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분홍색으로 질문했다
이인원
파란시선 0075 / B6(128×208) / 138쪽 / 2021년 1월 5일 발간 / 정가 10,000원 /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분홍 입술의 시간
이인원 시인의 시는 시적 대상이 가지고 있어야 할 정보의 양적 측면에서는 절대적으로 제로에 가깝지만, 바로 그 때문에 오히려 시적 대상을 적극적으로 환기한다. 이는 고정된 시적 대상에서 발산되는 의미들을 따라가던 감상의 방식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만들고 결국 우리만의 고유한 감각을 되살려 내는 데에 성공한다. <그래도 분홍색으로 질문했다>를 읽어 가면서 우리 고유의 감각을 되살려 보는 일은 시를 읽어 왔던 그간의 방식이 언어가 만들어 내는 의미들만을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하게 만든다. 그만큼 이인원 시인의 시들은 의미적 구성이 더 이상 불가능해지면서 오로지 자신만의 감각을 믿고 나아가게 만드는 일종의 경계 지점들에 집중하고 있다. (이상 남승원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이인원 시인은 1992년 <현대시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마음에 살을 베이다> <사람아 사랑아> <빨간 것은 사과> <궁금함의 정량>을 썼다. 2007년 현대시학작품상을 수상했다. <그래도 분홍색으로 질문했다>는 이인원 시인의 다섯 번째 신작 시집이다.
■ 추천사
“불쑥”과 “슬쩍” 사이, 범상하면서 범상하지 않은 언어의 긴장과 환멸 속에 이인원이 조성하는 언어 생태계가 자리 잡는다. 혀를 내밀 듯 “불쑥” 열린 붉은 산수유 열매와, 옷섶을 여미듯 “슬쩍” 핀 노란 산수유꽃 사이의 형언 못 할 간격이라니. “불쑥”의 폐쇄파열음 ‘ㄱ’이 질식할 것 같은 흥분과 교란의 표지라면, “슬쩍”의 그것은 참기 어려운 미혹과 수세(守勢)의 기호다. 늙음에 대한 섬세하고 당돌한 시치미 떼기, 혹은 생(生)에 대한 잔인한 환유. 아닌 것처럼 보여도, 그녀의 모든 시편은 과연 이 “수십 년 만의 폭설”이 품는 “불쑥”과 “슬쩍”의 간격 어디쯤 놓여야 할 듯싶다.(「눈 녹은 자리」) 그리고 그것들은 대개 삶의 숙명적 허무와 아이러니를 향한다. 양악 통증에 시달리는 어금니의 이빨 자국 같은 아픈 생을 영원히 상환할 수 없는 차용증으로 비유하는 모습이 그러하며(「A4」), “꽃을 사칭한 열매”와 “열매를 차용한 꽃” 사이를 배회하는 ‘나무’의 덧없는 그리움과 자의식이 그러하며(「꽃사과를 보러 갔다」), “나무들의 슬하”에 당도하기 위해 기꺼이 “연골 다 닳은” 채 “마지막 무릎걸음”을 하는 장엄한 광경이 그러하다(「나무는 무릎이 없다」). 성애의 환상을 담은 극채(極彩)의 프레스코화도 이면에는 그것이 밑그림처럼 보이지 않게 깔려 있을 터다(「홀소리들 3」). “불쑥”과 “슬쩍” 사이의 매혹적인 거리에서 그녀의 자백은 외설적이지 않으면서 위태롭다. 위태롭지 않은 사상(事象)은 너무 무뎌서 과녁을 꿰뚫을 수 없다. 이러한 모험은 삶과 세계와 언어에 대한 겸허하고 절박한 성찰을 전제로 한다. 동시에 그것은 시인 이인원이 밀고 가야 할 윤리이고 미덕이다.
―오태환(시인)
■ 시인의 말
억센 고함 소리의 뼈
감쪽같이 발골해 내는 에코처럼
한 템포 늦게
시치미 딱 떼며 반문하는 에코처럼
파동이 되어 돌아오지 못한 말들에게
미안하지만, 입 싹 닦기로 했다
■ 저자 소개
이인원
1992년 <현대시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마음에 살을 베이다> <사람아 사랑아> <빨간 것은 사과> <궁금함의 정량> <그래도 분홍색으로 질문했다>를 썼다.
