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바다와 용궁
1) 바다와 명당
우리들 지구상에 사는 인류에게, 바다는 하늘과 땅을 빼면 가장 중요한 자연환경이다. 이와 같이
중요한 바다는 풍류의 진리체계에도 그대로 도입되었으니, 원리적으로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중성적 존재가 바다라고 생각하였고, 이 중성을 통치구조에 적용하여 신전을 [바다]라고 불렀었다.
지금 우리가 쓰는 [바다]라는 말은 본래의 의미가 축소되어있는 대표적인 낱말이라 할수 있다.
지금 우리가 해역(海域; sea)의 뜻으로 쓰는 [바다]라는 말은 본래는 [하늘]을 가리키는 말이었었다.
[하늘]의 뜻으로 쓰이는 [바다]는 [발] + [라]로 분해될수 있다. 여기서 [라]는 지금의 말로
[땅(地)]이다. 그러면 [발]은 무엇인가? [발]은 [해 . 달 . 별]의 총칭이다.
[해(日)]는 햇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말로 [밝음 . 붉음]등이 지금도 쓰이고 있는만큼, 본래 햇님을
나타내는 [발]이라는 말이 있었음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달(月)]은 [보름]이라는 말의 어근인
[볼]이 달님의 뜻으로 쓰였던 말이라는 학자들의 연구결과가 있다. [별(星)]은 지금 쓰이는 발음이
[발]과 비숫하므로 더 설명할 것이 없다. 결국 [바다]는 본래 [하늘]의 뜻으로 쓰이던 말이었다.
하늘과 바다는 신기할 정도로 닮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 색깔이 낮에는 푸르고 밤에는 검다. 하늘에
구름이 떠있듯이 바다에는 섬들이 떠있다. 그리고 둘은 수평선에서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 구별할 수
없다. 하늘이 땅위의 울타리를 형성하듯이 바다는 땅아래의 울타리가 된다. 결국 하늘과 바다 모두가 [발의 땅]으로 불릴 수 있었고, 한편으로는 [삼한의 울타리]라는 뜻의 [한울]로 불리웠을 것이다.
따라서 이 [바다]는 동이족 천신들의 활동근거지인 동시에, 뒤에 설명될 [신정과 풍속]의 무대로서
동이들의 정체를 밝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말이다. 풍류의 진리 중에서 핵심적인 내용들이 이
[바다]라는 말 속에 녹아들어 있으며, 바다의 풍류적 의미는 오대양(五大洋)과 마찬가지로 지구
전체를 감싼 상징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풍류에서는 하늘이 허공과 그 정화(精華)인 태양을 통털어 가리키고, 땅은 대지와 달(月)을 함께
지칭한다. 마찬가지로 바다는 그 정화인 별을 반드시 포함하게 된다. 바다와 별을 연결시키는 것이
아무 근거가 없는 것 같지만,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어두운 밤에 [시그리 불]이라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 모양이 밤하늘의 별과 거의 똑같이 생겼으니, 별을 바다의 정기로 보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바다를 하늘과 땅의 중간존재로 보는 관념을 대표하는 것이 수평선(水平線)이다. 이는 땅위에서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이 산이기 때문에 산이 중성의 상징이 되었듯이, 바다에서는 수평선에서
산마루에서보다 더 완벽한 모습으로 하늘과 땅이 만나고 있다.
풍류에서는 이런 바다의 중성적 성격을 따서,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을 [바다]라는 이름으로 불렀
으니, 그 이름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檀君(단군)]의 칭호에 등장하는 [박달]이다. 근래에 민족
사학계에서는 단군의 의미 중에서 선군(禪君)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박달]의 의미를 제거하려는
경향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글쓴이가 보기로는 신시를 도읍으로 한 환웅의 나라이름이 [배달(倍達)]
이었으므로 [박달]로서 [배달]의 뜻을 이었다고 생각된다.
[박달]은 [밝 달]이다. [밝]은 [밝음 . 불음(부풀음 . 바람) . 붉음 . 푸름 . 바람(望)] 등의 의미와
연결되며, [달]은 [달(月) . 땅 . 들 . 돌] 등의 의미와 연결된다. [밝]의 뜻은 태양의 여러 속성들을
반영하고, [달]의 뜻은 주로 땅의 속성들을 반영하고 있다.
이 [밝달]은 풍류의 중심신전인 [아사달]의 다른 이름이니, [밝은 땅 . 아침 땅 . 새 땅]의 의미가
된다. 그리고 우리 고대어에서 [박(받)]과 [달(닫)]은 모두 산(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밝달]의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이 [명당(明堂)]이다.
[명당]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첫째 천자가 제후를 인견하는 궁전, 둘째 천자가 정사(政事)를 보는
궁전, 셋째 썩 좋은 묏자리 로 되어있다. 이 외에 우리나라의 일부지역에서 무당들이 신당(神堂)을
명당이라 부른다. 이런 뜻들은 지금까지 설명한 풍류의 중심신전인 [밝달]의 뜻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으로서, 더 보충설명할 필요도 없다. 특히 묏자리를 명당이라고 부르는 풍습은, 고분이 신전인
동시에 조상의 무덤이기도 했던 사실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따라서 [밝달]은 곧 [일월신전
(日月神殿)]이요, [삼신산(三神山)]인 것이다. 이런 생각을 지원해 주는 증거자료가 바로 [바다]의
한자음인 [해; hai]이다. [海]는 [每]의 [물(水)]이라는 뜻이되는 바, [每(매)]는 [아이를 낳는 어미]
의 뜻으로서 [사람이 불어난다]는 뜻으로 쓰였던 글자이다. 즉 [햇님의 아이를 낳아 부풀리는 것]
이 [每]라는 글자의 속뜻인 것이다. 여기에 다시 물을 뜻하는 삼수변을 덧붙인 것은 [해(日) 무리
(衆)]의 뜻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결국 [바다]는 [햇 달], 즉 [햇님 땅님]이라는 뜻이다.
