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장이 되려면 선원 경험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중국에 뉴질랜드문화원 설립이 꿈…멋진 자연환경·훌륭한 교육 제도 알리고 싶어
‘멘토’ 안준우. 그의 멘토는 다정다감하면서도 시원시원했다.
누구보다 뉴질랜드의 현실을 잘 아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오클랜드 퀸 스트리트(Queen St.), 이곳은 오클랜드에서 가장 활발한 거리다. 크고 작은 건물들 사이로 숱한 인파가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직장인도 있고, 대학생과 유학생도 있고, 관광객도 있다. ‘오클랜드의 오늘’이 여기에 다 있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퀸 스트리트 350번지. 아이맥스(i-Max) 극장 건너편에 자리 잡은 건물 3층에 ‘뉴질랜드 멘토’(NZ Mentor)라는 사무실 간판이 눈에 뜨인다. 상호만으로는 무슨 일을 하는 회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2009년 10월 설립…유학원으로 시작
“왜 회사 이름을 ‘멘토’로 지으셨나요?”
내 첫 질문이었다.
안준우 원장은 차분하면서도 분명하게 말했다.
“2009년 10월 제가 이 사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멘토’라는 말이 널리 쓰이지 않았어요. 쉽게 말하면 유학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말보다는 좀 더 뜻깊은 이름을 갖고 싶었어요. 우리 회사를 찾아오는 모든 분에게 멘토가 되고 싶다는 마음에 회사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겁니다.”
‘뉴질랜드 멘토’, 이 회사는 유학, 이민, 여행 일을 주로 한다.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뉴질랜드 이민과 유학 붐이 한창 불 때만 해도 관련 회사가 수십 개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옛날의 영화일 뿐, 존재하는 것 자체도 버거운 현실이 되어 버렸다. 그 가운데서 ‘뉴질랜드 멘토’는 한인 사회는 물론 현지 사회에서도 탄탄한 업체로 성장해 나가고 있다.
준우는 1992년 6월 부모를 따라 이민을 와 벨몬트 인터미디어트(Belmont Intermediate), 타카푸나 그래마 스쿨(Takapuna Grammar School)을 거쳐 오클랜드대학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3년을 공부한 뒤 잡은 첫 직장은 전공과는 관계가 없는 대한항공 오클랜드 지점(행정직)이었다.
“건축을 공부하기는 했지만 제 적성과는 맞지 않았어요. 미술 쪽에 치우친 공부라 저랑은 코드가 달랐어요. 졸업을 하고 석 달 정도 건축 회사에서 인턴을 했는데 계속해서 그 길을 가는 것은 힘들다는 판단을 해 일반 회사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케이 무브 스쿨’ 덕 봐…20%는 NZ 정착
준우는 대한항공에서 7년을 일했다. 1년은 시내 사무실에서, 6년은 공항에서 근무했다. 그 사이 현재 회사 ‘뉴질랜드 멘토’를 여는 간접 경험을 하게 됐다. 직장 선배들의 뉴질랜드 정착 일을 도우면서 그 일도 매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삼십 대 초, 준우는 자기 이름으로 된 회사를 세웠다.
회사는 2년도 되지 않아 터를 잡았다. 한국 정부에서 추진한 ‘케이 무브 스쿨’(K-Move School) 덕이었다.
“이명박 정부 때 한국 젊은이들을 해외로 보내 넓은 세상을 보게 해 주겠다는 게 바로 그 정책이었습니다. 고졸이나 대졸 미취업자에게 장학금 혜택을 주어 전 세계로 보냈는데 뉴질랜드 담당이 우리 회사였습니다. 5년 동안 대략 400명의 젊은이가 들어 왔습니다.”
준우는 그 가운데 20% 정도는 뉴질랜드 사회에 정착했다고 말하면서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정책은 2014년 끝무렵 뉴질랜드 이민법이 바뀌면서 더는 진행할 수 없게 됐다.
이 일을 계기로 준우는 시장을 여러 나라로 확대했다. 중국, 베트남, 브라질까지 넓혀 나갔다. 현재 사무실에는 한국 직원을 포함해 세 나라 직원들이 함께 일하고 있으며, 얼마 전에는 베트남에 지사도 설립했다.
“제 멘토는 부모님”…방목형 교육 고마워
그의 사업 목표는 의미가 깊으면서도 당차 보였다.
“먼 날의 꿈이지만 중국에 뉴질랜드문화원을 세우고 싶어요. 내가 사는 나라, 뉴질랜드의 멋진 자연환경과 훌륭한 교육 제도 그리고 뉴질랜드 고유의 상품을 널리 알렸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준우의 얘기는 거침이 없었다. 숱한 상담(멘토) 덕분인지 한 마디 한 마디가 자신 있어 보였다. 그만큼 멘토의 역할을 다해 나가겠다는 의지로 보였다. 이 대목에서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그의 멘토는 누굴까’하는.
