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북 전주시 풍남동 경기전 이성계어진.조선 태조(朝鮮 太祖, 1335년음력 10월11일)~1408년 음력 5월 24일)
이성계는 전주이씨로 전주 출신 가문이 확실하다.
만주 여진족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나서
이성계를 만주 여진족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얼토당토도 하지 않는 말이다.
1445년 세종이 정인지, 권제, 안지를 시켜 완성한 용비어천가에서도 명명백백하게 증명하고 있다.
이성계의 최측근 여진족 이지란(퉁두란)은
500호 이상의 여진족 가구를 거느린 세력가였다.
이외에도 주매, 금고, 시첩목아, 허난두, 최야오내 등을 비롯한
10여 명 이상의 숙여진족 [란주여진 중심] 세력가(300~500여호)들이 야인족이 되어
이성계를 보필했다고 해서 이성계까지 여진족으로 보는 관점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전주이씨 가문인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환왕/한왕)은 쌍성 총관부 함경남도 영흥군에서 태어났다.
이자춘의 몽고식 이름은 오로 사불화(울르스부카 :吾魯思不花)였다.
함경남도 영흥군이 쌍성총관부 자리이고 그곳에서 태어났는데,
이성계를 여진족이라면서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은 조선정권을 부정하는거나 다름없다.
실제로 이민족 출신의 여진족이라면 고려말 개경 정권에 출사도 할 수가 없었을 뿐만아니라,
조선 개창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단지 이성계를 경계했던 고려 귀족들은 이자춘이 몽골의 영흥 쌍성총관부에 협력했던 것을 명분삼아
고려 개경정권에 이성계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견제구를 치려 하였으나 실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이 개창되고 이성계를 보필했던 이지란 등 몇몇을 제외하고 모두 함경도에서 귀족으로
자리잡고 사는 것만으로 만족해 한다.
[고위관료가 되려면 개성 표준어를 사용해야 했으며 그렇치 못하면 천대받았고,
고려말을 모르면 등용되지 못하였음.]
이성계를 보필했던 숙여진족의 야인족화된 여진족들은 산스 크리스 트어인 국정문자를 사용하였으며,
고려 한자를 몰라 등용되지 못하였다.
이성계의 4대조 이안사는 세종이 언문을 창제하면서 언문(한글) 반포 목적을 설명하면서
용비어천가에서 수도 서울(서블ㅅ)을 소개하며 자세히 알려져 있다.(서울의 유래 찾아 읽어볼것)
이성계의 4대조인 이안사는 전주 경기전 한옥지구 오목대 기자촌에서 170여 가구를 이끌고
강원도 삼척을 거쳐 함경남도 함주(함흥)로 이주하여 말과 소를 놓아 목축을 하며 지냈다.
이것은 충선왕(1308~1313)이 몽골의 원나라 지배시기에
요동인 요녕성 심양으로 들어가 심양왕에 제수되었기 때문이었다.
요녕성 심양에서 심양왕으로 오래 있었기 때문에,
충선왕은 고려 왕실을 비워둔 적이 많았다.
그래서 고려왕 재위기간이 5년으로 짧았지만,
심양왕으로는 오랜기간 재위하고 있었다.
고려 대신들은 충선왕이 심양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때 반도에서도 유이민들이 장사를 하기 위해 대거 북상하게 된다.
고려왕까지 심양왕이 되어 북진해 있었고,
이로 인해 북방 몽골무역이 활성화되어 있었다.
몽골인이 요양 (조양, 심양)에 이어 의주, 함경도 영흥까지 진출하여,
무역이 활성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몽골의 선진문물이 실크로드를 통하여 고려에 들어와 무역이 활성화되자,
너도나도 돈을 벌기 위하여 북방으로 진출하였던 것이다.
함남 영흥의 쌍성 총관부는 몽골에 점령된 후
고려인이 다루가치(1대총관 조휘)가 되어 다스리게 되었다.
충선왕이 심양왕으로 있을때 이성계의 4대조인 이안사(목조)가
전주인 170여 가구를 이끌고 함경도 함주(함흥)로 들어가서 자리잡았다.