[바다]가 해와 달의 합일체라는 사실은 [白]에 대한 <강희자전>의 풀이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자전>에서 [白道謂明道也(백도는 명도라 한다)]라고 하여, [바다]와 연결가능한 [백도]와 [밝도]의
두 가지 발음을 제시하고 있다.
<자전>이 제시하는 이 [백도]의 뜻을 정리해보면, [백도]는 그림을 그리는 일, 혹은 백정(白丁)과
같이 실제로 동물을 해체하거나 술을 빚는 일 등과 관련되며, 이런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흰옷을
걸치고 띠(茅)로 덮은 초가에서 살았으며, 이들을 가리켜 [백민(白民)] . [백도(白徒)]라 했다고 한다.
이 모든 일들이 동이들이 직능에 포함된다.
바다의 뜻을 [햇 달]까지만 추적해내면, 그 다음에는 [바다]와 보다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단어를
찾아낼수 있으니, 그 단어가 바로 [밭(田)]이다. 글자 모양을 보면 알수 있듯이 [田(전)]은 곧
[피라밋]을 나타내는 [古]의 변형이다.
[밭]의 고어는 [받]이 되는데, 이 말은 수메르어 [바드(BAD)]와 곧바로 연결된다. 즉 5,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말인 것이다. [받]은 동이들의 터전이다. [받]에 살던 [이(夷)]는 [받이]이다. 이 말은
그대로 영어에서 [몸]을 뜻하는 [바디(body)]와 연결된다. 이 사실은 동이들의 중심 역할이 [몸받이]
였던 사실과 직결된다. [씨내리]와 [씨받이]가 동이들의 역할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런 견해가
올바른 것임을 쉽게 알수 있다.
여기서의 [씨받이]가 바로 바다와 연결되는 것은 [씨]가 [sea(바다)]와 [seed(씨)]의 두가지
단어와 연결되는 점만 보더라도 확실하다. [씨]는 [알]과 함께 쓰여 [씨알]이 되는데, 이 말을 고상한
쪽으로 풀면 씨실(가로 줄)과 날실(세로 줄)이 되어, 베(布)나 그물(網)을 짜내게 된다.
여기서 날실은 일(日)줄로서 해실(日絲)이 되고, 씨실은 지실(祇絲)로서 [달(月.地) 줄(絲)]의 뜻이
된다. [祇]는 중국음이 [지(zhi)]이고, 땅귀신의 뜻으로 귀(鬼)나 제(帝)와 같은 뜻이며, 여기서 보일
시변(示)이 떨어져 나가면 씨(氏)가 되어 혈통을 나타낸다.
그런데 풍류의 실상을 밝히려면 여기서 한단계 더 들어가서 육두문자를 구사해야 한다. 육두문자
(肉頭文字)란 골머리(骨頭)에 대응하는 말인 살머리(肉頭) 또는 샅머리, 즉 좇대가리에 대한 말을
일컫는다. 해는 남성을 상징하고, 땅은 여성을 상징한다. [날] . [일(日)] . [알]은 남성의 상징으로서
육두문자에서는 [불알], 유식한 말로는 [고환(睾丸)]이 된다. 이것이 [씨알]에서의 [알]의 정체이다.
그러면 [씨]의 정체는 저절로 드러난다. [씨입(씹 . 씨집)]속에 숨어서 [불알]을 키워 아이로 만들어
내는 땅귀신, <노자>에서 말하는 [곡신(谷神)]이 바로[씨(氏)]인 것이다.
이제 [바다]를 [받 . 밭 . 박달 . 밝땅 . 십토(十土; 씹터)] 등의 말로 나타내어도 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박용숙 선생이 단군을 바다의 신 포세이돈으로 본 것이 결코
억지주장이 아님을 알게된다. 그리고 이 바다의 중심기능이 씨받이(씨밭)나 몸받이(body)인 사실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바다]는 우물이라 불리웠으니, 우물 정(井)자가 두 개의 열 십(十)자로 만들어진 사실도 또한
씨받이와 깊은 관련이 있다. 지금 쓰이는 열 십(十)자는 고대에는 일곱 칠(七)자 였다. 박용숙 선생의
인체수리에 따르면, 七(칠)은 성기의 부호이다. 두 개의 성기가 만나는 것은 바로 성교(性交)이고,
[씹]은 뒤에서 설명될 신정(神政)의 핵심요소이기 때문이다.
[바다]는 우물이므로 당연히 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바다]에서 파생되는 첫째 개념은
[바닷물]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닷물]의 뜻을 밝혀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2) 삼성수(三聖水)
[바다]는 신전이라는 성격 때문에 외부세계와 격리되어 있었다. 여기서 바다의 새로운 개념이
파생되었으니, [밧 따] 즉 [바깥의 땅]이 그것이다. 동이의 신전인 삼신산은 지금도 풍수지리의
기본원칙으로 지켜지는 배산임수, 즉 앞은 물이 두르고 뒤에는 산이 감싸주는 지형조건을 선택하여
건설되었을 것이다.
이런 추측은 [아사달]이라는 이름이 [물가의 비탈 언덕]을 의미하는 것과, 아사달이 단순한 종교적
신전의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도읍의 역할을 겸했기 때문에 반드시 군사적 수비문제를
고려해야 했던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다.
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원형은 바다나 호수 속의 섬이었을 수도 있다. 이와같은 생각은 신전의
주인인 용왕의 처소가 [못(澤)]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아주 높아진다. 그러나 이런 부분
들은 여기서 논의할 일이 아니라 고고학의 발굴성과를 기다릴 일이다.
