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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115. [역경의 열매] 손동희 (1-15) '나환자 사랑·순교' 오늘 중요한 건 기념보다 실천
내 아버지는 손양원 목사다. 최근에 아버지의 동상을 세우려는 분들도 계셨다. 나는 반대했다. 숭배가 아니라 추모하고 기념하겠다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결코 원치 않았을 것이다.
기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억에 그쳐선 안 된다. 실천이 있어야 한다. 순교자는 우리 아버지와 오빠들만이 아니다. 주기철 목사님을 비롯해 수많은 분들이 신앙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다. 그 믿음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도 적지 않은 분들이 애양원을 찾아온다. 아버지와 오빠들, 우리 가족의 행적을 살펴주신다. 오페라까지 만들어 주셨다. 그렇게 기억해주는 것은 참 고맙다. 안타까울 때도 많다. 마치 붉은 물감에 물을 타면 색이 옅어지듯이, 한국 교회에 순교자들의 피 묻은 신앙이 점점 희석되는 것 같다. 예수 믿는다는 말 한마디에 목숨을 걸어야 했던 시절의 이야기가 잊혀지는 것 같다. 때론 이 나이 많은 노인이라도 나서서 뭔가 말을 건네고 싶어진다.
나도 이제 나이가 여든이 넘었다. 옛날 일은 또렷한데 최근 일은 잘 기억을 못한다. 더 기억이 쇠하기 전에 국민일보 지면을 통해서 아버지와 사랑하는 오빠, 나와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남길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 내가 직접 겪은 일들을 중심으로 기록하겠지만, 때로 우리 가족을 아는 분들이 직접 보고 전해준 이야기들을 함께 엮어 전하려 한다. 근거 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태어난 곳은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다. 그곳에는 칠원교회가 있다. 우리 집안 믿음의 첫 조상인 할아버지가 세운 교회다. 1923년 길선주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했는데, 그때 할아버지가 전 재산인 논 다섯 마지기를 교회에 바쳤다. 할아버지는 세 마지기만 바치겠다고 했는데, 할머니가 나머지 두 마지기를 추가로 바쳤다고 한다. 이걸 두고 동네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때 할아버진 이렇게 말씀하셨다.
"불이 나서 집을 날릴 수도 있고, 사업하다 망할 수도 있고, 술과 여자 노름에 빠져 탕진하는 사람도 있는데, 교회 짓다가 망하면 그래도 교회는 남아 있지 않나?"
할아버지는 3·1운동 때엔 앞장서 만세를 부르다 붙잡혀 마산형무소에서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할아버지에겐 세 아들이 있었다. 모두 목사가 됐다.
아버지가 애양원에 부임한 것은 1939년 7월 14일이었다. 애양원에 처음 들어서던 그날, 내 나이가 비록 어려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환자들의 모습을 보고 기겁을 했던 일은 어제처럼 선명하다. 요즘엔 나환자도 잘 없지만, 환자 분들의 상태도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다. 그때는 코나 눈이 문드러지고 살이 썩어가는 분들도 계셨다. 어린 마음에 그 광경을 보고 어찌나 놀랐던지 그 자리에서 울어버렸다. 어머니가 나를 등에 업고 달래 주셨다.
아버지는 나환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오히려 환자분들이 "병이 옮으면 큰일"이라며 꺼렸을 정도로 다가가셨다. 아버지는 차라리 나환자가 되길 원하셨던 것 같다. 간혹 혈액 검사를 하면 정상이라는 결과에 "이번에도 아닌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아버지 덕분에 나도 애양원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
아버지를 둘러싼 소문 중에, 아버지가 나환자들의 피고름을 빼기 위해 상처에 직접 입을 대고 빨아주셨다는 얘기가 있다. 나는 실제로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다. 혹시나 주변 분들이 손양원 목사님이 나환자를 돌봤다는 얘기를 자랑스레 전하다 보니 없는 얘기가 과장돼 전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가졌다. 설마 그랬을까 싶기도 했다. 나중에 그 시절 애양원에 계셨다는 분을 우연히 만났다. 그분이 이와 관련된 경험담을 내게 전해주셨다.
정리=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
* [역경의 열매] 손동희 (1) '나환자 사랑·순교' 오늘 중요한 건 기념보다 실천
* [역경의 열매] 손동희 (2) 나환자 상처 아물지 않자 입으로 피고름 빼내
* [역경의 열매] 손동희 (3) "우상숭배 안된다" 신사참배 거부 5년간 옥고
* [역경의 열매] 손동희 (4) 獄中 아버지 "간수들에게 복음 전하려 항고했다"
* [역경의 열매] 손동희 (5) 日軍 징집 큰오빠 "죽어도 신사참배는 안할게요"
* [역경의 열매] 손동희 (6) 일제 魔手 피해 온가족 찬송가 부르며 뿔뿔이 생이
* [역경의 열매] 손동희 (7) 해방후 교단 갈등 심화… 아버지 "회개하라" 일갈
* [역경의 열매] 손동희 (8) 해방 기쁨도 잠시… 나라와 교회, 분단·갈등 속으로
* [역경의 열매] 손동희 (9) 애양원 들이닥친 순천 반란군 "손목사 어서 나와!"
* [역경의 열매] 손동희 (10) 두 오빠 총살됐다는 소리에 순천까지 50리 길을
* [역경의 열매] 손동희 권사 (11) 아버지 "동희야, 두 오빠 죽인 학생을 구해주거라
* [역경의 열매] 손동희 (12) "목사님, 이 자가 지금 막 동인 동신이를 죽였다고 시인했습니다.
* [역경의 열매] 송동희 (13) 교문에 걸린 '붉은 깃발' 보기만해도 섬뜩…
* [역경의 열매] 손동희 (14) 아버지, 서울 수복되던 날 공산군 총탄에 순교
* [역경의 열매] 손동희 (15·끝) 아버지·두 오빠 순교 증언하는 삶… 주님, 감사합니다
◇약력=1933년 경남 함안 출생. 손양원 목사의 장녀. 이화여고 졸. 총신대·고신대 수료. 부산 대연중앙교회 권사. 저서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영문판) <손양원 목사 옥중 목회>
***[역경의 열매] 손동희 (2) 나환자 상처 아물지 않자 입으로 피고름 빼내
다행히도 아버지와 함께 애양원에 계셨던 김수남 권사님께서 방송에 출연해 그때 일을 얘기해 주셨다.
"목사님은 우리 나환자들을 가족처럼 대해주셨다. 목사님의 자녀들까지 우리와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 목사님 대접한다고 우리가 기른 시금치를 뽑아다 씻어 된장에 무쳐 드리면 '너희 반찬 참 맛있다' 그러시면서 그렇게 맛있게 잡수시고…. 당시 부산서 온 박옥순이라는 나환자가 다리에 상처가 났다. 좀처럼 낫질 않았다. 손 목사님이 그걸 아시고는 치료하겠다고 입으로 그 상처를 빠셨다. 옛날에는 환자 상처를 빨면 낫는다는 그런 통설이 있었던 모양이다. 목사님 같은 분은 정말 없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서야 사람들의 이야기가 과장이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나도 시간이 지나면서 애양원에 익숙해지고 내 또래 환자들과 친구로 지냈다. 하모니카를 멋지게 불던 내 친구 태수는 1991년 11월 22일 '손양원 목사 기념관 착공식 예배'에서 다시 만나 정말 기뻤다.
