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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보물은 사람이다.
딸, 아들, 며느리와 사위.
그리고 손주들과 한 배에서 나온 남매들.
또 어쩌면
이들보다 내 곁에서 더 나를 챙겨 주는 한 사람.
내 안에서 늘 반짝이는 보석같은 사람.
보물 중의 보물 보석 중의 보석.
아직 완전히 다듬어 지지 않은 원석의 형태로
여전히 남아 있는 사람.
아니
어쩌면 영원히 그 형태대로 남아 있을 것 같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아직도 여전히 긴 겨울 밤.
비가 한 방울 씩 내리는 커다란 밤 거리가
유난히도 반짝인다.
아직 덜깬 밤.
나홀로 깨어 있는 느낌이다.
문득 시계를 보니
그래도 벌써 아침 여섯시 반 이다.
비가 오느라고 하늘만 깜깜 했지.
벌써 아침은 밝아 오고 있었구나.
내 게으름이 밤과 아침조차 구별하지 못했다.
그러나 좀 더 자기로 했다.
내 일상에서 아침 여섯 시 반은 너무 이르다.
결국 8시까지 잔 후 눈을 비비며 일어 났다.
대신 오늘은 좀 일찍 집을 나섰다.
다행히 비는 밤사이 그쳤고
땅은 제법 바짝 말라 있다.
우선 카페에 먼저 들러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처음은 약간 신 맛이 나고 뒤끝이 달콤한 커피의 맛.
그것이 커피가 내게 주는 유혹의 맛이다.
때로는 꽃향기도 함께 나누어 주기도 하는
결코 떨칠 수 없을 것 같은 유혹.
어제의 맛이 다르고 오늘의 향이 다른 작은 유혹.
여인의 오묘한 속살의 향내 같은.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는 커피는 볼리비아 카나라비 .
진한 맛이 약간 거슬려 좀 연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직 오전이라 풍미가 깊은 것은 힘겨울 것 같아.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찾아간 천마산.
초입에서 약간 망설였다.
왼쪽으로 가면 송도 해수욕장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감천 문화마을.
어느쪽으로 가든 시간도 비슷하다.
그래서 더 망설임이 컸지만
결국은 감천 문화마을을 택했다.
송도 해수욕장은 엊그제도 해안 산책로를 따라 한바퀴 돌았기에
오늘은 감천 문화마을로 방향을 잡았다.
산길로 해서 문화마을로 가면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맞이 하는
아미 성당.
아미성당은 감천 문화 마을과 붙어 있다.
바로 아미동 비석 문화마을과 감천 문화마을이
동 경계로 맞붙어 있기도 하다.
평일에는 성당 마당에 무료 주차도 가능 하다.
바로 옆에도 무료 주차장이 있다.
이미 폐교된 초등학교 운동장을 임시 주차장으로 개방하고 있다.
늘 그렇듯이 감천 문화마을은 외국인들로 가득하다.
내국인과 외국인이 반반 혹은 외국인이 좀 더 많다.
그리고 방문을 할 때마다
조금씩 그 외관이 변하고 있는 기분이다.
우중충한 묵은 때를 벗고 화사하게 새옷으로 갈아 입은 듯 한.
특히 벽화가 자꾸 새로 생겨 화사한 느낌을 더욱 강하게 내 뿜는다.
포토존인 이 곳.
특히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곳이다.
인생샷을 남기기 위해.
가끔 줄을 기다리며 푸념을 하기도 한다.
같은 조형물을 하나 더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그렇다고
똑 같은 조형물을 새로 하나 더 만든다고 한들
이 줄이 줄어들 것 같지는 않다.
원래 이 곳이 포토존인 걸.
남포동 비파(영화의 거리)거리에 나가 보면 수많은 가게가 있고
수많은 인파가 붐비지만
그 많은 인파가 붐비는 곳은 단 하나.
바로 씨앗호떡 집이다.
항상 관광객들로 바글바글 하는 곳이다.
왕서방네 호떡집에 난 불 구경꾼 보다 훨씬 많은 손님들로 늘 가득이다.
꼭 맛이 있어서라기 보다 워낙 유명하기에 너나없이 호기심으로
먹게 되는 씨앗호떡.
감천문화마을의 상징인 이 어린왕자 조형물 역시
그 어떤 대체물로도 채울 수가 없을 것 같다.
사람의 호기심이란 마약 그 이상의 중독성이 있으니.
감천 문화마을을 벗어나 걸어 나오면
바로 눈 앞에 나타나는 아미동 비석 문화마을.
일제시대 일본인의 공동묘지 였던 곳이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의 생활터전으로 변한 곳.
당시 마땅하게 집을 지을 자재가 없어
일본인들의 비석을 주춧돌로 삼아 집을 짓고 생활의 보금자리를 이루던 곳.
때문에 촘촘하게 집을 지을 수 밖에 없었던 곳.
무덤 하나가 그들의 집 한 칸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고달펐던
피란민들의 생활상.
아직도 이 마을 뒷골목 그 어딘가에는 여전히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그래서 부산의 산복마을 모두는
마을마다 하나씩 전설을 간직 하고 있다.
내 여인도 약간은
그런 고달픈 삶의 흔적이 묻어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