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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
호세아서 3:1-5
우리는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이 말은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가장 구분되는 특징이 바로 사랑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기독교가 말하고 있는 사랑은 과연 어떤 사랑입니까?
사람들에게 ‘사랑은 몇 종류가 있는 것 같습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은, 두 가지를, 다른 사람은 세 가지를, 혹은 네 가지, 여섯 가지, 아홉 가지, 열두 가지, 이십 가지, 심지어 어떤 사람은 사십여 가지 정도의 사랑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사랑은 네 가지 단어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단어는 '아가페'(Agape)입니다.
아가페는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일방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으로부터 인간에게 내려오는 사랑'이라든지 혹은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 등을 말합니다. 이 사랑은 다른 말로는 '베푸는 사랑'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 단어는 '필리아'(Philia)입니다.
필리아는 아가페와 반대로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사랑입니다. 이것은 '나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 주는 부모에 대한 사랑' '나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신 신을 향한 인간의 사랑' 등 나에게 유익을 주고 이익을 준 대상을 사랑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유아적 자아가 행하는 사랑'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 단어는 '스토르케'(Storge)입니다.
스토르케는 '건전한 교류'를 뜻합니다. 예를 들자면 '친구들 간의 우정' 혹은 '형제애' '동료 간의 의리' 등에 해당하는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에로스'(Eros)입니다.
에로스의 사랑은 그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남녀 간의 사랑’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에로스적인 사랑은 ‘남녀의 육체적인 접촉’이라는 통속적인 사랑도 포함하고 있는 사랑입니다.
이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단어가 바로 ‘아가페’입니다.
여러분은 ‘아가페’로 표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고 또 어떻게 경험해 오셨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첫째, 기대를 포기하고 하신 사랑입니다.
호세아서 3: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이 말씀을 보면 호세아 선지자에게는 어떤 아픔이 있었습니까?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음란한 여자였던 고멜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고멜은 아들 둘 딸 하나를 낳은 후 다른 사람과 눈이 맞아서 호세아를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이렇게 다른 사람과 눈이 맞아 남편을 버리고 떠난 후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고멜을 다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3:1절에서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라고 하시는 말씀을 보면 고멜이 호세아를 버리고 떠나간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너는 또 가서’ 전과 같이 다시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사람을 사랑하여 자신과 자녀와 가정을 버리고 떠난 아내를 다시 사랑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그것도 한 번의 실수가 아니고 아주 습관적으로 사랑을 배반하고 떠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는 또다시 가서’ 사랑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근거로 이런 사랑을 호세아에게 요구하고 계십니까?
1절의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라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해 오신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랑으로 너를 사랑해 주셨으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고 있는 너도 네가 받은 그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신을 섬길지라도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 아무 기대도 하지 않으시고 하신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 죄의 종이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슨 선한 것, 의로운 것, 신실한 것 등등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모가 그 자녀를 사랑할 때 아무 기대도 하지 않고 사랑해 주듯이, 그렇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그 백성 된 이스라엘을 사랑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무조건적인 사랑, 기대를 포기하고 하신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이 사랑을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요구하심에 호세아는 어떻게 반응을 보입니까?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이 말씀을 보면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남편이 아내에게 가질 수 있는 그 모든 기대를 포기하고 음녀가 된 그 아내를 다시 사랑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호세아서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기대를 포기하고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그만 기대라고 가지고 계셨더라면, 하나님은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대를 포기하고 사랑하셨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듭되는 불신앙과 범죄에도 계속 사랑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남편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사랑이 바로 이 사랑입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하라.”
