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보성군(寶城郡) 경계까지 48리, 서쪽은 강진현(康津縣) 경계까지 12리, 북쪽은 나주(羅州) 경계까지 50리, 능성현(綾城縣) 경계까지
40리, 남쪽은 바다까지 15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6리다.【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오차현(烏次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오아(烏兒)로 고쳐 보성군(寶城郡)에 딸린 현이 되었다. 고려 때에 정안(定安)으로 고쳐 영암군(靈巖郡)에
예속시켰고, 인종(仁宗) 때에 공예태후(恭睿太后 인종 왕비) 임씨(任氏)의 고향이라 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부(府)로 승격시켰다.
원종(元宗) 6년에 회주(懷州)로 고쳐 목(牧)으로 올렸으며, 충선왕(忠宣王) 2년에 다시 장흥부(長興府)로 하였다. 후에 왜구로 말미암아
임시로 내지(內地)에 옮겼다가 본조 태조 원년에 수령현(遂寧縣)의 중령산(中寧山)에 성을 쌓아 다스리는 곳으로 하였다. 태종 13년에 규례에
따라 도호부로 하였고, 이듬해 성이 좁다하여 도로 수령현의 옛터로 다스리는 곳을 옮겼으며, 세조 때에 비로소 진(鎭)을
설치하였다.
【진관】 군(郡) 1
진도(珍島). 현 2
강진(康津)ㆍ해남(海南).【관원】 부사ㆍ교수
각
1인.【군명】
오차(烏次)ㆍ오아(烏兒)ㆍ정안(定安)ㆍ정주(定州)ㆍ관산(冠山)ㆍ회주(懷州).
【성씨】 본부 임(任)ㆍ조(曺)ㆍ혜(嵇)ㆍ오(吳)ㆍ정(丁), 이(李)
덕은(德恩). 송(宋)
염주(鹽州). 최(崔)
탐진(耽津)ㆍ화순(和順). 고(高)ㆍ박(朴)ㆍ승(乘)
모두 속성(續姓)이다. 회령 마(馬)ㆍ형(邢)ㆍ이(李)
계(季)라고도 한다. 주(周)ㆍ성(成), 백(白)
직산(稷山). 수령(遂寧)
위(魏)ㆍ박(朴)ㆍ조(曺)ㆍ함(咸).
장택(長澤) 임(林)ㆍ고(高)ㆍ윤(尹)ㆍ오(吳), 선(宣)
보성(寶城). 안양(安壤) 박(朴)ㆍ백(白).
어산(語山) 임(任).
유치(有恥) 표(表).
정화(丁火) 신(申).
【풍속】 옛날에 낙토(樂土)라 일컬었다. 백성은 순박하고
일은 간략하다.
모두 이색(李穡)의 기문.【형승】 땅이 큰 바다에
임하였다.
임종선(任從善)의 기문. 삼면이 넓고 아득한 바다이다.
최경지(崔敬止)의 시에, “아득히 넓은 바다로 삼면이 물인데, 푸르고 두터운 땅에는 얼마나 산이 많은고.”
하였다.【산천】 수인산(修因山)
부의 북쪽 10리에 있는 진산이다. 위에
돌성이 있다. 자세한 것은 강진(康津)의 고적 아래에 보인다. 중령산(中寧山)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장원봉(狀元峯)
읍성(邑城)의 서쪽에 있다. 억불산(億佛山)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천관산(天冠山)
부의 남쪽
52리에 있다. 예전에는 천풍(天風)이라 불렀고, 혹은 지제(支提)라고도 하였는데, 몹시 높고 험하여 가끔 흰 연기와 같은 이상한 기운이
서린다. 사자산(獅子山)
부의 동쪽 9리에 있다. 부암(婦巖)
혹은 망부석이라도 일컫는데, 억불산 산허리에 있다. 가지산(迦智山)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용두산(龍頭山)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착두산(錯頭山)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웅점(熊岾)
착두산 동쪽 5리에 있다.작천(鵲川)
영암군(靈巖郡)
월출산(月出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강진현의 북내상(北內廂) 서남쪽을 지나 부의 남쪽 6리에 이르러 수령천과 합쳐 강진의 구십포(九十浦)로
들어간다. 예양강(汭陽江)
부의 동쪽 성문 밖에 있다. 바다
부의 동남쪽 16리에 있다. 수령천(遂寧川)
예양강(汭陽江)이라고도
하는데, 가지산(迦智山)에서 나와 부의 북쪽 2리를 지나 돌아 동쪽으로 흐르고, 또한 서남쪽으로 흘러 성암(省巖)에 이르러 강진현의 구십포와
합하여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죽포(竹浦)ㆍ관음방포(觀音方浦)ㆍ돈도두포(豚道頭浦)
모두 옛
장흥에 있다. 천포(泉浦)
부의 동쪽 40리에 있는데, 어량이 있다.
