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제목 : 바른 기도의 자세
성경 본문 : 누가복음 18장 9절-14절
설교 자 : 박 한서 목사 <2024년 1월 31일 수요일>
사랑하는 행복 가족 여러분!
오늘 말씀은 자기의 믿음 생활이 훌륭하다고 믿고
영적으로 자만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비유입니다.
신앙적 자만에 빠진 자들은 자기의 생각과 행동이 올바르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신앙적 자만과 독선에 빠지기 쉽습니다.
본문에는 <바리새인>과 <세리>가 등장하는데.
두 사람은 뚜렷이 대조되는 신분을 가졌습니다.
<바리새인>이 <유대교>의 종교인들을 대표하는 반면에
<세리>는 당시 천시되던 소위 ‘죄인’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을 통하여 <바리새인>의 종교적 약점이 무엇이며.
또 <세리>의 신앙적 강점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기도할 때에 가져야 할
바른 태도가 무엇인지를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두 사람의 사회적 위치는 너무나도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먼저 누가복음 18장 10절 말씀을 보면.
10절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경건한 유대인은 하루에 세 번
즉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에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특히 본문에 나타난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모든 조항을 엄격히 지켰고.
또 자신들은 하나님의 구별된 선민임을 자랑하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은 다른 이방인들은 물론 <유대인>중에서도 율법과 제도를
엄격히 지키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 같은 율법주의는 형식과 외적인 면에만 치중하였으므로
내면의 영적 성장에는 무관심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경건은
기대 이하였고, 그 내면은 썩어 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23장 27절 말씀에서
27절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그들을 책망했습니다.
한편 여기의 <세리>는 신앙의 경건함이 결여되었음은 물론이고
그들이 정복자인 <로마>를 위해 세금을 징수하였기 때문에
동족에게 조차 미움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그는 세무비리 의혹의 대상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도
심한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참고 성경 <누가복음> 19장 7절-8절).
오늘날 우리 교회나 사회에도 세리와 같이 외형적인
죄 가운데서 허덕이며 영적인 갈증을 느끼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지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보다 인간의 내면을
통찰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무엘 상> 16장 7절 말씀에 보면.
7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바리새인>에게로 돌아가 생각해 보면
그들의 종교적 독선이 발견됩니다.
본문은 이들의 오류를
다음 두 가지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9절 말씀을 한 번 다시 읽겠습니다.
9절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첫째로. 그들은 자기 의(義)를 내세웁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만
의에 이를 수 있는데. 자기의 의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가장 큰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의(義)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 스럽습니다.
둘째로. 저들은 다른 사람을 멸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 사람은 겸손하며 타인의
저급한 상황을 멸시하기보다는 오히려 긍휼히 여깁니다.
성경 본문은 스스로 의롭다 하였고.
타인의 신앙을 경멸하는 태도에 대하여 책망합니다.
교회나 가정. 어떤 단체든 간에 자기 의와 경멸의 이 두 가지의
현상이 나타나면 이곳에는 이미 부패와 붕괴가 시작된 것입니다.
2. <바리새인>의 기도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좀 더 구체적으로 <바리새인>의
기도 내용과 자세에 대하여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1절 말씀에
11절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여기서 ‘서서 따로 기도하여’라는 말은 그의 기도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한 기도가 아니라 ‘조용히’. ‘스스로에게’ 혼자서
독백하는 기도입니다.
즉 그의 관심은 하나님께 있지 않고 오로지 주변 사람들과
자신의 의(義)에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서서’
기도했다는 것은 성전에서 서 있는 자세로 많은 사람 앞에서
기도하는 하나의 ‘습관’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따로’라는 말은 <바리새주의>
본질의 구별 정신을 엿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항상 골방에서
하나님과만 상대하듯 혼자 은밀하게 기도하여 자신의 기도하는
행위가 자랑이나 외식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경건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는 사치품이 아니라
내 영적 삶을 위한 영양이며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5절-6절 말씀에
5절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절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더 나아가 <바리새인>이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은 토색(討索). 돈이나
물건을 억지로 빼앗아 대는 짓).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않으며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즉 자신에게는 불의가 전혀 없으며 깨끗함뿐임을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특별한 공을 들이고자 할 때.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도 금식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장이 서는 때 얼굴을 희게 하고 헝클어진 머리에.
구김살이 간 옷을 입고 큰 거리에 나와 자신들의 경건을 자랑 하였습니다.