내 기억 속에 아버지는 항상 바쁘셨다. 주일은 애양원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시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보통 다른 곳에서 사경회를 인도하셨다. 불러주는 곳이 있으면 천리길도 마다하지 않고 가셨다. 집회가 없을 때에도 집에 머무를 겨를이 없었다. 늘 애양원의 나환자들을 돌아보셨다. 그 때문인지 내게 아버지에 관한 살가운 기억이 많지는 않다.
아버지는 카리스마 있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누구나 쉽게 말을 걸 수 있는 분, 어린이들도 달려와 매달릴 수 있는 분이셨다.
막상 맏딸인 나는 아버지와 정들 겨를이 없었다. 교회 일도 바쁘셨지만, 내가 여덟살 때 아버지가 신사참배 거부로 감옥에 가신데다, 나중에는 내가 오빠들과 자취를 했기 때문에 자주 뵙지 못했다.
이 글을 정리하다보니 떠오르는 기억이, 언젠가 방학 때였던 것 같다. 내가 집에 와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아버지가 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주셨다. 아버지의 따뜻한 손과 간절한 기도 소리에 우리를 향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늘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셨던 모습 덕분에 아버지의 사랑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여덟살이 되었을 때였다. 친구들은 다들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들어가는데 나는 집에만 있었다. 학교에 가면 신사참배를 해야 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아예 보내질 않았다.
사실 일제가 처음부터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신사를 만들어 놓고 '동방요배'라며 권하기만 했다. 그러나 미국과 전쟁을 벌이고 동원 체제가 되면서 점점 신사참배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오빠들도 그 무렵에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런 상황이라 나는 아예 학교를 보내질 않았던 것이다. 나는 너무나 학교가 가고 싶었다.
"엄마, 나는 왜 학교에 안 보내주는 거야. 나도 보내줘."
"동희야, 그건 안 된다. 학교에 가면 신사참배를 시키는데, 그건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행동이야."
어머니에게 아무리 졸라도 답은 늘 같았다. 그 무렵에 아버지에게 크게 혼났던 기억도 난다. 한번 울면 울음을 그치지 않는 성격이어서 아버지에게 한 대 맞기까지 했던 기억도 난다.
한번은 가방 멘 아이들 뒤를 졸졸 따라갔다. 아이들은 나를 놔두고 교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나는 차마 교실까진 따라가지 못 하고 운동장을 서성거렸다. 쉬는 시간에 나온 아이들은 나를 거지 취급하고 같이 놀지도 않았다. 서러우면서도 나는 학교를 떠나지 못했다.
'도대체 저기 교실 안에서는 무얼 배우는 걸까.'
살금살금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발꿈치를 삐죽 들어 유리창 안으로 교실을 들어다 봤다. 흑판 앞에 서 있던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드르륵-.'
문이 열리더니 선생님이 나왔다.
"너 학생도 아니면서 여기서 뭐하는 거야. 저리 가지 못해?"
선생님은 발을 번쩍 들어 나를 걷어찼다.
***[역경의 열매] 손동희 (3) “우상숭배 안된다” 신사참배 거부 5년간 옥고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예수교장로회 총회에는 일본 경관 97명이 총회장에 들어왔다.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신사참배는 애국적 국가의식이니 기독교인도 참여한다’고 결의해 버렸다. 신사참배에 응한 목사들이 모두 비양심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해 감옥까지 가셨던 배 모 목사님은 부인이 “당신 고집 때문에 자식들과 나는 죽게 된다”며 애걸복걸하는 바람에 의지를 꺾기도 했다. 그런 분들이 많았다. 슬픈 일이었다.
참배를 거부한 분들도 2000여명이나 된다. 일제는 온갖 고문을 했고, 200여개의 교회를 폐쇄했다. 순교자는 50여명이나 됐다. 애양원 교회가 소속된 순천노회도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아버지처럼 여기에 반대한 분들이 노회에서 분리해 나와 순천선교회를 결성했다. 그나마 애양원 교회는 다른 곳보다 박해를 덜 받았다. 나환자 수용소라는 특성 때문에 어느 정도 눈감아 준 것도 있었다. 세상이 천대하는 나병이 신앙을 지켜주는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던 셈이다.
아버지는 그러나 애양원 안에서 조용히 신앙을 지키는 데에 머물지 않았다. 애양원 교회에서는 물론이고 다른 교회에서도 설교를 할 때면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라고 역설했다.
“성경 말씀에 분명히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내 앞에서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 나라의 임금 명령도 거역할 수 없을진대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일본이 만든 신사의 신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신의 형상을 만들어 놓았으니 분명한 우상입니다. 참배해서는 안 됩니다. 세계 역사를 보면 우상 숭배하는 나라는 망합니다. 예수 잘 믿는 민족은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어찌 나라 망하는 일을 하겠습니까.”
이런 아버지를 일본 경찰이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그날은 1940년 9월 25일 수요일이었다. 2명의 남자가 바쁜 걸음으로 우리 집에 들어왔다. 다짜고짜 아버지를 찾았다. “손 전도사 집에 있나.”
어머니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뉘신지요.”
“우리는 손 전도사를 연행하러 온 여수경찰서 형사다!” 그때 아버지는 애양원 교회에서 당회를 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니 계시오.”
형사는 마루에 걸터앉았다. 아버지에게 집에 오지 말고 숨으라고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얼마 뒤 아버지가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두 형사는 아버지를 낚아채더니 밖으로 끌고 갔다. 아버지는 이미 각오를 한 듯 조용히 그들을 따라나섰다. 어머니에게 “걱정 말고 기도나 해 주구려”라는 말만 남겼을 뿐이다.
이 짧은 말을 던지고 떠난 아버지는 그날부터 해방될 때까지 5년을 갇혀 있었다. 아버지의 죄목은 신사참배 거부와 선동이었다. 나는 식사기도를 할 때마다 “아버지가 빨리 풀려나게 해주세요. 아버지가 빨리 집에 돌아오게 해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어머니는 다른 걱정을 하셨다. 그 무렵 신사참배를 거부했다가 경찰서에 끌려간 분들 중에 곤욕을 치른 뒤 신사참배를 하겠다고 서약을 하고 풀려난 목사님들도 계셨다. 혹시나 아버지도 그런 일을 겪지 않을까 생각하셨다. 아버지가 붙잡혀 간 지 열 달쯤 지났을 때였다. 어머니는 아버지 소식을 수소문했다. 마침 며칠 뒤 재판을 마치고 여수경찰서를 떠난다는 얘기를 들었다.
