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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 찬양대 귀한 찬양 감사합니다. 오늘 아침에 공동예배 한불 공동예배가 있었는데 우리 찬양대원들이 많이 참여하셔서 정말 은혜로운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감사드리고 또 일부는 일부 마치시고 또 학교에서 행사들이 있어서 그 학교로 갔다고 들었습니다. 오늘 오전 오후 수고해 주신 우리 기드온 찬양대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이 땅에 오셨을까? 그 대답은 매우 명백합니다. 죄인을 불러서 용서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대로 사셨습니다. 현대인들은 죄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니가 죄인이야 당신은 죄인이야라는 말을 듣기를 불편해합니다. 과거에도 아마 그랬을 거예요. 죄에 대한 설교도 선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이 죄의 문제를 다루는 것을 불편해하고 또 성도들도 원치 않기 때문이죠.
인기 있는 메시지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할까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까 마음의 평화를 어떻게 하면 누릴까 내적 치유 뭐 이런 것들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대의 경향이 하지만 여러분 죄는 피할 수 없는 인생의 현실이에요. 늘 우리 가운데 죄가 있고 우리는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이 문제를 피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3장 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 문제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죄를 가지고는 결코 형통한 삶을 살 수 없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저주와 절망이 따라붙고 우리가 이 문제를 덮어두고 해결하지 않는 한 결국은 죄가 저와 여러분들의 앞길을 가로막습니다. 시한폭탄과 같습니다. 잠시는 괜찮아 보이지만 언젠가는 폭발합니다. 뇌관을 잘못 건드리는 순간 어마어마한 폭발력을 가지고 우리의 인생을 무너뜨리고 맙니다.
오늘은 이 죄 문제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죄는 원죄와 자범죄로 나눠지죠. 원죄는 죄의 뿌리와 같습니다. 사람이 선하게 사냐 악하게 사느냐의 문제보다 더 근본적인 거예요. 우리가 선한 행동을 하고 악한 행동을 해서 우리는 악한 행동만 죄라고 생각하지만, 그 뿌리로 찾아가면 선한 행동까지도 원죄로부터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원죄가 뭐냐? 죄의 뿌리가 되는 원죄가 뭐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에서 시작됩니다. 선악가는 하나님과 인간 창조물과 피조물의 경계선이에요. 모든 나무의 실과를 다 먹어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어요. 다 먹어라. 그러나 에덴 중앙에 있는 선악가는 먹지 말라. 우리가 모든 걸 다 할 수 있으면 우리가 신이 됩니다.
그러나 그중에 할 수 없는 것 것이 있으면 우리는 피조물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그 말씀을 지킴으로 아담과 하와는 피조물의 자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게 참 중요해요. 이 선을 지키는 것, 이 자리를 지키는 것. 여러분 선악과는 선악과라는 그 과일 안에 어떤 독이 있어서 우리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고 그 명령이 중요한 겁니다. 우리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지킴으로 우리는 피조물이 되고 하나님만이 홀로 영광을 받으실 창조주가 됩니다.
그런데 마귀가 와서 속삭였죠. 내가 먹는 날에는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하와가 그 말에 유혹되어 따먹고 자기 남편도 따먹게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이 들어온 거예요. 그리고 그 선을 넘어버렸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겠다.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겠다.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하겠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내 생각, 내 가치관, 내 판단이 기준이 된다.
그것이 원죄의 시작입니다. 아무리 선한 일이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내 기준에서 시작되었다면 그게 죄라는 거예요. 이것이 세상의 풍조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하나님을 마음에서 몰아내고 스스로 주인이 된 것입니다.
바울도 인류의 이러한 현실을 이렇게 선언했어요. 로마서 1장 28절에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함에 그게 원죄라는 거예요.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 그런 성향을 갖게 된다는 거예요.
이런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됩니까? 도요토엡스키는 하나님이 없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몰아내는 한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뭐든지 할 수 있다. 히틀러, 스탈린, 마우쩌등 폴포 세계의 모든 독재자들. 그들은 하나님을 마음에서 몰아내면서 하나님 없는 세계를 추구했어요. 못할 것이 없는 겁니다. 사람 죽이는 일은 아무 일도 아니에요.
이 사람들뿐이겠습니까? 기독교 안에도 기독교 역사 안에도 이런 일이 있었어요. 72년 8월 24일 파리에서 벌어졌던 성바돌룸의 대학살 사건과 같은 이런 일들이 이 기독교 세계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들이 하나님 앞에 살았다면 하나님의 기준으로 돌아갔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반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죄는 하나님을 마음에서 몰아낸 상태 그 상태를 원죄라고 합니다.