금당도(金堂島)
둘레가 24리이다. 동도(童島)
둘레가
2리이다. 득량도(得良島)
둘레가 10리이다. 이상은 모두 부의 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횡간도(橫看島)ㆍ벌라도(伐羅島)
둘레가 60리. 산이도(山伊島)
둘레가 90리이다. 소랑도(小狼島)
둘레가 1리이다.
대랑도(大狼島)
둘레가 6리이다. 대화도(大花島)
둘레가
42보이다. 대저도(大猪島)
둘레가 3리이다. 우도(牛島)
둘레가 4리이다. 화도(花島)
둘레가 12리이다.
내덕도(來德島)
둘레가 30리이고, 목장이 있다. 이상은 모두 부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토산】
생강ㆍ옻ㆍ유자ㆍ비자ㆍ치자ㆍ석류ㆍ꿀ㆍ낙지ㆍ농어ㆍ물개ㆍ숭어ㆍ전복ㆍ굴ㆍ오징어ㆍ표고ㆍ송이ㆍ맛[甘蛤]ㆍ소금ㆍ우뭇가사리ㆍ참가사리[細毛]ㆍ은어[銀口魚]ㆍ홍합ㆍ미역ㆍ김ㆍ감태ㆍ매산ㆍ황각(黃角)ㆍ오매(烏梅)ㆍ죽전(竹箭)
부의 동쪽 정화리(丁火里) 및 부 안의 남산(南山)에서 나온다.【성곽】
장녕성(長寧城)
곧 읍성이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9백 4자, 높이가 8자이며, 안에 샘이 17개,
못이 3개가 있다. 장흥의 장(長)과 수령의 녕(寧)의 두 글자를 따서 성의 이름을 지은 것이다. 하연(河演)의 기문에 있다.
회령포성(會寧浦城)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천 9백 60자, 높이가 10자이고, 안에 샘이 1개가
있다.【관방】 회령포영(會寧浦營)
부의 남쪽 72리에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인.
【봉수】 억불산 봉수
동쪽으로 전일현(全日峴)에 응하고,
남쪽으로 천관산(天冠山)에 응하며, 북쪽으로 강진현의 수인산(修因山)에 응한다. 전일현(全日峴) 봉수
부의 동쪽 36리에 있다. 동쪽으로 보성군 정흥사(正興寺)에 응하고, 남쪽으로 천관산에 응하며, 서쪽으로 억불산에
응한다. 천관산 봉수
동쪽으로 전일현에 응하고, 서쪽으로 강진현의 남원포(南垣浦)에 응하며,
북쪽으로 억불산에 응한다.【누정】 청화루(淸和樓)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 임종선(任從善)의 기문에, “이 부는 처음에 정안현(定安縣)으로 천관산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 고읍(古邑)이라는 것이 곧 그것이다.