이들도 선진 문물인 몽고의 물건을 사기 위하여
말과 소를 목축하여 단기 간에 재물을 얻으려고 유목을 한것이다.
그당시 몽골은 잦은 토벌 전쟁으로 전투마가 많이 필요한 시기였다.
이자춘(子春)의 부친인 이춘이 죽자, 이자춘의 형인 이자흥이 천호직을
원나라로부터 세습받아 작위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얼마후 이자흥이 죽자, 조카인 이교주를 대신하여
이자춘이 천호직을 세습받아 다루가치를 유지하였다.
이당시 쌍성 총관부의 총관은 조소생으로 한양조씨의 시조 조지수의 고손자였다.
증조부였던 조휘가 고려 성주를 죽이고 몽고에 투항하여
99년간 대대로 자손들이 쌍성 총관부의 총관을 세습받았는데, 조소생은 4대 총관이었다.
공민왕이 대몽골 선전포고를 하고 밀직부사 유인우를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하여,
쌍성 총관부를 공격할 때 조소생은 충숙왕의 총애를 받았고, 숙부였던 조돈을 구류시켰으나,
조돈이 탈출하여 고려군에 협력할 당시 이자춘도 이에 협력하여, 성의 뒷문을 열었다.
이자춘과 조돈이 원나라와 총관 조소생에게 희망이 없음을 판단하고,
공민왕에게 협조하여 성의 뒷문을 고려군에게 열고 조소생을 몰아낸다.
조소생을 회유하기 위하여 다시 조돈을 보냈지만,
조소생은 1362년 원나라의 나하추를 끌어들여 동북면 지역인 삼살, 홀면지역을 침공하였다.
나하추 군대는 홍원의 달단동에서 이성계에 의하여 격파당했고,
조소생은 같은해 여진의 다루가치와 총관에 의해 탁도경(천호장)과함께 살해되었다.
탁도경은 탁청의 후손이었다.
조소생의 잔당일파는 고려군에 패하자 무리를 이끌고,
흑룡강성 합이빈시(하얼삔)로 들어가 다시 쌍성 총관부를 열었다.
그래서 현재는 그곳 합이빈시(하얼삔) 서남부 지역에 쌍성시가 지금도 현존하고 있다.
2011년 쌍성시의 여자 아나운서가 고위 관료와 불륜관계를 폭로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자춘은 쌍성 총관부에서 천호장으로 있을 때, 두명의 첩을 두고 있었다.
이내은장(李內隱藏)과의 사이에서 이원계를 낳았고,
김고음가(金古音加)와의 사이에서는 이화를 낳았다.
이들은 조선정권에서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였다.
첩의 성과 이름이 네자리인 것으로 봐서,
전주에서 올라가 여진족과의 융합으로 네자리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자춘은 원나라로부터 오로 사불화(吾魯思不花/울루부스카)라는
다섯자리의 성과 이름을 하사받았고, 천호장이라는 다루가치 직을 세습받으며 살아왔다.
이자춘의 아버지 이춘은 조휘의 손녀 딸과 결혼하였다.
조휘는 몽고군이 화주(和州)지역을 침공하자, 평안북도 정주 출신의 탁청과함게
강원도의 등주(登州), 문주(文州)등 여러 성의 사람들을 선동하여 몽고에 투항하였다.
(조휘, 탁청의 난)
이후 조휘, 탁청은 동북면 병마절도사 신집평이 죽도로 들어간 후,
식량 조달문제로 수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서,
신집평과 등주 부사 박인기, 화주 부사 김선보 등 경별초의 군사들을 살해하고,
강원도 고성까지 진격하였다.
그후 철령 이북 지역을 점령하고 몽고에 바치자,
몽고는 영흥일대에 쌍성 총관부를 설치하여 조휘를 총관으로 임명하고,
탁청을 천호로 임명하여 세습시켰다.
1259년 등주, 화주 사람들과함께 몽고병을 인도하여 한계성(인제군)을 치려고 하였으나,
고려의 방호별감 안홍민이 거느리고 나온 야별초군에게 섬멸당하였다.