어머니는 젖먹이 동생을 업고 나와 오빠들까지 데리고 여수행 기차를 탔다. 여수경찰서 앞에서 무작정 기다렸다. 나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아버지를 다시 만날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설레었다. “저기 아버지가 오신다.” 큰오빠가 먼저 소리쳤다. 머리를 파르라니 깎은 아버지의 모습은 기대와 달랐다. 어머니는 내 손을 이끌고 얼른 아버지 곁으로 다가갔다. 성경을 펴들고는 아버지에게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보! 계시록 2장 10절 말씀 아시죠? 신사참배에 응하면 내 남편이 아닙니다. 영혼 구원도 못 받습니다.”
***[역경의 열매] 손동희 (4) 獄中 아버지 “간수들에게 복음 전하려 항고했다”
*아버지는 징역 1년6개월 형을 확정 받고 광주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그러나 형기 만료일에도 풀려 나오지 못했다. 오히려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이대로 나가면 또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할 것이 틀림없다”는 이유였다. 종신형 소식에 어머니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통곡을 하시며 “이 땅에서 이제 네 아버지를 만날 생각은 마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항고를 했다. 그 이유를 당시 할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밝혔다. “불편이나 고통을 면해 보려는 뜻이 아니라 대구의 간수들에게 성경 교리를 증거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아버지가 연행된 뒤 애양원에는 안토(安藤)라는 일본 원장이 부임했다. 안토는 우리에게 목사 사택을 비우라고 재촉했다. 어차피 있으라고 붙잡아도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 원장과 같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애양원 교우들이 안토 몰래 700원의 돈을 쥐어주었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옥바라지를 위해 광주로 갔다. 광주형무소는 한 달에 한 번 면회를 허락했다. 그러나 그 한 번의 면회도 사치였다. 우선 먹고 살아야 했다. 그 무렵 주기철 목사님의 셋째 아들 주영해 오빠가 부산에서 박신출 집사님(훗날 삼각산 제일기도원 원장)이 경영하는 나무통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두 오빠도 박 집사님 집에서 밥을 먹으며 공장에 다녔다. 한 달 급료가 23원이었다. 오빠들은 그 중 20원을 광주로 보냈다. 그 돈도 남은 가족이 입에 풀칠하기 힘들 정도의 액수였다.
박 집사님은 우리 가족 모두 부산으로 내려오라고 권했다. 우리는 박 집사님이 마련해준 부산 범냇골 산꼭대기 판잣집으로 이사를 했다. 누우면 밤하늘에 별이 보이고, 비가 오면 빗물이 흘러내리고, 여름이면 빈대가 들끓는 그 집이 우리 식구의 보금자리가 됐다. 어머니는 다대포 바다에 나가 미역을 뜯어 머리에 이고 행상을 했다. 해질 무렵이면 행상 다니며 산기슭에서 캐온 쑥이며 냉이를 담아 오셨다.
나는 물을 길어 나르는 일을 맡았다. 큰오빠가 만들어 준 작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바가지를 물에 동동 띄워 날랐다. 범냇골 판자촌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며 손동희가 아니라 ‘물동이’라고 불렀다. 가끔 지나가는 어른이 내 머리 위에서 그 바가지로 물을 떠마시는 것이 속상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두고두고 그때 물동이를 이고 다니는 바람에 자라지 못했다며 미안해하셨다.
주일이면 우리 집에 몇몇 교인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신사참배에 동조하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 분들이었다.
어느 날 김길창 목사라는 분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아버지와 한 고향에서 같이 자란 절친한 친구분이었지만, 신사참배를 적극 찬동한 분이었다. 로마서 13장의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는 구절을 강조하고 설교 중에도 “옥중 성도들은 미련하기 짝이 없는 외골수니 그들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마라”고 한 사람이다. 그는 별이 훤히 보이는 우리 집을 둘러보더니 어머니에게 흰 봉투를 내밀었다. 어머니는 분노로 몸을 떨며 봉투를 던졌다. “목사님, 우린 그런 돈 아니라도 굶어 죽지 않으니 목사님이나 그 돈으로 잘 잡수시오.”
그러고 나서 어머니는 나를 붙들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나도 왠지 모를 설움에 어머니와 함께 울었다. 무안해진 김 목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돌아갔다. 김 목사 말고도 범냇골 판자집까지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애양원에서 내가 고모라고 부르며 따랐던 황덕순씨였다. 나환자였던 그분은 놀랍게도 머리에 된장을 이고 왔다. 그 된장 아래에는 쌀이 숨겨져 있었다.
“사모님, 너무 늦게 찾아왔죠. 이 쌀은 진주 남강 다리 밑 각설이패들이 모아준 것이랍니다. 꺼리지 마시고 받아주세요.”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진주의 거지들이 어떻게 우리 가족을 돕게 됐을까. 또 애양원 환자인 황덕순 고모는 어떻게 부산 우리 집까지 오게 됐을까.
***[역경의 열매] 손동희 (5) 日軍 징집 큰오빠 “죽어도 신사참배는 안할게요”
우리 가족이 쫓기듯 떠난 뒤 안토 원장은 나환자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아버지에게 설교를 들은 그분들에게 견디기 힘든 고문이었다. 몇몇 환자들이 애양원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몸도 성치 않아 고향의 가족에게도 갈 수 없는 신세였지만, 신사참배를 매일 해야 하는 상황이 더 큰 문제였기에 그러했다.
황덕순 고모를 포함한 7명의 환자들이 애양원을 나왔다. 7명 중 5명이 처녀였다. 황덕순 고모는 25살이었다. 이분들은 무작정 진주로 갔다. 그 무렵 남강 다리 아래에는 100여명의 나환자들이 천막을 치고 걸인 행각을 하며 살고 있었다.
그곳의 왕초인 경돌이는 7명의 사정을 듣고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환영해 주었다. 평소 애양원 이야기를 듣고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나중에는 왕초부터 시작해 그곳의 나환자들이 모두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고모는 아버지 이야기를 왕초에게 숨김 없이 털어놨다. 왕초는 그 자리에서 거지패들을 불러 모아 손양원 목사 가족을 위해 구걸해온 곡식의 십일조를 떼자고 했다. 그렇게 모은 쌀 위에 된장을 덮어 위장을 한 뒤 황 고모가 머리에 이고 부산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고모는 시시때때로 진주 각설이패들과 애양원에 남아 있던 식구들이 모아 준 곡식을 가지고 우리 집을 찾아왔다. 우리 어린 남매들은 고모만 오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모처럼 흰쌀밥을 먹는 날이었고, 애양원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하늘이 훤히 밝아올 때까지 밤이 새도록 고모와 얘기를 나누었다. 우리도 누워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잠을 설쳤다. 고모는 애양원 성가대에서 반주를 했고, 문학적인 재능도 있었다. 성격은 여장부처럼 대쪽같고 뜨거웠다. 훗날 내가 책을 쓸 때에도 많은 자료를 그에게서 받았다. 우리 집안일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분이다.