이 현 사람 중서령 정안공(中書令定安公) 임원후(任元厚)의 딸이 인종(仁宗)의 왕비가 되어 아들 셋(의종(毅宗)ㆍ명종(明宗)ㆍ신종(神宗))을
낳았으므로 승격시켜 장흥부(長興府)로 하였다. 땅이 큰 바닷가에 있으므로 자주 왜구의 해를 입어 임인년에 수령현(遂寧縣)으로 격이 내려졌는데
그것이 곧 지금의 부(府)이다. 그런데 기미년에 영일(迎日)의 정효완(鄭孝完)이 이곳 원이 되어 황폐하고 퇴락한 것을 수리하면서 객관 동쪽에
누각을 세웠는데, 공사가 끝나기 전에 경질되어 가고 동래(東萊)의 정여(鄭餘)가 교대로 와서 이내 완성시켰다.……” 하였다. ○ 허종(許琮)의
시에, “차가운 하늘에 기러기 날음을 객이 먼저 아니, 바로 시내와 산에 해가 저물려 하는 때로구나. 기쁘게 각 머리를 향하여 좋은 달을
맞이하니, 티끌 묻은 얼굴이 맑은 못에 비침을 부끄러워 하노라.”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산은 지는 해를 머금고 항상 난간을
마주하고, 수풀은 흐르는 샘을 보내어 가늘게 못으로 들어가네. 고국을 떠난 한 해에 집은 먼 데 있고, 긴 하늘 만리에 새도 더디 돌아오네.”
하였다. ○ 김영유(金永濡)의 시에, “물가의 푸른 숲은 숨었다 비쳤다 하고, 성을 둘러 있는 긴 대는 푸르게 우거졌네. 앞마을엔 아득히 연무가
비끼었고, 동녘 재는 높이 솟아 해 뜨기가 더디구나.” 하였다.동정(東亭)
예양강 동쪽
언덕에 있다. 부사 변포(卞袍)가 세웠다.【학교】 향교
부의 남쪽 3리에
있다.【역원】 벽사역(碧沙驛)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본도에 예속된 역은
다음 9곳이다. 가신(可申)ㆍ파청(波靑)ㆍ양강(楊江)ㆍ낙승(落昇)ㆍ진원(鎭原)ㆍ통로(通路)ㆍ녹산(綠山)ㆍ별진(別珍)ㆍ남리(南利). ○ 승(丞)
1인. ○ 이색의 시에, “바다는 벽사역에 가깝고 하늘은 황보성(皇甫城)에 열렸도다. 《시경》의 홍안(鴻鴈) 편을 노래하니 길이길이 편안히 살게
되었구나.” 하였다. 『신증』 금상 15년에 승을 없애고 찰방을 두었다.만수원(滿水院)
부의 동쪽 25리에 있다. 장릉원(長綾院)
부의 동쪽 60리에
있다. 서덕원(西德院)
부의 남쪽 13리에 있다. 비자지원(榧子枝院)
부의 북쪽 45리에 있다. 동덕원(東德院)
부의 동쪽 40리에
있다. 성암원(省巖院)
부의 남쪽 10리에 있다.【불우】
보림사(寶林寺)
가지산(迦智山)에 있다. 신라의 사마금영(司馬金穎)이 지은 보조선사(普照禪師)의
탑비명(塔碑銘)이 있다.천관사(
天冠寺)
천관산에 있다.
○ 중 정명(靜明)의 기문에, “천하를 통한 일기(一氣)가 쏟아져 내와 개천이 되고, 쌓여서는
산을 이루었다. 영(嶺)의 남쪽 바닷가에 임한 땅, 옛 오아현(烏兒縣)의 경계에 천관산이 있으니, 꼬리는 궁벽한 구석에 도사리고, 머리는 큰
바다에 잠겨 일어섰다 엎드렸다 하면서 구불구불 몇 주(州)의 땅에 걸쳐 있으니 그 기운의 쌓임이 크기도 하다. 영통화상(靈通和尙)이 일찍이 꿈을
꾸었는데, 북갑(北岬)이 땅으로부터 솟아올랐다. 가지고 있던 석장(錫杖)이 날아 산꼭대기를 지나 북갑에 이르러 꽂혔다. 꿈에 석장을 세웠던
그곳에 숲을 베고 절을 지었으니 지금의 천관사가 바로 이것이다. 절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바위들이 더욱 기이한데 높이 우뚝 서있는 것이
당암(幢巖)이요, 튀어나와 외로이 걸려 있는 것이 고암(鼓巖)이다. 구부리고 공손히 절하며 명령을 듣고 있는 것같은 것이 측립암(側立巖)이요,
사자가 웅크리고 앉아 울부짖는 것같은 것이 사자암이다. 층층이 쌓아 놓은 것이 마치 잔치 그릇에 음식을 쌓아 놓은 것같은 것이 상적암(上積巖)과