고종이 몽고에 사자로 보낸 김기성 일행의 선물을 보룡역에서 약탈하기도 하였으나,
조휘, 탁청은 동진국(東眞國/심양)의 군사와함께, 춘주(春州)/춘천)의 천곡촌에서 고려의 신의군에게
다시 빼앗기고 영흥 쌍성 총관부로 돌아갔다.
그이후 4대 99년에 걸쳐 쌍성 총관부의 총관을 지내다가
공민왕의 대원 선전포고로 보낸 동북면 병마사 유인우에게 토벌되었고,
공민왕은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였다.
이자춘의 아들 이성계는
전주 출신으로 함남 영흥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이자춘의 아버지 이춘이 조휘의 손녀딸과 혼인하면서,
이춘에게 천호장직이 제수된 것이다.
그리고 이춘의 큰 아들 이자흥이 얼마후에 죽자,
이자춘이 조카를 대신하여 세습하였고,이성계(천호장>동북면 병마사)가 이어받은 것이었다.
이자춘은 공민왕이 보낸 밀직부사 유인우에게 적극 협력하면서, 천호장직을 유지할 수가 있었고,
훗날 조선 창업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참고로 동진국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한다.
동진국(東眞國/대련반도 심양)은 발해의 후예로 발해국 멸망시
거란이 들어와 점령하고 세력이 가장컸던 신요동반도의 동단국(요녕성조양)을
거란왕자 야율배가 직접통치하였다.
발해인들이 거란의 야율배를 이간질시켜 반란을 유도하여 성공시켰다.
이여파로
후발해,(상경용천부)
발해국(오사성)
정안국,(열만화928~1004)
흥요국,(대연림 1029~1030)
동단국(야율배 926~ 거란이멸망시킨후 거란왕자 야율배지배/요양>요녕성조양)
동진국,(금나라의 요동선무사 포선만노건국,요양>요녕성심양)
대발해국,(고욕)
단파국,
연파국,(상경용천부)
대진국,(금나라 여진족 포선만노)
대원국(고영창 1115~1116)
동하국(동진국,대진국연합정권)등으로 분열한다.
그후 거란에서 독립하여 동진국을 세웠으나,
몽골이 강성해져 과거 여진, 거란의 식민지배를 당한 앙갚음을 풀기 위하여
거란국 토벌에 이어 여진을 침공하였다.
신강성, 감숙성의 건주여진과 감숙성의 란주여진, 말기에 세운 란주시 서하국 등의 금나라를 침공하자
서하국인을 이끄는 금나라 요동선무사 포선만노 등이
신요동 반도인 요양(요녕성조양,심양)으로 들어와 동단국(조양)을 점령하고,
대련반도로 들어와 동진국(심양)을 점령하였다.(거란국 와해)
이후 몽고군이 이곳까지 쫓아오자 포선만노는 대진국을 선포하고,
동진국인 일부를 이끌고 동간도 지역으로 들어와 동하국을 선포하였다.
(금나라/여진족 동간도, 북간도 사할린(연해주)지방으로로 밀려남)
조휘, 탁청은 몽고에 점령되어
현지에 남은 동진국(완안자연)인들을 동원하였다.
거란의 비주류는 내몽골 동북부 임황시, 적봉시와
흑룡강성 제제합이(치치하얼), 합이빈(하얼삔), 길림시 지역으로 밀려났다.
(거란국, 여진족의 금나라 몽골에 멸망)
만주 요녕성, 길림성 등 동북 3성에서 살고 있던 고려인들은
거란과 금나라 여진족(건주여진, 란주여진)에 밀려 평안도, 함경도로 들어와 동북 9성을 쌓게 된다.
고려 성종이전부터 내몽고~하남성 황하강 이북 북조에서 여진에게 밀려난 거란은
동북 3성인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남부지방으로 밀려나면서 거란에게 고려인이 반도로 밀려나
동북 9성을 쌓고 거란에 대항하다가 여진족이 징키스칸의 몽골(뭉케/쿠빌라이)에
만주지방으로 밀려 들어오자, 압록강, 두만강 이남지방으로 영토가 축소되는 것이었다.
