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군사정부의 종식
(1) 6․10 민주항쟁
광주민중항쟁이 끝난 직후인 80년 5월 31일 정부는 대통령의 계엄업무 지휘․감독 자문보좌기관으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했다. 국보위 상임위원장은 보안사령관(계엄사 합수부장)과 중앙정보부 부장서리를 겸직하고 있던 전두환 장군이 맡았다. 의장직을 대통령이 맡긴 했으나 실질적으로 모든 권력은 신군부의 핵심인 전두환 상임위원장에게 집중되었다. 국보위는 대대적인 공직자 숙정, 폭력배 소탕, 과외중지 등 각종 숙정작업과 사회정화운동을 전개했다.
최규하 제10대 대통령은 그 해 8월 16일 대통령직을 내놓았다. 박충훈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최 대통령의 사임은 신군부 세력의 전면적인 등장을 예고한 신호나 다름 없었다. 뒤이어 국보위 상임위원장 전두환이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뽑혀 9월 1일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전두환은 81년 2월 25일 대통령선거인단 간접선거에 의해 다시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돼 임기 7년의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학생들의 반정부운동은 날로 확산되어 갔다. 야권 인사들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을 결성하는 등 가세했다. 민추협이 모태가 돼 탄생한 신한민주당은 85년 1월 18일 창당대회를 가졌다. 신민당은 선언문에서 “민중의 힘이 곧 국민의 힘이요, 민중이 국가의 주인임을 보여줄 것”이며 “난국을 타개하는 길은 민주주의밖에 없다.”고 밝혔다. 신병치료를 이유로 억지 도미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후보가 2월 8일 2년여만에 귀국 김영삼과 함께 민추협 공동의장을 맡았다.
85년 2월 12일 실시된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은 화려하게 등장했다. 184석의 지역구 가운데 농어촌에서 많이 득표한 민정당이 87석을 얻었고, 신민당은 서울을 비롯한 6대 도시에서 거의 전부 당선해 50석을 확보했다. 나머지는 민한당이 26석, 국민당이 25석을 차지했다. 예상 밖의 선전을 한 신민당은 제1야당이 되었다. 85년 3월 6일에는 정치활동 금지가 전면 해제돼 김대중․김영삼․김종필 등 이른바 3김을 포함한 모든 정치인의 규제가 풀렸다.
신민당은 총선 1주년을 기념해 86년 2월 12일 ‘직선제 개헌 1천만명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대학생과 재야단체, 종교단체 등이 신민당 집회에 대거 참여, 광주대회에는 10만명 이상의 군중이 모이기도 했다. 시민항쟁은 87년 1월 14일 서울대 박종철 군에 대한 경찰의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하면서 그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건을 은폐 조작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공권력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폭발 민주화 욕구에 불을 붙였다.
전두환은 그 해 4월 13일 “일체의 개헌논의를 중단시키고 현행헌법으로 88년 2월 정부를 이양하겠다.”고 선언 그 날부터 국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국민의 함성은 87년 6월 10일 ‘박종철 군 고문살해 은폐조작 규탄대회’로 절정을 이루었다. 그 뒤 약 20일 동안 전국은 연일 대규모 시위로 들끓었다. 6월 26일에는 6월 항쟁 기간 중 최대 인원이 참가한 가운데 전국 33개 도시에서 ‘국민평화대행진’이 벌어졌다.
6월 29일 아침 노태우(盧泰愚) 민정당 대표위원은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하고 선거를 실시, 1988년 정부를 이양하며 국민적 화해를 위해 김대중씨를 사면복권 시킨다.”는 것 등 8개항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전두환 대통령은 7월 1일 담화를 통해 “여야가 국회에서 개헌안에 합의하면 이를 국민투표에 부쳐 개헌할 수 있다.”고 노태우 대표의 구상을 전폭 수용했다. 민주화를 위한 국민의 열망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 해 12월 16일 16년 만에 직선제로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36.5%를 얻어 당선됨으로써 제6공화국이 출범했다.
(2) 문민정부 출범
1) 민주주의의 출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출범은 민주화의 새 출발을 의미했다. 1993년 2월 25일은 광복 이후 한국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이 하나의 결실을 맺은 날이었다. 특히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부 지배 하에 놓였던 한국 정치가 종말을 고하고 민주화를 향해 한 걸음 내디딘 것이다.
독재정권의 퇴장이 바로 민주정치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30여년 간 누적되어 온 사회적․경제적 갈등이 동시에 폭발하는 또 다른 혼란의 과정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3당 합당으로 정권창출에 성공한 김영삼 정부는 이같은 유산을 청산하고 민주화시대를 열기 위한 변화와 개혁의 추진을 떠 안았다.
권위주의 잔재를 없애는 일환으로 김영삼 대통령은 우선 청와대 앞길을 개방하고 공직자 재산공개를 제도화했다.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제거하는 등 대대적인 군 개혁도 단행했다. 93년 8월 12일에는 금융실명제를 실시, 검은 돈의 유통과 그에 따른 탈법과 비리를 막는 장치를 마련했다.