하적암이요, 하늘을 찌를 듯이 공중에 홀로 솟아 있는 것이 사나암(舍那巖)이며, 우뚝하고 험한 것이 서로 끌어 안아 이즈러진 데를 보충하고 있는
것이 문수 보현암(文殊普賢巖)이다. 천관사에서 남쪽으로 5백 보를 가면 작은 암자가 낭떠러지 아래 외진 곳에 있는데, 그것을 구정암(九精庵)이라
부른다. 그 암자에서 낭떠러지를 따라 백여 보를 올라가면 돌 대(臺)가 펀펀한 것이 있으니 환희대(歡喜臺)라 한다. 그것은 올라가는 사람이 험한
길에 지친 몸을 여기에서 쉬게 되므로 즐겁고 기쁘기 때문이라 한다. 대 앞 초목이 우거진 사이에 희미한 길이 있고, 길을 따라 올라가 산마루에
이르면 사방이 틔어 바라보인다. 구름과 놀이 곱고 초목들이 빛나며, 온 산봉우리는 푸른 소라를 벌려놓은 듯, 시냇물은 흰 비단을 펼쳐놓은 듯한
것이 손바닥 위를 가리키듯 역력히 보인다. 산꼭대기에서 남쪽으로 30리쯤 되는 곳에 선암사(仙嵒寺)가 있는데, 절 북쪽에 바위들이 총총 섰으니,
이곳은 지선(地仙 지상의 신선)이 거처하던 곳으로서, 단애옹(丹崖翁)ㆍ황석공(黃石公)과 같은 분들이다. 절의 남쪽 별봉(別峯) 꼭대기
미타암(彌陁庵) 북쪽에 신령스러운 돌이 하나 있어, 높고 크기가 거의 10척이나 되는데도 손으로 밀면 움직이니, 아아 놀랍도다. 또
포암(蒲嵒)이 그 서쪽에 있는데, 그 위에 모난 우물이 있어 깊이가 한 자쯤 되며, 신령스러운 맑은 샘이 솟아 사시에 마르지 않고,
청포(靑蒲)가 두어 떨기 돌틈에 나있어 마치 무엇이 그것을 보호하고 있는 것같다. 그 외에 이상하고 기괴한 것들이 많은데, 오뚝한 것, 숙인
것, 우묵한 것, 입을 벌린 것, 우뚝 일어선 것, 숨어 엎드린 것, 울툭불툭한 것 등이 천태만상 기괴하고 이상하여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어찌 조물주가 여기에 정수를 모아 놓고 바다를 한계로 하고 넘어서 달아나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 옛사람이 몹시 산수를 사랑하여
나막신으로 올라간 이도 있고, 나귀를 거꾸로 타고 돌아온 사람도 있으며, 혹은 수일 묵으며 돌아가기를 잊어버린 이도 있고, 아주 가서 돌아오지
않은 사람도 있으니 눈으로는 산의 울툭불툭한 것을 보고 귀로는 잔잔한 물소리를 들어 그 정서를 유쾌하게 하기에 힘쓸 뿐만이 아니라, 이 사이에
뜻을 붙여 인지(仁智)의 즐거움을 따라서 장차 그 본성을 회복하고 그 도(道)에 알맞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가지사(迦智寺)
가지산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구불구불 골짜기를
건너고 숲을 뚫고, 나는 새보다 높은 만첩 봉우리에 올라간다. 범 다니는 길에는 푸른 이끼가 어울렸고, 용당(龍堂)에는 흰 구름이 깊었네, 해가
더디니 섬돌에는 온갖 꽃이 웃고, 바람이 빠르니 동산에는 많은 나무들이 읊는다. 밑바닥까지 본래 한 줌 티끌도 없으니, 산 빛은 눈을 씻고 물은
마음을 깨끗이 한다.” 하였다.수정암(修精庵)
천관산에 있다. ○ 앞사람의 시에,
“여윈 몸 절에 앉아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몸은 한가하고 경치는 좋기가 그대 같은 이 드물어라. 종소리 골짜기에 은은하니 미친 고래의 울음이요,
탑 그림자 하늘에 흔들리니 상서로운 기러기 날아 가네. 바람이 옥로(玉爐)를 지나니 작전(鵲篆)이 흔들리고, 비가 금소(金沼)에 뿌리니 물풀이
자라네. 도정(道情)은 오히려 도연명(陶淵明)을 사랑하여, 손을 이끌고 일을 잊은 채 도리어 전송하네.”