두 오빠는 부산 나무통 공장에 다니면서도 그곳 직공들에게 전도했다. 우리 집까지 찾아온 직공들과 더운 여름날 집 뒤 동산에 모여 맑은 공기를 호흡하며 성경을 읽고 예배드리던 일, 성탄절 공장 직공들에게 ‘그 맑고 환한 밤중에’라는 찬송가를 들려주던 일, 모닥불을 피워 놓고 나무토막을 두드려 박자를 맞추던 오빠들의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오빠들은 공장에 다녀와서 틈틈이 책을 읽었고, 우리 동생들에게는 한글을 가르쳐 주었다.
1944년 1월이었다. 일제가 일으킨 전쟁이 아시아 전역을 확대되던 시기였다. 그것이 일제의 마지막 발악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그 무렵 아버지는 청주구금소에 갇혀 있었다. 큰오빠가 처음으로 아버지 면회를 갔다. 당시 오빠의 나이는 19살이었다. 오빠가 면회를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오는 기찻간에 경관과 마주쳤다. 그 시절에는 기차에 경관이 꼭 타고 있었다. 경관은 오빠가 어디를 다녀오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오빠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갇힌 아버지를 면회하고 오는 길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경관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집 주소와 나이, 이름을 물었다. 아무런 두려움이 없던 오빠는 솔직하게 알려주었다.
며칠 뒤 북부산경찰서에서 통지서가 날아왔다. 징병을 위한 신체검사 통지서였다. 군대에 가면 매일 신사참배를 해야 할 터였다. 살아 돌아올 기약이 없다는 일보다 더 두려운 일이었다. 큰오빠는 신체검사에서 갑종을 받았다. 확실한 군입대 예정자가 되었다. 온 가족이 큰오빠를 위해 기도했다. 며칠동안의 금식으로 오빠는 더 수척해졌다. 핼쑥한 얼굴의 오빠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지는 죽어도 하나님께 불경이 되고 아버님께 불효가 될 신사참배는 할 수 없습니더. 도저히 안됩니더.”
한참 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어머니가 말을 꺼냈다. “알았다. 우리 식구는 이제 흩어져서 숨어 살아야겠다.” 부산 생활에 이제 막 적응하려던 순간에, 우리 가족은 다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역경의 열매] 손동희 (6) 일제 魔手 피해 온가족 찬송가 부르며 뿔뿔이 생이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나 사람은 한치 앞도 알지 못한다. 1년여 뒤 일제가 물러났지만 그때 우리 가족의 심정은 어쩌면 영영 그렇게 헤어진 채 못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뿐이었다. 그러나 설령 다시 못 만나더라도 큰오빠가 신앙을 저버리는 것보다는 백배 나은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만주 하얼빈의 작은아버지 손문준 목사님 댁으로 가기로 했다. 작은아버지는 할아버지가 3·1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붙잡혔을 때 일경의 추적을 피해 만주로 가셨다. 어머니와 막내는 부산 기장의 장부자 집으로, 작은 오빠는 애양원에서 나온 7명 나환자들이 있는 진주로, 큰오빠는 남해 깊은 산골로 가기로 했다. 나와 밑의 동생은 부산 구포에 있는 애린원(愛隣院)이라는 고아원에 들어가기로 했다.
자기 때문에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으니 큰오빠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내가 동생 동장이랑 고아원으로 가던 날 아침 오빠는 초췌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 아빠가 계신데 왜 고아원에 가야 하는지 나와 동생은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 배고파도 개안타. 인자부터는 엄마 말 잘 들을게. 엄마, 내 고아원에 가기 싫다. 진짜 엄마하고만 같이 살게해도. 어! 어!”
울면서 매달리는 우리를 보며 어머니는 성경과 찬송가를 꺼냈다. “어쩌면 우리 가족은 이제 천국에서나 다시 만날지 모른다.” 어머니는 짧게 말을 한 뒤 찬송가를 불렀다. 우리도 따라 불렀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하나님이 함께 계셔/간 데마다 보호하며/양식 주시기를 바라네/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예수 앞에 만날 때/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그때까지 계심 바라네.’
나와 동장이는 큰오빠가 빌려온 자전거에 실려 퉁퉁 부은 눈으로 구포로 향했다. 그때 내 나이 열두 살, 동장이는 아홉 살이었다. 구포 애린원은 1938년 한정교 목사님이 설립한 곳이다. 당시 신사참배를 거부해 쫓겨다니던 성도들이 숨어 지내곤 했다. 그곳에서 나는 희야로, 동장이는 장은이로 이름까지 고쳐 불렀다. 주기철 목사님의 첫째 아들 영진 오빠와 셋째 아들 영해 오빠도 함께 생활했다. 주 목사님은 이미 순교한 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 나는 내 곁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도대체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이기에 사랑하는 아버지는 감옥으로 가야 하고, 우리는 고아가 되어야 했나. 주기철 목사님은 왜 자식들마저 고아원에 팽개치고 감옥에서 숨졌을까. 어째서 내 부모님은 별난 예수를 믿어 자식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나.
우리가 고아원에 있는 동안 큰오빠는 남해 등지의 산 속에 숨어 살며 나무껍질과 산열매, 산나물을 먹으며 지냈다고 한다. 산 속 마을에서 잡일을 도와주며 밥을 얻어먹으면서도 늘 찬송가를 불렀다고 남해 내산의 한덕례씨 집 큰따님이 나중에 내게 얘기해주기도 했다. 어머니도 한덕례씨 집에 잠시 머물렀다.
한번은 애린원에 큰오빠가 찾아왔다. 어디서 구했는지 과자 봉지도 있었다. 새까맣게 탄 얼굴에 몸은 더욱 말라 있었다. 입고 있는 옷도 여기저기 해진 데다 때가 잔뜩 끼었다. 그래도 반갑기만 했다. 그날 밤 오빠가 30명 정도 되는 애린원 고아들 앞에서 성경 말씀을 전했던 기억이 난다. 진주의 나환자들을 찾아간 작은 오빠는 새벽마다 산에 올라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며 살았다고 한다.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고아원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한정교 목사님이 나무 그늘 밑에 돗자리를 깔고 사람들을 모아 요란스럽게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이 뭔가 들떠 있는 느낌이었다. 애린원에 들어와서 처음 보는 분위기였다. 한 목사님이 나를 발견하고는 달려오시며 말씀하셨다. “동희야. 이제 너희 남매도 고생이 끝났다. 오늘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었단다. 이제 손양원 목사님도 감옥에서 풀려나오실 거야!”
***[역경의 열매] 손동희 (7) 해방후 교단 갈등 심화… 아버지 “회개하라” 일갈
감옥 문은 해방 이틀 뒤인 8월 17일 밤 11시에 열렸다. 감옥 문을 나서는 아버지는 누구의 마중도 받지 못했다.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다니는 바람에 어머니와 오빠들은 해방이 온 줄 몰랐다. 2주일이 지난 뒤에야 일본인들이 물러간 것을 알았다니, 누가 아버지를 마중했겠나. 그날이 며칠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드는 황혼녘이었다. 애린원에 한 남자가 들어섰다. 턱밑까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앙상했다. 다 해진 푸른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아버지였다.