사도 요한이 성도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사랑이 바로 이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러면 왜 사도 요한과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기대를 포기하고 사랑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에게 가지는 기대가 크면 클수록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대방에 대한 실망이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커진 실망의 마음이 우리 사랑의 마음을 막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경우를 만나든지,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기대를 버리고 사랑하는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남편이라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기대를 포기하고 고멜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저는 아직까지 기대를 포기하고 사랑하는 이 방법 외에, 언제나, 어떤 경우를 만나든지, 사랑하며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기대를 포기하고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우리의 본성과 어긋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다가도 때때로 그만둘까? 그만할까? 하는 생각이 수도 없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또 상대방이 내게 하는 대로 나도 그렇게 해 줄까? 하는 마음이 수도 없이 드는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여자 집사님의 경험
어떤 여자 집사님이 신앙이 없는 남편과 함께 30-40 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삶이 어떠했겠습니까? 그 고난, 그 어려움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여자 집사님에게 들은 말은 ‘나는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남편에게 할 만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직까지 남편이 회개하지 않고 있는 것은 남편의 완악함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남편만 바뀌면 우리 가정은 믿음 안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남편이 변하지 않고 있어서 문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 그런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자기의 신성을 부인하고, 모든 기대를 포기하고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피조물인 우리가 사랑하는 삶을 살려고 하면, 얼마나 자기를 부인하고, 기대를 버려야 하는지 잘 말씀해 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집사님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 집사님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남편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도 않고 사랑하려고 하니, 그 수고하고 애쓴 사랑들이 불완전한 사랑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정에 하나님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경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이 칭찬을 많이 했던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그 행위와 수고와 인내가 남달랐던 교회입니다. 주를 위해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않았던 교회입니다. 또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않았던 교회이고, 자칭 사도라 하는 거짓된 사람들을 시험하여 그 정체를 드러낸 교회였으며, 초대교회 이단이었던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했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주를 위해 이 많은 일들을 하다가 보니 사랑할 만한 사람들과 사랑할 대상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랑할 가치가 있는 사람들만 사랑하고, 니고라 당에 속한 사람들을 미워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에베소 교회를 향해 ‘처음 사랑’ 잃어버린 교회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처음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처음 사랑’은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사랑하시되 기대를 포기하고 일방적으로 사랑해 주신 그 사랑입니다. 이 사랑 안에서 아담 안에서 죄인 되었던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이 너무 놀라워서, 나의 지식, 나의 건강, 나의 삶, 아니 나의 생명까지도 하나님을 위해 바치겠다고 고백하며 믿음 생활을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에베소 교회도 그랬습니다.
에베소교회는 하나님이 기대를 포기하고 사랑해 주신 그 사랑 안에서 구원을 받은 후에, 자신들도 기대를 포기하고 에베소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사랑했던 사랑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에베소 교회는 나중에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않고, 자칭 사도라 하는 거짓된 사람들을 시험하여 그 정체를 드러내고, 니골라 당이라는 이단’에 대적하다가 보니, 이런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님도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에베소 교회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니골라 당의 악한 행위는 미워하셨지만, 니골라 당에 빠진 사람들은 기대를 포기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이 사랑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런데 에베소교회는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할 뿐 아니라, 니골라 당에 빠진 사람들까지 미워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에베소 교회를 향해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니골라 당에 빠진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기대를 포기하고 사랑하신 그 사랑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이런 에베소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엄위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촛대를 옮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촛대가 무엇입니까? 촛대는 교회를 말합니다. 그러면 교회를 옮기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처음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기대를 포기하고 사랑하신 사랑,’ 을 버린 에베소교회는 더 이상 교회일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모든 기대를 포기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의 백성일 수 있지만,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기대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할 사람들과 사랑하지 않을 사람들을 구별하며 산다는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며 살려면, 기대를 버리고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따라 우리도 기대를 버리고 사랑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꼭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우리에게 무슨 기대하실 것이 있으셔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목회자로 세워 주심도, 제게 무슨 기대할 것이 있으셔서 세워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주셨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고, 또 때때로 말씀해 주시고, 성령을 통해 주시는 은혜와 감동 안에서 이전과 다른 삶을 살도록 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도 잘난 척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예수 믿고 있다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쭐 델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직분을 받았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은혜를 받고, 은사를 받았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나서 그렇게 사랑해 주시고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분을 주시고, 은사를 주실 때, 무슨 특별한 기대를 하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잘 난 것이 하나도 없고, 기대할 것이 없지만, 은혜로 그런 것들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겸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부자가 되었어도 겸손할 수 있고, 능력과 은사가 넘쳐나도 겸손할 수 있고, 놀라운 역사를 이루는 삶을 살면서도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교만합니다.
