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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낭만주의 음악을 대표하며 유럽사회에서 환영 받은 최초의 러시아 음악가
표트르 차이콥스키는 1840년 러시아 우랄산맥의 산악지방에서 러시아군 장교출신이자 광산기술자인 아버지와 프랑스인의 피가 흐르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다
5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면서 음악에 재능을 보이는 그는 프랑스인 가정교사에게서 독일어 프랑스어 등 다양한 교육을 받는다
체계적인 음악 교육도 없고 음악가로서의 생활이 쉽지않은 시절이라 법률학교에 진학하여 법률서기 생활을 시작한다
22세에 유명한 피아니스트 안톤 루빈시테인이 주관하는 러시아 최초의 서양음악 교육기관인 페트르스부르크(=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1기생으로 입학하여 처음으로 유럽 음악을 배운다
3년후에는 모스크바에 개설되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초빙 받는다
작곡 활동과 함께 음악 비평가로서의 활동도 활발히 한다
러시아 민족음악을 주장하는 러시아5인조와 교류를 하면서 러시아 전통음악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 민족음악가이라기 보다 러시아 낭만주의 음악가로 보는 게 타당하다
36세 때 철도회사 부호의 미망인인 나데츠다 폰 메크 부인을 알게 된다 14년 동안 둘은 만난 적도 없이 천통 이상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작곡 활동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충분한 지원을 받는다
이 시절의 작품으로 '백조의 호수' '피아노 협주곡 1번' '바이올린 협주곡' '1812년 서곡'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등을 들 수 있다
37세 때 자살하겠다고 협박할 정도로 집착하는 밀류코바와 결혼하나 2달 만에 파경을 맞는다 동성애자라는 소문 때문에 위장 결혼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40세에 모스크바 박람회를 위하여 '1812년 서곡'을 6주 만에 작곡한다 요란하기만 하고 별로 내키지 않은 작품이라고 주변에 푸념하나 오히려 그의 사후에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
이 곡은 그가 작곡하기 68년 전인 1812년 러시아 제국의 알렉산드로 1세 황제와 프랑스 제국의 나폴레옹 1세 황제와의 전쟁을 담은 곡이다 러시아에서는 조국전쟁이라 부르고 프랑스에서는 제2폴란드전쟁이라 부른다
----------- 당시 세계사를 살펴보자
땅은 넓으나 가난한 러시아 제국은 유럽의 명문 합스부르크 왕실과 교류하면서 이제 막 유럽 세계에 명함을 내밀기 시작한다
에스파냐와 잉글랜드를 제외한 전 유럽의 땅을 장악한 강력한 나폴레옹 1세 황제의 프랑스 제국과 몇 차례의 무력 충돌 끝에 서로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평화조약을 맺는다
러시아 제국도 나폴레옹1세가 주도하는 대륙봉쇄령 - 유럽의 모든 국가는 잉글랜드와의 교역을 금지하는 명령- 에 같이 참여한다 그러나 자국산 농산물을 수출하지 못하면서 경제적으로 심한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 나폴레옹 1세 황제를 견제해야 한다는 주변의 부추김에 1810년 12월 대륙봉쇄령에서 탈퇴한다
1812년 6월 오래전부터 러시아를 최후의 적으로 생각하던 나폴레옹 1세 황제는 60만의 대군 - 프랑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폴란드 등의 유럽 연합군 - 을 모아 러시아로 진군한다
속전속결로 짜르 (러시아의 황제) 의 항복을 받겠다는 그의 전쟁 계획은 장마와 전염병(발진티부스)으로 속도가 느려진다
모스크바로 진군하는 동안 노예 같은 농부 몇명씩 드문드문 사는 허허벌판 넓은 땅에서 현지보급에 차질이 생긴다
러시아 군대는 치열한 반격과 함께 후퇴를 하면서도 곡식 한톨 남기지 않고 불에 태워버리는 초토화 전술을 펼친다
이미 적지않은 병사를 잃은 나폴레옹 군대는 굶주림에 지친 채 9월 모스크바에 입성한다
러시아 제국의 수도 모스크바는 여지껏 본 적 없는 거대한 도시이나 이미 주민도 사라지고 먹을 것도 없는 텅 빈 거리일 뿐이다 심지어 대규모 방화로 제대로 된 건물조차 찾기 힘들다
페테르스부르크로 피신한 알렉산드로 1세 황제는 모스크바를 점령한 나폴레옹 1세 황제의 거듭된 항복 요구를 무시하며 계속 시간을 끈다
5주가 지나고 나폴레옹 병사들이 고양이를 잡아 먹으러 길바닥을 헤매고 다닐 무렵 하필 동장군이 일찍 찾아온다 겨울나기 준비를 하지 않은 나폴레옹 군대는 결국 퇴각을 결정한다
영하 수십도의 얼어붙는 눈보라 속에서 굶주리며 헤매이는 나폴레옹 병사들을 러시아 기병대와 주민들의 끊임없는 추격에 계속 쓰러진다
60만의 나폴레옹 병사가 불과 6개월 여만에 3만 여명만 살아서 돌아간다
다음해 1813년 이번에는 러시아 군대가 프로이센군과 함께 프랑스 파리를 함락시킨다 러시아의 힘을 보여주면서 나폴레옹 황제를 몰락시키는 순간이다
----------- 다시 차이콥스키로 돌아가자
이 곡은 프랑스 국가도 나오고 치열한 전투 장면을 연주하다가 결국 조국 러시아의 승리를 축복하면서 마무리된다
실제의 교회 종과 대포가 사용되어 특이한 주목을 받는다 음악가와 군인중에서 누가 대포를 쏠 거냐를 두고 주장이 엇갈린 적도 있을 정도다
오늘 날에는 오디오 기기를 평가할 때 이 곡의 대포소리를 레퍼런스하기도 한다
44세에 니콜라이 루빈스테인을 추모하며 '피아노3중주'를 작곡한다
알렉산드로 3세 황제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 등 유럽 전역에 걸쳐 러시아 음악을 알리는 연주여행을 한다 브람스 그리그 등과 교류를 한다
50세에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발표하나 반응은 별로이다
1893년 페테르스부르크에서 '교향곡 6번-비창'을 발표하고 1주일 만에 별세한다 53세이다 8천여명의 시민들의 애도 속에 한 수도원 묘원에 안장된다
그의 사인은 오랫동안 콜레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비소 성분이 확인되어 자살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타고난 내성적인 성격에 어린 시절 가정교사와의 이별 기숙학교의 기억 어머니의 이른 별세 금지된 동성애와 남자 조카에게서 느낀 감정으로 인한 죄책감 메크 부인의 갑작스런 후원 중단 등등이 거의 평생 그를 괴롭혀왔다
그는 번잡한 모스크바나 페테스부르크보다 전원적인 우크라이나를 좋아하였고 작품의 영감도 거기서 많이 얻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교향곡 6번-비창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1812년 서곡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등이다
차이콥스키보다 불과 1년 후 프라하에서 또다른 위대한 음악가가 태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