하였다.옥룡사(玉龍寺)
천관산에 있다. ○ 앞사람의 시에, “구름 속에 솟은 누각
우뚝하니, 한 떼가 높은 공중에 단청이 빛난다. 해와 달은 험한 산에서 낮게 보이고, 산과 시내는 지령(地靈)을 웅장하게 하네. 비가 오니 용이
바릿대에 내리고, 바람이 이니 범이 경을 듣네. 온갖 생각이 홀연히 사라져 버리니, 덩그러니 마른 나무의 형상이로구나.”
하였다.금장사(金藏寺)
용두산에 있다.【사묘】 사직단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부의 남쪽 2리에 있다. 천관산신사(神祠)
봄가을에 본읍에서 제사를 지낸다. 여단
부의 북쪽에
있다.【고적】 옛 장흥[古長興]
천관산 남쪽에 있다.
회령폐현(會寧廢縣)
본디 백제의 마사량현(馬斯良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대로(代勞)로 고치고
보성군(寶城郡)에 딸린 현이 되었고,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본부에 소속시키었다. 부의 동쪽 32리에 있다.
수령폐현(遂寧廢縣)
본래 백제의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마읍(馬邑)으로 고치고 보성군에
딸린 현이 되었으며,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영암군(靈巖郡)에 소속되었다가 뒤에 와서 본부에 소속되었으며, 지금은 부의 치소가
되었다. 장택폐현(長澤廢縣)
본디 백제의 계천현(季川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계수(季水)로
고치어 보성군에 딸린 현이 되었다가,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와서 소속되었다. 부의 동북쪽 41리에
있다.황보성(皇甫城)
중녕산(中寧山) 동쪽 5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으며, 터가 남아
있다. ○ 이색의 기문에, “중녕에 성을 쌓는 것은 나라의 근본을 굳게 함이다. 장흥부는 큰 바닷가에 임해 있어 초목에는 상록수가 많으며,
예전에 낙토(樂土)라 일컬었다. 인종 왕비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가 의종(毅宗)ㆍ명종(明宗)ㆍ신종(神宗) 세 왕을 낳았는데, 서로 이어
왕위에 올랐으므로 장흥은 옛적부터 유신(有莘)에 비하여 군에서 목으로 승격하였으니, 특별하게 표창한 것이 지극하였다. 백성은 순박하고 일은
간략하므로 명현(名賢)과 재주 있는 사대부가 공명에 별 뜻이 없고 고요히 수양하고 다스리기를 좋아하는 이가 많이 이 부를 맡게 된다.