우리는 “아부지!” 한마디 하고는 그 품에 안겼다. 이제 다시는 ‘아버지’라는 말은 내 입에서 나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누추한 모습이라도 좋기만 했다. 마음 아팠던 것은 주기철 목사님의 아들 영해 오빠의 모습이었다. 이 기쁜 날에도 영해 오빠를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오빠는 우리 아버지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주기철 목사님은 1년 전인 1944년 4월 21일 옥중에서 순교하셨다.
진주에서 나환자들과 살던 작은오빠는 나무통 공장 사장 박신출 집사님 댁에 왔다가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는 진주 남강 다리 밑 나환자들이 우리 가족을 도와줬다는 얘기를 듣고는 눈물을 흘리더니 곧장 남강다리로 달려갔다. 거기서 부흥집회를 열었다.
그곳에서 황고모와 의논한 끝에, 작은오빠와 아버지는 애양원으로 갔다.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나환자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 사람의 모습이 보이자 나환자들은 함성을 지르며 환영해주었다. 남해 산골에 숨어 있던 큰오빠와 어머니, 동림이도 애양원 사람이 찾아가 불러왔다. 비로소 우리 가족이 다시 모였다. 애양원을 설립하고 운영하다 일제의 추방으로 떠났던 월슨 박사와 원가리 선교사도 왔다. 애양원을 떠났던 나환자들도 속속 모여들었다. 험한 세월이었지만 하나님은 머리털 하나도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셨다.
나는 학교도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도 가고 싶었던 학교, 돈이 없어서가 아니고 가기 싫어서가 아니고 신사참배를 할 수 없어서 가지 못했던 그 학교였다. 애양원은 산간 벽지여서 근처에 학교가 없었다. 우리 남매는 50리 떨어진 순천의 학교로 가야 했다. 5년의 공백이 길긴 했지만, 큰오빠는 순천 사범학교(현재 순천 농업고등학교) 4학년으로, 작은오빠는 순천중학교 2학년으로 편입했다. 나는 나이대로 하자면 6학년에 다녀야 했지만 학교는 가보지 못한 입장이라 어찌어찌 4학년으로, 동생 동장이는 2학년으로 들어갔다. 공부를 따라가기가 무척 힘들었지만 오빠들은 밤 12시까지 코피를 흘리며 공부에 열중했다. 나는 아직 쉬운 과정이라 그런지 공부나 학교생활이나 온통 신나기만 했다. 성적이 쑥쑥 올라 이듬해는 월반을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46년 3월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지 만 8년 만이었다. 졸업 때 목사 안수를 받지 못한 것은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일본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글을 자주 읽는다는 이유였다. 아버지는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 김교신 선생과도 교분이 깊었다.
해방된 교회에는 혼란이 있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옥중 성도들과 신사참배를 했던 이들 사이의 갈등이었다. 무슨 일만 있으면 “저 사람은 신사참배를 했대, 안 했대?”하고 따지는 것이 일이었다. 신사참배를 했던 이들 중에는 “우리가 교회를 지켰다”며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강단에 올려둔 ‘천조대신’ 우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교회들도 있었다. 해방이 되어도 나쁜 습관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곳곳을 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했던 아버지는 우상을 내동댕이치며 천둥과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회개하라!”
***[역경의 열매] 손동희 (8) 해방 기쁨도 잠시… 나라와 교회, 분단·갈등 속으로
언젠가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우리 민족이 해방 뒤에도 38선으로 갈라진 것도 한국 교회가 신사참배라는 범죄를 범교회적으로 저지른 것에 대해 하나님이 진노하셨기 때문이라고. 해방은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순교자와 옥중 성도들의 공이요, 분단은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선량한 성도들을 현혹하고 나쁜 길로 인도한 교회 지도자들의 죄의 대가인지도 모른다고.
아버지는 해방 이후에 교회가 신사참배를 한 사람과 안 한 사람으로 나뉘는 것도 마음 아파하셨다. “신사참배를 거부했다고 완전한 신앙의 표준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며 고신파와 총회파로 대립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으셨다. 실제로 해방 이후 출옥 성도인 재건파의 지도자 최덕지 선생이 아버지를 찾아와 재건파와 함께 한국 교회를 바로잡자고 권유했을 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주님도 죄인을 구하려 나 같은 죄인이 사는 땅에 오셨는데 내가 어떻게 현재의 교회를 끊어버리겠습니까.”
돌이켜보면 해방 이후에 교회가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며 화합하지 못했던 것이 훗날 교회 분열의 단초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아쉬움이 있다.
사실 일제시대에 그 강압과 고문을 감수하면서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막연하게 느끼는 것보다 훨씬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투철한 신앙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실족한 이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며 사신 생명이다. 돌이켜보면 그때 화해와 포용이 어느 때보다 필요했지만 그럴 만한 마음의 힘이 우리에게는 없었다.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해방 이후에 우리 민족은 큰 분열과 갈등을 겪지 않았는가. 그 대립이 우리 가족에게 비극으로 닥쳐왔지만, 우리 민족도 지금까지 분단의 비극을 날마다 살아가고 있다.
순천에서 두 오빠와 동생 동장이와 넷이서 같이 살면서 학교를 다니던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맏이인 동인 오빠는 노래를 참 잘했다. 순천사범학교의 오경심 선생님은 음악경연대회 때마다 오빠를 앞장세웠고, 오빠는 늘 최우수상을 받아왔다. 오 선생님은 오빠에게 미국으로 유학을 가라고 권하기도 했다.
순천사범학교 안에 기독학생회가 만들어졌는데, 오빠는 회장으로 당선됐다. 순천중학, 여중학, 순천농업학교와 매산학교 등 순천의 학교마다 기독학생회가 조직돼 순천 연합 기독학생회가 탄생됐다. 이 모임에서도 동인 오빠가 회장을 맡았다. 얼마 안 되어 전국에 걸쳐 한국기독학생회(KSCF)가 결성됐다. 잘생긴 데다 성품도 강직했던 오빠는 여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았다. 그 덕분에 나도 언니들에게 귀한 선물을 받기도 했고 빵집이며 맛있는 음식점에 곧잘 초대받기도 했다.
하루는 오빠가 나에게도 음악을 공부하라고 권했다. 큰오빠의 모습은 지금도 내 눈앞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동희야. 오빠가 너 피아노 배울 수 있게 해줄 테니 나중에 오빠가 노래할 때 꼭 반주해 줘야 한다. 알았지.”