자기가 잘나서 그렇게 된 줄 알고, 거만하고 건방을 떨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은 또 어떤 사랑입니까?
둘째, 사랑할 것만 생각하고 하신 사랑입니다.
호세아 3:4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이 말씀을 보면, 범죄 한 이스라엘이 징계를 받아, 이방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어떤 생활을 하게 될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가장 깊은 슬픔이 무엇입니까?
그 가진 믿음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며 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꼭 북한에 남아 있을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북한에 있는 성도들은 우리와 같이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삶을 살 수 없는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기회가 되어서 북한에서 온 사람으로부터 북한교회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공개적으로 믿음을 표현하며 살 수 없는 북한 성도들이 남한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자유롭게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가 북한 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국교회는 북한에서 어렵게 신앙으로 살고 있는 북한 교회를 잊고 있는데, 오히려 북한에 남아 있는 성도들이 남한에 있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을 듣게 되었을 때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때 제 마음속에는 많은 재산을 가진 나는 전혀 선을 행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웃에 사는 가난한 사람이 넘치는 선을 행하며 산다는 말을 들었을 때와 같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또 느낀 것은, 어쩌면 극한 고난 중에 있는 북한교회가 웅장한 건물을 자랑하고 있는 남한 교회보다 더 부유한 교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하나님께서 환난과 궁핍 중에 있었던 서머나 교회를 향해 실상은 네가 부유한 자라 하셨고, 물질적으로 부유한 교회였던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는, 가난하고 곤고한 교회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오직 사랑하실 것만 생각하는 그런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가지신 사랑이 이런 사랑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사랑할 것밖에 모르시는 분이신 것처럼 범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사랑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누구에게 사랑을 주면서 나도 준 만큼 받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받을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직 사랑하실 것만 생각하시는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부모의 사랑에 비겨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줄 부모가 없듯이,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면 뱀을 줄 부모가 없듯이, 하나님께서도 구하는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라고 말씀해 주신 일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이 하며 살고 있는 사랑을 보면 하나님과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시는데, 교회들이 하는 선행 들을 보면 그 목적이 이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기적인 목적으로 선을 행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미 그 상을 다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그런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성도와 교회가 하나님의 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바라는 성도라면 이 하나님의 보상을 바라보고 살라고 하셨습니다.
얼마 전 방송을 보니 어떤 노숙자는 자기 집도 있고, 은행에 저축해 놓은 돈도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숙자 대부분은 노숙 생활에 타성이 젖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그중에는 소수이지만 정말 어쩔 수 없이 노숙자가 된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소리를 듣고 도움을 주어야 할 사람과 도움을 주지 않아도 될 사람들을 구분하기 시작하면 이것이 노숙자를 향한 우리의 사랑을 막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병 고침을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너는 재산도 많고, 권세도 있으니, 의사를 찾아가 고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대해 주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런 삶을 사셨습니까?
사랑 그 자체 이신 예수님은 오직 사랑할 것만 생각하시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부자이든 가난한 자이든지 구분하시지 않으시고 사랑을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사랑하는 삶을 살려고 하면 예수님과 같이 사랑할 것만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다른 것은 다 하나님께 맡기고, 다 상대방의 양심에 맡기고, 오직 사랑할 것만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사랑해야 할 사람, 사랑하지 않아도 될 사람을 구분하다가 보니, 예수 믿고 처음에 가졌던 그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판단하려고 하지 말고, 구분하려고 하지 말고 오직 사랑할 것만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아내를 볼 때 내가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녀를 볼 때 내가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섬기고 공경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아니면 섬기고 공경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늘 섬기려고 하고 공경하려고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웃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다윗은 아주 신앙이 실실하였던 사람입니다.
