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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ransition
1992년 총선 직후 주류를 이루는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드디어 영국이 회복기에 들어섰다는 합의가 형성되었다. 더불어 광범위한 층의 정치 엘리트들은 10여년에 걸친 대처 집권이 종식된 현시기는 대처의 개혁안과 스타일을 취사선택해야 할 때라는 데 동의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중도적 합의는 대처의 긍정적 개혁안이라고 여겨지는 것들, 즉 보다 효율적인 시장 중심경제, 정부와 민간영역에 있어 효율성에 대한 관심, 개인과 정부의 책임성의 풍조 등을 지지하였다. 이와 함께 실용성과 타협, 보다 관대한 이견의 인정과 같은 전통적인 영국적 가치로의 회귀 또한 새로운 합의가 지지한 대상이었다. 이로써 많은 사람들은 시민과 노조, 각료들 그리고 EU 사이의 대립의 감소와 그에 따른 정치·경제적 이득을 기대하였다.
탈 대처시대 새로운 중도적 합의는 시민에 대한 정부의 심화된 책임성을 요구한다. 이같은 특징은 메이저 정부가 내놓은 시민선언(citizens' charters)의 큰 줄기를 이룬다. 시민선언은 Charter 88이라는 비판적 헌법 개혁 단체의 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으로, 메이저의 정치적 비젼을 제시하고 메이저 정부의 특징을 구체화하려는 의도에서 발표되었다. 즉 정부와 시민간의 관계를 재정의하고 행정의 소비자로서 시민을 강조함으로써 메이저는 국가서비스에 대한 불만을 정치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공급자인 정부에 대한 시민 통제의 범위를 확대시키고자 하였다. 이와 함께 시민선언의 핵심원칙에는 공개와 소통, 공공서비스의 명확한 지침과 기준, 정책시정을 위한 법적 조치, 효율성과 예산 긴축의 강조등이 포함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업 문화를 정부 분야로 확대시켜 정부에 의한 자원의 효율적 이용을 고무시키는 것처럼 보였던 시민선언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지나친 기대였음이 드러나고 결국 헌법 개혁에 이르지는 못하였으며 공공 서비스 분야 역시 불만족의 상태를 유지하였다.
또한 새로운 중도적 합의는 헌법적 기초로의 복귀와 증대된 시민 참여를 약속하였다. 이로써 보다 협조적인 의사결정 방식은 내각의 집합적 책임성을 높일 터였다. 마지막으로 탈대처시대는 영국이 EU 정책에 보다 유연하게 대응할 것을 요구하였다. 즉 EU 정책에 대한 자율적 주권은 유지하면서도 통합을 향한 협정에 건설적으로 참여할 것이 기대되었다. 또한 새로운 중도적 합의는 국가개입의 수준과 성격에 대한 적절한 이견의 존재를 허용할 것이다. 결국 이 모든 흐름은 "합리적 중도에 바탕한 친시장, 친 유럽적 합의"로 귀결되었고, 이는 차기 대권주자로서 토니 블레어에게 이상적인 기반이 되었다.
정치적 저항과 안건의 변화
1992년 선거에서 영국은 대처시대의 개혁조치와 온건한 복지국가 목표들, 그리고 합의적 가치 및 민감한 유럽 사안을 잘 융합해 낼 수 있는 적임자에 대한 보수당의 선택을 받아들였다. 대처의 직계로서 존 메이저는 시장주의와 기업 가치 실현의 측면에서 그녀와 뜻을 함께 했지만, 유럽에 대한 적대적 태도는 공유하지 않으려 한 조정자이자 실용주의자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1992년 여름 보수당 승리 직후에는 가중되는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낙관론이 확산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90년대 중반에 이르러 경제 실적면에서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앞서 있다는 흥분되는 주장이 무색하게 보수당은 각종 여론 조사에서 노동당에 크게 뒤졌고 보궐선거에서 대패하였다. 심지어 당내 인사의 입에서 메이저 정부가 재임(in office)하고 있지만 정권을 쥐고(in power) 있지는 않다는 자조섞인 푸념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그 해답은 '기본으로의 회귀'와 유럽이라는 두가지 쟁점으로 요약할 수 있다.
