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까지 그대로 둔 채 맨몸으로 나갔으니까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제 생각엔 다시 올 것 같지 않아요 그까짓 거 몇 푼이나 나간다고 그것 때문에 다시 돌아오겠어요.」
「주인이 펄펄 뛰겠군요.」
「흥. 그럴 것도 없지요. 그렇게 착취해 먹으니 누군들 도망가지 않겠어요.」
「춘이도 도망친 건가요?」
「그럼요. 여기 있으면 하루하루 빛이 쌓여 가니까 도망치지 않고는 절대로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함부로 도망치다간 혼나겠군요.」
「너무 목소리가 커요.」
여자는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고 나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데…… 제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 같네요. 아마 손님이 좋아졌나 보지요.」
여자는 쑥스럽게 웃었다. 그것을 보자 그도 따라 웃었다.
「여긴 깡패들이 꽉 쥐고 있어서 섣불리 도망치다가 붙들리면 맞아 죽어요. 불로 지지고 그래요. 춘이라고 맞아 죽지 말라는 법은 없지요. 이 골목 여자들이 어떻게 죽어 가는 줄 아세요? 맞아 죽거나 병들어 죽지요.」
「경찰에선 가만있나요?」
「경찰 말이에요? 차암. 손님 순진하시네요. 깡패들이 경찰과 짜고 노는데 어떻게 경찰을 믿을 수가 있어요. 제발 돈이나 뜯어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여자는 담배를 다시 하나 피워 물었다.
「춘이가 죽었다면 큰일이군요.」
「아직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 걸 보니까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에요. 어떤 남자하고 도망쳤다니까…… 어쩌면 별일 없을지도 몰라요.」
「남자라니. 누구 말입니까?」
「저도 잘 몰라요. 주인한테 그렇게 듣기만 했으니까요. 어쩌면 거짓말인지도 모르지요.」
「술 한 잔 하겠어요? 제가 살 테니…….」
「싫어요. 몇 년 전만 해도 곧잘 술을 마셨는데…… 이젠 몸도 좋지 않고 해서 못 마셔요.」
「안됐군요. 이런 데 있을수록 몸이 건강해야 할텐데…….」
오 형사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말했다.
「춘이 년이 저를 많이 걱정해 줬어요. 사실은 자기가 더 불쌍한 몸인데도 말이에요. 그 앤 고아예요. 다섯 살 때부터 혼자 자랐다니까 오죽 했겠어요.」
「아. 그랬군요. 어쩌다가 그렇게 불행하게 태어났지요?」
그는 가슴이 젖어 드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여자는 초점 없이 허공을 응시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애는 저한테 와서 잘 울곤 했어요.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저도 함께 울곤 했지요. 그 애 말을 들으면…… 고향이 평안북도 의주인데, 두 살 때 엄마가 돌아가셨대요. 그리고 다섯 살 때 아버지와 오빠, 자기, 이렇게 셋이서 남하(南下)했대요. 오빠와는 아홉 살 차이라고 하던가…… 그런데 글쎄…… 도중에 가족을 잃어버렸다지 뭐예요.」
「춘이 혼자서요?」
「그렇지요. 그 뒤로 영영 가족을 만나지 못하고 혼자서 고생고생하면서 살아온 것이지요. 열두 살 때까지는 이곳 저곳 고아원을 찾아다니다가 그 뒤로는 식모살이, 껌팔이 같은 궂은일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 살아온 모양이에요. 하지만 이런 애들이 막판에 빠지는 길이란 뻔하지 않아요. 자기 몸이나 파는 게 고작이죠.」
「그럼, 어딘가에 가족들이 살고 있겠군요.」
「그럴 거예요. 아버지와 오빠가…… 죽지 않았으면 어디선가 살아 있겠지요.」
「혹시 그 가족들 이름을 알고 있습니까?」
「왜요? 찾아 주려구요?」
그녀는 비웃듯이 물었다.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그런 건 혼자 속에 품고 있는 것보다는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좋을 겁니다.」
「춘이한테 듣긴 들었는데 잊어먹었어요.」
「춘이란 이름은 진짠가요?」
「이런 데 있는 여자치고 진짜 이름 쓰는 사람 봤어요?」
「하긴 그렇겠군요.」
「손님은 남의 이야기 듣기를 퍽 좋아하는군요.」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러나 봅니다. 앞으로 종종 놀러 와도 되겠지요?」
그의 말에 여자는 놀란 듯이 몸을 움찔하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로서는 오랜만에 털어 내는 것처럼 웃음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나 같은 사람한테 와서 무슨 재미를 보려고…… 오늘처럼 또 춘이 이야기만 하려고요? 손님 이상한 사람이야.」
여자는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렇다고 공짜는 아니에요.」
여자는 그것을 확인하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물론, 물론이지요.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요. 여기 전화 있지요?」
「아무한테나 전화를 가르쳐 주지는 않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