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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기본 진리 (4)
죽음이란 무엇인가?
고후 5:1~8
I. 서론
오늘 제가 가장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나온 것 같습니다. ‘죽음’이라는 주제는 무거운 주제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다루어야 하는 주제입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첫째는, 우리 모두가 죽음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BC 3세기,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죽지 않기 위해서 불로초를 구하려고 했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의술이 발달하여 인간의 수명이 100년, 200년으로 연장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2) 둘째는, 성경이 죽음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중요한 주제라고 하더라도 성경이 침묵하고 있으면 제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죽음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궁금해하는 모든 질문에 답을 해 주지는 않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부분만 알아도 죽음을 준비하는데 문제가 없습니다. 오늘은 죽음에 대해서 두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인가? 2) 죽음과 재림 사이의 중간기 상태란 무엇인가?
II. 본론
1. 첫째,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인가?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형벌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혹시, 죽음을 두려워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만일, 죽음이 두렵다면, 왜 두려우십니까? 우리가 이 문제를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죽음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가 두려운 것이라는 알 수 있습니다. 혹시 죽은 후에 지옥에 가지는 않을까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축복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왜냐하면, 죽음 이후에 더 좋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1) 먼저, 죽은 이후에 더 좋은 몸을 입기 때문입니다.
1절,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본문을 보시면, 바울은 우리의 몸을 “집”으로 비유했습니다. 이 땅에서의 몸을 “장막 집”(Earthly Tent)로 비유했고, 천국에서의 몸을 “영원한 집”(Eternal House)로 비유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바울의 직업은 Tent Maker였습니다. 누구보다도 장막 집 즉, 텐트를 잘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살던 당시 텐트는 상당히 보편화 되어 있었습니다. 수많은 로마 군인이 전투를 나가면서 텐트를 치고 잠을 자야 했고, 수많은 유목민들이 풀을 따라 이동하면서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 당시, 텐트를 만들었던 소재는 짐승의 털이나 가죽을 활용하거나 아마라는 식물에서 실을 추출하여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방수가 잘 되었던 소재도 아니고, 날카로운 것에 잘 견디는 소재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말 그대도, 임시 거처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몸이 이런 텐트와 같다고 비유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여기저기 낡아지고 닳아져서 수리를 해야 하는 텐트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수명이 다하면, 텐트를 새 것으로 바꾸어 주여야 합니다. 어떤 분의 텐트는 10년 사용할 수 있고, 어떤 분의 텐트는 100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간의 차이일 뿐이지 언젠가는 수명이 다할 날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영원한 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원한 집은 텐트가 아니라 하우스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땅의 것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으로 지은 것으로 우리가 영원히 살 집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부활의 몸입니다.
2) 다음으로 죽음이 축복인 이유는 주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6~8절,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6절을 보시면, 우리가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8절을 보시면, 우리가 몸을 떠날 때에는 주와 함께 있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조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한글 성경에 빠진 부분이 헬라어 성경과 영어 성경에 있습니다. “At Home with the Lord”에서 “At Home”이 빠져 있습니다. 여기서 Home은 하우스가 아니라 본향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오랜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행 후, 집에 돌아와서 “아무리 좋은 곳을 다녀보아도 집만한 곳이 없다”라고 밀 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천국에 가시면 이런 고백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Home이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세상의 죄성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는 그런 것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욕심, 질투, 탐욕, 교만, 음욕… 이 모든 것이 천국에서는 사라질 것입니다. 즉, 죽는 순간 우리의 영혼도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것이라고 말씀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지식도 자라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분적으로 알던 것이 천국에서는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바울 당시 구리 거울로 얼굴을 보다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듯이 알게 될 것입니다. 설마 우리 중에 가물가물해지는 기억력 그대로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안 계실 겁니다. 또한, 죽은 후에 천국에서 가서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 얼마나 기쁘고 흥분이 될까요? 이 세상에서도 인격이 고귀한 사람을 만날 때, 존경심이 우러나오는데, 주님을 뵐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떻게 될까요? 주님의 겸손하심, 온유하심, 인자하심, 깨끗하심, 아름다우심… 이런 주님을 만나 뵙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죽음이 축복인 이유는 죽음이 우리의 성화에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을 때, 몸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다음 세상으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결코 소멸되거나 의식이 없어지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눅 16:22~23,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은 사람의 영혼은 천사들에게 받들려 천국을 가게 되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영혼은 음부에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음부 즉, 지옥에서 의식을 가진 채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25 절에 보시면, 나사로는 위로를 받고, 부자는 괴로움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의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생생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돌아보면, 많은 사람이 자살을 하고, 부끄러운 타락을 하고, 강력 범죄를 저지릅니다. 