 했는데
당신 한 장으로 세계는 빛났고 고통 없이 허물어질 수 있었지만
당신은 마지막 피와 첫 기억이 빚어낸 종이 인형
몇 방울의 눈물에도 조각나 사라지고 말 텐데
나귀는 때 묻은 동전을 짤랑이며 내 손가락을 빠져나갈 텐데
나는 무덤이자 작업장인 구석방 탁자에 엎드려
당신이 들려준 적 없는 가위 소리를 스케치한다
나비가 벗어놓은 웅덩이 하나 / 유미애
가죽을 벗어놓기 위해 세상 끝에 닿은 짐승처럼, 쓸쓸할 때가 있지
많이도 떠돌았네
달고 쓴, 눈먼 것들의 심장을 맛봤으니 꽃이 필 때마다 숨이 가빴지
뿌리를 갖고 싶었지 내가 피운 것이 꽃인지 눈물인지가 중요할까?
슬그머니 잡풀 사이로 숨어들었지만 절룩이는 온갖 종들이 모여들어서
망초 그늘에 세든 구덩이도 수시로 옮겨가야 했지
색색의 천을 기도처럼 묶고 떠나가는 배들
난들 배꽃 피는 동네에서 살아보고 싶지 않았을까
연두의 봄날을 가르며 오는 목선 한 척의 설렘을 잊었을까
삽 한 자루 제대로 잡아본 적 없는 나는
떠나는 발 풍문을 쫓는 귀 시간을 발라먹는 혓바닥이었을 뿐
웅덩이며 나뭇가지에 영혼을 흘리며 가는 노을에도 서러워져서
붉은 오지를 밝혀놓은 망초 꽃대가 신성한 촛불처럼 느껴졌지
그 흔들림과 나란히 허리를 숙이면 최초의 사람이라도 된 듯해
내가 달린 외로움의 씨앗 하나가 또 다른 나로부터 달아나던 중이었을까
이제 와 신전 하나를 몸에 들인들 네가 나를 용서할 수 있겠냐만
삽날의 두려움이 쪼그라든 심장을 두드리지만, 지금도 나는
꽃핀 웅덩이를 노 저어가는 꿈을 꾼다네
⸻ 계간 《문파》 2021년 겨울호
------------------
* 유미애 시인
1961년 경북 문경 출생. 경희사이버대학교 졸업
2004년 《시인세계》 등단.
시집 『손톱』 『분홍 당나귀』.
북극곰처럼 / 유미애
안드로메다에서 온 고양이의 편지를 읽는 저녁
당신은 한 마리 북극곰처럼 슬픔을 뜯어먹는다
김이 오르는 황혼의 선지 한 그릇을 비운다
이 목젖 뜨거운 만찬은 준비된 것이 아니다
얼어붙은 도시의 뒷거리를 어슬렁거리던 당신은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굴 속 같은 은둔지로 돌아오는 중
찢어진 봉투 속에는 우리의 엉덩이 같은 복숭아가 무르고 있다
당신은 중력을 잃고 스러지는 꽃의 성체를 들여다보며
나무에 리본을 묶던 기억과 그 그늘 아래 숨을 거두던 노루의 눈
어느 밤, 당신은 쓰레기통을 뒤지는 고양이처럼
꼬리를 세운 제 그림자에서 그 눈을 발견하고 울컥 서러울 것이다
실내악과 포도주가 향기로운 카펫 위의 식사는 상상으로 족하다
분홍 뺨이 턱수염으로 덮여가는 당신의 저녁
노루의 안마당에는 봉함엽서가 쌓이고 고양이 깡통에는 별이 빛난다
길 잃은 고래를 찾기란 당신이 건기를 나는 것만큼이나 거룩한 일
유빙을 타고 아무르 강 어귀까지 갔던 당신은
마침내 할딱거리는 허공의 심장까지 손을 뻗는다
나는 달동네 쪽마루에 엎드려 긴 일기를 쓴다
너무 깊이 왔다
어둠 곳곳에는 우리의 잇자국과 침 냄새가 배어 있다
내 혀에서는 쇠 종이 울고 당신의 턱수염에선 석유 냄새가 난다
그렇게라도 가슴 속 만년설을 녹이려는 듯
고래섬 너머 불타는 도화원에 닿으려는 듯
리본을 벗겨 반쪽의 달, 검푸른 고양이의 눈을 올려다보며
또 한 끼의 밥을 먹는다
어둠의 심혼이 복숭아꽃처럼 피어나는 차고 순결한 북극의 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최형심 시인