고려말 거란국의 황제,승상이 이끄는 주류 10만여 명은 몽골, 동진국 연합군에게 쫓겨
고려 충주목까지 남하했다가 1년간을 웅거하며 버티다가 김취려 장군에게 쫓겨
평양 강동성으로 들어가 3년간을 대치한다.
진짜 승상은 북상하다가 5만을 이끌고 이탈하여 성남, 부산 등으로 숨어 들어가 흩어진다.
평양 강동성으로 들어온 몽골(합진), 동진(완안자연)연합군은 고려(김취려)와 강제 동맹을 체결하고
성안으로 들어가는 수맥을 끊어 거란 황제를 항복시키고 황제,가짜 승상 등 800여 명을 참수하고
대도로 끌어가 노예로 삼았다.
70~80여 명의 거란인을 김취려에게 주었는데 고려 정부에 의해
전국 산간지방으로 분산 배치하여 농사를 짓고 살수있도록 배려해준다.
이일로 몽고가 고려를 알게 되어 1231년 살례탑(살리타이)에 의해 몽고 제1차 침략이 시작된다.
-몽고사신 압록강 저고여 살해사건은 협의의 원인.
거란인에 의해서 풍물놀이, 매매춘, 기생, 광대패, 5일장이 고려에 유래하게 되었다.
(성남 모란장, 부산 지명은 현재까지 남아 역사적 증명표가 되고 있다.
부산(副山), 부산(負山)이라는 지명은 현재 부산(釜山)으로 바꿔 표기하고 있다.
거란족의 조상이 광개토 비문에 나오는 부산적이며 이들의 조상이 모용 선비족이었다.
이들의 조상은 비려, 패려국인으로 알려진 비려거란, 패려거란인이다.
거란은 개성/송도 북방에서 고려의 왕건을 괴롭혔다.
또 발실위와 결합했던 발해(후발해)의 후예 솔롱고스 메리키트 고려국.(대우순/다이르 우순칸)
후란(쿨란)공주가 대우순의 딸로 징기즈칸의 두번째 아내가 되어,
다섯 자식들에게 다섯 한국을 나눠주게 된다)
이밖에,
평롱 치청천국(고구려유민 이정기)
후제나라(이정기>이납>이사고>이사도) 등이 있었다.
발해의 2대 무왕(대무예)의 산동성 등주시 장악에 이어, 이정기가 고구려 유민군2만, 당군2만을 이끌고
등주시를 다시 장악하며 대신라무역을 통제하고 발해와 친분관계를 유지하였으며 강동9주를 차지하고
섬서성 서안을 공격하여 당현종을 양귀비와함께 파천시켰으며 4대에 이르러 이사도때 대운하를 봉쇄하고
강소성 회수전투에서 패하여 멸망한다.
금나라는 원래 신강성, 감숙성 중서부의 건주여진과
감숙성 란주시의 란주여진[숙여진/문명생활]이 있었다.
란주여진은 금나라 말기 란주시에서 서하국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들이 점차적으로 내몽골 지역으로 몽골에 밀려나면서
신요동 대련반도의 동단국, 동진국을 거쳐, 동간도, 북간도 지역으로 들어와 동하국을 건국하였다.
이들이 바로 금나라 여진족이었다.
그리고 후금시대를 맞으며 생여진족 [건주여진/수렵생활]이 누루하치 때 강성해져
중원으로 다시 진출하여 청나라를 건국하게 되는 것이다.
충선왕 시기에 이성계의 4대조인 이안사가 전주에서 170여 가구를 이끌고
함경남도 함주(함흥)로 들어가 영흥의 쌍성 총관부 주변에서
소와 말을 목축하며 장사하면서 세력을 키워, 조부 이춘이 조휘의 손녀 딸과 결혼하면서
천호장직을 세습받으며, 이자춘, 이성계로 이어졌던 것이다.