여기서 배산임수를 끌어들인 이유는 이 산과 물에 의해 신전과 바깥 세상이 격리되었던 사실을
중시한 것이다. 신전의 사람들은 이 물의 바깥세상을 [밧따(밖땅)]라 불렀을 것이고, 속세의 사람
들은 신전의 사람들을 [바닷] 사람들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바닷속]이라고 할 때에는 신전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밧따] 사람들에게는 신전을
감싼 물은 자기들의 땅에의해 둘러싸여 있으므로 신전이 바닷속이 되고, [바닷] 사람들에게는
자기들의 신전이 [바다]의 원형이므로 안(內)에 있고, 속세인들은 [밧]에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신전을 감싼 물을 [바닷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바닷물은 처음에는 신전(바다)을
속세와 격리시키는 역할을 하는 물이었다. 땅은 바닷물에 의해 [안땅(內地)]과 [밧땅(外地)]으로
구별되었으며, 이 두 땅을 이어준 것이 [달 닛]으로서 지금 우리가 [다리(橋)]라고 부르는 것일
것이다. 이렇게 물로 에워싸인 바다는 또 세가지 종류의 물로 구성된다. 그런데 바다는 신전으로서
성지(聖地)이므로, 바다의 물은 성수(聖水)이다. 따라서 바닷물이 세가지라면[삼성수(三聖水)]라고
부를수 있다.
삼성수의 첫째는 [바다]와 [밧따(외부세계)]를 구별하는 바닷물이요, 둘째는 그 바닷물과 우물을
이어주는 시냇물(蓋川)이요, 셋째는 신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지황의 거처인 우물물이다.
바닷물은 이미 설명하였으니 시냇물을 살펴보자면, 가장 먼저 [시내수(市內水)]의 뜻을 찾을 수
있다. [시(市)]는 물론 [신시(神市)]가 된다. 신시의 안을 흐르는 물이 시냇물인 것이다. 이 시냇물은
실제로는 물이 흐르는 길, 즉 [물길(水路)]이었다.
시냇물이나 물길이나 지금은 똑같은 말이지만, [물]이 [무리(衆)]와 [마리(머리)]를 뜻한다는
사실을 알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신전에 살던 신들이 다니는 [신도(神道)]가 바로 [물길]이었고,
삼한의 강역내에 있었다는 [물길(勿吉)]이나 [말갈(靺鞨)]은 바로 이 신의 길이었던 것이다.
이 물길은 신성한 권위를 보호하기 위해 일반인들의 눈길이 닿지 않도록 은폐되었는데, 고분이나
고대신전에서 자주 발견되는 비밀통로, 즉 [밀도(密道)]가 바로 이 물길이었다. 앞의 [천축]에 대한
해설에서 인용된 <산해경 . 해내경>을 다시한번 살펴보자.
東海 안, 北海의 구석에 나라가 있는데 이름은 朝鮮이며 天毒(天竺)에 해당된다. 이 나라의 사람들은
물 속에 사는데 거기에는 畏人, 愛人이 있다. 西海 안, 流沙의 가운데 나라가 있는데 이름은 壑市.
西海 안, 流沙의 서쪽에 나라가 있는데 이름은 氾葉. 流沙의 서쪽에 鳥山이라는 것이 있는데, 세개의
냇물(川)이 여기에서 흘러내린다.
여기에 나타나는 [세개의 냇물(三川)]을 박용숙 선생은 <삼국유사>의 내용과 관련시켜 살피고 있다.
그렇다면 경주(慶州)에 있어서 용궁은 구체적으로 어디일까. 물론 그것은 코에 해당하는 남산(南山)
을 중심해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선 남산의 남쪽에 있는 천룡사(天龍寺)에 주목하게 된다.
<삼국유사 . 천룡사조>의 문장을 검토해 보자
"동도(東都)의 남산 남쪽에 한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데, 향속(鄕俗)에서는 고위산(高位山)이라고
한다. 산의 남쪽에 절이 있으니, 향간 속칭에는 고사(高寺) 혹은 천룡사라고 한다. <토론삼한집
(討論三韓集)>에 이르기를 '계림 땅에 객수(客水) 두줄기와 역수(逆水) 한줄기가 있는데, 그 역수와
객수의 두 근원이 천재(天災)를 진압하지 못하면 천룡사가 뒤집혀 가라앉는 재앙을 이루게 된다 ......."
여기에서 보이는 고위산이란 지금 남산 남쪽에 솟아있는 금오산(金鰲山)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점은 역수와 객수가 모두 천룡사에서 흘러나온다는 사실인데, 이점은 조금전에 <산해경 . 해내경>에서 인용했던 문장에도 보이는 구절이다. 즉 조산(鳥山)에서 세 개의 냇물이 흘러내린다는
구절이다. ...... 그렇다면 이때의 세줄기 물이란 무엇인가? 즉, 두줄기의 객수와 한줄기의 역수가
천룡사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그것은 곧 코와 입 사이의 두줄기
인중(人中)을 뜻한다.
즉, 두줄기 인중은 코에서 음기와 양기가 흘러내려와 입으로 들어가는 길(통로)이다. 따라서 여기
에서 말하는 역수란 곧 입에서 코로 올라가는 길, 즉 통로를 가리킨다. 이를테면 객수가 위에서
내려오는 강신(降神)의 통로라면, 역수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천자의 통로인 것이다.
경주 남산은 양쪽 옆으로부터 북쪽을 향해 물이 흘러내린다. 동쪽에서 흘러내리는 문천(汶川)은
반월성(半月城) 앞을 통과하여, 서천(西川)인 모량천(毛良川)과 합류하여 서천의 본줄기를 이루고
있다. 뿐만아니라 경주 시내의 동북쪽에서 다시 북천이 흘러내려서, 문천과 수평선을 그으며 서천과
합류하게 된다. 따라서 입에 해당하는 지역은 반월성, 안압지(雁鴨池), 황룡사, 분황사, 첨성대,
석성지(石城祉), 계림(鷄林) 등의 고적지가 있는 구역인데, 이들은 모두 물 속에 갇혀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서 이런 건축물들은 계획적으로 물가에 지었다는 결론을 얻게된다. ......