서식지를 잃고 유빙을 타고 떠내려가는 북극곰처럼,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시들어가는 꽃처럼, 버림받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고양이처럼, 달동네 마루에 누워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는 누군가처럼, 가슴 속에 만년설이 가득한 우리는 순결한 북극의 밤을 잘 알고 있는 북극곰. 어느 날 울컥 서러울 수 있는 우리는 실연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출처 : 내외일보(http://www.naewoeilbo.com)
https://blog.naver.com/kiroro1956/130101908439
https://blog.naver.com/miaeyu/222316176926
피리
- 유미애
나는
나무의 눈동자를 찢고 나온 새요
피 묻히며 새가 건너가는 하늘, 바람의 긴 숨
가쁜 숨으로 빠져나온 바다의 눈썹 끝
연둣빛 상처를 드러내며 우는 달이요
죽은 사람이 벗어놓고 간 비단 버선
복숭아 자루를 끌고 가던 보름 밤
한 떼의 나비를 날려 보낸 썩은 복숭아 조각이요
초록의 물렁뼈가 닳은 나무의 무릎
빈 무릎 아래서 색을 나누던 구렁이
류화주*한 잔을 먹고 잠든 구렁이 속의 얼굴이요
산비탈, 바다로 가는 길목을 지키는 집
엉겅퀴 밭을 헤치며 콩을 줍던, 허리가 휜 램프요
한 생애 동안
황토밭에 눈물을 뿌려 온 늙은 암소요
나는
혀 짧은 뱀, 눈썹이 문드러진 소
몸 바꾸어 돌아가던 풀집 모퉁이
그리운 봄날을 향해 가는
털이 무성한 맨발이요
* 신선들이 마신다는 술.
시집『손톱』문학세계사 2010
오카리나
- 유미애
어느 저녁 당신이, 강가에 서 있을 때
푸른 견장의 후투티 한 마리 날아가던가요?
생강, 앵두, 잘 못 익힌 말들이 호루라길 불던가요?
새 모양의 악기를 산 건 열병을 앓은 후였죠
내가 지켜낸 것들이라야 노란 생강나무와 바위앵두
야무진 새의 주둥이를 입에 무는 순간
내게 악기를 판 페루 남자가 생각났어요
이글거리는 붉은 눈의 사내가 다가왔어요
나는 생강꽃이 지는 일보다 당신의 기억이 녹는 것보다
중심을 잡지 못하는 여음이 서러워, 멍하니
그이의 목에 걸려 노래하는 새를 바라보았죠
바람 부는 섬에서 다시 만났을 때의 몰골이란
세상에나, 당신의 심장 같은 꽃은 지고
다시 싹 틔울 씨앗 하나 남지 않은
우리들의 황폐한 페루
그 페루 남자, 심폐소생술을 하듯
베들거리는 화분 속으로 두툼한 입술을 밀어넣었죠
파닥거리는 새들을 날려 온 검붉은 목
앵두, 앵두, 생강
악기 상자 속에 사는 작은 페루의 유령
큰 잎 물새의 유서
- 유미애
물새 처녀가 피 빨래를 하고 있다
검은 밤, 뭍의 심장을 훔쳐 의식을 치른 바람은 그녀의 몸에
글자를 새기고 갔다
첫 개화, 첫 흔적, 강물에 닿는 순간 산호색 문장은 녹아 내리고
당신들의 얇은 귓불엔 연두의 새잎이 돋는다
웅크려 흙 냄새를 맡던 여인숙 끝 방은 신전이 있던 자리
벽 너머의 그녀는 물고기가 지느러밀 펴듯 칼을 갈았고
아랫목엔 발굽 소리를 죽이고 날개를 접은 푸른 달
물의 색, 뿌리 없는 꿈, 흔들리는 사생활을 간섭 마라
강물을 마시면 꽃의 혀가 되고 광대의 입술이 되어
떠도는 피를 사랑한 새의 조상이나
북의 군대로 돌아간 바람의 일대기를 노래할 수 있으련만
나는 물의 종족, 그녀의 핏물을 읽으며
물새의 혈통을 물려받은 눈, 내 눈 속의 당신들을 후벼팠다
사내들이란 그립고도 한스러운 적국의 말이 아니든?