동간도 사할린 지역으로 들어와 동하국을 세운 금나라 여진족들은
훗날 함경북도를 위협하며 들어와 야인이 되어 고려를 위협하였다.
이순신이 처음으로 조산보 만호(종4품)로 녹둔도 녹도만호를 겸해, 이곳으로 들어가
죽을 고비를 넘긴 상대가 바로 금나라 여진족의 후예 야인들이었다.
1583년 니탕개의 난 평정에 이어 1585년 니탕개의 잔당 침공전에 패해 이순신이 백의종군하고
1586년 잔당 소탕작전에 투입되어 다시 싸워야만 하였다.(니탕개의 난 잔당 침공전과 잔당 소탕작전)
이들이 바로 생여진과 숙여진이었는데,
숙여진(감숙성 란주여진, 란주시 서하국중심)은 송나라/명나라와 고려의 영향을 받아
문명생활을 영위하였다.
숙여진은 고려와 국경을 접하며 함경북도, 두만강, 길림성 일대에 살았다.
생여진(신강성 감숙성 건주여진 중심/누르하치)은 수렵생활을 영위하였다.
길림성 북방과 흑룡강성 일대에 살면서 수렵생활을 하며 살다가,
완안 아골타의 금나라를 이은 후금을 누루하치 때 건국한다.
외몽골로 밀려난 징키스칸의 동생이었던 호르친부의 카사르 후예들이 생여진을 찾아와
황제 자리를 제의하여, 몽골 8기군과 여진 8기군을 결성하고 요녕성 심양을 점령한다.
누루하치(요녕성 무순시/푸순시 신빈)의 후금은 태종(홍타이지)때 요녕성 심양에서 청을 건국하고
1636년 병자호란을 일으키며 북경을 점령하게 되는 것이다.
금나라 여진족무리는 신강성, 감숙성 란주시, 내몽골 중부, 산서성 대동시 일대에서
몽골에 밀려나서 들어온 이민족들이었다.
이들의 조상이 바로 타타르족(달달족/達達族)이다.
몽골, 동진, 고려연합군에 쫓기던 신강성, 감숙성 건주여진은 흑룡강성으로 달아나 생여진족이 되어
수렵생활을 영위하고 압록강, 두만강 유역에서 고려의 영향을 받아 문명생활을 유지하던
감숙성 란주여진의 숙여진족(란주시 서하국>연해주 동하국)은 고려말, 조선의 토벌로
일본 동경으로 들어가 고구려, 발해 망인계를 동북(도호쿠)지방 [동경 북쪽 동해촌~후쿠시마원전 터진곳]으로
밀어내고 전국시대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 덕천가강(도쿠가와 이에야스)때
일본을 장악하고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생여진족(건주여진)은 징기즈칸 으로부터 외몽골을 물려받아 찬밥 신세가 되었던
동생 호르친부의 카사르 후예들이 누르하치에게 찾아가 동맹을 맺고
몽골 8기군,여진 8기군을 결성하여 요녕성 무순시 신빈과 심양을 점령하고 후금을 세웠다.
청태종 홍타이지는 1624년 권력을 장악한후 한윤을 앞세워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북경을 점령하였다.
이후 몽골 8기군과의 권력투쟁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외몽골 공신들을 내몽고 동부로 몰아낸다.
청이 멸망할 때 귀족들은 내몽고 중서부로 달아나 현재에 이른다.
遼寧省(요녕성) 무순시(撫順市=抚顺市/푸순시).
p/s
만주족은 황제아래 친왕, 기윤왕, 버일러(드로이 버일러/貝勒)직위가 있다.
버일러(貝勒)는 세번째 직책으로 추장/부족장(部族長)에 해당하는 지위로 패륵(貝勒)이다.
貝勒(패륵)을 "패리"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패리는 패려와 같은 말이고 이들이 중원 섬서성, 산서성 대동시이남 패려지방으로 진출하여
거란을 밀어내고 맹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하남성 황하강 이북 장악)-완안 아골타의 금나라 영역.