기본으로의 회귀
1993년 메이저 정부는 전통적인 가족 가치를 재확인하고 사회의 묵인주의를 지탄하는 '기본으로의 회귀'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때마침 보수파 의원들과 법관들, 그리고 각료들이 연루된 스캔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이러한 상황은 개인의 책임과 도덕성에 호소하는 정치 방침이 발표된 상태에서 보다 나쁜 것처럼 보였고, 이에 비행을 저지른 관료들을 단죄하는데 단호한 태도를 취하지 못한 메이저는 더욱 어려운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가히 폭발적으로 발생한 온갖 형태의 스캔들로 인해, 1994년 가을 갤럽이 행한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의 61%가 보수당 의원들은 타락하고 수치스러워 보인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결국 일련의 스캔들은 메이저 정부가 통치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의식을 심화시켰다.
영국과 유럽 :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함의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과연 메이저 수상과 영국정치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가? 첫 번째로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메이저 정부의 다양한 정치적 논제들을 흡수해 버리고 정당정치와 리더쉽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게 했다. 사회헌장(the Social Chapter)의 조항들은 대부분의 영국인들에게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보수당 의원들과 많은 기업인들은 그 조항들이 노동비용을 증가시키고 기업의 활동을 저해함으로써 영국의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약에 포함된 구체적인 조항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사회헌장은 그 자체로 EU의 간섭과 권력 집중을 상징하고 있다. Peter Riddel에 의하면 보수당의 반대는 "결국 사회헌장을 거부함으로써 EU의 간섭에 반대하는" 행위인 것이다.
사회헌장과 보다 넓게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둘러싼 끝없는 험담과 반발은 메이저에게서 수상직을 가져가 버리고 말았다. 대처로부터 물려 받은 영국-유럽 문제들은 당과 정부에 대한 그의 지배력을 약화시키고 집권 초기부터 그의 수상직을 위협하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 메이저는 유럽 문제와 관련하여 보수당내에서 끊임없는 저항에 부딪쳐 왔고, 이러한 당내 분열은 내각으로까지 확산되어 그의 취약성을 보다 악화시켰다. 노동당에 있어 사회헌장은 대처와 메이저 집권기 크게 감소한 노동자의 권리와 사회 이익을 회복할 수 있는 중대한 기회를 의미했다. 이에 노동당 의원들과 그 지지자들은 사회헌장의 편에 섰으나 헌장 채택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의회적 책동(parliamentary maneuver)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정책 차이의 진정한 의미를 부각시키는 데 실패함에 따라 별다른 지지를 얻지 못하고 말았다.
두 번째로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보다 진전된 헌법적 관행을 구체화시켰는데, 이는 영국에서의 민주적 이상과 중요한 관련을 맺고 있다. 자신의 정책에 대한 반발이 심해지면 메이저는 신임 투표(vote of confidence)를 치뤄 이에 승리함으로써 자신의 정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전개는 점차 약화되는 의회 주권의 양상을 더욱 부채질하였는데, 아무리 약하고 인기 없는 수상일지라도 이와 같은 정치적 강수를 최후 수단으로 삼음으로써 살아 남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행정부와 입법부의 융합체제에 있어, 수상의 권한 행사를 제한할 수 있는 수단으로 더 이상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져 볼 수 있다. 그러나 마스트리히트 조약으로 인한 위기에 봉착하여 메이저는 그의 선임자들보다 전통적인 헌법적 접근 방법에 의존했음을 주목해야 한다. 대처와는 반대로 그는 내각과 폭넓게 의논하고, 고위 관료들과 더불어 신임 투표라는 전략을 계획해내 이를 내각에서 비준한 것이었다. 결국 그러한 전략은 한편으로 하나의 헌법적 원칙으로서 의회 주권을 훼손시켰지만 한편으로 내각의 총체적 책임을 재확인한 것이기도 했다.
전환기의 영국 정치
EU 정책으로 인해 대처와 메이저가 처한 어려움은 유럽 정치와 국내 정치 사이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의 일면에 불과하였다.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의 사회당은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단지 1%의 우위를 점할 수 있었고, 독일의 헬무트 역시 1994년 10월 선거에서 사민당을 간신히 앞설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두가지 예에서 유럽 문제는 자원배분에 있어 이견을 보이는 전통적인 좌-우 분할 정치와 부분적으로 겹치고, 또는 부분적으로 이탈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정치의 재편인가?