북풍의 뼛조각을 물고 와 물 무덤에 내려놓는
새벽의 등을 쓸어주었을 뿐 입을 숨긴 물의 얼굴은
먼 봄을 향해 지저귀지 않았다
시집『손톱』문학세계사 2010
[ 손톱 ]
-꽃잠
- 유미애 -
망초 붓꽃 파랭이
흘러간 사랑의 비린내를 핥아먹는 저녁
아∼하고 상처를 연 순간 색의 덩어리가 쏟아진다
여러 날을 늙은 나무의 그늘에 얹혀 지냈다
새장이 흔들리는 나무 밑, 고양이와 나눠먹는 앵두 한 접시
나비야, 마실 가자! 붉게 번진 입술을 문지르며 따라가던
애인과의 마지막 꽃구경
누군가는 이 열망이라는 짐승과 할퀴며 뒹굴고, 또 누구는
고양이의 눈에 비친 황금나무를 꺾어 달빛 속으로 노 저어갔지만
나는 늑대의 시를 읊기 위해 사내라는 벼랑을 탔다
타들어가는 환부를 열어젖히고 새의 허공을 흘러 다녔다
일생, 조용한 꽃나무의 묘지기로 살자던 비밀을 엎지르고
장미와 고양이의 로맨스를 탐닉했다
초승달 신부가 부풀고, 신랑이 거친 몸을 가렸던 옷을 찢었을 때
그믐에 죽은 꽃을 부르며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떠난 자의 눈물이 푸른 손톱을 다시 물들일 때까지
새들이, 장미가 낳은 앵두의 눈을 다 파먹을 때까지
내 안의 주홍빛을 비워내지 못했다
꽃잠 : 깊이 든 잠. 신랑 신부의 첫날밤의 잠
http://blog.naver.com/jaewoonim/223042811962
사과꽃 램프 / 유미애
식탁 위의 사과 한 알 등불처럼 흔들리는 저녁
어머니의 칼이 길을 트자, 종소리가 흩어졌다
헛간 뒤 사과밭 묘지, 봄에도 꽃 피지 않는 아버지의 나무
세잔의 열망도 파리스의 영예도 없이 침묵으로 돌아온 자식들
나무 아래 굽은 등 포개며 11월의 바람 소리를 듣는다
사막의 외딴집엔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다는데
이따금, 거친 두레박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어머니의 백학과 오라비의 목검이 부딪히고
어쩌면 검은 목젖을 부풀려온 이 목마름의 근원도
저 속, 말라죽은 아버지의 뿌리인지 몰라
우우우 턱을 쳐올리면 묘지기의 푸른 눈동자에
훅, 연분홍 꽃잎을 새겨 넣는 늙은 나무
겨드랑이의 노랑부리는 아직도
붉은 꽃냄새에 갇혀 울던 옛집 버리고
나귀 등에 오르는 꿈을 꿀까
칼을 물고 올려다본 고목에서 툭, 풋열매가 터졌다
식은 저녁 식탁 위, 죽은 꽃이 피운 생비린내
잊었던 사람의 눈빛처럼 뜨거운 램프 하나 덩그렁!
시집<손톱>2010. 문학세계사
유미애 시인
경북 문경 출생.
