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한말 숭례문 모습.
임진왜란 때 일본은 가토 기요마사 부대를 선봉으로 숭례문을 통해 서울에 입성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왜군이 어떻게 단 19일 만에 부산에서 서울을 점령할 수 있었던 걸까. 부산과 서울의 거리는 약 400㎞이다. 왜군은 도보로 매일 21㎞를 진군했다는 얘기다.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치르지 않고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쳐밀고 올라왔던 것이다.
1592년 4월 13일 부산포로 상륙한 왜군은 5월 2일 카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부대를 선봉으로 숭례문을 통해 유유히 서울로 입성했다.
대참화는 오랜 평화가 원인이었다. 고려 고종 18년(1231) 몽골과의 40년 전쟁 이후, 300년 넘게 큰 외침이 없었다. 무방비 상태로 당한 임진왜란은 우리에게 전대미문의 인적·물적 피해를 입혔다. 거의 모든 고을은 쑥대밭이 됐고 인구의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왜 1군사령관이요 선봉장인 고니시 유끼나가
우리는 임진왜란이 사전에 무수한 침략의 징조가 있었지만 조선조정이 이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해 자초한 비극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전쟁 기간 내내 전란수습을 총괄했던 서애 유성룡(1542~1607)은 이와는 다른 얘기를 한다.
그의 역저 <징비록>에서 "조정이 조선을 침략하려는 일본의 속셈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김성일과 황윤길의 보고가 상반되기는 했지만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했다는 것이다.
조선조정은 우선 남부지방 사정에 밝은 인물을 뽑아 삼도(충청, 전라, 경상)의 방어를 맡겼으며 무기를 준비하고 성과 해자를 축조하도록 했다. 특히 왜와 인접한 경상도에는 많은 성을 쌓고 영천, 청도, 합천, 대구, 성주, 부산, 동래, 진주, 안동, 상주의 병영을 신축하거나 고치게 했다.
그런데 조정도, 백성들도 너무 오랜 기간 평화에 길들여져 있었다. <징비록>은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이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태평시대에 당치 않게 성을 쌓느냐"는 상소가 빗발쳤다. 국왕의 자문기관인 홍문관도 공사의 부당함을 주장하고 나섰다.
활쏘기.
19세기말, 20세기초. 18세기 후반의 실학자 박제가는 "우리 민족이 활쏘기에 뛰어난 것은 겁이 많아서"라고 분석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병법의 활용, 장수 선발, 군사 훈련 등의 정비는 논의조차 못했다. 유성룡은 유사시 각 향촌에서 군사를 군사 거점에 집결시켜 중앙에서 파견된 장수가 지휘하도록 하는 '제승방략(制勝方略)'의 헛점을 거론하고 있었다.
유성룡은 "군사가 모여 있더라도 지휘관이 내려오기 전에 적의 공격을 받으면 지리멸렬할 것이니 각 지역 수령들에게 군사통제권을 부여해 적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시행해오던 체제를 바꾸기는 힘들다"는 반론이 지배적이었다. 결국 유성룡의 제안은 폐기됐다.
그러던 와중에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사신으로 조선에 왔다가 돌아간 뒤, 부산포에 머물던 왜인들이 모조리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왜의 20만 대군이 부산에 들이닥쳤다.
오랜 내전으로 전쟁 경험이 풍부한 데다 조총이라는 신무기로 무장한 왜군을 맞아 조선군은 애초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경 방어를 책임진 조선의 장수들은 하나 같이 무능한 겁쟁이였다.
<징비록>에 의하면,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병영 울산) 이각, 경상좌수사(수영 부산 수영구) 박홍, 밀양부사 박진, 김해부사 서예원, 순찰사 김수는 적의 규모를 보자 겁을 집어먹어 달아나 버렸다.
경상우수사(수영 거제) 원균은 많은 수의 배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멀리서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는 것을 쳐다볼 뿐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부산진 순절도(釜山鎭殉節圖), 대한민국 보물 제391호 - 정발이 전사한 부산진 전투
동래부순절도-송상현이 순절한 동래성 전투
다만, 부산포 첨사 정발(1553~1592)이 절영도(영도)에서 사냥 도중 다급히 성으로 복귀해 적을 맞아 싸우다가 죽었고 또한 노비 출신의 다대포 첨사 윤흥신이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리고 평생 글만 읽던 동래부사 송상현(1551~1592)이 동래성 성루에서 반나절 동안 고군분투하다가 왜적의 칼에 장렬히 순국했다.