자범죄는 뭐냐? 그런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마음과 생각과 입술과 행동으로 나오는 악한 행위들이에요. 그래서 그건 자범죄는 대체로 누구나 누가 보기에도 악한 열매가 열매로 보입니다. 그건 우리가 구분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열매. 로마서 1장 28절에 저희가 하나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함에 저희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려두사 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그래서 어떤 일을 했습니까? 모든 불의 추악, 악독,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시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근수근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이런 열매들이 나온 것입니다.
이게 이런 것들을 다 자범죄라고 할 수 있어요. 이 자범죄 우리 삶의 우리 인생의 악한 이런 행위들은 노력과 수련을 통해서 다수 극복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노력하면 절제하고 노력하면 좋은 행위도 할 수 있고 좋은 마음도 품을 수 있어요.
그러나 원죄라는 뿌리가 해결되지 않는 한 잠시 눌러놓을 뿐이에요. 언제든지 터집니다. 평소에는 참 잘 절제하고 잘 극복을 했는데 어떤 위기 상황이 오면 이게 폭발하는 경우가 많아 대개 그냥 평소에 조금씩 이렇게 그 에너지를 밖으로 빼낸 사람들은 좀 나쁜 짓도 자주 하고 하는 사람들은 크게 문제가 안 되는데 대개 큰 사고를 치는 사람들이 이것을 눌러놓은 사람들이 그래서 그것이 한 번 터지면 본물 터지듯이 나옵니다. 뚜껑이 열렸다고 그러죠. 닫아놨던 뚜껑이 탁 에너지가 찼을 때 팍 터지면 어마어마한 폭발력을 갖는 거예요. 그래서 이 근원적인 문제 이 자범죄를 악한 행실을 나오게 하는 뿌리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적당히 덮어놓고 가다 보면 이게 터지거나 불행해집니다.
이게 터지지 않고 꼭 눌러놓은 사람들은 정신적인 문제가 오거나 그 마음속에 갈등이 많아지는 거예요. 아니면 이게 그러다가 터지면 자기도 다치고 다른 사람도 다치는 겁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사망은 온갖 부정적인 그림자를 우리에게 가져옵니다. 불안, 절망, 비겁함, 부끄러움, 원망, 분노, 두려움 이런 것들이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는 동안은 계속해서 저와 여러분들의 삶을 엄습하는 거예요. 갑자기 두려움이 찾아오기도 하고 갑자기 인생이 부끄러워지기도 하고 막 절망이 찾아오기도 하고 사람들은 죄를 숨기면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숨길 수 없는 거예요.
주머니 속의 송구처럼 반드시 그건 삐져나오게 돼 있어 언젠가는 드러납니다. 드러날 때 우리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고 그 결과 나와 내 후손도 어려움을 당하게 되 죄의 세력이 우리의 인생의 발목을 잡아버립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돼요. 이 사순절 기간은 주님의 생애와 말씀을 묵상하면서 특별히 주님이 오신 첫 번째 목적 죄인을 불러 그 죄를 용서하시려고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주님을 묵상하면서 내 자신을 살펴보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서 이 죄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시간으로 삼으셔야 합니다.
누가 이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낼 수 있을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죄사하는 권세는 하나님께만 있어요. 죄를 지은 내가 스스로 내 죄를 사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부탁한다고 해서 고백하고 털어놓는다고 해서 그 죄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께 나가서 죄에 사하는 고난을 가지신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보내신 거예요. 물론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이 많아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게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죄 용서받고 새 생명 얻고 거룩한 자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늘 죄인들을 찾아가셨어요. 그리고 그들의 친구가 되셨어요.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세리 마태를 부르셨고 제자로 부르셨고 그의 집에 가셔서 식탁을 나누셨습니다. 세리 마태는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원수 원수 같은 사람이에요. 우리로 말하면 일제시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로 또는 일본 경찰에게 붙어서 그 자기 조선인들을 괴롭히는 이렇게 베레모 쓰고 형사도 제대로 아닌 게 이게 그 사이에 붙어가지고 우리 민족의 고혈을 빠는 그런 사람과 같은 거예요.
로마 자체도 과중한 세금을 부여합니다. 그 로마에 바쳐야 될 거예요. 걷고 또 쥐도 먹어야 되잖아요. 어차피 기왕 욕 먹고 사는 인생 내가 이 길을 택했는데 제대로 벌어보자 그래서 그만큼 또 걷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만 백성들만 고난을 당하는 거예요. 힘이 없기 때문에 로마라는 권력을 등에 업은 사람이 권세를 업은 사람이기 때문에 힘없는 백성들은 원망하고 가슴앓이만 할 뿐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죄인 중에 죄인이에요. 상종해서는 안 되는 사람, 막 친일파 공산주의자 뭐 이런 거 있잖아요. 그 시대마다 절대 상종하면 안 되는 사람.