EU를 둘러싼 분열과, 국가적 이익을 초국가적 이상과 융합시키려는 보다 광범위한 시도로 인해 서유럽 국가의 대부분에서 부분적인 정치개편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경제와 사회정책에 대한 실용주의적 합의가 계층과 분할 정치의 수준과 정도를 약화시키면서 그러한 논쟁이 다른 정치적 안건들을 밀어내고 정당들을 차별화시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사실상 국가 주권에 대한 EU의 위협이야말로 유럽 통합이 영국내에서 그토록 논란이 되고 분열을 조장하게 된 주된 이유이다. 보다 진전된 경제·통화 공동체를 위한 마스트리히트의 안건은 경제적인 의미에서 영국의 국제 경쟁력에 근본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따라서 EU내의 외교정책과 정책 결정과정을 섭렵하는 것은 향후 모든 당과 정부의 신뢰도와 피선(被選) 자격을 시험하는 지표가 될 것이다.
결국 유럽 문제는 향후 영국 정부를 끊임없이 괴롭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영국의 '위대함'은 여전히 그 차별성과 제국, 연방의 이미지, 그리고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에 바탕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축소된 위상에의 적응은 물론 많은 부분 국가적 정체성의 약화까지도 감수해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점진적으로 친유럽 성향의 실제적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는 정치·경제의 엘리트들과 여전히 불확실하고 관심을 보이지 않는 유권자들 사이의 커다란 괴리가 존재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 인터뷰에 응한 영국 남부 해안의 작고 보수적인 도시 Christchurch의 영국인들은 이에 노골적으로 실망감을 표시했다. 그들은 마스트리히트와 유럽에 대해 충분히 들어 왔고, 그들의 대표자들과 지도자들이 이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다. 결국 1910년 이래 모든 선거에서 보수당을 지지해온 Christchurch의 유권자들은 마스트리히트 신임투표 직후 치뤄진 보궐선거에서 자유민주당에 표를 모아 줌으로써 메이저 정부를 더욱 더 약화시키고 말았다.
정부와 시민간의 간극
Christchurch 시민의 태도는 의회의 지나친 몰두와 영국인들의 우려간에 존재하는 보다 광범위한 틈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간격을 좁히는 것이야말로 정치색에 관계없이 영국정부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과제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정치의 관심이 마스트리히트로 쏠린 것은 마침 주변상황의 변화로 유럽 통합의 전망에 조심스러운 물음이 제기되고 있는 시기였다. 1993년 여름 Franc에 대한 통화 투기로 ERM(Exchange Rate Mechanism)이 다시 한번 흔들린 후, 경제 및 통화 공동체를 위한 마스트리히트 계획안의 시기와 신뢰도가 매우 의문시되었다. 동시에 보스니아에서 전쟁의 참화가 이어지고 이를 해결하려는 유럽 차원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보다 넓은 외교 정책 조정의 계획과 새로운 탈냉전시대 유럽의 안보적 역할 역시 신뢰를 잃고 말았다. 보다 일반적으로 EU 각국은 경기침체와 실업률 증가, 리더쉽 부재는 물론 이민자에 대한 폭력 소요의 증가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태이다. 요컨대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정신은 퇴색하였고, 향후 유럽통합의 궤도 또한 불확실하다.
그런 와중에, 영국과 EU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악화될 계기를 맞이하였다. 영국정부가 1996년 3월 병든 소를 원료로 한 식품이 11명의 환자들에게서 퇴행성 뇌질환을 유발할 수 있음을 발표한 직후, EU는 즉각 영국산 소고기의 수출을 금지했다. 이에 영국은 EU내의 결정을 방해함으로써 대응하였다. EU의 금지령과 영국의 비협조 정책 중 어떤 것도 오래 지속될 것 같지 않았지만, 이른바 '광우병'을 둘러싼 갈등은 여전히 영국정부와 EU간의 고질적인 불신과 적대감을 보여주고 있다.