2004년 <시인세계>로 등단
2009년 서울문화제단 젊은 예술가를 위한 창작지원금을 받음
2010년<손톱> 문학세계사
https://cafe.daum.net/SWAOM2019/nFyd/36?q=%EC%9C%A0%EB%AF%B8%EC%95%A0&re=1
https://cafe.daum.net/S.R.H/DQqe/350?q=%EC%9C%A0%EB%AF%B8%EC%95%A0&re=1
사냥, 그리고 일곱 번째 눈썹
-투화(投花)
우린 이제 아름다운 사냥감을 돌에 새기지 않는다
부족의 창에 걸려든 작은 짐승
마지막 숨이 고요한 지층을 흔들 때
꽃잎 같은 긴 임종을 불 속으로 내던졌다
짐승들이 인간을 사냥하던 그때
저들도 심장이 놓인 돌 앞에 둘러 앉아 노래를 불렀을까
어금니에서 귀로 건너가던 낯선 종(種)의 울음소리
살생의 분홍빛이 빠져나갈 때까지 바닥을 긁었을까
동굴처럼 깊은 눈을 껌벅이면
원시의 시간을 벗겨낸 뺨과 입술
고독한 팔다리를 가진 족속에 대한 그리움으로
심장 반쪽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을까
그렇게, 서로의 상처를 엿보는 슬픔 하나씩을 지니게 된 걸까
낄낄거리며 뜯어먹는 이 살점의 주인은
어쩌면 내 까마득한 날의 사랑일지도 몰라
붉은 영역 너머로 꽃을 던지는 저녁
비린 눈썹 한 쌍이 건너왔다
- 『시산맥』 2014년 봄호
모란*
-치마
몇 번의 빚을 얻으며 이어왔나
수렵의 정강이를 쫙 찢어내며 육교와 지하도를 건너가는 허리 잘록한 원피스
치마 속에 잠든 은협도와 사슴과 모란꽃손매듭
나는 피 묻은 비단 조각을 바친다
창을 던지며 피리를 불며
재봉틀을 돌려온 검정치마의 그늘 앞에
육식바늘의 귀에 화살을 꽂은 초식바늘 앞에
맨 치마에 나비를 꿰매준 어미의 굽은 손가락 앞에
야생으로 던져진 첫 드레스의 눈물 앞에
마지막 패치코트를 펼쳐놓은 공작새 날개 앞에
나는 치마를 들어올린다
모란 속에 살던 건달과 별빛과 피리소리
치마를 나온 사슴이 어린 공작을 몰고 숲으로 든 후
꽃의 처마가 뜨거울 때
흩어진 치마들에게 묻는다
해진 밑단 아래 숨은 폭 좁은 역사에 대해
제 분홍을 다 뜯어 먹히고 가벼워진 늙은 모란에 대해
부끄러운 몸뚱이를 둘러준 푸른 치마와
그 눈의 죄를 읽게 한 내 치마의 붉음에 관해
*모란: 작약과에 속한 낙엽 활엽 관목. 난을 꾀하다
- 『시인동네』 2013년 여름호
거짓말 부족 소녀 릴리
우리들의 아침이 순결을 잃는 순간 양이 울었다
정오의 나무와 자두 사이에 그늘이 생기고 작은 자두의 그늘 속으로 눈꺼풀이 눌러 붙은 별이 걸어왔다
누더기를 바꿔치기 한 그늘과 별, 내 눈은 아직 어두웠다
바람이 일고 가까스로 양이 몸을 일으켰다 그늘을 밀친 내 눈 속에서 처음으로 꽃이 피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나는
마지막까지 생존의 피를 빚져야 할 그늘 이었다
일생을 탕진하고 돌아온 자두의 지붕, 늙은 별의 아이였다
흰 바위산을 뛰쳐나간 도망자, 낙인찍힌 천사의 자식 이었다
질척한 흉터 어디에나 깃들던 바람의 미립자였다
그러고 보면 부족의 모든 것이 나의 아비
나는 냄새나는 온갖 어미들의 새끼