그런데 경주의 문천에는 역수에 관한 전설이 전해져 있다. 이를테면 문천에는 물은 흘러내리지만,
반대로 모래는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다. 이점은 <산해경 . 해내경>에서 인용된 문장 속의 유사
(流沙)라는 문구와 일치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때의 유사, 즉 역수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앞에서도 지적한 바지만,
그것은 천계에서 지계로 올라가는 길이다. 따라서 문천은 곧 통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천로
(天路)의 상징이다. 실제로 옛날에 문천은 포항에까지 연결되어서 임금이 배를 타고 그곳으로 왕래
했다는 전설이 있다. 물이 흘러내리는 것이므로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기는 힘들다. 이는 문천이
곧 통로가 아니라, 그러한 천로가 문천을 끼고 올라간다는 것을 뜻한다.
신라시대에는 안압지 일대에서 불국사로 가는 길은 비 한방울 맞지 않고 갈수 있었다고 한다. ......
<사기 . 진시황 본기>에는 시황(始皇)이 천하를 평정하고 조궁(朝宮)을 짓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보인다.
"조궁을 위수의 남쪽 상림원 속에 조영(造營)하였다. ...... 주위에는 건너는 낭하(廊下)로 둘러치고,
궁전 밑으로는 낭하 채로 남산으로 갈 수 있었다. ...... " 위 문장은 천로가 낭하로 이어졌음을 암시
하고 있다.
이 낭하로 된 길인 천로가 복도(復道) 또는 갱도(坑道), 즉 지붕을 덮어 은폐한 도로임을 알수 있다.
그것을 시냇물이라 불렀으니, 이것이 바로 [강물(江水)] 또는 [개천(蓋川)]이 된다. 강물의 [江]은
물이 흐르는 구멍(工)을 나타내는 글자이다.
즉 구멍속을 흐르는 물을 뜻하는 [갱물(坑水)이 강(江)의 실제 뜻이 되는 셈인데, 이 [강]은 지붕을
덮어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 만들었던 고대신전의 비밀통로였던 것이다.
미천한 신분의 사람이 갑자기 출세한 것을 묘사하는 속담인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은 이 개천(蓋川)
에서 용왕이 바깥 세상으로 나오던 풍습에서 유래한 말이다. 용왕이 밖에 나올때는 평복을 입고
변장하여 민정(民情)을 살폈던 것이니,암행어사의 유래도 이 [개천에서 용나기]에서 찾아진다.
바닷물에서 개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샘물에 닿게된다. 이 샘물이 삼성수의 세 번째이면서
가장 고귀한 물인 우물(井)이다. 우물은 웃물(上水), 안물(內水), 암물(雌水)로 풀이된다. 샘 천(泉)
자는 달(月)의 모습을 나타내는 백(白)과 물(水)을 합친 글자로서, [泉(천)]은 달물(月水)의 뜻을
나타내는 글자이고, 이 [달물]이 지황의 상징임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햇님과 달님이 [바다]를 통해 합일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한 셈이 된다. 달(月)의
옛말은 [볼]이었다고 한다. [보름달]에서의 <보름→볼>이 [달]의 뜻이었다고 하는데, 이 [볼]이
[白]을 통해 [밝], [해], [맏] 등의 뜻과 연결되는 다리 역할을 해 주므로서, 일월(日月)이 합쳐져서
[밝달]이 되는 원리를 해명해 주는 것이다.
삼성수의 또 다른 측면은 [바다]의 구성원들이 모두 [물이]로 불리웠던 점에 있으니, [성수(聖水)]
가 성스러운 사람(聖人)의 뜻으로도 쓰였다는 것이다.
먼저 우물의 사람들은 [물이(水人 정확히는 水夷)]로 불린다. 다음으로 [바다]가 삼신산이었으므로,
[산이(山人 또는 山夷)]라는 이름이 나온다. 산(山)의 순 우리말이 [뫼(메)]이므로 [뫼이]라는
이름이 있을 수 있는데, 이 이름이 [무리]가 된 것 같다.
무리 중(衆)자는 [해(日) 밑에 나란히 선 세사람]의 모습인데, 고대에 [산(山)]과 [화(火)]의 글자
모양이 구별하기 어려웠던 사실을 생각하면 이들은 [산이], [뫼이], [불이]등으로 불리웠을 것이다.
그러다가 삼신산의 이름이 바다로 굳어진 후에는 [물이]라는 이름에 동화되어 [무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무리 중(衆)]이라는 새김의 유래라고 생각된다.
[물이]의 마지막은 [머리]이다. [머리]는 [맏이(伯夷)]에서 바뀐 것으로 볼수 있다. [맏이(伯夷)]가
[밝이], [볼이(月夷)]등으로 바뀔 수 있음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머리]는 [맏이]의
뜻이 마지막으로 정착한 형태로 지금까지 쓰이는 것이라 하겠다.
이상의 세종류의 [물(水)]과 [무리(물이)]가 다른 특별한 도학적 . 역사적 의미가 없다고 할지라도,
한가지 사실은 분명히 증명해 준다. 그것은 동이족의 성지가 [바다]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던 적이
있었고, 지금도 한겨레가 물을 신성시하는 심층의식은 그때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바다]에 대해 한가지 빠뜨릴수 없는 내용이 더 있으니, 그것은 삼신산이 바다로 불리던 당시까지만
해도, [물(水)]과 [뭍(陸)]이 같은 뜻으로 쓰였다는 점이다. 이 두 말이 언제 분화되었는지는 확실
하지 않으나, 땅(地)과 물(水)이 모두 음성(陰性)으로서 지황(地皇)의 관할에 속했었던 사실은 거의
확실하다. 그 시기는 [땅]과 [달(月; 물)]과 [딸]이 모두 [달]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때일 것이며,
고모(姑母; 坤母)가 모든 영토권을 장악하고 있던 환웅의 치세였을 것이다.