지정(至正) 경인년 이후로 왜적들이 침입하여 밤에는 작란하다가 날이 밝으면 몰래 곧 달아나므로 나라에서 가볍게 여기고 걱정거리로 삼지 않았는데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대낮에도 깊숙히 들어와 열흘 혹은 한 달 동안이나 멋대로 횡행하여 바다 근처의 민가는 폐허가 되어버렸다. 조정에서 그때마다
대장을 보내어 쫓아 버렸으므로 조금 평정되기는 했으나, 형세가 궁박해져서 백성을 딴 곳으로 옮기라는 영을 내렸으므로 장흥 백성은
철야현(鐵冶縣)으로 옮겨가서 살게 된 것이 기미년이요, 보성군에 합친 것이 기사년이었다. 옛날에 제후가 나라를 잃으면 다른 제후에게
우거(寓居)함은 비록 예가 그러하다 하였으나, 그 사대부로서 늙어 고향에 은퇴한 사람, 관리로서 뜻이 있는 사람, 백성으로서 뜻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분개하여 말하기를, ‘우리 부는 은대(銀帶 정3품~종6품 벼슬) 이상의 관원이 다스렸는데, 이제 지현(支縣)의 관리에게 기탁하게 되었으니
마치 머리가 아래에 있는 것 같고, 혹이나 군더더기같이 되었으니, 어찌 심한 수치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금년 봄 2월에 부사 황보공이
부임하자 부로들이 그 사연을 진정하였더니, 황보공도 옳게 여겨 안렴사 이원(李原)에게 보고하였다. 이공도 옳다고 하여, 이웃 고을에 통첩을
내리어 장정 3백 50명을 모아서 8월 17일에 공사를 일으켜 9월 27일에 끝마쳤는데, 성의 높이가 15자, 두께가 6자, 둘레가 1천 5백
자이다. 동ㆍ서 두 문이 자물쇠가 이미 굳고, 경비하는 자의 바라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낮에는 동ㆍ서문을 활짝 열어 놓아 나무꾼이나
목동들도 편리하게, 나가서 밭갈이 하고 들어와서 쉬며, 백성들이 두려움 없이 즐겁게 처자를 기르는 기쁨을 누리고, 도망쳐 달아나는 괴로움도
없어졌으니, 사대부 및 아전과 백성들의 소망이 이제 이루어졌다. 봉역을 굳게 지키고 부역을 바치고 여유가 있게 되었으니, 나라의 근본을 굳게
하였다고 쓰는 것이 어찌 옳지 않으리오.” 하였다.유치향(有恥鄕)
부의 북쪽 15리에
있다. 안양향(安壤鄕)
안회(安懷)라고도 썼는데,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어산향(語山鄕)
부의 남쪽 15리에 있다. 도내산향(徒內山鄕)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아서향(阿西鄕)
부의 서쪽 41리에
있다. 요랑소(䭜狼所)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수태소(守太所)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칠백유소(七百乳所)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정산소(井山所)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운고소(雲膏所)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정화소(丁火所)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창거소(昌居所)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웅점소(熊岾所)
부의 동쪽 15리에 있다. 가좌소(加佐所)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거개소(居開所)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가을평소(加乙坪所)
부의 동쪽 31리에 있다. 향여소(香餘所)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명환】 고려 한문준(韓文俊)
부사(副使)였다. 주열(朱悅)
고종 때에
지부사(知府使)였다. 윤해(尹諧)
지부사였는데, 동정 전함(東征戰艦)을 감독하여
만들었다. 채홍철(蔡洪哲)
충렬왕 때 원이 되었는데 은혜로운 정치를 하였다.
김이(金怡)
부사로 있을 때에 합단(合丹)이 침입하였는데, 나라에서 주ㆍ현에 영을 내려 험한 곳에 의거하여
스스로 지키고, 백성들이 들에 나가 농사 짓는 것을 금지하였다. 김이가 안렴사 강취(姜就)에게 말하기를, “천병(天兵)이 이 조그마한 도적을
제압하는 것은 도마 위의 고기와 같을 뿐인데, 어찌 능히 변방의 고을까지 이를 수 있겠으며, 또한 먹는 것은 백성의 하늘이라 밭갈고 씨뿌리는