미국에서는 (2016년 자료 인터넷) 일년에 약 45,000명, // 하루에 약 125명 // 한 시간에 약 5명이 자살을 하고 있습니다. WHO (World Health Organization)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는 일년에 약 800,000명 // 하루에 약 2,200명 // 한 시간에 약 9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합니다. 지금 이 순간, 한 시간의 예배를 드리는 동안에도 미국에서는 5명, 전세계에서는 90명이 자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요? 물론 자살하는 사람 중에는 심각한 정신 질환에 걸린 사람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자살하는 것입니다. 또한 부끄러운 타락이나 강력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죽은 후에 죄에 대한 더 큰 형벌을 기다라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쉽게 자살이나 범죄를 저지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 이후를 생각할 때에 보다 건전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노벨상을 제정한 알프레드 노벨을 아실 것입니다. 1888년 프랑스 한 일간지에 부고 기사가 실렸습니다. “죽음의 상인, 알프레드 노벨이 죽다” 그 기사의 내용은 “많은 사람의 생명을 순식간에 날려버리는 폭약의 발명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를 노벨이 읽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노벨이 이 기사를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몇몇 신문사에서 노벨의 형 루드비그의 사망을 노벨의 사망으로 오보를 실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죽음의 기사를 접한 후, 노벨은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 자신의 재산 94% (지금의 돈으로 약 4억 7,200만 달러)를 기부했고, 노벨상을 제정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불리는 솔로몬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전 7: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올바른 삶의 자세와 지혜는 혼인집이 아니라 초상집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생각할 때, 이 세상을 올바르게 지혜롭게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세에 대한 분명한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는 죽음이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그리고 그 거룩한 삶에 따라서 천국에서 상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도 우리에게는 축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2. 둘째, 죽음과 재림 사이의 중간기 상태란 무엇인가?
2~3절,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본문을 보시면, 바울이 간절히 사모하는 것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간절히 사모하는 것은 처소를 덧입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장막 집을 벗고, 영원한 집을 입는 것이 아니라, 장막 집 위에다가 영원한 집을 덧입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바울의 표현이 약간 애매모호한 이유는 바울이 집에 사는 것과 옷을 입을 것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바울은 자신이 죽기 전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을 간절히 사모했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3절에서 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기 위해서는 말에서 분명해 집니다. 사람은 죽을 때,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주님께서 계신 천국으로 갑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은 후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는 몸이 없는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벗은 상태라고 묘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영혼들이 부활의 몸을 입게 되고, 그 다음에 살아 있는 자들의 몸이 순식간에 영원한 몸으로 변화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죽음과 주님의 재림 사이에는 죽은 영혼들이 아무런 몸을 입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인이 죽기 전에 예수님께서 빨리 재림하셔서 장막 집이 무너지기 전에 영원한 집을 덧입기를 원한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어떤 신학자는 바울도 죽음을 두려워했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어느 정도 말이 맞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바울도 사람이고 순교 당할 것을 알았을 테니까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다룰 부분은 이것보다 조금 더 깊이 있는 내용입니다. 사람의 죽음과 주님의 재림 사이에 있는 이 기간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중간기 상태”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죽은 다음, 곧바로 천국에 간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에서는 조금 다르게 말합니다. 많은 분들이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의 차이점에 대해서 궁금해 하실 것입니다. 도대체 둘 사이에 차이점이 무엇인가? 제가 지금 드리는 설명이 두 종교의 차이점을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 드리는 설명은 로마 카톨릭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를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라는 점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루이스 벌코프 교수는 다음과 같이 로마 카톨릭의 연옥 교리(중간기 상태)를 설명합니다. “로마 교회에 의하면, 죽을 때 완전히 순결한 영혼들은 곧바로 천국 혹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복락으로 들어가지만, 완전히 깨끗함을 받지 못한 자, 즉 작은 죄를 갖고 있어 그 죄에 합당한 형벌을 받지 않은 사람은 하늘 나라의 최상의 복락과 즐거움으로 들어가기 전에 정결의 과정을 겪어야만 한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죽을 때에 이런 상태이다. 연옥은 시험의 장소가 아니라 정화의 장소이며, 궁극적으로 천국에 들어갈 것이 확실하면서도 아직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복락에 합당하지 못한 신자들의 영혼을 위한 준비의 장소이다. 연옥에 머무를 동안 이들 영혼은 하나님을 뵙는 복락에서 제외된 상실의 고통을 겪으며, 영혼을 괴롭히는 실제적인 고통을 겪게 된다. 그들이 연옥에 머무는 기간은 미리 알 수 없다. 이 기간과 강도는 땅 위에 있는 신자들의 기도, 선행, 미사에 의해 줄거나 경감될 수 있다. 교황은 연옥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고 있다고 간주된다. 연옥에 대해 사면을 내리고, 고통을 가볍게 하며, 심지어 그 고통을 끝내기도 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러한 로마 카톨릭의 연옥 교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금만 깊이 들어가 보면, 성경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내용일 뿐 아니라 상당히 위험한 교리입니다. 그 이유를 간단하게 세 가지로 말씀드리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첫째, 성경에 나오지도 않는 연옥 교리를 만들어서 믿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연옥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천국과 지옥 둘 사이에 어떤 장소가 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더구나 성경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합당한 형벌을 받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로마 카롤릭에서는 신자라고 할지라도 죽을 때까지 자신이 천국에 갈지 연옥에 갈지 모르는 것입니다.
