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시집 제1권 3-5
3 술회述懷 5 자소自笑 스스로 조소한다
시주유유삼십년詩酒悠悠三十年 시와 술로 유유히 30년을 지났는데
방인착회애도선傍人錯會愛逃禪 옆 사람 잘못 알고 禪에 참례하기 좋아한다 하네.
청운역유투한일靑雲亦有投閑日 벼슬길도 또한 한가함 찾는 날 있을 것이나
일단청유공부전一段淸遊恐不全 한 번의 청유淸遊도 온전하지 못하리라.
시와 술로만 아득히 30년을 지내니
옆 사람도 잘못 알아 참선하기 좋아한다
벼슬길에도 또한 한가한 날 있을 것이나
한 차례 맑은 놀음도 완전치 못할까 두려워라
►유유悠悠 ‘멀 유悠’ 아득하게 먼 模樣. 때가 오랜 模樣. 침착沈着하고 餘裕가 있는 模樣.
►청운靑雲 푸른 빛깔의 구름. 높은 理想이나 벼슬을 가리키는 말.
►청유淸遊 풍취 있는 놀이. 俗塵을 떠나 自然을 즐김.
●자소自笑 자신을 비웃다/정약용丁若鏞(1762-1836)
1
여취여성도반생如醉如醒度半生 취한 듯 깬 듯 반평생을 보내는 사이
도두영득차신명到頭贏得此身名 간 곳마다 이 몸의 이름을 너무 얻어서
니사만지도기만泥沙滿地掉鬐晚 진창 가득한 땅에서 지느러미 늦게 흔들고
망고미천서익경網罟彌天舒翼輕 그물 가득한 하늘에서 날개 가벼이 폈으니
락일제산수계주落日齊山誰繫住 제산齊山에 해 진다만 누가 잡아매랴1)
충풍초수가횡행衝風楚水可橫行 초수楚水에 드센 바람 불거늘 횡행할 수 있으랴.
동포미필개동명同胞未必皆同命 형제라고 운명이 반드시 같지는 않으리니
자소우유암세정自笑迂儒闇世情 세상물정 모르는 선비라서 스스로 웃노라.
►제산齊山 만당晩唐 시인 두목杜牧의 시
<구일제산등고九日齊山登高 중구일 제산에 높이 올라>에서 借用.
단장명정수가절但將酩酊酬佳節 다만 좋은 술로서 좋은 시절 즐길 뿐
불용등림한락휘不用登臨恨落暉 높은 곳에 올라 지는 해를 한할 게 없네.
유배지에서 낙조를 보며 쓸쓸한 처지를 읊은 것이다.
►초수楚水 초나라 屈原이 방축放逐되어 있던 상수湘水 가. 정
약용이 경상도 장기에 유배되어 있었으므로 남방의 그곳을 초수에 견준 것이다.
2
초초관상시여기草草冠裳是汝欺 초라한 관모와 의상이 너 자신을 속인 것
십년구책지분피十年驅策秪奔疲 십년을 진력했지만 바쁘고 지쳤을 뿐
지주만물우무대智周萬物愚無對 지혜는 만사를 주도하나 어리석음은 상대가 없어
명동천인방이수名動千人謗已隨 명성이 천 명을 놀라게 하자 비방이 뒤따랐네.
불견홍안다박명不見紅顏多薄命 홍안이 대부분 박명한 걸 보지 못했더냐
유래백안재친지由來白眼在親知 원래 눈 흘기는 자는 가까운 이들 사이에 있다네.
사린조익종하대蛇鱗蜩翼終何待 뱀 비늘 매미 날개4)를 어이 의지하랴
자소오생도저치自笑吾生到底癡 내 삶이 철저히 바보짓이라 스스로 우스울 뿐.
►‘우무대愚無對’ 어리석음은 상대가 없어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말한 영무자寗武子의 ‘우불급愚不及’을 뜻한다.
혼란한 정국에서 몸을 사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3
미망의로여인거迷茫義路與仁居 의리의 길과 어진 삶이 막막하기만 하여
구도방황약관초求道彷徨弱冠初 그 길을 찾으려고 젊은 시절 무척이나 방황했지.
망요진지천하사妄要盡知天下事 천하의 일을 함부로 모두 알려고 들어
수사궁람역중서遂思窮覽域中書 온 세상 책을 끝까지 다 보겠다 생각했다가
청시고작상궁조淸時苦作傷弓鳥 청명한 시절에 모질게도 활에 다친 새가 되고
잔명잉성괘망어殘命仍成掛網魚 남은 목숨도 그물에 걸린 고기 신세 되었구나.