영국과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두 번째 아이러니는 경제적 부와 지역적 영향력에 있어 예기치 못한 변동이 영국내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메이저 정부에 대한 격렬한 정치적 반발에도 불구하고 1992년 9월 ERM과 결별한 영국은 이후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국제적 중요성
삼년에 걸친 상호비난과 위험신호이후 홍콩을 둘러싼 英-中 관계는 그 치열한 다툼이 점차 사그라들 조짐을 보이고 있다. 1984년에야 마무리된 협상에서 영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홍콩을 1997년에 중국에 귀속시킬 것에 동의했다. 그러나 1989년의 천안문 사태는 주권이양이후 예상되는 억압적 정부의 횡포에 대한 홍콩 주민들의 불안을 가중시켰고, 이에 영국의 책임 문제가 다시 한번 부각되었다. 그러나 인종과 이민문제에 관한 국론분열, 신흥 경제 세력으로의 중국과의 적극적인 관계 유지에 대한 국제적인 압력, 홍콩내의 민주주의와 시장 자유 보장에 대한 압력이 맞물리면서 영국은 정책 결정의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물론 영국내에서의 정책 논의과정에서 당파적 분열이 심하게 불거지지는 않았지만 중국과의 협상은 항상 긴장속에서 비생산적인 논의만이 진행되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에 따라 1997년 6월 30일로 예정된 주권반환은 홍콩내 민주주의에 대한 불안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홍콩의 입법 의회 선거에서 미약하나마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다수당이 형성되고 영국이 1억 5천만 달러의 원조계획에 동의함으로써 상황은 호전되었다. 이와 더불어 현재 미국이 새로운 경제세력으로 중국에 가장 큰 위상을 부여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영국이 어디까지 미국의 분노를 담보하고 중국을 압박할 수 있을 것인지 불확실하다. 물론 긴장이 완전히 가신것은 아니지만 상황이 보다 순조로운 방향으로 호전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헌법상의 문제들
민주적인 통치와 시민참여의 문제들이 미해결로 남아 있는 것은 비단 중국과 제 3세계 국가들만의 사안이 아니다. 정도는 덜하지만 영국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인데, 전통적으로 신성 불가침의 영역이었던 왕실이 최근 스캔들과 부정(不貞), 이혼 사건등으로 그 권위가 흔들리면서, 영국의 비민주적인 토대에 대한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한 평자는 신랄하게 문제제기하고 있다. "왜 하원이 온전한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왜 다른 선출되지 않은 기구(unelected institution)들과 주권을 나누는가?"
직접적으로 군주제를 거부하는 이는 거의 없지만 총선거에서 다수당이 생기지 않을 경우 정부구성에 왕실이 행사하는 역할에 대한 불평도 만만치 않다. 뿐만 아니라 긴축의 시대에 사치스러운 왕실에 들이는 세금 비용에 대해서도 시선은 곱지 않다. 보다 중요한 것은 왕실의 역할에 대한 의문들이 정부와 헌법 개혁에 대한 시민적 통제라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무게를 싣고 있다는 점이다.
영국의 민주주의와 시민 참여에 관한 중요한 질문들은 현대의 정치논쟁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헌법상의 중요 기구들간의 권력 균형은 여전히 관심의 대상이다. 이에 영국 헌법 관계자는 최근의 상황에 대해 강력하고 소수 독점체제의 정당들과 역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행정부의 제약으로 휘청거리고 있는 의회의 모습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에 더하여 시민에 대한 정부의 책임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적절한 지적일 것이다.
북아일랜드
1994년 가을 IRA와 프로테스탄트 의회조직의 휴전선언은 북아일랜드 평화 정착의 희망을 되살렸다. 그리고 1995년 봄, 북아일랜드 의회 설립을 골자로 하여 메이저와 아일랜드 수상존 브러튼이 공동으로 발표한 기본 협정(Framework Agreement)은 북아일랜드 문제의 정치적 해결에 대한 낙관적 분위기를 심어 주었다. 그러나 메이저가 문제 해결의 위험한 도박을 성사시킨 것 같았던 1995년이 지나고, 1996초가 되자 이러한 평화적 과정은 다시 한번 중대한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즉 휴전기간내내 영국정부는 IRA가 무장해제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IRA를 군사적 기반으로 하여 공화주의 운동을 이끄는 정치 조직인 신페인당(Sinn Fein)의 평화 협상 참여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IRA는 이를 거부했고, 이에 전 상원의원 조지 미첼을 중심으로 국제위원회가 구성되어 위기의 돌파구를 모색하고자 했다. 1996년 1월 미첼은 신페인당이 휴전을 영구화한다는 조건으로 영국정부가 신페인당의 협상 참여를 허용해 줄 것을 권고하였다. 사실상 미첼의 제안은 협정과 군축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함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메이저는 이러한 제의를 단호히 거부하였고 결국 며칠후 IRA는 런던에서 폭탄을 터뜨리면서 휴전을 끝내 버렸다. 이에 IRA의 휴전 재개에 대한 요구가 전국적으로 일어나는 가운데, 영국과 아일랜드는 부랴부랴 평화적 절차를 소생시키고, 신페인당의 게리 아담스와 주류 기독 사민 노동당의 존 흄은 IRA의 수뇌부에 폭력을 자제할 것을 요구하였다.