중세 시대 독일에는 수도원마다 수도사들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어느 마을에서는 마을 인구의 10퍼센트가 수도사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수도사가 많았던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니라 구원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중세 시대에는 결혼을 하지 않고 수도사가 되는 것이 큰 공로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그 공로로 천국에 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중세가 왜 어두운 시대였는지 조금 감이 오실 것입니다. 실력 있고 경건한 젊은이들이 세상으로 나아가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수도원으로 들어와서 결국 중세 사회가 어두워지고 말게 된 것입니다.
둘째, 연옥 교리는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 돌아가시기 전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그런데, 로마 카톨릭은 “거의 이루었다”라고 그 의미를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와 “거의 이루었다”는 것은 단어 하나의 차이지만, 천지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 틀리셨거나 로마 카톨릭이 틀렸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모든 형벌을 대신 담당해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국을 가는데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거의 이루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는 충분하지 않고, 예수님의 공로에 우리의 공로를 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즉,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행위가 아니고 (X3),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X3) 말미암는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로마 카톨릭이 맞다면, 우리의 구원은 믿음과 함께 행위가 필요하다고 말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셋째,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연옥교리는 로마 카톨릭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만든 것 같습니다. 두산백과사전에는 “연옥”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교리에서 저승은 천국과 지옥으로 나뉜다. 그러나 천국도 지옥도 아닌 제3의 세계인 연옥을 받아들이는 문제는 종파마다 차이를 보이는데,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가 가장 크다. 연옥은 가톨릭의 필수 교리 중 하나이다. 이는 신교와 구교의 갈등이 심했던 16세기에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ient)의 ‘연옥에 관한 교령’을 통해 분명하게 공표되었다. 즉 연옥은 가톨릭이 종교 개혁이라는 위기의 돌파구를 모색하던 시기에 신교와는 다른 구교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내부체제와 교리를 정비하기 위해 사용한 주요 신앙 개념이었다.”
그러니까 로마 카톨릭에서 말하는 연옥은 개신교와 차별을 두고, 로마 카톨릭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만든 교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맞는 말인 이유는 16세기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하여 로마 카톨릭은 자신의 성경을 확정하게 되는데 유대인들도 정경이 아니라 외경으로 분류하는 7권의 책을 성경 속에 집어 넣었습니다. (구약: 39 + 7 = 46권) 그리고 그 외경 중에서 마카베오 하권에 나오는 한 구절을 근거로 해서 연옥 교리를 세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로마 카톨릭의 연옥 교리는 성경 66권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이 연옥 교리를 통하여 교황의 권위를 세웁니다, 교황은 이 연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으며, 교황의 결정에 따라 연옥에서 고통 받는 사람이 사면을 되기도 하고, 고통이 줄어들거나 그 기간이 줄어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특별하고도 유일한 공동체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좋은 단체들이 있습니다. 학교, 병원, 많은 NGO 봉사 단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단체는 교회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더욱 소중히 생각해야 하고, 교회를 보호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교회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며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성경에도 없는 연옥 같은 곳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교회의 수장에게 성경에서 말하지도 않는 권세를 부여한다면, 그 교회는 반드시 개혁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III.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조차도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통하여 영원한 부활의 몸을 입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새로워지며 주님을 만나 함께 동거동락하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