며칠 안돼 나는 구자례라는 여선교사님께 피아노를 배우게 됐다. 평생 산으로 쫓겨 다니고 고아원에서 살아야 할 줄로만 알았던 나로서는 꿈과 같은 일이었다. 반대로 그 피아노 공부가 오빠에게 받은 마지막 선물이 될 줄은 그때로선 역시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피아노를 배운 덕분에 나는 신앙에 회의감을 가지고 방황할 때도 반주를 하기 위해 교회를 빠지지 않았고, 그 덕분에 새롭게 신앙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 무렵 중학교와 종합학교에선 학생들도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서 대립했다. 한번은 순천 승주교회 나덕환 목사님의 아들인 제민 오빠가 이런 얘길 들려주었다. “동희야, 어젯밤에 어느 학교 교장선생님이 괴한에게 실컷 두들겨 맞고 시궁창에 던져진 걸 사람들이 겨우 구해냈대.”
단지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런 일이 벌어지던 시대였다.
***[역경의 열매] 손동희 (9) 애양원 들이닥친 순천 반란군 “손목사 어서 나와!”
시궁창에 버려졌다 간신히 생명을 구한 그 교장 선생님은 결국 서울로 옮겨갔다고 했다.
그 시절에는 어른들보다 학생들이 더 격렬했다. 툭하면 두 패로 나뉘었다. 좌익은 공산당, 우익은 기독학생회가 대표적인 조직이었다. 자습 시간만 되면 학생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진다. 너희가 옳니 우리가 옳니 시비가 벌어지면 패러독스니 뭐니 온갖 논리가 나오다가 결국에는 주먹이 올라갔다. 자습 시간에 논쟁을 하다 격해지면 교사들이 와서 말리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우익 학생이 좌익 학생을 구타하고, 좌익 학생이 우익 교사를 폭행하는 일도 흔했다. 유도를 잘하는 학생이 교사를 들어올려 창 밖으로 던진 일도 있었다.
순천만 그랬던 것은 아닐 것이다. 서울에서도 날마다 찬탁 반탁 시위가 벌어졌고, 대구에서도 혼란스러운 일이 있었다. 온 나라가 그렇게 나뉘어 싸웠다. 그런 시절에 교회도 분열돼 화합하지 못하였으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런 분열과 대립은 우리 가족에게 크나큰 비극으로 다가왔다.
1948년 10월 19일이었다. 그날은 가을소풍을 가는 날이었다. 나는 순천 매산여중 1학년이었고, 동인 오빠는 25살, 동신 오빠는 19살이었다. 소풍 가방을 메고 나서는 나를 큰오빠가 불러 세웠다.
“동희야, 잠깐만.” 오빠는 언제 준비했는지 우유와 과자를 가방 속에 넣어주고 용돈도 쥐어주었다.
“오빠, 고마워. 나 오늘 여수 쪽 신성포로 소풍 가고 내일은 쉬니까, 오늘 바로 애양원으로 갈 거야. 거기서 하루 있다가 다음날 바로 학교에 갈 테니 나 기다리지 마.” 나는 말을 마치자마자 밖으로 뛰어나가려 대문을 향했다.
“동희야.” 오빠가 또 나를 불렀다. “왜 자꾸 불러.” 오빠는 내 소풍 가방을 다시 살펴보더니 내 손을 꼭 잡았다. 오빠는 한 번 더 나를 불러 세웠다. 세 번이나 그러니 장난치는 것 같기도 했다.
“별일 아냐. 소풍 잘 갔다 와.”
나는 오빠가 또 나를 부를까 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 나갔다. 그것이 두 오빠와 이 땅에서 마지막 나눈 인사였다. 그날이 소풍날이 아니었다면, 소풍을 애양원에서 가까운 곳으로 가지 않았다면, 그래서 내가 그날 순천의 자취집으로 들어갔다면 내 운명 역시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날 하루 고운 단풍을 만끽하고 나는 애양원으로 갔다. 이상하리만치 단풍이 예뻤고, 기분이 좋았다. 다음날에는 애양원 친구들과 바다로 나가 꼬막이며 바지락을 잡았다.
21일이 되었다. 순천에 있는 학교로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신풍역으로 나갔다. 이맘때면 기차가 기적소리를 울리며 달려와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조용했다. 대신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사람들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 이야기를 엿들었다. 지금 여수와 순천에 주둔해 있던 국군 제14연대의 군인들 사이에서 반란이 일어나 서로 싸우다 좌익 군인들이 부대를 점령했다는 것이다. 반란 군인들은 여수와 순천 시내까지 자신들의 관할로 두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 지 불과 65일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기차가 오지 않는 것도 반란군이 철길을 막아서라고 했다.
나는 터덜터덜 집으로 되돌아 왔다.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어서 그랬을까. 이때까지만 해도 사태가 심각한 줄 몰랐다. 두 오빠와 순천에 있던 동림이도 집으로 왔다. 오빠들이 “부모님이 걱정하시니 너는 집에 가 있으라”고 보냈다는 것이다. 오는 길에 시체가 곳곳에 널부려져 있고 반란군이 곳곳에서 검문을 했다고 한다.
그날 밤, 멀리서 트럭 소리가 들려왔다. 외딴 곳인 애양원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나는 공연히 불안해 트럭이 우리집을 지나가길 빌었다. 그 트럭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우리 집 앞에서 멈췄다. 대문을 걷어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람들이 몰려들어 왔다. 앳된 얼굴의 학생들이 총칼과 죽창을 들고 있었다. “여기가 손양원 목사 집이지? 손 목사, 어서 나와!”
***[역경의 열매] 손동희 (10) 두 오빠 총살됐다는 소리에 순천까지 50리 길을…
다행히 그때 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학생들은 신발을 신은 채 방으로 뛰어들어와 이 방 저 방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어디 숨었을까 죽창으로 천장과 마루를 쑤셔댔다. 학생들은 아버지를 찾지 못하고 집을 나서면서 청천벽력 같은 말을 던졌다. “오늘 당신 아들 두 놈이 다 총살당해 죽었단 말이오. 알고나 있소?” 그 말을 내뱉던 그 사람의 얼굴이 지금도 내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다. 어찌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그게 무슨 말이오? 우리 아들들이….”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나도 정신이 아찔하고 가슴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아니야. 오빠들은 결코 죽었을 리가 없어.’ 나는 주변 사람들의 손을 뿌리치고 순천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애양원에서 순천까지는 50리 길이다. 죽창을 든 젊은 학생들을 태운 트럭이 쌩쌩 지나갔다. 곳곳에서 반란군을 마주칠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여수·순천에 주재하던 14연대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뒤 좌익 학생들에게 무기를 건네고 그들에게 치안을 맡긴 상황이었다. 군인들은 시내의 지리나 상황을 잘 알지 못해 학생들을 동원했던 것 같다.
가까스로 도착한 순천 시내는 눈뜨고 볼 수 없는 생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신작로 옆으로 시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개들이 그 시체를 물어뜯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전봇대에는 불에 탄 채로 묶인 주검도 있었다. 경찰서와 관공서도 모두 반란군이 접수한 상황이었다.
좌익 학생들은 반동분자를 색출한다며 정치 요인, 정당 관계자, 부유층, 기독교인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어제까지 같은 학교 같은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던 급우들이 친구의 가슴에 서슴없이 총부리를 들이댔다. 반란이 진압된 뒤 전남 보건후생국이 발표한 사망자는 3500명, 행방불명자는 500명이었다.