청 태조(아이신 자오뤄 누루하치)는 1587년 신강성, 감숙성 건주(建州)를 만주에서 다시 들어가 통일하고
혁도아랍(赫圖阿拉/허투알라)부근인 불아랍[佛阿拉/퍼알라, 현재의 이도하 자촌(二道河子村/얼따허쯔춘
동남쪽]에 성을 구축하고 스스로를 숙륵패륵(Sure Beile - 淑勒貝勒/수러버일러)라고 칭하였다.
淑勒貝勒(숙륵패륵)은 신강성 동남부, 감숙성 서남부, 청해성 서북부 청해호 해서지방이 중심축으로
해서 숙몽고 자치주, 해북 숙몽고 자치주, 해서 장족 자치주, 해북 장족 자치주를 말하는 곳으로
건주여진 (생여진)과 란주여진 (숙여진)의 원래 고향을 말하는 곳이다.
누루하치가 요녕성 무순시(푸순시) 신빈에 세운 혁도아랍(허투알라)은 완안 아골타의 금나라 때
신강성, 감숙성 건주지방에서 란주여진과 함께 몽골을 식민지배하다 징키즈칸[성길사한]의
몽골군에 쫓겨나서 흑룡강성으로 달아났다가 서남진하여 후금 [심양/선양]을 세우기전,
요녕성 무순시 신빈에서 건주지방에서 살던 지명을 임시로 붙이고 살았던 곳이다.
(주인없는 곳에 임시 망명정부를 세운 격).
누루하치의 후금은 요녕성 무순시 신빈 혁도아랍(허투알라)을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명나라 서로군(두송)은 1619년2월29일~3월2일 사르하(薩爾滸/살이호)전투에서 패하여 두송이 전사하고,
북로군 마림은 1619년3월4일 상간하다(尚間崖/상간애)전투에서 패하여 명나라 동맹군인
예허여진군도 퇴각하였다. [예허여진은 건주여진과 여진족 통일 쟁탈전을 벌이는 대립관계였음]
1619년 동로군 사령관 유정은 요녕성 무순시 혁도아랍 남쪽 아부달리(阿布達裡/아포달리)로
진격하다가, 살이호 전투, 상간애 전투에서 승리한 병력을 동원한 홍타이지(누루하치 8남)에게
포위당하고 후방을 공략당하며 패하게 되자, 모든 화약을 불태우고 자폭하고 말았다.
동로군에 편제되어 있었던 강홍립의 1만2~3천의 조선군은 유정의 강압으로 합류하기 위하여
아부달리로 북상하다가 부차(富察/부찰)에서 후금의 홍타이지군과 결전을 벌였으나,
바람이 역풍이 불어 화약이 날아가고 불이 꺼져 대패하여 선천 군수 김응하 등
8천여 명이 희생되고 홍타이지에게 부원수 김응서 등과 함께 투항한다.
남로군 사령관 이여백(이여송 동생)은 지원하기 위해 달려왔으나 조선군의 투항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대패하여 1620년 자살하고 만다.
건주여진 [생여진]과 예허여진이 만주에 남은 여진족 통일 쟁탈전을 벌이다가
예허여진이 패색이 짙어지자, 명나라를 끌어들이고 명나라는 조선을 끌어들여 진압하려다가
조명, 예허여진 연합군이 대패당하고 누루하치/홍타이지의 생여진이 후금/청을 건국하는 것임.
예허여진은 압록강 넘어 현재의 안동(단동/해족)사람을 말하는것임].
생여진(건주여진)과 숙여진(란주여진)의 가장 오래된 조상은 숙신족이었다.
숙신(肅愼)은 식신(息愼), 직신(稷愼)등으로 불리우다가 읍루, 물길, 말갈 등으로 분화하며
여진으로 이어진다.
서쪽으로 간 숙신은 서돌궐, 그리고 슬라브족과 융합하면서 색신 등으로 분화한다.
숙신족은 앙골족과 붙어다니며 앙숙관계가 되었다.