부산진구 송상현 광장의 송상현 동상
전쟁 초반 어처구니없는 일들은 도처에서 벌어졌다. 예천의 용궁현감 우복룡은 병마절도사 소속 군사 수백 명을 반란군으로 몰아 도살했다. 군사들은 병마절도사의 공문을 내보였지만 소용 없었다.
학살당한 가족들이 원통한 사정을 울음으로 호소했으나 묵살당했고 우복룡은 끝까지 고을을 지켰다는 이유로 훗날 안동부사 자리에 오른다.
경상순변사 이일은 상주에서 적군이 근접했다고 알린 군관을 "망령된 보고로 군을 동요 시킨다"며 목 베었고, 조선군 총사령관 신립 역시 충주에서 적의 접근을 보고하는 군관을 죽였다. 그러나 그들의 말 대로 이미 적들은 턱밑에까지 와 있었고 이일과 신립의 정예병은 적의 급습에 우왕좌왕하다가 몰살 당한다.
맞붙어 싸우는 백병전에서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했던 왜군에 오합지졸의 조선군은 지리멸렬, 백전백패였다. 수원전투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패전이었다.
조선군 1만 명이 설욕을 다짐하며 수원에 운집했다. 충청순찰사 윤선각, 전라순찰사 이광, 경상순찰사 김수의 군사들이었다. 그런데 왜군 기병 단 6기에 어이없는 패배를 했다.
구한말 흥인지문 전경.
흥인지문 쪽으로는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가 들어온 것으로 전해진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상도 의병 정경운(1556~1610)이 쓴 <고대일록>은 "말 탄 왜병 여섯이 깃발을 들고 칼을 휘두르며 달려 나오자 1만이 넘는 우리 군사가 한꺼번에 대열을 이탈해 갑옷과 활을 버리고 달아났다"고 서술했다.
적병이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자 모두들 죽음의 공포에 빠져 도망가기 바빴던 것이다. <고대일록>은 "버려진 군량, 활과 화살, 깃발과 북 등이 언덕을 이룰 만큼 널렸다. 그 밖에 잃은 것들을 모두 기록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기가 막혀했다.
그러나 백병전 대신 익숙한 지형에 숨어서 활을 쏘는 게릴라전에서는 승전의 소식이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음은 <고대일록>의 내용이다.
"6월 9일 묘시(오전 5~7시)에 현풍의 쌍산강에 적선이 내려왔다. 황응남이 정병 30여 명을 거느리고 주요 길목에 숨어 있다가 적선이 가까이 이르자 한꺼번에 활을 쐈다. 배에 탄 적병 80여 명과 조선 여자 대여섯 명에게 화살을 맞혔다. … (중략) …
배에 가득 타고 있던 왜적 중에서 두세 명만이 살아 남았다. … (중략) …
이튿날 또 강 언저리에서 싸워서 왜적 3명의 수급을 베고 베와 비단 등 50여 바리를 빼앗았다. 빼앗은 물건 속에는 왕과 비빈의 비녀, 화관, 옷과 이불, 한양에서 가져온 서책, 사가의 보물과 장식품 등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조선의 무기는 전통적으로 활에 대한 의존성이 높았다. 백병전을 피하기 위해 멀리서 활은 쏘는 데 치중했던 것이다. 후대의 실학자 박제가(1750~1805)는 <북학의>에서 그런 습성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는 "활을 멀리 쏘는 자는 접전을 하기도 전에 미리 겁을 내는 자"라고 개탄했다.
어쨌든 백성들도 초기의 패닉상태에서 서서히 벗어났다. 이제 일반 백성들도 스스로 모여 지세가 유리한 곳을 골라 매복했다가 오가는 소규모 적들을 공격했던 것이다. 왜적의 목을 베어 바치는 이들도 줄을 잇게 됐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 27. 1만명의 조선군, 왜군 6명에 궤멸되다[임진왜란- 대환란1] / 매일경제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