이 다윗이 가졌던 소원이 무엇이었습니까? 범죄자들에게 주의 은혜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죄를 범한 후, 범죄 한 자신을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한 후, 이 사랑을 범죄자들에게 전해 주는 삶을 살고자 소원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도끼로 일가족을 다 죽인 고재봉과 같은 사람을 사랑하여서, 사형수로 있는 그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을 죽이고 그 인육을 먹었다는 지존파와 같은 사람들을 사랑하여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런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도 사랑하셔서, 예수 믿고 구원받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사랑할 것만 생각하시고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맺게 한 사랑의 열매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영적으로 한 가족이 된 성도들과 물건을 통용하고, 그 재산을 팔아 필요에 따라 나누어 줄 수 있었습니까? 자기 가족을 생각하고, 자기의 안락한 미래를 생각하면 이런 일은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일은 예루살렘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따라 자기들도 오직 사랑할 것만 생각하였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두 가지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창조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은 한 가족입니다. 다른 하나는 구속안에서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아 영적으로 한 가족이 된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육신에 속하여 자기 육신의 혈육만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영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 안에서 모든 인류를 사랑해야 합니다. 또 구원 안에서 한 가족 된 성도들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되 하나님을 따라 오직 사랑할 것만 생각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행하며 살아야 할 사랑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 세상 속에 이루어 나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셋째, 회복에 그 목적을 두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신 사랑은 첫째, 기대를 포기하고 사랑하신 사랑이었습니다. 둘째, 오직 사랑할 것만 생각하고 하신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런 사랑으로 사랑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여 깨어진 관계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사랑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시려는데 목적을 두고 그렇게 사랑해 주신 것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사랑으로 인류를 사랑해 오신 것입니다. 아멘.
그러면 하나님이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해 주신 결과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입니다. 5절을 보면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의 결말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랑 안에서 하나 됨에 있습니다.
미음은 다툼을 일으키고 분쟁을 일으켜도, 사랑 안에는 하나 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복음 성가 중에는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라는 아름다운 노래가 있습니다. 또 요한복음 17장을 보면 예수님의 제사장적인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심적인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우리 안에 있어서 하나로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사랑 안에는 깨어진 관계를 하나로 회복시켜 주는 마력이 있습니다.
사랑은 깨어진 부자 관계를 회복해 주고, 깨어진 부부관계를 회복해 주는 힘이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하나 되는 이 회복 안에서 우리는 이 땅에 존재하는 천국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는 그 회복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며 살게 되는 가장 큰 복은 물질이 아닙니다.
명예도 아닙니다. 권세도 아닙니다. 영광도 아니고, 장수도 아닙니다. 우리가 누리며 사는 가장 큰 복은,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화평의 복입니다. 아멘.
고린도후서 5:17-18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저는 우리 삶 속에 이것보다 더 큰 복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의 복을 누리며 사는 우리들에게 화목의 직분을 주셨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5장에서는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화목 속에서 누리게 되는 평화, 기쁨, 만족보다 더 큰 은혜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믿음 안에서 이 큰 복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기대를 포기하고 사랑해 주셨고, 사랑할 것만 생각하면서 사랑해 주셨고,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의 회복에 그 목적을 두고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주께서 주신 화평의 직분, 회복의 직분을 수행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습니까?
첫째, 기대를 포기하고 사랑하신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둘째, 오직 사랑할 것만 생각하고 사랑하신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셋째, 깨어진 관계의 회복을 그 목적으로 하신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 교회의 이름은 사랑의 교회는 아니지만, 이런 사랑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어서, 아직도 이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는 삶을 살아가는 2026년도를 만들어 가는 성도들로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