반쯤 익은 자두, 오염된 눈물, 내가 처음 마주한 그들은 모두 이 비린내를 구별할 깊은 속눈썹을 가졌었다
- 『시와 표현』 2013년 봄호
쌍혓바닥얼룩뱀
내가 눈 뜬 곳은 버려진 북쪽 연못가
나를 이끈 것은 부끄러운 혀와 일곱 음률과
그믐밤 달을 관통하던 화살
당신의 목 뒤로 이빨을 찔러 넣은 뒤
귓속을 울리는 목소리 잘라내며 떠나왔지만
내 철칙은, 남루한 사랑을 긴 허리로 안으며
헉헉, 세상 바닥을 핥으며 온몸으로 간다는 것
달이 차오르면 내 피는 응혈의 덫을 풀 것이라
점점 몸은 덥혀져오고 참을 수 없는 나는
풀밭을 뒹굴 거라 또 하나의 꽃빛 혀를 가질 거라
귀머거리 여자가 찾아와 피리를 주고 간 밤
나는 바람의 등을 때리며 만삭의 달 속으로 들 거라
달의 고요한 목젖을 얻을 거라
당신은 첫 흉터를 찢으며 새끼를 낳을 거라
핏덩이를 닦아주며 일곱 색, 내 음률을 들려줄 거라
푸른 몸의 얼룩무늬 더욱 선명해질 때
나는 다시 화살을 쏘아 보낼 거라
슬픈 날이 올 거라
비단 갑옷이 증표가 되지 못하고
꿈틀거리던 혓바닥은 갈라 터져서
활을 멘 아이들이 힐끔힐끔 연못가를 지나쳐 가는
마침내 나는 어느 날
아비보다 큰 귀를 가진 소년의 피리 소리를 들을 거라
풀밭의 늙은 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거라
- 『문학마당』 2011년 가을호
오카리나
어느 저녁 당신이, 강가에 서 있을 때
푸른 견장의 후투티 한 마리 날아가던가요?
생강, 앵두, 잘 못 익힌 말들이 호루라길 불던가요?
새 모양의 악기를 산 건 열병을 앓은 후였죠
내가 지켜낸 것들이라야 노란 생강나무와 바위앵두
야무진 새의 주둥이를 입에 무는 순간
내게 악기를 판 페루 남자가 생각났어요
이글거리는 붉은 눈의 사내가 다가왔어요
나는 생강꽃이 지는 일보다 당신의 기억이 녹는 것보다
중심을 잡지 못하는 여음이 서러워, 멍하니
그이의 목에 걸려 노래하는 새를 바라보았죠
바람 부는 섬에서 다시 만났을 때의 몰골이란
세상에나, 당신의 심장 같은 꽃은 지고
다시 싹 틔울 씨앗 하나 남지 않은
우리들의 황폐한 페루
그 페루 남자, 심폐소생술을 하듯
베들거리는 화분 속으로 두툼한 입술을 밀어넣었죠
파닥거리는 새들을 날려 온 검붉은 목
앵두, 앵두, 생강
악기 상자 속에 사는 작은 페루의 유령
- 『시인세계』 2010년 겨울호
-트럼펫 보이/유미애- 너는 가장 빛나는 별이 될 거란다 흰 보에 싸인 내 울음소리는 담을 넘지 못했다 신이 주신 건 속눈썹이라는 낮은 지붕 하나였으니 자두꽃이 피는 저녁, 눈 속의 물고기를 꺼내 나무에게 바쳤다 나의 시작은 자두 한 알이었으니까 자두 너머의 세계를 들려주는 건 내 손의 비린내를 쪼다 가는 새들이었으니까 속눈썹에 빗질을 했다 악보 사이 짐승들이 우글거렸으나 눈 속에는 비늘을 번뜩이며 길을 묻는 음표들, 하이에 나를 눕히고 발라드를 찾아오겠다 놈의 심장에 꽃을 던지겠다 운석 지대로 새를 날렸다 별을 깨며, 최초의 노래를 듣겠다 돌 속으로 돌아가 마지막 악기가 되겠다 자주색 달이 뜨는 밤 담장 밖으로 뛰어들 때, 이 메트로놈 소리를 따라가거라 남은 빛을 건네는 물고기 다시 환해질 때까지, 나는 자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