1996년 2월말, 메이저와 브러튼은 그해 6월 전당차원의 평화회담이 시작될 것임을 발표한다. 새로운 계획안에서 신페인당은 영구적으로 폭력의 사용을 포기하고 민주적 과정을 지지하며, IRA가 휴전을 재개하는 조건으로 협상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6월이 되어 신페인당이 평화협상에서 Ulster지역의 대표여부를 결정하는 선거에서 15.5%의 지지를 얻었음에도 또다시 회담에서 배제되자 사태는 다시 악화되었다. 결국 며칠이 되지 않아 맨체스터에서 IRA의 소행으로 보이는 폭발사고가 일어나 200여명이 부상하였고, 문제해결을 위한 평화적 노력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이로써 북아일랜드 문제의 평화적 해결 가능성은 희박해졌고, 메이저의 정치적 능력은 또다른 의문을 낳게 되었다.
실용주의적 중도
90년대 중반에 이르러 메이저 정부는 국가를 이끌고 새로운 중도적 합의를 실행에 떬길 수단을 상실해 버린 듯 하였다.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둘러싼 의회내 위기가 발생한지 2년이 지나고 1997년 4월의 차기 총선거가 다가오는 가운데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정치적 책략에도 불구하고 메이저는 유럽 문제에 대한 당내 분열과 끊임없이 그의 리더쉽을 문제삼는 회의론자들(the Euroskeptics)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1996년 1월 내각은 유럽 통합에 대해 보다 강경한 입장을 요구하는 회의론자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백지안(a white paper)을 제출하게 된다. 같은해 북아일랜드 문제해결의 가능성을 산산 조각내 버린 IRA의 폭탄테러 사건과 함께, 메이저 정부는 또다른 골칫거리에 부딪히는데, 그것은 영국이 80년대 이라크의 후세인에게 군사 용품을 판매했다는 사실에 대한 리처드 스콧경의 1800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였다. 결국 다시한번 신임 투표를 거쳐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이는 2명의 각료 해임이라는 참담한 희생의 결과였다. 결국 스콧경의 보고서는 메이저 정부를 둘러싼 혼란의 물결을 더욱 세차게 하였다.
이제 영국은 메이저를 넘어 향후 불가피한 흐름으로 블레어 정부의 탄생 시간을 재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데올로기에 경사되지 않은 이상주의자"로 평가되는 그 젊고 인기많은 정치가는 영국정치를 실용주의적 시장주의와 친 유럽주의의 중심으로 이끌것은 물론 확고한 리더쉽을 재확인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에 모든 여론조사들은 그의 기회가 도래하고 있음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물론 영국의 전통적인 양대계급과 양당제에서 비롯된 분할적 쟁점들이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이들 사이의 불평등과 시각차이는 사회 복지 혜택의 수준과 임금, 완전고용의 책임, 경제 운용에 대한 국가의 역할등의 문제에 있어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 질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전통 좌파의 조합주의적 합의와 우파의 대처식 대안에서 탈피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비교 관점에서 본 영국 정치
역사적이고도 현실적인 이유에서 영국은 비교관점에서 중요한 사례를 제공하는 동시에 전환기의 유럽 정치를 이해하는 유용한 출발점이 된다. 그것은 영국이 가진 '최초의' 전력들, 이를테면 과거 식민 국가에 대한 의회 민주주의의 영향과 개인주의와 경쟁에 근간한 정교한 시장주의 모델에 기인한다. 최초의 산업국으로서 영국은 전세계적인 생산-교환관계를 확립하고, 의회주권과 온건 및 관용의 정치문화에 기반한 혁신적인 민주주의 모델을 건설하는 과정을 선도해 왔다. 그러나 그이후 다른 어떤 나라보다 급격한 정치적 혼란을 경험한 영국은 오늘날 여러 가지 물음에 면(面)에 있다. 영국은 여전히 특이하고 설득력있는 민주주의 모델을 제공하고 있는가? 300년에 걸친 흔들림없는 헌정과 자유방임의 역사속에서 영국은 통제의 원천이 줄어든 정치·경제적 상황에 얼마나 잘 준비해 왔는가? 또한 영국은 그 국력의 쇠퇴를 얼마나 훌륭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나아가 우리는 영국의 성공과 실패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