이때에 [무당]이란 이름의 원형이 나타났을 것이다. 물과 뭍을 동시에 다스리던 천제(天帝)의
칭호가 [물한(水王)]과 [뭍한(地王)]과 [뭇한(衆王)]을 모두 뜻하는 [물한]에서 나오고, 후세에
무당으로 변하게된 [말한(馬韓)], [모한(母韓 . 牟韓)], [무함(巫咸)] 등이 나왔을 가능성은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고 보여진다.
용이나 뱀에 대한 동서양의 정서는 정반대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동양의 경우에는 태고시대 최초의
성인으로 추앙되는 복희씨가 뱀의 몸통을 지닌 사람으로 묘사되고, 신전이나 왕궁의 지붕에는 예외
없이 용이 그려질 뿐만 아니라, 제왕은 반드시 용으로 자신의 상징을 삼았다.
또 동양의 삼대종교를 살펴보더라도, 불교에서는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뱀이 깨달음의 상징으로
신성시되었고, 도교의 경우에도 수련의 최종단계에 가면 적사귀신(赤蛇歸神)이라 하여, 단광(丹光)이
뱀이 몸을 사리고 있는 듯한 형태로 수련자에게 빛을 비추다가, 돌연 움직이기 시작하여 정수리에
이르면 붉은 뱀 형태로 변해 몸 속으로 들어가서, 몸 속의 이곳 저곳을 빠짐없이 돌아다닌다고 한다.
유교는 태호복희를 조종(祖宗)으로 하는가르침을 내세우는 만큼, 더 거론할 필요도 없다.
이런 사례들은 동양에서 용이나 뱀이 지혜와 권능의 상징으로 이해된 친근한 동물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서양에서는 용이나 뱀이 죄와 악 그 자체의 상징이다. 이스라엘의 민족종교인 유대교
에서 갈라져나와 훗날 서양의 대표적 종교가 된 그리스도교의 <성서>에는 뱀이 모든 죄와 악의
시원인 사탄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중세 교황청의 지배를 받게된 봉건영주의
기사들은 용을 죽이는 것을 최대 최고의 영예로 생각했었다.
<그리이스 . 로마 신화>에는 많은 괴물이 나오지만 가장 끔찍한 괴물은 페르세우스에게 머리를 잘려
죽은 메두사인데, 메두사의 머리카락은 뱀으로 되어있다(이 뱀이 무당의 상징인 트레머리였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와 같이 상반된 정서의 밑바닥에는 어떤 역사적 사실이 숨어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특정사물에 대한 호감이나 혐오감이 형성되는 데에는, 장기간에 걸친 감정의 축적
이나 의도적이고 집중적인 교육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서양이 뱀이나 용에대해 뿌리깊은 악감을 가지게 된데에는, 용이나 뱀을 상징으로 삼는
집단들과의 오랜 투쟁이 그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집단들은 동양에서 건너간 무당들, 즉
동이족의 성직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상징으로 삼았던 용과 뱀은 우루보로스라고 불리는,
<천부경>의 진리를 원과 세모꼴로 형상화한 것이었다.
이들의 엄청난 능력과 급속한 확산력은 당시 미개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서양세계를 급속도로
잠식하였고, 특히 일종의 혼혈정책인 동이족의 신정은 그들에게 혈통단절의 위기감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배세력들은 목숨을 건 전쟁을 통해 그들을 몰아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후 동이족이 다시는 발붙일 수 없도록 내부적 결속을 강화하는 한편, 동이족의 후예인 마술사들을
색출하여 제거하기 위해 용사냥과 뱀(마녀)사냥에 열을 올렸던 것이다.
이와 반대로 동양에서 용이 천지조화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군왕의 상징으로 묘사되는
것은, 동이족들의 본고장이 동양의 고산지대에 속하는만큼 동이족의 지배에 거부감을 느낄 이유가
적었고, 그들의 지도를 받아들여 많은 혜택을 입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지금까지는 용과 뱀을 구별하지 않고 동이족의 상징이라는 측면에서만 생각하였으나, 실제로는
용과 뱀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점이 있었다. 그 차이점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뱀 중에서 특별한 종류가 용으로 구별되었다는 것이다.
뱀은 지혜와 의술의 상징이었다. <성서>에서도 뱀이 이브와 아담에게 해준 일은 지혜의 눈을 뜨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천부경>의 입장에서 볼때에도 뱀은 소와 대비되는 형이하학적 측면의 상징
으로서 밑변삼각형(△)으로 표시된다. 그런데 뱀은 지구상의 어떤 곳에서나 흔히 볼수 있는 동물로서, 신비성을 부여받을 여지가 거의 없다.
그러나 용은 우선 생김새부터 뱀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용의 생김새는 "소머리(혹은 말머리 .
양자악 머리 . 물고기와 코끼리의 혼합된 머리 . 악어와 호랑이의 혼합형 . 뱀머리 등등) . 코끼리 코 .
사슴 뿔 . 말갈기 . 뱀 몸체(비늘달린 몸) . 악어가시 . 물고기 꼬리 . 매 발톱 . 악어 발의 형상을
골고루 가지고 있다.
용의 이와 같은 모습에 대해, 일반적으로는 우리의 국어사전에 나오는 것처럼, 여러 가지 상서로운
동물들의 신체적 특징을 혼합해서 만들어낸 상상의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이와같은 관점에 대해 중국의 왕대유는 <용봉문화원류>에서, 용의 정체가 당(唐)나라 이전까지
양자강 유역에 살았던 악어의 일종인 만악(灣鰐) 또는 만악과 비슷한 양자악(揚子鰐)이라고 한다.