(참고 성경 <마태복음> 6장 16절-18절).
그리고 <바리새인>은 <누가복음>18장 12절 말씀에
12절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라고 기도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마치 자신만이 율법을 준수한 냥.
또 그것을 마치 하나님께 보답을 요구하는 듯 한 자세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십일조의 본 의미는 하나님이 모든 소유의 주인이며 자기는 청지기임을
고백하는 신앙 고백적 행위입니다(참고 성경 <마태복음>25장 14절-30절).
십일조는 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조건부적으로 드리는
뇌물성 헌금이 아니라 택함 받은 자가 마땅히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드려야 하는 신앙의 표시입니다.
<바리새인>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1) 하나님 앞에서 의가 자신 안에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2) 자신의 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데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3) 자신의 경건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착각하였습니다.
4) 자신의 경건을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교만의 무기로 삼은 점입니다.
5) 이런 교만이 하나님 앞에서도
통할 줄 알았다는 점입니다.
3. 반면 세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누가복음>18장 13절 말씀에
13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여기에서 ‘멀리 서서’는 <바리새파> 사람과는 대조적인 표현으로
<세리>는 멀리 아마도 성전 밖 이방인의 뜰에 서서
기도하였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은
정상적인 여러 자세 중 하나였습니다.
(참고 성경 <시편>123편1절 <마가복음>6장 41절 7장 34절).
그런데 <세리>는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기도하였는데.
이는 정상적인 자세조차도 취하지 못할 정도로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슴을 치며’라는 표현은 죄의 근원지로서의
마음을 치는 깊은 참회와 애통을 나타내는 말로서
(참고 성경 <누가복음> 23장 48절 <마태복음>11장19절)
미완료 형 시제로 계속해서 치는 반복적인 행위를 의미합니다.
‘불쌍히 여기소서’(ἱλάσθητί, 힐라스데티)는 ‘진정 하옵소서’.
‘분노하지 마옵소서.’ 라는 의미인데. 이 말 속에는
하나님께 회개하는 <세리>의 겸손한 모습이 역력히 나타납니다.
<세리>의 기도는 한마디로. 자신은 죄인이며 무가치한 자임을 깨닳았기에
감히 하나님 곁에 가까이 가지도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는 기도였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언제나 정직한 고백에서 이루어질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죄를 애통해 하는 자들에게 용서와
자비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마르틴 루터>는 <세리>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강조하기를.
<바리새인>의 기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편지라면.
<세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전보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4절 말씀에서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고.
<다윗>은 <시편> 51편 17절 말씀에서
17절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 하시리 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수도를 고쳐 주고받는 돈으로 연명해 가는 불쌍한 난쟁이 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달동네에서 수도를 고치다가 우물을 파는 건장한
청년에게 사정없이 두들겨 맞았습니다. 그는 키가 작고 힘이
없기 때문에 늘 당하기 만하였습니다.
그는 이후 굴뚝 청소를 하다가 그곳에서 나오지 못하고 죽어 버렸습니다.
이 작품은 난쟁이로 태어났기에 겪어야만 하는 난쟁이의 슬픈 영원한
고뇌를 그렸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9장 말씀에 보면
난쟁이 <삭개오>의 집에 예수님께서 방문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록 <삭개오>는 동족의 따돌림을 받아 친구 하나 없이 영원한 고뇌로
죽어야만 하는 <조세희>의 난쟁이와는 같지 않습니다.
성경은 난쟁이 <삭개오>의 이야기에서 그가 <세리>였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독과 영적 갈급함만을 서술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세리>였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물이 낫은 곳으로 흐르듯
하나님의 은총은 낫은 곳에 임합니다.
이 시간 우리의 불행이 변하여 하나님의 축복이 되는
전화위복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초대교회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신앙생활에는 첫째는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세르반테스>는 그의 작품 <돈키호테>에서
“공작새는 자기의 발밑을 볼 때는 깃털을 접는다.”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부족을 인정하고 인간의 무능력함을 그대로 인정하며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를 용납하십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18장 14절 말씀에서
주님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14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따라서 아직도 자신의 자랑과 교만에 빠진 자들은
더 이상 의인이기를 그만두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의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자신의 노력이나 의(義)로써 이룰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분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를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행복 가족 여러분!
오늘도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하나님께 간구하심으로
응답받는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