서흉노 질지선우가 한나라, 동흉노 호한야선우 연합군에게 패해 신강성 토노번(투르판)
오로목제(우르무치)로 퇴각하였다가 중원 재공략에 실패하자, 북근동 아란지방으로 들어가
혼혈을 이룬 후 아틸라 훈족으로 거듭 태어나 330년대 동유럽으로 진출하자
숙신족,앙골족 등도 동고트, 서고트 지방으로 밀려나면서 숙신족이 슬라브족과 융합하여
스코틀랜드까지 들어가 색슨족으로 분화하고, 앙골족은 로마제국 영토 안으로 게르만족과 함께
밀려 들어가게 되고 로마제국이 게르만족의 난입으로 혼란스러워지자 무어족(모아족)을 따라
북아프리카로 이동하면서 무어족이 배를 타고 잉글랜드 남부지방으로 들어가자 따라 들어가서
소수족이었던 무어족을 제압하고 융합하여 앵글족이 탄생하게 된다.
동으로는 숙여진족이 몽골, 동진, 고려, 조선의 토벌로 일본으로 들어가
전국을 통일하는 풍신수길, 덕천가강 세력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는 사실이다.
이들의 침략 근성은 경계해야할 대상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고 승전국인 러시아는 일제가 세운 만주 괴뢰국 일대에
동진국[東眞國]을 재건하려 했다가 중국의 반대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스라엘도 이곳에 히브리국을 세우려고 시도한 적이 있음]
서흉노 질지선우계중 서역으로 이동하지 않고 중원에 남는세력이
한[韓], 전조, 말예[말갈/예맥], 한예, 한백족으로 분화하는 세력이다.
동흉노 호한야 선우계는 다시 남북으로 분열하고 북흉노 김일제[휴밀족>휴도/휴저국 태자]가
몽염에게 끌려가 한무제 유철의 암살사건을 막아 제후로 봉해지면서 동흉노의 남북분열로 남흉노를
산동반도 토후[투후]국으로 2~20만을 옮기면서 중원화되며 하남성 낙양에서 서한[전한]을 무너뜨리며
왕망, 김당이 신나라를 건국하고, 북부여[감숙성 평양시 고원족/고려족]와 동맹을 맺고
비단길, 초원의 길을 장악하려다가 북부여의 비협조[배신]로 실패하고, 북흉노와 결탁한
동한[후한]을 세우는 광무제 유수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대월지는 북흉노[두만, 모돈, 노상선우계]가 장악한 감숙성 돈황지구를 피해 청해성 청구 루트와
서장성 아리지구, 창도[창두]지구를 통해 초원의 길 루트를 개척하며 사천성 보주, 성도[청두/청구]로
들어가 신나라와 결탁하며 실크로드 무역을 펼치자, 여기에 고무된 왕망, 김당이 돈황지구를 장악한
북흉노를 토벌하려다가 북부여의 비협조로 실패하고 북흉노와 결탁한 산서성 태원시를 주름잡던
유수 장군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산서성 태원시에 있었던 북한산[北漢山]은 훗날 동한 망후 서울로 들어와 北漢山으로 이어진다.
"이성계는 고려를 침공한 홍건적의 난(1351년)이후 잔당들이 재침공했을 때 이들을 토벌하면서
압록강 주변에 살던 여진, 거란족을 함께 토벌하면서
신요동 반도인 요녕성 요양[조양,심양]의 심양 앞까지 홍건적을 토벌하였으나,
위험하고 추운지방의 국경지대로 이주하여 살아갈 고려 백성들이 없어 군량미 조달 실패로
심양 앞에서 고려 영토라는 표지목만 세워 놓고 회군한다.
위화도회군전에
이미 이성계는 심양 앞까지 홍건적을 토벌하고 고려 영토라는 표지목을 세워 놓고 회군한 바가 있어
요동을 점령해도 관리해 나갈 고려민이 없었고, 흑룡강성 일대로 밀려나 남쪽을 시시각각 위협하는
거란족, 건주여진족이 많아져 실익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성계는 몽고(원나라, 북원), 홍건적, 건주여진, 란주여진, 예허여진, 야인족, 거란족, 왜구 등
세계 유수의 실력자들을 만주와 한반도에서 가장 폭넓게 승리만을 거두며 축출하는 위대한 장군이었다.