데는 때가 있는 것인데, 그 때를 잃어서는 안 되니, 밭갈이에 나가도록 해 주소서.” 하였으나, 강취가 말하기를, “만약 영을 어기었다가 견책을
받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고,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김이가 물러 나와 탄식하기를, “한 농부가 농사를 짓지 않으면 천하가 굶주리는 손해를
받게 될 것이다. 영을 따라 농사를 짓지 않으면 굶어 죽는 사람이 많을 것이지만, 영을 따르지 않고 농사를 지으면 죄를 받을 사람은 나
하나이다.”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나가서 농사를 짓게 하였다. 도적은 과연 연기(燕岐)까지와 천병에게 멸망되었다. 다른 고을은 모두 수확이
없었으나, 이 부만은 농사가 아주 잘 되었으므로 원근의 백성들이 이 고을을 의뢰하며 살았다. 벼슬이 만기가 되어 불려 들어가 내시(內侍)가
되었다. 황보덕(皇甫德)
위를 보라.본조 안종약(安從約)
부사가 되었다. 『신증』
강삼(姜參)ㆍ김연수(金延壽)
정치에 있어 간결하기를 힘썼다.【인물】
고려 임의(任懿)
인종 때에 벼슬이 태사 중서령에
이르렀다. 임원후(任元厚)
인종 비 공예왕후(恭睿王后)의 아버지이며 벼슬이 태사 중서령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임규(任奎)
원후의 아들로 진사시에 뽑히었으며, 벼슬이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렀다. 외척(外戚)으로서 현명함이 그보다 나은 이가 없었다. 임유(任濡)
원후의 아들로 벼슬이 태사 문하시랑동평장사 태자태사에 이르렀다. 임경숙(任景肅)
유(濡)의 아들로 벼슬이 수태사 문하시랑에 이르렀다. 임경겸(任景謙)
유의 아들로서 벼슬이 추밀원사 태자빈객에 이르렀다. 임익(任翊)
경겸의 아들로서, 벼슬이 찬성사에 이르렀다. 조정통(曺精通)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시중에 이르렀다. 위원개(魏元凱)
고종 무신년에
정원급제하여 벼슬이 한림에 이르렀다. 뒤에 출가하여 충지(沖止)라 이름하였고, 시호는 원감(圓鑑)이다. 위문개(魏文凱)
원개의 아우인데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평양 군수에 이르렀다. 원개의 시가 있는데, “황금방의 으뜸을 내가 일찍이
차지하였더니, 영예로운 장원을 그대가 또한 거두었구나. 천고에 드문 일, 한 집안에서 두 용두(龍頭 장원(壯元))가 났구나.”
하였다.본조 마천목(馬天牧)
태종 때에
좌명 공신(佐命功臣)이 되어 장흥군(長興君)에 봉하였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김필(金㻶)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관찰사에 이르렀다.【제영】 땅은 다하여 하늘이 바다에 이어
있고
이색(李穡)의 시에, “땅은 다하여 하늘이 바다에 이어 있고, 성은 높은데 비가 내리니 산이 어둡네.
예부터 유락(流落)한 나그네, 몇이나 살아서 돌아왔던고.” 하였다. 시냇가 곳곳에 매화가 물에 임하였고
이방직(李邦直)의 시에, “시냇가 곳곳에 매화가 물에 임하였고, 산밑의 집집에는 대나무가 집을 에워싸고 있네.”
하였다. 대사립 띠집이 맑은 시냇가에 있다
앞 사람의 시에, “옛 고을에 사람이 드물어 까마귀
어지럽게 울고, 대사립 띠집이 시냇가에 있구나.” 하였다. 조수(潮水)소리는 저물 녘에 성을 흔든다.
박원형(朴元亨)의 시에, “산 빛은 맑아 숲에 이어 있고, 조수 소리는 저물 녘에 성을 흔든다.”
하였다. 높은 산은 해를 가리어 누각에 더디 오른다.
이석형(李石亨)의 시에, “안개 낀 숲은
바람을 끌어 길이 아득하고, 높은 산은 해를 가리어 누각에 더디 오른다.” 하였다. 땅은 탁 트이어 하늘이 바다에 떴고
앞사람의 시에, “땅은 탁 트이어 하늘이 바다에 떴고, 산은 굽이져 물이 성을 끌어안았다.”
하였다.『신증』 강은 옛 성을 돈다.
이계동(李季仝)의 시에, “산은 큰
고을을 둘러싸고, 강물은 옛 성을 돈다. 가을은 높아 날씨도 상쾌한데, 누워서 피어오르는 구름을 바라보네.”
하였다.《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부내(府內)ㆍ부동(府東)
처음은
1리이고, 끝은 15리이다. 부서(府西)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0리이다.
