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뿌리를 찾아서 - 장지마을]
김해김씨 안경공파 장지문중 김희수 공의 후손을 찾아서
장지마을은 우1동 1통, 40통 지역에 해당된다. 장산의 동남쪽 장지봉 기슭에 펼쳐진 마을로 못안 마을 쪽에 자리를 잡고 있어 웃 마을로 불렀다. 장지마을 이름을 풀이해 보면 장(萇)은 보리수나무를 가리키며, 보리(菩提)는 범어의 도(道), 지(智), 학(學)의 뜻이다. 지(旨)는 상의하달(上意下達)의 뜻이니 불법(佛法)을 펼친다는 이야기가 된다.
장지천은 안골(安峰谷, 53사단 사령부 자리)에서 발원하여 해운대고등학교와 마을을 지나 해운대 남북을 가로지르는 우1동과 중1동 경계선을 통과하여 글로리콘도호텔 옆으로 춘천에 유입된다. 장지천의 시냇가를 따라 꼬불꼬불 흐르는 곡선미와, 개나리와 버드나무가 늘어선 아름다움을 말한 ‘장지유수(萇旨流水)’가 해운 8경 중 1경이다.
해운대 장지마을 입향조 지곡(池谷) 김희수(希壽) 공은 임진왜란 공신으로 김수로왕 51세 손이며 중시조 목경의 6세 손이다. 손인 고조는 홍문관 교리를 지낸 김진손(震孫). 증조는 안경공 김영정(永貞), 조부는 김세균(世均)이다. 부친은 청양군수를 지낸 김말수(末壽)며, 4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하여 1593년 송상현이 동래부사로 부임할 때 그 비장(裨將)이 되어 함께 내려왔으며 부사가 1년 동안에 걸쳐 성 밖의 사면에 참호를 파고 성벽을 수리하며 군사들을 조련할 때 곁에서 도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적이 그 해 4월15일 동래성을 포위하자 부사 이하 모든 장령(將領)들이 왜적에 맞서 조방장 홍윤관, 동료군관 송봉수 등과 더불어 싸웠다. 그러나 2만의 왜병들이 백병전으로 쳐들어오자 성루에서 지휘하던 부사가 왜군에게 겹겹이 싸여 포위 공격을 당했다. 성을 구할 길이 없자 부사는 “이제 군신의 의리를 중하게 여겨 여기에 죽고자 합니다”라는 유서를 써놓고, 엄위한 자세로 군관 송봉수, 향리 대송백, 관노 철수 등이 부사의 좌우에서 시위하면서 왜적들을 막았다. 그러나 부사가 진몰하자 칼집을 던지고 가진 화살을 모조리 쏘면서 적을 죽이다가 전멸하였다. 그 후 13년이 지난 1605년 남문로에 충렬사를 건립하고 송상현을 제사하고 1624년 부산진 첨사 정발이 합사되었다. 1652년 남문로에서 안락동으로 옮겨 안락서원을 건립하였는데 이 때 조영규, 노개방, 문덕겸, 송백, 김상 등과 함께 제사되고 봉훈랑의 품계로 군자감판관에 추증되었다. 1932년에 선황골 묘소에 공적비가 건립되었으며 선황사에 신위가 모셔져 있다. 아들 김진식(盡直)의 증손 김서응(瑞應)이 아들 셋을 두어 김추려(秋礪)가 수영파조, 덕려(德礪)가 해운대파조, 충려(忠礪)가오륜대파조가 각각 되었다.
<김해김씨 통합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