“식상할 수 있겠지만 부모님이 제 멘토예요. 어렸을 때부터 방목형 교육으로 키우셨고, 또 한국의 좋은 조건을 포기하고 순전히 교육만을 목적으로 뉴질랜드에 이민 오셨습니다. 덕분에 훌륭한 교육을 받게 되었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셨죠.”
준우의 나이는 올해 서른여덟(1978년생), 중년의 문턱을 향해 가고 있다. 자녀는 둘. 초등학교 2학년(Year 2) 딸과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내미다. 부모에게 받은 교육을 자녀들에게도 이어주고 있다. 한국 사람의 정체성을 가진 아이들로 키우겠다는 다짐이다. 뉴질랜드에서 사반세기 삶을 살아온 준우도 정체성에서는 한국의 피를 무시할 수 없다는 뜻이다.
후배에게 주는 조언…“눈높이를 낮춰라”
교민 2세, 중등학교나 대학교에 다니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도움말을 부탁했다.
“무엇보다 ‘눈높이를 낮춰라’ 이 말을 강조하고 싶어요. 모두 다 선장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선원의 길을 먼저 걸어야 선장에 자리에 오를 수 있지요. 경험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에요. 학생들을 많이 상담했는데 대다수가 높은 자리, 좋은 자리만을 꿈꾸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웠어요. 배울(경험) 기회가 있으면 찬밥 더운밥 가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권하고 싶어요.”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그 누구의 ‘멘토’가 되기에 충분한 말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지면상 다 옮길 수 없어 아쉽다. 그런데도 이 말만큼은 꼭 덧붙이고 싶다. 취업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주는 도움말이다.
“회사 면접 때 건방지게 보이지 않는 선에서 자신감을 보여주라고 말하고 싶어요. 키위 사회는 그런 사람을 찾습니다. 동양식 예의 바름이 꼭 장점이 되지는 않아요. 자기주장을 소신껏 밝히고, 너무 틀에 박힌 답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력서도 좋고 추천서도 받았는데 취직을 못한다면 바로 그런 경우일 거예요.”
공자 선생님이 그러셨던가?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라도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고.
내친김에 교민 1세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준우의 부모뻘은 아니어도 삼촌이나 고모(이모)뻘은 될 사람들이 대상이었다.
“혹시 최근에 한국에서 오셨거나 앞으로 오실 계획이 있는 분들에게 한 말씀 드릴게요. 뉴질랜드 사회를 냉정히, 현실적으로 보는 게 중요해요. 너무 거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현지 사람(키위 사회)이 보기에 우리는 ‘외국인 노동자’에 불과합니다. 영국이나 호주에서 온 이민자와는 다르다는 말이죠. 한국에서 사는 동남아 출신 사람들을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올 겁니다.”
‘케이 무브’ 멘토로 봉사…온라인으로 상담
정확한 지적이다.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내게도 해당하고, 나이 사십 오십 넘은 모든 한인에게 주는 말이라고 믿는다. 영어도 잘 못 하고, 뉴질랜드 졸업장 하나 없는 우리의 냉정한 현실이기도 하다.
준우는 선후배 세대들에게 여러 도움을 주고 있다. 딱히 비즈니스 차원에서 하는 것만은 아니다. 같은 동포로서, 힘이 되어주겠다는 마음이다. 얼마 전에도 사업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민에게 좋은 멘토를 해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또 생수 사업, 해삼 양식 사업 같은 정보 제공에도 힘을 보탰다.
한인 사회의 허리 세대에 진입한 준우는 뉴질랜드를 널리 알리는 일에 공을 쏟는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한국 고용노동부에서 벌이는 ‘케이 무브’(K Move) 멘토다. 그는 2013년부터 뉴질랜드 멘토로 봉사하고 있다. 뉴질랜드에 관심 있는 젊은이들에게 온라인(On Line) 또는 오프라인(Off Line)으로 조언을 해 줘 앞길을 설계하는 데 함께하고 있다.
준우와 얘기를 나누면서 많이 배웠다. 나도 스무 해 넘게 뉴질랜드에 살았지만 아직 모르는 게 많았다. 그 사실을 그와 만나 실감했다.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멘토는 꼭 유학이나 이민을 꿈꾸는 사람들만이 아닌 교민들에게도 필요하겠다는 사실을.
“혹시 나같이 나이 든 사람이 도움말을 부탁해도 해주실 수 있으세요?”
준우는 아주 시원하게 답했다.
“물론이죠. 제가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지요.”
나는 그 말이 하나도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회사 이름 ‘멘토’에서, 나랑 대화를 나누면서 건네준 ‘멘토’에, 그리고 그가 머리와 가슴 속에 담아둔 무궁무진한 ‘멘토’가 어떤 것일지를 대충 눈치를 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시간 반이 넘는 인터뷰를 끝내고 밖으로 나왔다. 퀸 스트리트에 내려앉은 오후 네 시의 햇살이 보석처럼 빛났다. 거리를 분주하게 오가는 숱한 사람들의 표정이 왠지 윤이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좋은 멘토를 독자들에게 소개해 줄 수 있어 그랬는지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글_프리랜서 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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