천재유인지아부千載有人知我否 천년 뒤 나를 알아줄 사람 있으려나
립심비왕시재소立心非枉是才踈 뜻은 세웠으나 재주가 어설픈 탓이로다.
4
부세론교문기인浮世論交問幾人 뜬 세상에 마음으로 사귈 사람 몇이나 되랴
왕장조시작정진枉將朝市作情眞 공연히 조정 사람 저자 사람을 진정으로 대했구나.
국화영하시명중菊花影下詩名重 국화 그림자 아래 시의 명성 높았고
풍수단중연회빈楓樹壇中讌會頻 단풍나무 단壇에서 자주 연회를 가졌네.
기전호간승부미驥展好看蠅附尾 천리마 달릴 때는 꼬리의 파리를 내버려 두고
룡전불금의침린龍顚不禁蟻侵鱗 용 자빠지면 개미가 비늘에 기어올라도 놔두는 법
분륜물태성고소紛綸物態成孤笑 분분한 세상 행태에 홀로 웃음 짓나니
일임동화암연진一任東華暗軟塵 동화문이 뿌연 먼지로 어둡든 말든.
►시명詩名
정약용은 명례방 죽란서옥竹欄書屋에서
여러 차례 국영회菊影會를 열어 죽란시사 일원들과 시를 읊었다.
►단풍다무 단壇 곧 풍단楓壇은 한양의 약봉藥峯 근처를 말한다.
채제공은 오광운吳光運의 형 오필운吳弼運의 딸과 결혼했고
오광운이 살던 약봉의 집을 사 약 13년간 거주하면서 풍단시회楓壇詩會를 주도하였다.
정약용도 이 시회에 참여하였다.
►꼬리의 파리
파리가 천리마의 꼬리에 붙으면 천리를 갈 수 있다는 말로
어진 이를 따름으로써 자신의 聲價가 높아짐을 뜻한다.
“안연顔淵이 비록 학문에 독실했으나
공자라는 천리마의 꼬리에 붙은 덕분에 더욱 이름이 드러났다.”
한 말에서 나왔다./<史記 伯夷列傳>
►동화문東華門 백관百官이 입조入朝할 때에 출입하는 문이다.
5
항장심지섭세난骯髒深知涉世難 강직하면 세상풍파 헤쳐 나가기 어려운 법
배우총집소유관俳優叢集笑儒冠 광대들이 떼 지어 유자를 비웃어 대지
도무열폐쟁미록都無熱肺爭微祿 열정이라곤 전혀 없이 적은 녹이나 다투고
미작비안사달관未作卑顏事達官 높은 관직 바라면서 안색은 안 그런 척하네.
홍행원림류주음紅杏園林留酒飮 붉은 살구나무 동산에 술을 두고 마시며
록태문항포서간綠苔門巷抱書看 푸른 이끼 낀 골목집에 들어앉아 책을 보지만
탄주불우영명수呑舟不遇瀛溟水 배 삼킬 큰 고기가 큰 바다를 못 만나서
용역함구상죽간容易含鉤上竹竿 낚싯바늘 물었다가 낚싯대에 매달리다 하나니.
►후당後唐을 건국한 장종莊宗이 광대와 연극을 좋아하여 총애하던 배우들을 등용하여
정사가 어지러웠던 일을 빌려, 당시 조정의 요로에 소인배들이 많았던 것을 비유한 듯하다.
장종은 재위 4년 만에 영인伶人 곽종겸郭宗謙의 모반 때문에 살해되었는데
여기서 순조를 장종에 비유한 것은 아니다.
6
금화옥서해진연金華玉署解塵緣 금화전10)이며 옥서며 속세 인연 모두 끊자
초수종산흥묘연苕水鍾山興杳然 초수와 종산의 흥취 아득히 그리워라.
<재광주在廣州 초수苕水와ᆞ 종산鍾山은 광주廣州에 있다>
환부과장상자포喚婦夸張桑柘圃 아내 불러 뽕나무 밭을 더 넓히라 하고
교아경략채고전敎兒經略菜苽田 아이에게는 채소밭을 가꾸라고 하여
천어청복간무비天於淸福慳無比 하늘이 주는 복이 너무나 인색해도
지설황추대유년地設荒陬待有年 땅이 열어 둔 외진 곳에서 풍년을 기다리네.
만사불여금일음萬事不如今日飮 오늘은 음주보다 중요한 일이 다시없나니
사명일사시치전思明日事是癡癲 내일 일 생각한다면 그거야말로 바보짓.
►금화전金華殿
한漢나라 성제成帝가 금화전에서 <상서>와 <논어> 등의 강론을 들은 고사에서 온 말이다.