간신히 오빠들과 함께 생활하던 집에 도착했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막상 집 앞에 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동희야, 소풍은 재미있었니”하며 오빠가 나를 부를 것만 같았다. 고개를 내밀어 집안을 들여다보았다. 마당에 오빠들의 교복과 책, 가방과 사진, 목도리가 내팽개쳐져 있었다.
조금 있자 옆방에 살던 분이 대문 안으로 들어오셨다. “아이고, 동희야!” “집사님….” 더 이상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래, 동희야. 동인이하고 동신이는….” 나는 애써 정신을 수습하고 물었다. “시신은 어찌 됐나요?” “내가 찾아다가 다른 곳에 옮겨놓았다.” “어서 가 봐요.”
따가운 햇살이 내리 쬐는 산모퉁이의 밭도랑이었다. 가마니 위에 두 오빠가 누워 있었다. 머리가 터져 온 몸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이마와 가슴에는 총알 자국이 뻥 뚫려 있었다.
“하나님! 하나님은 그때 무얼 하고 계셨나요. 내 오빠들이 그렇게 무고하게 죽어갈 때 당신은 눈을 감고 계셨나요. 왜요! 한 사람만 데려가도 억울한데, 왜 두 사람이나 데려갔습니까. 하나님 두고 봅시다. 내가 예수를 믿는가 봐요. 이 총알은 누가 만들었나요. 날아오는 총알 막을 수는 없었나요?” 내 입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실성한 사람처럼 마구 외쳐댔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죽게 놔두셨나요. 다시 살릴 수는 없었나요.”
두 오빠가 좌익 학생들에게 끌려간 것은 21일이었다. 죄목은 기독학생회장인데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고 하는 친미주의자라는 것이었다. 순천경찰서로 끌려가면서도 오빠들은 학생들을 달래려 했다고 당시 사진관 아주머니께서 나중에 전해주셨다.
“이봐, 우리는 같은 동족이고 같은 학생 아닌가. 같은 동족끼리 이렇게 해야 할 이유가 뭔가. 예수 믿고 선한 일을 해야 이 나라가 복을 받지. 동족끼리 헐뜯고 싸우면 망하기밖에 더 하겠어?”
***[역경의 열매] 손동희 권사 (11) 아버지 “동희야, 두 오빠 죽인 학생을 구해주거라
순천경찰서 뒤편의 총살 현장을 많은 사람들이 목격했다. 좌익 학생들은 ‘예수 사상’을 버리고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면 살려주겠다고 했지만, 두 오빠는 끝까지 거부했다. 큰오빠는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라는 찬송가를 부르며 숨졌다. 작은오빠도 “내 신앙도 형님과 같소. 나도 쏘시오”라고 항변하다 같이 숨졌다.
이 일을 주동한 학생이 안모군이었다. 안군은 쓰러진 작은오빠를 향해 확인사살까지 했다.
반란은 불과 1주일 만에 진압됐다. 순천의 상황은 180도로 바뀌었다. 정부에선 여수·순천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해 군 총사령관에게 모든 통치권을 주었다. 재판 없이 즉결 처분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경찰도 손이 모자라 우익 학생들의 모임인 ‘학생 연맹’에 무기를 공급해 치안권을 주었다. 학생 연맹은 순천 북국민학교에 좌익 인사들을 잡아다 ‘악질’과 ‘단순 동조자’를 분류했다. 취조와 고함, 고문 소리로 건물이 진동했다. 참혹했다. 악질로 분류되면 사형에 처해졌다. 생사여탈이 한순간에 갈렸다. 잡힌 학생들의 부모들이 몰려와 내 자식은 좌익에 가담하지 않았다며 애원했다.
두 오빠를 총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학생이 붙잡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사실 순천의 나덕환 목사님 아들인 나제민 오빠를 잡으려 했지만 허탕치자 옆집에 살던 우리 두 오빠를 잡아가 취조하고 총살했다고 자백했다. 확인사살을 한 뒤 중학교 앞 신작로에 버린 사실도 털어놓았다. 그의 목에는 ‘악질-사형’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제민 오빠에게 그 소식을 전해들은 아버지는 조용히 나를 불렀다. “동희야.” 아버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지금 부흥집회 때문에 집을 떠나야 한다. 그래서 순천까지 갈 수 없구나. 나 대신 네가 나덕환 목사님에게 다녀오너라. 가서 내 뜻을 전하거라.” “아버지 뜻이라니요?” “네 두 오빠를 죽인 학생이 잡혔다지? 네가 얼른 나 목사님께 가서, 그 학생에게 매 한 대도 때리지 말게 하고 사형장에서 빼내 달라고 부탁해라.”
그리고 아버지는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그 아이를 내 아들로 삼으려 한다. 이 말도 잊지 말고 전해다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어찌 그럴 수 있는가.
사실 아버지는 처음 두 오빠의 사망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두 오빠의 유품이 집에 왔을 때는 오열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애양원에 부흥회 인도차 와 있던 이인제 조사님의 말씀에 아버지가 마음을 바꾸었다고 했다.
“손 목사, 우리는 과거 감옥에서 순교하기를 원했으나,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셨소. 오늘 젊은 두 아들을 순교의 제물로 바친 것은 슬퍼해야 할 일이 아니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오히려 기뻐합시다.”
아버지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마음속에 한 줄기 밝은 빛이 비치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어쨌든 그 말을 전해야 할 임무를 맡은 것은 나였다. 아버지의 표정을 보니 이미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이 느껴졌다. 내 마음과는 다른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말대로 할게요.” 말하는 내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어깨를 들썩이며 울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내 눈물을 닦아주며 꼭 안아주시고는 말했다. “고맙다. 역시 내 딸이다. 그 학생이 사형당하기 전에 가야 하니 서두르거라.” 아버지는 부흥집회를 위해 황급히 떠났다. 나는 억지로 발길을 옮겨 순천으로 향했다. 나 목사님 댁을 찾아가 아버지 말씀을 전했다.
“과연 손 목사님이시구나.” 나 목사님은 학생들이 붙잡혀 있는 조선은행 옆 대학당으로 달려갔다. 우리 오빠를 죽인 그 학생은 이미 피투성이가 돼 있었다. 취조는 끝나지 않았다. 구타와 발길질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를 더 이상 때리지 마시오!” 나 목사님은 분노로 가득 차 있는 우익 학생들을 향해 소리쳤다.
***[역경의 열매] 손동희 (12) “목사님, 이 자가 지금 막 동인 동신이를 죽였다고 시인했습니다.
“목사님, 이 자가 지금 막 동인 동신이를 죽였다고 시인했습니다.”
“나는 동인 동신이 아버지 손양원 목사에게서 부탁을 받고 왔소. 그 학생을 처형하지 말고 살려주면 회개시켜 아들 삼겠다고 했소.”