이 두가지 악어류는 크고 깊은 연못이나 큰강, 바다 속에서 생활하며, 비가 오기전에 울부짖는
습성이 있었고, 그들의 습성을 신성시한 태호족에 의해 토템으로 숭배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신은 <신의 기원>에서 고대 문헌들에 묘사된 용의 여러 특성들이 자연현상을 활물화하여
만들어진 상징이라고 주장하면서, 용의 정체는 구름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오늘 날의 위성사진에
찍혀 나오는 구름의 형상은 용의 모습으로 보기에 아무 문제가 없다. 그리고 이런 연구결과들은 용을
미개한 고대인들이 꾸며낸 괴물로 치부해버리는 주장들에 비해 학문적으로 우수하고 올바른 학설
들이라 하겠다.
글쓴이는 용을 종족의 표지로 삼았던 복희족에 의해 역리법칙이 처음으로 체계화된 사실을 근거로
용을 천문(天文), 즉 은하수를 몸통으로 하고 별자리를 비늘로 하는 밤하늘의 모습으로 해석하였다.
위의 여러 내용들을 종합하면 용은 단순한 가공의 동물이 아니라, 일기예보를 해주므로써 고대인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실존동물이 모델이 되어 토템으로 신성시되고, 그 토템을 종족의 상징
으로 삼은 복희족의 현인들이 찾아낸 자연법칙을 의상으로 걸친 일종의 그림경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렇게 자라난 용은 [큰 물에 사는 신령스런 짐승으로서, 일월성신의 운행법도와 풍운우로의 변화
양상을 알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천지조화의 능력까지 가지게된 종족의 표상]이라고 할수 있다. 이는
뱀이 표상하는 삼한의 진리와, 그 인체적용(人體適用)인 의술과 연금술을 터득한 것은 물론이요,
한걸음 더 나아가 천지조화 까지 행사할 수 있는 큰 무당(대도술가)들이 용으로 표현되었다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또 한가지 빠뜨릴 수 없는 사실이 있으니, 용의 형상에는 소의 모습이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용의 모습에서 소머리와 사슴뿔은 <천부경>의 형이상학적 측면을 나타내는 상징이라는
사실은 이미 소개된 바와 같다. 따라서 용은 소나 뱀이 각기 떨어져 있을 때에는 상징할 수 없었던
천지합덕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이점은 또 완성된 진리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고대의 신상이 신체의 각 부위가 고유의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는 점과 관계된다. 고대의 신상은 단순한 예배대상이 아니라, 머리 . 몸통 .
수족이 각기 귀족 . 평민 . 노예의 신분을 상징하고, 머리의 눈 . 코 . 입 . 귀나 몸통의 오장육부,
수족의 손가락과 발가락등이 모두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등, 일종의 법전(法典)과 같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용과 뱀의 가장 큰 차이는, 뱀에게는 뿔로 상징되는 중앙신전과 다리로 상징되는 지부(支部)
또는 속국(屬國)이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용은 제왕의 상징으로 쓰였지만 뱀은 무당의 상징으로
쓰였던 것이다. 따라서 뱀이 오래 묵으면 용이 되는 것이 아니라, 뱀이 지부신전을 거느리게 되므
로써 다리가 생긴 이룡이 되는 것이고, 뿔이 있는 규룡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으며 그곳이 [진한]
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박용숙 선생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고대사회의 핵심을 올바로 지적한 것이된다.
바다가 세계를 지배하는 심장부가 되고, 세계를 대리 통치하는 나라나 왕(소단위 신정구역과 신관)
은 하천으로 비유된다. 동이들이 나라를 강에다 의존하여 세운다고 한 것도 그런 뜻이다. 산은 신전의 대명사이다.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대리자가 있는 나라에는 신전이 있게 되므로, 무당이 반드시
배치된다. 신채호에 따르면 그것은 [신소도(臣蘇塗)]와 [소도]의 관계가 된다. 신소도는 대신단
(大神壇)(중심)이고 소도는 소신단이다. 대신단이 바다의 용궁 속에 있는 신전이고, 작은 소도가
소국을 지배하는 작은 왕국의 신전이며, 오늘날 무당의 당집(서낭당)이 그런 제도의 유물임을 알수
있다. 그런데 신채호는 [소도의 무당(日官)이 왕의 정사에 관여하고, 그 비위사실들을 상제께 보고
한다]고 썼다. 이점은 티벳의 밀교제도나 중세 카톨릭의 신정체제에서도 볼 수 있으며, 결국 교황청
에서 파견한 신부들이 그들의 교구에 나가 그랬던 것처럼, 바다에서 위임된 무당들은 열국으로
흩어져서 왕들의 정사를 감독하는 기능을 맡았음을 의미한다.
<규원사화>가 [상계에 일대 주신(환인)이 있어, 그가 형체를 드러내지 않고 슬하의 무수한 소신
(小神)들을 시켜서 세계를 다스린다]고 했고, [단군시대에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서 대국을 아홉,
소국을 열두나라로 나누어서 다스렸다]고 쓴 것은 이점을 암시하고 있다.
이때의 소신들이 무당들이라는 것은 오늘날의 무당이 걸치는 특이한 의상이나 신사(神事)의 여러
내용으로 미루어 알수 있고, 또 주목할 점이다.