흔히 경연經筵이나 서연書筵을 가리킨다.
►옥서玉署
궁중의 사적史籍 관리와 문한文翰 처리 및 왕의 각종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는 弘文館의 별칭.
►초수苕水 소내[苕川]이다.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의 시내이다.
정약용이 살던 마현馬峴의 지명이다. 조선 시대의 행정구역으로 경기도 광주목에 속하였다.
►종산鍾山 운길산雲吉山(수종산水鍾山)
정약용의 생가가 있는 소내의 뒷산으로 정약용이 어려서 독서하던 水鍾寺가 이 산 중턱에 있다.
7
어어류류이십추圉圉纍纍二十秋 답답하고 고달프게 이십 년을 지내다가
몽중미획각래수夢中微獲覺來收 꿈속에서 조금 얻었어도 깨고 보면 간 데 없네.
부명사달이진적浮名四達已陳跡 사방에 헛이름 난 것도 이미 지난 일
외물일공여독두外物一空餘禿頭 외물 모두 스러지고 대머리만 남았을 뿐
고하석칭강좌망顧賀昔稱江左望 예전에 고씨와 하씨는 강좌에서 명망을 일컬었건만
채릉금작롱서수蔡陵今作隴西羞 이채)와 이릉은 지금 농서의 수치가 되었구나.
안전막조기구상眼前莫造崎嶇想 목전의 일로 기구한 상상 하지 말자꾸나
수의운행우수류隨意雲行又水流 구름 따라 물 따라 순리대로 하리라.
►고하顧賀
명나라 말 귀유광歸有光의 <고은군전顧隠君傳>에 보면 사마씨司馬氏가 장강을 건넌 이후로
고씨, 하씨賀氏, 기씨紀氏, 설씨薛氏를 세상에서 세주고문世胄高門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이채李蔡
한漢나라 비장군飛將軍 이광李廣의 종제로
이광보다 인품이 못했지만 輕車將軍을 거쳐 樂安侯에 봉해졌다.
이광은 명성이 오랑캐 지역에까지 널리 퍼졌는데도 제후에 봉해지지 못했다.
이광이 자신의 기구함을 탄식하자 왕삭王朔이
“장군께서 스스로 생각건대 무슨 한스러운 일을 한 일이 있었습니까?”라고 물었다.
이광이 “내가 옛날 농서수隴西守였을 때 강족羌族이 반란을 일으켰다오.
내가 회유하여 항복을 받고는 항복한 800여 인을 속여 하루에 모조리 죽였소.
지금까지 크게 한스러운 건 이것뿐이오.”라고 대답했다.
왕삭이 말했다.
“이미 항복한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큰 화란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장군께서 후작을 얻지 못하는 까닭입니다.”/<史記 李將軍列傳>
►이릉李陵
한漢나라 농서隴西 성기成紀 사람으로 ‘비장군飛將軍’으로 불린 명장 이광李廣의 손자이다.
무제武帝의 명을 받고 흉노를 토벌하러 갔다가 도리어 항복하고 우대를 받았다.
한실漢室에서는 그의 처자를 모두 죽였고
그의 문하에 있던 농서의 사대부들은 모두 그 사실을 부끄러워했다.
/<史記 李將軍列傳>
►농서隴西 甘肅省 임조부臨洮府와 공창부鞏昌府의 서쪽에 걸쳐 있던 진한 시대의 郡 이름이다.
8
불행궁래막송궁不幸窮來莫送窮 불행히 곤궁이 오더라도 쫓아내지 말라
고궁진정시호웅固窮眞正是豪雄 곤궁을 견뎌 내야 참으로 영웅호걸
성회숙고한안국成灰孰顧韓安國 재가 된 한안국을 누가 다시 돌아보리.
림도상봉려마동臨渡常逢呂馬童 강 건널 때면 언제나 여마동을 만난다네.
총욕장생춘몽리寵辱莊生春夢裏 총애 입건 모욕 받건 장자 봄날 꿈.
현우두로취가중賢愚杜老醉歌中 어짊도 어리석음도 두보의 <취가행>
해천작야비비우海天昨夜霏霏雨 바다 위 하늘에 어젯밤 부슬비 내리더니
잡답림화만수홍雜沓林花萬樹紅 무성한 나무들이 온통 붉은 꽃 피워 냈네.
►한안국韓安國 권좌에 있다가도 失勢를 하면 주위에서 냉대를 한다는 말이다.
한漢나라 때 양梁 효왕孝王의 中大夫였던 한안국韓安國이 죄를 받게 되었을 때
몽현蒙縣의 옥리獄吏인 전갑田甲이 한안국을 욕하였다.