많은 영국인들은 그간 온갖 정치· 경제적인 병폐를 경험하면서 문제의 원인을 영국 정치제도의 특징이나 리더쉽의 부재에 국한시켜 파악해 왔다. 그러나 그러한 접근방식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들을 영국만의 문제로 특징지움으로써 보다 폭넓은 정치적 이해를 어렵게 한다. 오늘날 수많은 영국인들이 정부의 책임성과 시민에 의한 민주적 통제성을 고양시키기 위해 근본적인 헌법 개혁이 필요함을 주장하고 있다. 군주제에 대한 비판에서 촉발된 개혁의 요구는 지나치게 중앙집권화되고 경직된 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확대되고 있다. 의회주권의 원리라는 핵심적인 헌법 원칙은 오늘날 행정 지배적 정부의 현실을 더 이상 담아내지 못하며 내각 정부의 원리 역시 한편으로는 수상 지배의 가능성을, 또 한편으로는 거대한 선출되지 않은 관료제의 권력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러한 입법부에서 행정부로의 권력이동은 오늘날 정책의 규모와 복합성이 증가함에 따라 의회적 감시가 어려워지고 광범위한 전문 관료집단의 출현이 불가피해지면서 거의 모든 산업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점이다. 이와 함께 정부사안에 대한 통제력의 상실 역시 비단 영국인들만이 절실하게 체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국내의 인종, 민족적 소수 집단이 상대적으로 소규모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집합적 정체성(collective identity)이라는 가장 분열적인 이슈를 약화시켰지만 문제시되는 영국 정치체제의 경직성이 민주주의와 관용의 원리를 가장 위협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비례대표제의 요소가 결여된 소선거구제와 단일 선거제도는 소수 집단의 의회 진출을 차단하고 정부는 이들의 문화적 소외에 대해 무관심하다. 또한 소수 집단에 대한 사회적 혜택의 삭감과 자격 요건 강화는 희박한 고용전망과 더불어 이들 종교, 민족, 인종적 소수 집단을 사회의 끄트머리로 내몰고 있다. 물론 이역시 영국의 경우는 유럽 전체에 팽배한 외국인 혐오의 분위기를 일부 반영하고 있을 뿐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영국의 경우에서 쇠퇴하는 중류 국가가 외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펼치는 충실하고 꽤 성공적인 노력의 예를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볼 적에, 메이저의 마스트리히트 이야기는 두가지 측면, 즉 사회헌장과 단일 통화 계획에서 빠져 나올 수 있게 한 정상회담에서의 성공담과 그 이후 정치 투쟁의 실패담을 모두 포함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간의 논의에서 우리는 역내(域內)적, 세계적으로 쇠퇴 추세에 있는 국가가 지역 차원에서 결정된 사안들의 국내적 영향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것임을 살펴 보았다. 영국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영국은 EU와 중국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기대이상의 성과를 거두었고, 이는 우리에게 영국이 가진 리더쉽과 협상 기술, 그리고 역사적 권위라는 비가시적인 잠재력의 존재를 상기시켜 주고 있다. 즉 영국은 더 이상 독일과 프랑스의 국제적 영향력과 맞설수 없지만, 상당히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외부 환경을 조율하는 데 있어 그들이 거둔 성공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의 경제적 성공이 대부분 민간이익체와의 협조 관계에 바탕한 정부의 정교한 간섭주의에 기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은 비교정치학의 공리에 속한다. 정부와 핵심적 사회·경제적 이익단체들과의 상호작용은 혁신의 기회와 국제 경쟁력을 제고하고 통일된 정책과 일관된 경제적 성과를 가능하게 한다. 이는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영국은 80년대와 90년대 초반까지 유럽 전체를 강타한 불황의 충격에서 비켜서 있었고, 오히려 독일 보다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비교정치학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중 하나이다. 이와 같은 영국의 경제적 성공은 앞으로도 논란의 대상이 될 전망이다. 과연 영국식 경제 운용책은 독일과 프랑스의 국가 중심적이고 간섭주의적인 정책에 대한 적절한 대안인가? 이처럼 긴장된 질문에 대한 동의는 물론 요원하다. 그러나 그간 국제관계에서 독립된 위치를 확보하고, 헌법 개혁에 관한 논쟁을 부활시키려 한 노력처럼 영국의 경제적 성과 또한 영국해협을 훨씬 넘어선 반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과연 영국은 이미 '한물' 가버렸는가, 아니면 다시 기운을 회복할 것인가? 불확실한 민주주적 변동이 진행되고 다양한 경제적 모델이 시험대에 오르는 이 시대에, 영국의 대응 방식은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