오늘날의 무당은 교황청이 없는 카톨릭의 신부처럼 종교의 나라(용궁)를 잃어버린 성직자의 후예
들로 이해되며, 따라서 그들은 체제를 상실한 성직자로서 품위와 그 본질적인 능력을 잃은 한낱
괴이한 기능공이 되었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샤만과 신부의 지위가 별반 다를 것이 없으며,
샤만을 폐쇄적인 성직자로 규정한다거나 또는 신부를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지는 열려진 성직자로
특별하게 규정하는 따위의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4) 용궁과 용왕
옛부터 동서양 각지에는 용궁과 관계된 전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효녀 심청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선원들에게 몸을 팔아, 수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한 제물이 되어 인당수 깊은 물에
뛰어 들었으나, 그 효심에 감동한 용왕의 구조를 받아 극진한 예우를 받은 다음 연꽃을 타고 나와
왕궁으로 들어가서 왕비가 되고, 왕에게 청하여 맹인잔치를 열게하여 결국 아버지를 만나서 눈을
뜨게 한다는 <심청전>의 이야기, 용왕이 불치병에 걸려 뭍에 있는 토끼의 간을 구해 먹으면 낫는
다는 의원의 말을 듣고 자라를 시켜 토끼를 꾀어 잡아왔으나, 간을 떼어서 깨끗이 씻어 나무에
걸어놓고 왔다는 토끼의 거짓말에 넘어가 살려주었다는 <별주부전>, 도술을 배운 돌원숭이
손오공이 용궁에 들어가서 여의봉을 훔쳐 하늘나라를 어지럽히다가 부처에게 벌을 받는 <서유기의
이야기, 용왕의 딸인 인어공주가 땅위의 왕자를 사랑하여 자기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마녀에게 주고
걸을때마다 고통을 주는 두 다리를 얻어 왕자를 만났으나 자기 마음을 전하지 못하여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는 <인어공주> 이야기 등은 누구나 어릴 때 한 번씩 듣고 자라는 용궁이야기 이다.
이런 이야기에 등장하는 용궁은 주로 강물이나 바닷물 속 깊은 곳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용궁의 탐사는 물속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이 물이나 바다가 물분자(H2O)의 집단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된 [바다]의 [물]임을 이제는 알수 있을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용궁이나 용왕을 전적으로 꾸며낸 이야기로만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용궁이나 용왕은, 정사(正史)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삼국유사>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실존인물과 건축물의이름이다.
서양의 경우에도 그 초상화가 벽화로 생생히 그려져 전하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바로 용왕이었다.
그러나 용왕과 용궁에 대한 직접적인 단서는 중국의 황궁과, 동양 여러나라의 사찰에서 찾아진다.
중국의 황제는 [용(龍)]으로 상징되어, 용상(龍床)에 앉아 용포(龍袍)를 입고 용안(龍顔)을 자랑
하였다. 그리고 지금도 사찰에 가서 보면 대웅전의 용마루와 처마 끝에 조각된 용의 모습을 누구나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용궁은 절(寺)이나 왕궁이었고, 용왕은 황제나 부처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용왕은 분명히 부처는 아니고, 불교에 우호적이기도 하고
적대적이기도 했던 독자적인 세력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들이 토착적인 종교세력임은 박용숙
선생이나 서윤길 박사 등이 이미 밝힌 바 있고, 그 토착종교가 최치원 선생이 말한 풍류임은
대웅전이 환웅전이라는 사실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중국의 황실도 앞에서 밝힌대로 편법이라 할지라도 환웅과 단군의 계보를 이은 정치세력인 만큼,
용궁이 풍류의 신전이란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겠다. 그리고 중국황실의 절대적 권위 아래
에서 황제의 상징인 용이 사찰건축에 쓰일 수 있었던 것은 풍류신전의 권위가 제실(帝室)의 권위와
대등한 것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앞에서 말한바 있는 동이의 [천상천]으로서의 위상을 증명
해주는 근거가 된다.
이런 사실을 알면 용궁을 소재로 한 옛날 이야기들의 용도는 쉽게 알수 있다. 그 이야기들은 용왕
(무당)이 다스리던 도덕정치 시대에 용궁에 들어가려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가르치기 위한
교과서인 동시에, 속세의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한 경전이었던 것이다.
<심청전>은 효도와 신앙을, <별주부전>은 지모와 충성을, <세가지 소원>은 잉어같은 물고기
까지도 사랑하는 생명존중의 덕목을 가르치고 있다. <인어공주>는 학업을 중도포기하고 세속의
사랑과 부귀에 눈이 멀었던 여학생의 비극적 종말을 다룬 것이니, 면학을 장려하기 위한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그 이면에 숨어있는 상징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 풍류의 실상을 밝히는데 큰
도움을 받을 수도 있는 소재들이다. <심청전>의 경우, 스토리의 전개과정이 도가에서 전해지는
운기행공법(運氣行功法)과 일치한다는 해설도 본적이 있다.
5) 망수행주와 가마
망수행주(罔水行舟)는 <서경 . 익직(益稷)편>에 나오는 말로서, 육지행주(陸地行舟)라고도 하는데,
물이 없는 곳에서 배를 밀고 돌아다닌다는 뜻이다.
이 말의 유래는 상고시대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알려진 요임금이 그 아들 단주에게 왕위를 전하지
않고, 순임금에게 왕위를 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거론되는, 단주의 방탕한 행적 중의 하나이다.
망수행주의 기록은 노아의 방주와 함께 배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의 하나이다. 노아의 홍수와
요순 시대의 홍수가 비슷한 시대의 것이라는 추측도 있는만큼, 어쩌면 이 둘 사이에는 모종의
관련성이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해당 기록을 살펴보면, 요임금이 자신의 윤자(胤子)인 단주(丹朱)가 임금의 자리를 물려
받을 수 없는 이유로서 "밤낮없이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만 하고, 물없는 곳에 배를 밀고 다니며,
집에서는 친구들과 함께 술만 마신다(罔晝夜額額 罔水行舟 朋飮于家)"는 행패를 내세운다.
