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결혼문화도 바뀌어야 한다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김정수
장례문화나, 결혼문화가 하루 빨리 바뀌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과거로 돌아가 보자. 혼사를 앞둔 부모들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명예와 권력과 재력이 풍족한 가정의 혼사는 화려하며 명예와 부를 대물림 해 준다. 그런가하면 재력을 갖춘 여식일수록 혼자 살고자 결혼을 포기하고 있으며, 서민은 서민대로 적당한 규수가 없어 혼기를 놓치고 혼자 살아가는 싱글 시대가 되었다.
산골마을에 살던 우리 삼촌은 혼기가 되어도 결혼을 하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살림이 기울자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삼촌이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는데 시작부터 가난이 따라욌다. 어린 나이에 먹고 살만치 논농사는 남아 있어 농사부터 지었지만 실패하게 되었다. 마을 어르신 한 분의 도움으로 많이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농사일을 가르쳐 주시던 어르신이 삼촌을 착하게 보았는지 자기 딸과 결혼을 시켰다. 결혼은 했으나 신부는 3년이나 삼촌 곁으로 오지 못하고 친정에서 보내야 했다. 그 시절에는 결혼예식장이 없어 집에서 돗자리를 깔고 구식 결혼식을 치렀다. 재력과 권력과 관직이 높은 사람들의 결혼은 신랑이 말을 타고 부모가 정해주신 처녀와 결혼식을 올렸다. 집에서 부리던 종들이 혼수를 짊어지고 뒤를 따라갔다. 많은 하객들이 보는 곳에서 혼사를 치른 뒤 신부를 가마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와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인자한 시어머니를 모시며 살림살이 하나하나 배워가며 살아갔다.
3년이 지나 작은어머님이 삼촌 곁으로 오는 날, 초라하지만 시골산골마을에도 예법에 따라 그날부터 할머님은 안방차지가 되고 작은어머니가 부엌에 들어가 신혼살림살이가 시작되었다. 우리 할머니 성격 또한 엄하고 곧은 성격이어서 집안에 긴장이 항상 감돌았다. 한 마을에 살았는지라 그때 작은어머님에게 어렴풋이 우리 아버지, 어머니에 대하여 들을 수 있었다. 원인은 고부갈등으로 같이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러 아버지가 데려가 김제로 오셨다고 했다.
아들의 혼사이야기를 하고 싶다. 아들딸을 둔 부모들은 혼기가 다가온 자식들의 혼사 문제로 밤마다 부부가 고민하고 어떤 규수를 얻어야 우리 가정이 태평성대를 이룰까 고민한다. 딸들에게는 또 어떤 신랑을 만나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아갈까 고민한다. L대기업에 입사하여 삼년이 지날 무렵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울산아가씨인데 회사 간부로부터 소개를 받아 사귀어보니 마음에 들어 아빠엄마에게 인사드리려 같이 오겠다고 했다. 그날은 하루쯤은 시간을 비워 두라고 신신 당부했다. 아들의 일생에 중요한 자리인 만큼 실수나 하지 않을까, 아내는 사무실에서 배워오라 당부까지 했다. 사실 무엇부터 물어봐야하는지 몰라 며느리를 둔 동료들에게 물어보았다. 이미 아들이 맘에 든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싶었다. 아들이 울산에서 며느리 후보와 같이 왔다는 전화가 왔다. 서류를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첫눈에 보인 처녀의 훤칠한 키가 맘에 들었다. 정좌하여 처음 큰절을 밭고 보니 아음이 이상했다. 하룻밤을 딸들과 지내며 아내와 딸들과 아가씨와 같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하며 간간히 웃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하룻밤을 보내고 울산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양가 부모의 상견례가 맛의 고장 전주에서 있었다. 한식요리로 미리 예약을 했다. 울산에서 한 대의 차량으로 오셨고 우리 가족들이 참석하여 혼사가 이루어졌다. 