남면(南面)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안량(安良)
본래 안양향(安壤鄕) 동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40리이다. 고읍(古邑)ㆍ회령(會寧)
모두 남쪽으로 처음은 4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대흥(大興)
남쪽으로 처음은 50리이고, 끝은 70리이다. 천포(泉浦)
동쪽으로
처음은 50리이고, 끝은 70리이다. 부평(富平)
동쪽으로 처음은 4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웅치(熊峙)
본래 웅점소(熊岾所) 동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용계(龍溪)
북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부산(夫山)
북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5리이다. 유치(有恥)
본래 유치향 북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60리이다. 장동(長東)
북동쪽으로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장서(長西)
동북쪽으로 처음은 4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내덕도(來德島)ㆍ산일도(山日島)ㆍ평일도(平日島)ㆍ금당도(金塘島)
위의 네 면(面)은 모두 부(府) 남쪽
바닷가 가운데에 있다.
○ 어산향(語山鄕)은 남쪽으로 15리에 있다. 도내산향(徒內山鄕)은 남쪽으로 35리에 있다. 아서향(阿西鄕)은
서쪽으로 41리에 있다. 요랑소(饒狼所)는 남쪽으로 35리에 있다. 수태소(守太所)는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칠백유소(七百乳所)는 동쪽으로
20리에 있다. 정산소(井山所)는 동쪽으로 20리에 있다. 운고소(雲膏所)는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정화소(丁火所)는 동쪽으로 5리에 있다.
창거소(昌居所)는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가좌소(加佐所)는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거개소(居開所)는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갈평소(乫坪所)는 동쪽으로 30리에 있다. 향여소(香余所)는 북쪽으로 20리에 있다.【성지】 읍성(邑城)
장녕성(長寧城)이라고도 하며 둘레가 94척이고 동(東)ㆍ남(南)ㆍ북(北)의 3문이 있고 샘이 14개, 못이
3개 있다. 황보성(皇甫城)
고려 말에 황보덕(皇甫德)이 쌓은 것이며 부 남쪽 30리에
있으며, 둘레는 1천 5백 척이다. 고읍성(古邑城)
중령산(中寧山)에 있으며 태조 원년에
쌓았다.【창고】 창(倉)이 2개
읍내에 있다. 사창(社倉)
장택고현(張澤古縣)에 있다. 해창(海倉)
동남쪽으로
20리에 있다. 남창.
【진도】 우도진(牛島津)ㆍ해창진(海倉津).
【교량】 행원교(杏園橋)
북쪽으로 5리에 있다. 예양강교(汭陽江橋)
동쪽으로
2리에 있다. 감천교(甘川橋)
서쪽으로 5리에 있다.【목장】
득량도(得良島)ㆍ내덕도(來德島)ㆍ장내곶(帳內串).
【토산】 뽕ㆍ차.
【누정】 규양루(葵陽樓)
부 안에 있다.【사원】 연곡서원(淵谷書院)
숙종
무인년에 건립하고 영종 병오년에 사액하였다. 민정중(閔鼎重)
양주(楊州) 편에
보인다. 민유중(閔維重)
자(字)는 지숙(持叔), 호는 둔촌(屯村)이다. 정중(鼎重)의
동생이며, 벼슬은 영돈녕부사 여양부원군(領敦寧府事驪陽府院君)이다.○ 강성서원(江城書院)
숙종 계미년에 건립하고 정종 을사년에 사액하다. 문익점(文益漸)
단성(丹城) 편에 보인다.○ 충렬사(忠烈祠)
숙종 계해년에
건립하고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정분(鄭苯)
자(字)는 자외(子) 호는 애일당(愛日堂)이며, 본관은 진주(晉州)다. 단종 계유년에 사사(賜死)하였다. 벼슬은 우의정이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정광로(鄭光露)
분의 아들이다. 한온(韓蘊)
자는 군수(君粹)이며 청주(淸州)사람이다. 명종(明宗) 을묘년에 본 부사(本府使)로서 싸우다 죽으니, 병조 판서로
추증되었다. 정명세(鄭名世)
자는 백시(伯時) 호는 독곡(獨谷)이다. 선조 계사년에 해미
현감(海美縣監)으로 진주에서 싸우다 죽으니, 도승지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