2007년 현대시학작품상을 수상했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꽃사과를 보러 갔다 – 11
기찻길 옆 오막살이 – 12
air cap – 14
11월 – 16
눈 녹은 자리 – 18
퀵 – 20
오래된 시집 – 22
빨강, 티셔츠 – 24
빨강, 페인트 자국 – 25
협상의 기술 – 26
A4 – 28
관문체육공원 – 30
에코 – 32
유작전(遺作展) - 33
분홍 입술의 시간 – 34
양재천 – 36
소금 광산 – 38
제2부
또 다른 방언 – 41
포테이토칩을 한 입보다 크게 만드는 이유 – 42
아버지는 가끔 돌사탕을 사 오셨다 – 44
표면장력 – 46
주먹이 운다 – 47
큰언니 – 48
대서 – 50
능소화 – 52
독작 – 54
만성중이염 – 55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 56
스커트론(論) - 58
장미, 또는 도마뱀 – 60
체위반사 – 62
맨드라미, 맨드라미 – 64
나무는 무릎이 없다 – 65
누구긴 누구 – 66
풍뎅이 – 68
제3부
묵비권 – 71
번개탄 – 72
언제 밥이나 한번 먹자 – 73
불길한 예감은 – 74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 76
커튼콜 – 78
특집 인터뷰 – 80
Zoom In – 82
136쪽과 137쪽 사이 – 83
웃음 꽈리 – 84
지중해 – 85
오리지널 레시피 – 86
외가 – 88
어떤 네모난 정원 – 90
닭똥 같은 눈물 – 91
캐러멜마키아토, 혹은 아메리카노 – 92
새벽을 프린팅하다 – 94
제4부
홀소리들 1 – 97
홀소리들 2 – 98
홀소리들 3 – 100
홀소리들 4 – 102
홀소리들 5 – 103
보디랭귀지 – 104
타는 냄새 – 106
스캔들 – 108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시 – 110
흰 살 생선 – 112
사투리 – 114
step by step – 115
낙타에게 – 116
포옹 – 117
은발 – 118
붓 이야기 – 119
다 울고 나서 – 120
그래도 치즈, ~ - 122
해설 남승원 비대칭의 지점들 – 123
■ 시집 속의 시 세 편
꽃사과를 보러 갔다
꽃을 사칭한 열매를 맺고
열매를 차용한 꽃을 피우며
꽃과 사과 사이를 죽어라 오가는 나무
무서워라,
꽃멀미를 핑계로 그대를 보러 가서
사과꽃과 꽃사과 사이
어정쩡한 나만 만나고 왔네
사람을 사람에 빠지게 만드는
누명 같은 꽃 오명 같은 열매 사이를
아슬아슬 피해 가며
한 알 한 알 붉은 애와 증의 관계를
어김없는 공전과 자전이라 읽고 왔네
꽃가루 알레르기 증상이나 더듬더듬 사칭하다
그대 몰래 죄 없는 그대를
또 한 번 차용하고 왔네
그대 목울대 안에서 피고 지며
달과 지구 사이의 거리를 암산하고 있는
작은 꽃사과 하나
똑똑하게 목격하고 왔네 ***
눈 녹은 자리
수십 년 만의 폭설
갑작스레 더 쪼글쪼글해진 산수유 열매
불쑥, 붉다
불쑥은 얼어붙은 뺨을 한 방 세게 때리고는
눈 녹듯 사라진다
입가에 팔자 주름 생겼다
몇 십 년 퇴적층이 슬쩍, 농을 걸어온 것
슬쩍은 연노랑 산수유꽃으로 접근해
눈 녹은 자리까지 실없이 지켜본다
숙달된 바람잡이와 소매치기인 시간에게
내 얼굴은 가장 털기 쉬운 지갑
면도날에 길게 찢긴 핸드백 같은 허공에서
함박눈 펑펑 쏟아진다
불쑥의 좁은 등 슬쩍 떠밀며
슬쩍의 발목 불쑥 걸고 넘어진다
저 현란한 손기술에 언제 또 당할 것이겠지만
넋을 놓고 쳐다본다 ***
분홍 입술의 시간
방금
발등으로 떨어지지 않았다면
책갈피 속에 영영 잠들었을 이 한 컷
그때
셔터에 잡히지 않았다면
까맣게 지워졌을 장면들
기억 속에 순장된 얼굴
눈꺼풀 아래 매장된 만남과 이별
발굴이 되기도 도굴이 되기도 했다
누가 가슴에 삽을 댄 것일까
깜짝 놀라 깨어난 분홍 입술의 시간
벼락같은 한 장면과 다 늙어 죽어 다시 만난다면
네가 죽고
내가 산다면
내가 죽고
네가 산다면
그래도
나는 분홍색으로 질문했을 것이다
푸르렀던 젊은 날 개장해 보자
녹슨 애증의 시절 이장해 보자
도톰한 분홍 입술의 시간
자꾸 달싹거리는 날에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