예식장은 울산으로 잡고 우리 가족이 내려갔다. 부족한 것은 살아가며 구입하도록 이르고 우리 부부는 대전에 신혼집을 구해 주고 아들며느리의 신혼생활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우리 가정에 대를 이을 손자 손녀가 태어 날 때마다 며느리에게 따뜻한 사랑의 말을 전하며 보너스를 주기도했다. 지금 행복하게 잘 살며 회사 중견간부로 근무하고 있다. 지금 아들 가족은 5년 동안 폴란드에서 살며, 손자손녀는 외국어학교에 입학하여 영어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개인 돈을 들여 유학을 보내야하는 번거로움을 던 셈이다. 지금 이 사회에서는 열쇠 꾸러미를 몇 개씩 밭았느니 하며 많은 이야기들을 한다. 어느 날 TV뉴스를 보았다. 가정파탄에 이른 중년가정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코너를 볼 수가 있었다. 아들딸을 둔 엄마아빠가 결혼할 당시 예비신랑 1위를 차지하는 청년들은 끝자리에 사자가 붙은 의사, 판사, 검사 등의 직업군이다. 가정형편이 곤란하면서 의사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서민의 생활 속에서도 노력하여 의사가 되었다. 아내는 서울에서 중견 사업가의 둘째 딸로 명문대학교를 나온 며느리 감으로 탐나는 여성이였다. 사위될 사람은 서민중 서민으로 의사가 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 동생들과 부모님들은 어려운 생활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막노동을 해가며 근근이 먹고살 정도였다고 한다. 돈으로 사위를 싸온 셈이다. 그런 일들이 지금도 재벌가에서는 일상화 되는 실정이다. 황금만능주의 시대에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 서민들은 장가가는 시대가 자꾸만 멀어져 혼자 살아가는 싱글들이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외국여인들이 우리의 며느리로 바닷물처럼 들어오고 있다.
의사사위를 보려고 열쇠 3개가 아니라 꾸러미채 준다고 한다. 고가 아파트도 구입하여 딸과 사위가 살도록 해주었다고 한다. 10여년을 그렇게 행복하게 살던 부부였다. 남편은 병원에서 하루 종일 환자들 치료하고 늦은 밤에 집에 들어오면 아내가 집을 비우는 때가 많았다고 한다. 아내가 밤늦게 집에 들어오는 횟수가 많아져 남편은 스트레스를 밭기 시작했다. 남편 홀로 소주를 마시면서 이혼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혼사유는 의사남편이 남편으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성격차이가 심하다는 이유였다. 고단했던 이 의사의 일생이 하루아침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직업 중 의사나 법관이란 직업도 모두 외롭고 고단한 직업이다. 양심이 있는 어떤 판사는 한 잔 소주를 마시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사람이 사람을 법이라는 짓대로 사형이란 심판을 해야하는 비정한 직업이라고 했다. 세상을 사는데 규범이 있고 자연은 자연대로 천적들이 있어 솎아주며 평행선을 이루게 해 준다.
그 의사는 아무 말을 남기지 않고 아내가 원하는 대로 가정 법정에서 결혼 때 혼수로 가져온 모든 혼수품과 아파트 그리고 양육권까지 원하는 대로 인정하고 홀홀 단신 입은 옷과 신던 구두 차림으로 병원으로 돌아가 환자를 돌보는데 정성을 다하며, 결혼의 악몽을 떨쳐버리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지금도 싱글로 해외봉사활동을 하며 아이들이나 아내의 전화가 와도 절대 밭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세상과 단절해 버린 남편, 그는 의사의 의무인 환자 돌보기에만 전념한다고 한다. 이제는 결혼문화를 바꾸면 좋겠다. 지금 능력이 뛰어난 싱글일수록 혼자 살고 있는 남자, 여자들로 이 사회는 넘쳐나고 있다. 그러니 갈수록 인구가 부족하여 뿌리가 흔들릴 수 있다는 말이 현실로 돌아올 날도 머지 않은 것 같다. 혼기에 접어든 자녀들을 둔 부모들은 결혼문화를 바꾸는데 앞장서야 하리라 믿는다.
(2015, 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