한안국이 “죽은 재라고 해서 다시 불붙지 말라는 법이 있다더냐?”라고 하자
옥리는 “불이 붙기만 하면 오줌을 싸 버리리라.”라고 하였다.
얼마 후 한안국이 다시 양梁의 내사內史가 되자 전갑이 그를 찾아가 사죄하였다.
/<史記 韓安國傳>
►여마동呂馬童
궁지에 몰릴 때는 친구도 적으로 변한다는 말이다.
항우項羽가 패하여 오강烏江을 건너려 할 때 항우의 옛 친구이자 한漢의 기사마騎司馬인
여마동呂馬童이 왕예王翳에게 저 사람이 바로 항우라고 가르쳐 주자 항우가
“한나라에서 내 머리를 千金과 萬戶의 邑으로 산다고 하니 내가 너를 위해 덕을 베풀마.”
하고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史記 項羽本紀>
►취가행醉歌行
두보杜甫는 과거에 낙방하고 돌아가는 종질從姪을 전송하며 지은 <취가행>에서
구천양엽진자지舊穿楊葉眞自知 예전에 버들잎 맞힌 것을 진정 스스로 알거니
잠궐상제미위실暫蹶霜蹄未爲失 잠시 헛디딘 준마 발굽은 과실이 아니란다.
단 여기서는 두보가 광문관박사廣文館博士 정건鄭虔에게 준
<취시가醉時歌>의 취지를 가리키는 듯하다.
<취시가>에서 두보는
상여일재친척기相如逸才親滌器 뛰어난 재주 사마상여도 그릇을 씻었고
자운식자종투각子雲識字終投閣 글 잘하는 양자운도 교서각에서 투신했지. 하였다.
9
려송과왜동부동呂宋瓜哇東復東 여송과 과와 풍속이 동쪽으로 밀려와서
피풍취전사비봉被風吹轉似飛蓬 바람 따라 굴러옴이 쑥대처럼 빠르구나.
만년탕목장기현晚年湯沐長鬐縣 만년에 하사받은 탕목 읍은 장기 고을
소겁창상단발옹小刦滄桑短髮翁 찰나에 상전벽해 하니 머리 짧은 영감 꼴.
만안어하비박록滿案魚蝦非薄祿 생선과 새우가 상에 가득하니 박한 봉록 아니요
잡원송죽야청풍匝園松竹也淸風 정원 두른 송죽 또한 맑은 바람 보내누나.
파서천권장하조破書千卷將何措 천권 서적 독파한들 어디에 쓰랴
감담여이시여공坎窞如夷是汝功 구덩이를 평지처럼 여김은 바로 네 덕이로다.
►여송呂宋과 과와瓜哇 여송은 필리핀 루손섬, 과와는 자바섬이다.
10
중구소금태모지衆口銷金太母知 많은 입이 쇠도 녹임은 태모께서 아실 일
총권하석막경의叢拳下石莫驚疑 뭇사람 주먹질과 돌팔매질 괴이하지 않아라.
인방겁이비증아人方怯耳非憎我 사람들이 두려워서 그러지 날 미워하는 것 아니며
천실위지욕한수天實爲之欲恨誰 하늘이 실로 이렇게 한 것이니 누구를 탓하랴.
북극성진여작일北極星辰如昨日 북극성과 뭇별 들은 어제와 똑같은데
서강풍랑경하시西江風浪竟何時 서강의 풍랑이 어느 때나 그치랴.
궁도지파흉회착窮途只怕胸懷窄 막다른 길에서 이 마음 옹색해질까 두려워
림해시문저립지臨海柴門竚立遲 사립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바다를 바라본다.
►태모太母 대왕대비.
여기서는 영조英祖의 계비繼妃 정순왕후貞純王后(1745-1805)를 말한다.
김한구金漢耉의 딸로, 1759년(영조 35) 왕비로 책봉되었다.
소생은 없었으나 사도세자思悼世子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세자 사후에 항상 벽파僻派 쪽에 가담하였고
순조 즉위 후 수렴청정을 하며 천주교 금지령을 내렸다.
정약용은 1801년(순조1) 3월 하순(40세)
유배지인 장기현에 이르러 마산리 교졸 성선봉의 집에 묵게 되었다.
그곳에서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를 여러 편 지었는데
이 시 역시 물정세태에 어리석은 자신을 비웃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10수에서
“많은 입이 쇠도 녹임은 태모께서 아실 일,
뭇사람 주먹질과 돌팔매질 괴이하지 않아라.”라고 하여
비록 비방을 당하고 있지만 자신은 떳떳한 처지임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