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망野望’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30년 전이다.
아주 재미있게 봤다.
왜냐하면 드라마 주제곡이 한동안 나의 18번 곡이었으니.
“사랑도 부질없어, 미움도 부질없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버려, 성냄도 벗어버려
하늘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버려라 훨훨 벗어라 훨훨 사랑도 훨훨 미움도 훨훨
버려라 훨훨 벗어라 훨훨 탐욕도 훨훨 성냄도 훨훨훨훨훨훨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아아~ 물 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훨훨 벗어 버릴 수 있을까? 그러면 정말 삶이 가벼워질까?
노자의 도덕경을 읽으면서 다시 부르는 애창곡이다.
언제 들어도 가슴이 편안해진다. 흥얼거리면 마음도 가벼워진다.
도덕경을 쬐끔이라도 읽어서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무위無爲에 대해선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읽으면 읽을수록 와해되는 느낌이다.
도대체 어떻게 살란 말인가? 손을 놓고 살라는 말인가?
물 같이, 바람 같이, 깃털 같이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바람 불면 바람에 넘실거리고, 비가 오면 비에 젖고,
물이 되어 맞닥뜨리는 모든 것을 끌어안을 수 있단 말일까?
작위作爲하지 말고, 멍때리고 사는 것이 無爲自然이란 말인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시간이 과거, 미래, 현재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한다.
완전히 틀린 생각이란다.
시간은 과거와 미래로 나누어 지지만, 현재는 전혀 시간의 일부가 아니란다.
시간 속에서 그대는 현재를 잡을 수 없다.
현재를 잡으려고 해보라. 놓치고 말 것이다.
그것은 항상 그대가 닿는 영역 저 너머에 있다고 한다.
어제와 오늘이 다른 古稀의 나이다.
시간 개념이 없을 수 없다.
나이를 잊고 싶다. 어제와 오늘을 잊고 싶은데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노자는 잃고 또 잃음으로써 무위에 이른다고 한다.
무위에 이르면 작위하지 않건만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세상을 취하는 자는 무위로써 하나니
어떤 것을 하기에 이르면(作爲) 천하를 취할 수 없게 된다.
도대체 무위無爲를 어떻게 찾으란 말인가?
노자는 말한다.
도를 추구하는 자는 날마다 더 잃으려 한다.
이들은 날마다 잃어버린다. 자신을 비우고 잊어버린다.
그가 배우는 것은 단 한 가지. 잊어버리는 것이다.
무위에 이르는 방법으로 명상하라 한다.
명상은 집중되지 않은 상태이다.
단지 조용히 듣는다.
마음 안에 어떤 긴장도 없이, 배우거나 알려는 욕망도 없이, 완전한 이완의 상태로,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흘러가도록 놔두는 상태로, 그대 존재를 열어놓은 상태로 조용히 있어야 한다.
無爲! 행하지 말라고 한다.
많은 것들이, 그대의 행위 없이도 잘 돌아간다.
그리고 그대의 행위가 없이 일어날 때,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그 안에 아무런 성냄도 없다.
오직 우아한 비움만 있어 사랑스럽다.
그러나 그대가 그것을 할 때, 그것은 탐욕이 된다.
그때 우아한 품위는 사라지고 모든 것은 추해진다.
삶과 죽음은 공존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에고가 없는 초목들은 상생한다.
햇볕이 있으면 광합성을 하고, 비가 오면 수분을 흡수할 뿐,
인간처럼 날씨의 좋고 나쁨을 자기 분별대로 판단하지 않는다.
自然人으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