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힘이 넘치고 물오른 나이에 동네를 휘젖고 뛰어다녀본들 거기가 그 곳이다. 채 60채 도 되지 않는 집들이 들어앉아 있어 마음 놓고 눈길 한번 굴리면 누구 집에 뭐가 있는지를 속속들이 알았다. 책보를 마루에 내 팽개치고 동네로 나가면 친구들도 몇 명씩 모여 있었다. 할 일없이 빈둥거렸다. 숨바꼭질을 해도 재미가 없고 진달래를 꺾으러 산에 올라도 흥이 나지 않는 일이 많았다.
그런 날은 동네 형들과 함께 바로 동네 앞에 있는 신작로에 나갔다. 신작로에 퍼질러 앉아 뽀얗게 먼지를 몰고 오는 미군 트럭을 향해 팔을 걷어 부치고 쑥떡을 매기는 게 일이었다. 그러면 미군은 소리 없이 웃었다.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누런 털 부숭부숭 덮힌 팔을 차창밖에 내놓고는 다정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미군들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다. 동네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장구매기에는 미군막사가 몇 채 있었는데 친구들 몇이 놀러를 간 적이 있었다. 미군놈들이 바글거리는 막사에 선뜻 가지 못하다가 호기심으로 한 번 가본 것이 탈이었다.
치권이 때문이었다. 치권이가 내질렀던 비명소리를 생각하면 지금도 오금이 저렸다. "아이구 똥 나오네" 치권이가 다급하게 내지르는 소리를 듣고도 친구들은 도망을 가지 못햇다. 얼마나 무섭고 다급했으면 똥나온다고 소리를 질렀을까. 치권이가 무엇을 잘못햇는지 미군에게 무슨 일을 당했는지 말을 하지 않아 알 수는 없지만 하여튼 그 일이 터진 이후로 친구들은 막사에 잘 가지 않았다. 그 대신 미군차량을 만나면 복수하 듯 쑥떡을 매기는 일이 잦아졌다.
그리고는 신작로를 따라 이웃동네로 마실을 가기도 했다. 후줄근히 꽃들을 휘감던 바람이 부드러운 손길로 얼굴을 매만져 주기도 했다. 바람은 참 감질났다. 얼굴 한번 쑥 문질러주면 온 몸에 물이 올라 가슴은 콩닥거리고 덩달아 친구들의 마음도 달아올랐다. 더 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동네에서만 노는 게 아니라 동네와 조금 떨어진 야산으로 들어가서 숨바꼭질을 하기도 했다. 진달래, 철축이 붉게 물든 산은 금세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고 그 재미에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이제 산을 타는 일도 우습게 보였다. 잡목이 우거진 산길을 타고 오르며 숨바꼭질을 할 때에도 무섭지도 않았다.
산꼭대기에 서있는 장수나무를 향해 들고 뛰었으나 너무 멀고 무서워 장수나무까지 오르지는 않았다. 그 대신 가끔씩 웃골을 올라갔다. 동네에서 외따로 떨어진 큰 산 아래 웃골엔 단 두 집만이 있었다.
승학이와 홍구네 집이었다. 큰 산을 배경삼아 앉아있는 집 주변으론 나무가 울창했고 바람 따라 쓸려가는 잎새 소리만이 가슴을 처연하게 적셔주었다. 외롭다고 우는 산새소리와 산자락을 붉게 물들이던 꽃들을 가슴에 묻은 채 그 해 겨울인가 다시 홍구네 집을 찾았을 때 홍구 엄마가 내어준 홍시 맛을 잊을 수 없었다. 얼음 막힌 빠알간 홍시를 혀끝이 녹아나도록 몇 번 퍼먹으면서 불현듯 이 외딴집이 동화 속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겨울 우리 집에서 맛보지 못했던 달콤한 홍시를, 그것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던 홍시를 심심하면 먹는 홍구가 너무나 부러웠다. 그런 생각을 하면 군침이 돌았다. 심심하면 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앗다. 저수지에서 쳐다보아도 숲에 묻힌 홍구네 집이 빤히 보였는데도 수영만하고 놀다 동네로 내려오는 일이 다반사였다.
친구들이 올라가지 않는 대신에 홍구는 자주 동네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끄덕하면 웃었다. 조금만 웃겨도 헐헐거리며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으면 오랜 동안 산속에 묻혀 지냈던 외로움이 진하게 배어나왔다. 산비둘기와 장꿩과 산새의 날개 터는 소리가 함께 묻어 나왔다. 그렇게 밤늦도록 놀다 어둠을 털며 외딴집으로 올라가는 홍구의 뒤를 보고 있으면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눈도 왕방울만 하고 걸음도 한없이 느려터진 놈이 들판 길을 타고 검은 물이 너울대는 저수지를 거쳐 어떻게 올라가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눈이 크면 겁이 많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 같았다. 그리고는 여러 날이 지났다.
싱그러운 풀들이 후꾼 후꾼 뿜어내는 열기에 지쳐 늘어진 어느 여름날이었다. 친구들과 홍구네 집을 다시 찾게 되었다. 동네서 올라간 게 아니라 자갯골에서 잠목에 묻힌 산길을 타고 가게 되었다. 여름이 던져주는 열기는 대단했다. 한 무리의 친구들이 열고 가는 산길은 온통 연두빛 물로 넘쳐흐르는 잡목들이 앞을 막았고 이름 없는 꽃들이 소담스럽게 터져 소리 없이 흔들렸다. 꽃들을 보고 걸어도 심심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 웃골에 발을 디뎠더니 승학이네와 나란히 이웃한 홍구네집이 사립문을 열어 넣고 친구들을 반겼다. 친구들은 홍구네 집에서 하루종일 놀았다. 음식을 맛나게 먹고 누워 놀다가 나른한 여름의 열기에 취해 그만 잠이 들어 버렸다. 얼마나 오랫동안 곯아 떨어졌는지 모른다. 온몸 이 부서질 듯 나른하여 꿈을 꾼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꽃들이 일렁이는 화원을 헤매다가 돌아온 것 같기도 했다. 서서히 귓문이 열리며 폭포처럼 날이 선 물살소리가 귀속을 휘감는가 싶더니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시끄러운 매미소리였다. 매미소리를 들으며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을 때 아, 내 앞에 펼쳐진 눈부신 세상에 정신에 아찔했다. 아카시아꽃이 튀밥같은 꽃망울을 매달고 술렁거렸다. 살가운 바람결에 아카시아꽃은 달콤한 꽃향기를 멀리멀리 뿌려대고 있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햇살을 온통 다 받아먹고 희디흰 꽃술을 술렁거리는 아카시아꽃에 한참동안 넋이 빠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