그런데 우리는 앞에서 요순의 시대가 [삼한]의 상쟁시대였음을 살펴본 적이 있다. 그리고 이런
시대의 역사기록은 흔히 이긴 자를 옹호하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망수행주에 대한 평가도 그런 논리의 하나이다. 이점은 망수행주의 참뜻을 밝혀내면 알수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서 나오는 배가 어떤 것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우리는 앞에서 동이의 신전이 바다로 불리웠고, 바닷물 . 강물 . 냇물 . 우물물 등이 실제로는 신전
속의 땅과 길과 건물 등을 상징하는 말임을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망수행주에서의 물도 길이나
건물로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망수행주의 시대배경과 무대가 삼한 정립시기의 동이신전인 바다
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배(舟)에 대한 해석도 육지의 운송수단의 일종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배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을까? 박용숙 선생은 이 배가 바로 가마(乘轎)임을 <삼국유사 .
가락국기> 해설에서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 기사(記事)에서 주(舟)라 함은 곧 가마를 가리키며, 또 주사(舟師)라 함은 가마꾼을,
그리고 섬(島)은 정자(亭子)를 뜻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해서 주(舟)는 신들만이 타는 날개(태양)
이다. 왜냐하면 신은 걷는 것이 아니라, 새처럼 날거나 혹은 구름처럼 떠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디온은 "신화시대의 배는 천상의 바다를, 그리고 마차(馬車)는 천상의 초지(草地)를
횡단하는 수단인 동시에 그 자체가 태양"이라 하였다. 미하일로브스키에 의하면 시베리아 . 몽고
일대의 샤만은 천상에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에는 반드시 작은 배(小舟)를 타고 작은 개천을 통해
내려오는 것이라 믿는다. 이때의 작은 개천이란 물론 천도(天道), 즉 신들이 하강할 때 다니는 길을
뜻한다.
또 엘리아데에 의하면, 폴리네시아 섬의 제의에서는 하나의 의례로서 보우트(小舟)를 수선하는데,
그것은 수리가 목적이 아니라 신을 맞이하는 종교적 행사(imitatio dei)라는 것이다. 우리들의 궁중무
(宮中舞)에서도 유선악(遊船樂)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춤은 한척의 배를 가운데 두고 돌아가면서
군무(群舞)를 벌인다. 또 용왕굿에서는 작은 모형선(模型船)을 만들어서 걸고 이에 절한다. 그러므로
배가 신(神)과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삼국유사 . 가락국기> 중의 초반부가 소개되고) 이렇게 해서 구간(九干)들과 나라 사람들이 모두
즐겁게 춤을 추니까 급기야 천(天)에서 금상자(金合子)에 든 동자(童子)를 보내온다. 물론 그 금상자
속에는 여섯 개의 황금알이 들어있다. 그것이 곧 왕자의 신분이나 권위를 상징하는 신표, 이른바
천부인(天符印)이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 어쨌든 우리는 이 문장에서 강신제(降神祭)
가 먼저 일자(日者)인 무당에 의해 시작됨을 확인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때의 강신이 동명왕
(東明王)의 경우에는 모체(유화부인)가 직접 내려오고, 금와(金蛙)의 경우에는 여승원(女僧院)에서
갓난아기로, 그리고 수로의 경우에는 젊은 승(僧 ;동자)이 직접 가마(금합자)를 타고 내려옴을 보게
된다.
이제 망수행주에 등장하는 [배(舟)]가 실제로는 가마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이 망수행주
라는 구절도 새롭게 해석되어야 하는데, 여기에도 두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그 첫째는 기존의
해석대로 땅위로 배라고 불리우는 가마를 타고 돌아다녔다는 뜻이 된다. 둘째로는 물이 신전을 뜻
하므로 [신전 밖에서 가마를 타고 돌아다녔다]는 뜻이다.
이 두 해석은 중대한 의미차이를 내포하고 있다. 첫 번째 해석을 취하는 경우에는 단주를 배제하고
통치권을 장악한 세력(순임금)이 풍류의 제도를 완전히 부정했다는 뜻이 된다. 신전에서 배를 타고
다니면서 공부하는 풍습이 악(惡)으로 간주되고 배척되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신전에서 배를 타고 돌아 다니는 것은 삼신산인 바다가 다섯 구역으로 나뉘고, 중앙의 용궁을 제외한 네 구역을 사해(四海)로 불렀던 사실과 관계가 있으며, 이 사해유람(四海遊覽)을 거친 사람만이 사람
(四覽)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곧 왕이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수행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해유람(수학여행)을 삼대악행의 하나로 거론했다는 것은 풍류의 제도를 완전히 부정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번째 해석을 취한다면 처음의 경우와 이야기가 달라진다. 물이 없는 곳에서 배를 타고 다녔다는
것은 신전 밖으로 배를 타고 돌아다녔다는 말이 되고, 이는 신으로서의 품위를 지키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을 아내로 취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때에는 단주가 풍류의 제도에 반기를 든 셈이 된다.
그런데 <서경>의 기록은 "단주가 밤낮없이 친구들과 어울려 술마시고 놀기만 했다"고 했으니,
둘째 해석을 적용할 수 없게 한다. 단주가 했던 일은 동이들의 풍습에 충실했던 올바른 제왕수업
(帝王修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경>의 기록은 풍류의 풍습을 부정하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 순임금이 중국 역사상 최초로 부계(父系) 왕권을 확립한 인물이었다는 하신의 주장을 고려
하면, 중국의 역대왕실에서 단주를 매도하는 이유가 밝혀진다. 그들이 미워하는 것은 단주의 방탕함
이 아니라, 동이족의 신정체제였던 것이다. 따라서 요순의 왕위선양은 동이족의 종주권을 부정당한
최초의 역사적 사건이었던 셈이다. 그들이 신정(神政)을 부정했던 이유는 다음 장에서 밝혀질 것이다.
(향일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