그런데 예수님이 그 사람을 부르시고 그 집에 가서 식탁을 나누시는 거예요. 이런 행동은 유대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스캔달이 됐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10절 11절에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어째서 그런 일을 행하느냐 말이야. 이 민중들의 유대인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면서 자기가 오신 목적을 분명히 하셨어요.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오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은 목적이 분명하셨어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러니까 죄인의 지백하고 죄인을 자꾸 만도하시는 거예요.
근데 유대인의 사회는 유대 사회는 의인의 사회입니다. 의인이 높아지고 의인이 대우받고 율법에 의하여 죄인이라고 낙인 찍힌 자들은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사회예요. 그 사회를 역행하는 거예요. 주님이 오신 목적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어요. 그래서 자꾸 죄인들하고 접촉하시는 겁니다.
실수로 마태를 부르신 게 아닙니다. 마태를 부르실 목적으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그렇다고 유대인들을 열받게 하려고 그러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대로 사시다 보니까 이런 충돌이 일어난 거예요.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어요. 죄인을 불러서 용서하시고 거룩한 자로 만들어서 하나님 백성으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그래서 교회 예수 그리스도 교회 복음 그리스도인은 때로는 세상의 가치와 충돌을 하게 돼 있어요.
이런 경우에 세상하고 잘 맞으면 비난받을 이유가 없죠. 그러나 이 복음의 가치, 기독교의 가치는 때로는 세상의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의인의 사회에서 사실은 의인의 사회가 아니죠. 다 죄인들인데 하나님 앞에 죄인들인데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의인의 사회를 만든 거예요. 그런 사회에서 죄인들을 상대하고 죄인을 가까이 하고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는 기독교의 복음은 충돌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오해를 받고 공격을 받고 비난을 받습니다.
교회가 진짜 잘못해가지고 개독교 먹사 어떻게 그런 말이 나왔는지 몰라요. 그런 그런 사회가 기독교를 비난할 때는 우리 잘못도 많아요. 그것은 우리가 고치고 회개해야 됩니다. 그러나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풍조를 따라가는 게 아니고 세상의 가치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어떤 본질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 충돌을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잘못해서 욕먹는 건 고쳐야 되지만, 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붙들고 살아가다가 욕을 먹고 오해를 받고 비난을 당할 때는 용기를 내야 하는 것이죠. 예수님이 지금 마태의 집에서 그런 상황에 처하셨습니다. 주님은 죄인을 불러 용서하시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주님은 대가를 치르셨어요. 공짜는 없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공짜는 없어요. 우리가 구원받고 죄 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사실은 우리에게는 공짜지만 하나님께는 대가가 있어요. 세상에 공짜가 없다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그 대가를 치르셨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것이 은혜고 하나님께서는 그게 희생인 겁니다.
희생 없는 사랑도 없고 희생 없는 은혜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참혹한 십자가를 짊어지셨어요. 채찌개 맞으셔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셨고 온몸은 피로 물들었습니다. 옷벗김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시고 조롱거리가 되셨어요. 목마르셨고 고통스러우셨고 두려우셨고 배신당하셨고 그토록 사랑하시던 하늘 아버지로부터 버림당하셨어요.
마지막 주님의 그 일성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사랑하고 신뢰하던 이로부터의 버림받는 그 고통 주님은 그것까지 당하신 겁니다.
왜 주님이 당하셨어요? 이런 일을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 때문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도다. 우리 때문에 우리 때문에 허물, 우리의 허물 때문에 우리의 죄악 때문에 또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주님이 갈보리 재단에서 자신의 몸과 물과 피를 다 쏟으셔서 재물이 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가 이 죄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십자가 앞으로 나가는 일을 너무 가벼이 생각하면 안 됩니다.
뭐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정도로 생각하면 안 돼요. 그냥 붙들고 있으면 망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에서 오셔서 그 온갖 고난과 굴욕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루어 놓은 일이에요.
정말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앞으로 나가 주님이 흘리신 보열로 보열의 은혜를 힘입어서 죄 용서함 받고 인생이 새로워지고 주님이 우리에게 제시해 주신 그 길을 걸어가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는 무서운 존재입니다. 죄는 결국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그걸 가지고는 형통할 수 없습니다. 당장은 잘 되는 거 아무 일 없는 것 같지만 빨리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반드시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습니다. 누구든지 예수께 가 엎드리면 어떤 죄든지 용서받습니다.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면 주님은 그 피로 저와 여러분들을 씻어주십니다. 그 순간 우리에게는 새로운 인생, 새로운 역사가 시작이 됩니다.
사순절 이 기간에 특별히 이번 주간에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면서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내 속에 이미 크리스찬이 돼서 원죄의 문제를 해결받았지만 그래도 또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 우리가 우리 속에 죄를 쌓았는지 돌아보면서 십자가 앞으로 나가 그 주님의 죄 용서하시는 은혜를 받는 한 주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