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깬 여동생
내게는 8살 밑의 남동생과, 10살 밑의 여동생이 있다. 내가 고1 때 막내 여동생은 7살 아기에서 갓 벗어난 동생이었다. 나는 집을 떠나 I 시 학교 기숙사에서 기거하며 학교 다녔던 때다. 어쩌다 가끔 집에 가면 늦게까지 엄마 젖에 매달려있던 막내 여동생. 엄마는 너무 늦게까지 젖을 못 뗀 동생의 젖을 끊고자, ’아까징기‘라는 빨간색 약을 가슴에 발랐다. 낮에는 안 먹더라도 무의식 속에 밤에 다시 젖을 빨아 먹어서 말짱 도루묵이 되곤 했다. 엄마 품에서 늦게까지 젖을 먹던 여동생의 눈이 유난히 까맣게 빛나서, 엄마는 막내의 눈을 보며 오목한 까만 눈이 이쁘다고 말하곤 했다. 몸이 유난히 가냘프고 약했던 엄마는 그래도 막냇동생이 젖을 먹을 때 표정이 무척이나 행복해 보이셨다.
아기였던 동생들이 어느덧 커서 남동생은 60을 바라보고, 여동생도 곧 오십 대 말이 되었다. 아니 그리 작았던 동생들이 언제 큰 건지 세월 유수라더니 그 말이 딱 맞다. 남동생은 어려서부터 충실한 크리스천이었는데 중학교 시절은 아예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촌 동네라 인물이 없던 곳에서 남동생은 어려서부터 조그만 초등 동생들의 교회 오빠가 되어 지도 했다. 남동생은 늘 바빠서 내가 공부를 가르칠 시간이 없었다.
초등 6년이던 여동생이 집에서 좀 여유로워 그때 여동생의 공부를 봐주고자 했다. 난 그때 이미 대학생이었다. 그리고 좀 있으면 중학교에 들어갈 여동생이 반 배치고사를 보는데, 좋은 성적을 내고자 남은 한 달 동안 맹훈련하고자 했다. Y시 서점에서 총정리 문제집 2권을 사다 읽고 가르치는데, 시골에서 공부 안 하고 자유롭게 놀던 아이 가르치니 어찌나 힘들던지, 때론 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심지어 목소리가 약간 갈라지기까지 했다. 소리가 높아지면 밖에서 일하시던 할아버지 왈,
“아니 남동생을 가르쳐야지 왜 자꾸 여동생만 가르치냐고.”
라고 소리치곤 했다. 한국은 5·60년 전 그때까지도 많은 어른들은 남아 선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난 뚝심 있게 계속 여동생을 지도했다. 여동생은 글짓기를 잘해서 여주 관내에서 최우수상도 타고 제법 글재주도 있는 똑똑한 아이였다. 한데 이상하게 숫자계산에 약해서 산수를 가르칠 때 많이 애를 먹었다. 그래서 산수 공부할 때마다 야단 아닌 야단치는 일이 생겼다.
그러던 어느날 건넌방에서 공부를 가르치는 날이었다. 엄마가 ’양평장날‘ 시골에 두어 번 왔다 갔다 하는 양평행 차를 타고 양평 장을 가셨다. 아마 방학 시즌이라 공부를 거의 하루 종일 했다. 오후 시간이었는데 산수를 가르치는데 반복된 설명에도 계산을 못하고 이해 못해서, 그날은 엄마도 없고 해서 아마 내 손으로 동생 등을 쳤던가 아무튼 분란이 나고, 화가 난 동생이 일어나 책상 앞에 있던 장롱 큰 거울을 발로 차서 산산조각을 내고 말았다. 깜짝 놀라서 멍하니 있다가 곧 엄마가 시장에서 돌아올 시간인 걸 알고, 빨리 수습해야 했다. 동생에게 나는 급하게 말했다.
“동생아, 엄마 곧 올 시간이다. 거울 깨진 것 알면 너 매타작 난다.
빨리 같이 치우자. 넌 내가 책임지고 엄마에게 말 잘해놓을게.”
그때 나는 대학생이니 엄마가 나를 때릴 순 없으실 테고, 아마 어린 동생이 엄청나게 깨질 것 같았다. 급히 치우고 마침 버스 올 시간 되어 집 밖으로 내달으니 좀 있으니까, 버스가 온다. 저녁 앞두고 오는 차이니 오후 5시쯤 되고 막차였다.
엄마가 내리자 달려 나가 이래저래 하여서 공부 가르칠 때 내가 과하게 혼내서 화가 나서 동생이 거울을 찼다. 동생은 하나도 잘못 없고 다 내 잘못이다. 동생 혼 내지 말라 등등. 집에 들어오기 전 내 설명을 이미 들은 엄마는 깨진 거울 앞으로 가시더니
“시상에, 시상에 어찌 거울을 다 찬다냐” 하시면서 혀를 끌끌 차면서 어이없어 웃으시고 우리가 덜 치운 유리 조각을 깨끗이 안전하게 치우셨다. 치우면서 몇 번을 어이없어 웃으셨다. 그러나 동생이 맞거나 하진 않았다. 난 한숨을 돌리고 여동생이 화남 아주 무섭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나도 조심해서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안 남은 배치고사를 위해 계속 공부를 해서 마침내 고사를 잘 치렀다. 바람대로 1등 성적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좋은 성적으로 학교에 들어갔을 것이다. 시골 학교지만 동생은 들어가서도 선두 그룹에 속해 공부했으니까. 그리고 리더십 있어 반장, 부반장을 훌륭히 해내었고, 노래도 잘해 아마 독창 대회를 나갔는데 가사 잊어버려 노래를 부르다 하차했다나 그래서 한참을 웃었다.
옛날얘기를 하게 되면 언제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거울 깬 이야기. 나중에 어떻게 거울 깰 생각을 다 했냐고 물으니, 언니가 머리를 때려서 너무 화가 나 폭발했다고 했다. 하지만 난 내가 어디를 건드렸는지 솔직히 생각 안 난다. 그간 오랫동안 가르쳐 온 것에 누적되어 온 감정이 폭발했을 것이다. 그래도 꾹 참고 잘 배웠던 동생에게 지금 장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때 딱 한 번 그랬으니까. 동생도 공부 잘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던 것이라고 믿는다.
거울 깬 그 동생은 매사 뚝심이 있다. 결혼도 남들이 원하는 바대로가 아닌 본인이 뜻한 바대로 밀고 나갔다. 그 당시 저도 가난, 상대도 가난한 사람 만났지만 굴하지 않고 이겨내 지금은 남편은 남편대로 직장에서 명예를 얻었고, 동생도 믿음 생활에 신용을 얻어 권사로 바삐 활동 중이다. 이런 뚝심은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 삶의 철학이 확실한 사람이 많다. 학생도 지도하고 해외 봉사도 나가 적극적으로 인생을 살아내며 자기 인생의 개척자되어 잘 살고 있다. 그리고 가장 훌륭한 일은 친정아버지께 가장 효녀로 아버지 병원을 모시고 다니고, 철 따라 보기 좋은 장소 구경시켜 드리고, 맛난 것도 사드리고, 몸소 효를 실천하고 있다. 언니로서 고맙고도 미안하다. 동생아 파이팅! 매사 승승장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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