만약 이성계가 위화도를 도강하여 만주로 들어갔다면, 란주여진에 이어서
예허여진, 건주여진까지 일본으로 밀려들어가 훗날 더욱 강성해진 왜군이 되어
한반도 전체를 유린하고도 남았을 것이었고 조선은 선조 시기에 멸망하여 식민지배를 받다가
일본화 되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오히려 반대로 추운 만주지방으로 밀려나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들어갔을 것이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해서 여진족을 세종족으로 분열하도록 나눠 버린 것이고,
숙여진[란주여진]은 일본 동경으로 들어가서 일본을 장악하고,
생여진 [건주여진]이 북경으로 들어가 청을 건국하며, 예허여진은 현재 단동[안동]~심양지방에서
자리잡고 살도록 분산시키는 역활을 해버렸던 것이다.
만주 통일 쟁탈전에서 건주여진이 예허여진을 누르고 만주를 통일하지만,
이들을 모두 토벌하여 일본으로 달아났다면 여진통합군이 일본어가 아닌 여진어를 사용하면서
고구려, 발해 망인계가 장악한 동경을 점령하고 전국통일을 이룬 후, 조선은 여진족에 의해
전국토가 유린당하고 도리어 조선이 추운 만주지방으로 밀려나 살면서 문명화의 지체로
중국 소수민족으로 들어가고도 남았다.
또한 조선인이 홍건적, 란주여진, 건주여진, 예허여진, 야인, 거란, 만주족 등 약탈세력으로
역사적 오명을 뒤집어 쓰고 구구하게 살아가야만 하였을 것이었다.
이성계의 조선 건국 1392년으로 부터 임진왜란 발발 1592년 4월 13일까지
정확히 200년 간 시간을 벌어준 것이며, 과연 이것이 우연이겠는가???
이성계의 후예들이 군사분야를 전담하여 담당할 때는 평화기를 누려왔다는 게 증명된 것이다.
[이성계 가문의 군대는 가별초].
[현재 요녕성, 흑룡강성, 길림성 인구는 4억.
산시성 출신인 시진핑[태자당파(북경의 공천단파에 대항하여
상하이방파와 태자당파의 연합구도)]이 동북삼성을 기반으로 함].
모택동(마오저둥)도 동북삼성을 기반으로 성장하여 일본군에 밀려 섬서성 연안시로 쫓겨들어와
조선 연안파 독립군(호남중심 동학 농민군의 후예 5만명/국공합작이 깨진후 조선팔로군)에 의지하며
배수진을 치고 장개석(장제스)의 국민군을 대만으로 몰아내며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음.
이성계는 몽고(원나라,북원), 거란, 여진, 홍건적, 왜구 등을 한반도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세계 유수의 실력자들을 가장 폭넓게 축출한 공적이있고, 남해안으로 처들어 오는 정규군화 된 왜군,
원나라와 결탁하여 고려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을 내세우거나 스스로 왕이 되려한 반란 세력,
그리고 덕흥군, 이인임, 최유 등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했던 권력자들을 모조리 축출하여
진압한 공적을 가지고 있다.
또한 권문세족을 축출하고 불교의 폐단을 정리하였으며
신라 멸망의 일등공신이었던 호족제도를 타파하여 근세문명으로 도약시켜 놓은 왕이었다.
그리고 한양으로 천도하여 모든 권력과 부를 쥐고 있었던 개성의 수구정치세력과 수구자본을 재편하였고
근세문명으로 한단계 도약시켜 놓았다.
[이성계의 신의한수- 수구정치세력과 수구자본세력을 재편하기위해 한양으로 천도한 일임.
서울사람들의 권력과 부는 이성계가 만들어 준 것이나 다름이 없음].
고려정권을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다는 점 때문에 위대한 공적이 묻혀 버린다는
단 하나의 단점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