문민정부는 또 현대사의 분수령을 이루었던 주요 사건들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 작업을 실시했다. 국외안장 선열들의 유해봉환, 상해 임시정부 청사 복원, 옛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등이 바로 그 것이었다. 4․19을 혁명으로 정의하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문민정부 수립의 원천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12․12 군사반란, 5․18에 관련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핵심 주동자의 사법처리는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을 받는다”는 이정표를 세웠다. 그러나 문민정부는 한보사태를 시작으로 야기된 대기업의 연쇄부도에 속수무책, 외환위기를 초래하여 국가를 파산 직전까지 몰고 갔다. 이는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체제를 수용하는 초유의 경제난 속에 집권 5년의 막을 내리게 만들었다.
2) 지방자치제 실시
5․16 쿠데타로 중단되었던 지방자치제가 1991년 두 차례의 지방의회의원 선거를 통해 30년 만에 부분적으로 부활되었다. 시․군․구(기초)의회 의원은 3월 25일에 시․도(광역)의회 의원은 6월 20일에 선거가 각각 실시됐다. 기초의회는 전국 3,562개 선거구에서 4,304명의 의원을 선출했으나 유권자들의 무관심 때문에 전국 투표율은 55%에 지나지 않았다.
제1대 기초의회 의원의 임기는 4년에 무보수 명예직으로 하였으나 개정된 지방자치법에 따라 그 임기를 95년 6월말까지 연장하였다. 장성군에서는 11개 선거구에서 모두 13명의 군의회 의원이 당선되었는데 이는 장성읍에서 2명을 뽑았고, 남면에서는 임기 도중 사망한 의원으로 인해 보궐선거를 실시했기 때문이었다. 장성군의회의 전반기 의장은 기관서 부의장은 이만수였고 후반기는 의장에 조복래, 부의장에 김판근이었다.
기초의회와 달리 정당참여가 가능한 광역의회 선거는 여당인 민자당이 전국 15개 시․도 866개 의석 중 564석을 차지했다. 신민당은 165석, 민주당은 21명의 당선자를 각각 냈다. 이에 비해 무소속은 115명이 당선되는 강세를 보였다. 이같은 결과는 정치권이 14대 총선을 앞두고 야권통합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절름발이를 못 면했던 지자제는 95년 6월 27일 전국의 광역 및 기초단체장, 광역 및 기초의회 의원 등 4개 지방선거를 동시에 실시함으로써 명실공히 풀뿌리 민주주의를 만개하게 되었다. 이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은 서울을 포함해 4개 광역단체장과 84개 기초단체장을 장악하고 광역의원 352석을 차지했다. 기초단체장은 민주당 84명 이외에 민자당 70명, 무소속 53명, 자민련 23명 등이었다.
세계 주요 언론들은 6․27 지방선거를 여당의 패배로 규정하고 선거과정에서 나타난 지역주의가 향후 정국구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관심을 표명했다. 특히 김대중씨의 정계복귀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일본 언론들이 내다봤다.
6․27 선거에서 장성군수로는 김흥식(金興植)이 당선돼 민선초대 군수가 되었다. 장성군으로서는 3년 임기의 제32대 군수를 군민의 손으로 뽑게된 것이다. 제2대 장성군의회 의원은 11개 선거구에서 12명을 선출했는데 임기는 95년 7월부터 98년 6월까지 3년간이었다. 전반기 의장은 최남호, 부의장은 이우규였고, 후반기는 의장에 조복래, 부의장에 김병관이었다. 당선무효 1명과 형 선고에 의한 자격상실 1명이 있었으나 그 중 서삼면은 보궐선거를 실시했지만 삼계면은 실시하지 않은 채 임기를 마쳤다.
98년 6월 4일 실시된 제2기 동시 지방선거는 비교적 공정하게 치러졌으나 전국 투표율은 52.6%로 1961년 이래 가장 낮았다. 두드러진 현상은 영남 쪽은 야당, 호남 쪽은 공동여당이 분점하는 지역 분할구도가 더욱 굳어진 것이다. 고질적인 지역감정이 기승을 부린 탓이다.
6․4 선거에서 김흥식은 다시 제2기 민선자치 군수로 재선되었다. 김 군수는 취임사를 통해 “무소속 전국 최고의 득표율인 63%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것은 지난 3년 간 벌여 놓은 사업을 마무리하고 앞으로 4년 간 장성 발전을 위해 열심히 일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제3대 장성군의회 의원은 모두 11개 선거구에서 11명이 선출돼 임기 4년(1998년 7월2002년 6월)의 의정활동을 펴고 있는데 전반기 의장에는 김종권, 부의장에는 변원이 각각 뽑혀 의회를 이끌었으며, 후반기 의장에는 최남호, 부의장에는 김상복이 선출되었다.
(장성군청 홈페이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