사람들은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대부분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태도였다. 오히려 한 군인은 “그런 말 하시면 목사님도 빨갱이라고 오해 받습니다”라며 아예 입을 다물라고 했다.
나 목사님은 사흘 동안 경찰서와 군청을 찾아다니면서 아버지의 뜻을 전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나는 나 목사님 댁에 머물며 상황을 전해들었다. 나는 무엇 때문인지 초초하고 불안했다. 사흘쯤 지났을 때 목사님이 다급히 집으로 들어오시며 나를 불렀다. “동희야. 도저히 안 되겠다. 지금 나와 같이 팔왕 카페로 가자.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팔왕 카페라는 술집에 죄수들이 모여 사형장으로 갈 차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목사님이 아무리 설득해도 말이 안 통하니 나를 급히 부르러 오신 것이다. 목사님 집에서는 5분 거리였다.
“동희야. 거기 가서 딴소리 하면 안 된다. 꼭 아버님이 시킨 대로 말해야 한다.” 내 기색을 눈치채셨던 것인지 나 목사님은 당부를 했다. 내 가슴은 방망이질을 하듯 뛰기 시작했다.
‘이놈을 죽일까, 살릴까, 죽일까, 살릴까.’ 한 걸음 한 걸음 디딜 때마다 마음이 바뀌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팔왕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수십개의 눈이 모두 나와 목사님을 바라보았다. 대령 계급장을 단 군인이 내 이름을 묻더니 물었다. “그래, 아버지가 뭐라고 하셔서 여기까지 왔느냐.”
나는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토하듯 말을 뱉었다. “두 오빠를 죽인 자를 잡았거든 매 한대도 때리지 말고, 죽이지도 말라고 하셨어요. 그를 구해 아들 삼겠다고요. 성경 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 했기 때문이래요.”
숨을 참아가며 겨우 말을 마쳤다. 주르륵, 눈물이 내 뺨 위로 흘러내렸다. 나는 옆에 있던 책상에 엎드려 울었다. 사방이 조용해졌다. 잠시 뒤 대령이 나직이 하는 말이 들렸다. “위대하시다.”
교실 크기만한 방 안에 조금씩 흐느낌이 들리더니 울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나 목사님도, 살기등등했던 우익 학생들도, 죽음을 기다리던 좌익 학생들도, 군인들도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고 있었다. 아직 철부지, 신앙의 깊은 경지를 깨닫기엔 부족했던 나였지만 이 광경도 오늘까지 내 눈 앞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양식이 없어 기근이 아니라 사랑이 없어 기근이라고 한다. 복수만이 최대의 승리인 양 끝장을 보자는 오늘의 우리 사회에도 아버지가 던진 이 사랑의 폭탄이 던져질 수는 없을까. 용서를 모르는 완악한 인간사회에 죄악으로 뭉친 근원을 뿌리째 파괴하는 복음의 원자탄을 투하할 수는 없을까.
며칠 뒤 집회를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는 안군의 집을 찾아갔다. “너로구나. 이리 오너라.” 아버지는 따뜻하게 이름을 부르며 안군의 손을 꼭 잡았다. “안심하거라. 네 실수는 벌써 용서했다. 기억도 하지 않겠다. 하나님도 용서했을 줄 믿는다.”
안군의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제가 사실 일제시대에 경제범으로 광주형무소에 구금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신사참배를 거부해 들어왔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다들 존경하는 마음이었지요. 어떤 분인지 한번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뵐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안군의 손을 잡고 “예수 잘 믿고, 내 두 아들 몫을 다해 주님의 일꾼이 되어다오”라고 당부했다. 떠나려는 아버지를 붙잡고 안군의 아버지가 부탁했다.
“목사님, 큰따님이 순천 매산여중을 다닌다면서요. 따님이 저희 집에서 학교를 다니면 어떨는지요. 우리 가족이 예수 믿는 데도 도움이 되겠고, 목사님도 더 가까이 뵐 기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역경의 열매] 송동희 (13) 교문에 걸린 ‘붉은 깃발’ 보기만해도 섬뜩
그런 이유로 나는 얼마 동안 안군의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아버지의 권유를 거역하지 못해 그런 것이지만, 내 심정은 괴롭기만 했다.
안군은 그 집에 있을 때가 거의 없었다. 아버지는 그의 신앙을 키우고자 집회마다 데려갔다. 오며 가며 친아버지처럼 사랑을 베풀고 감싸주었다. 하지만 곧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면서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힐끗힐끗 거렸기 때문이다. 예배가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무슨 동물원의 원숭이 구경하듯 안군 곁에 몰려들었다. 그가 몸을 피해도 사람들은 쫓아갔다. 아버지도 민망한 노릇이라며 더 이상 데리고 다니진 않았다. 아버지는 취직자리까지 알아보러 다닐 정도로 그를 아꼈다.
아버지는 어쩜 그렇게 안군을 사랑할 수 있었을까.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고 나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행적이 눈 위의 발자국처럼 내 마음에 새겨졌다.
어쨌든 나는 두 오빠의 핏자국이 있던 집에서는 무서워 살 수가 없었고, 학교는 다녀야 했기에 안군 없는 그 집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집에 있는 것 자체가 지옥에 와 있는 것만 같았다. 날이 갈수록 내 몸은 말라가고 정신도 쇠약해졌다. 어쩌다 안군이 집에 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고개를 돌려버렸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도 마음이 편지 않았을 것이다.
나날이 야위어가는 나를 더 두고 볼 수 없었던 부모님은 서울 이화여중으로 전학시켰다. 일제시대 말기에 우리 가족을 도와주었던 황덕순 고모와 함께 작은 방을 얻어 자취생활을 했다. 나병은 있었지만 병표가 없었던 황 고모는 총신대에서 신학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듬해 나는 3학년이 되었다. 그해 6월 북한이 전쟁을 시작했다. 이 민족의 불행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고, 우리 가족의 불행 역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해방이라는 큰 선물을 주셨는데, 무엇이 모자라 형제간에 총부리를 들이대야 했을까.
황 고모와 나는 미처 피난을 가지 못했다. 전쟁이 났다는 소식이 들린 지 사흘 뒤에 이승만 대통령은 한강 다리를 폭파시켜버렸다. 학교 교문에는 붉은 깃발이 걸려 있었다. 보기만 해도 섬뜩했다. 두 오빠의 뒤를 이어, 이번엔 내 차례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와 황 고모는 절대로 떨어지지 말고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고 맹세했다.
자취방에 들어가기도 무서웠다. 두 오빠들처럼, 언제 누가 트럭을 타고 와 우리를 데려갈지 몰랐다.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는 많은 목회자 가족들이 남아 있었다. 전쟁 나기 하루 전인 6월 24일 밤 서울에 거주하는 목사님들 중 상당수가 어딘가로 끌려갔다. 남은 가족은 돌아올 줄 모르는 목사님들을 기다리다 피난도 가지 못한 것이다. 황 고모와 나는 땅굴 속에 숨기도 하고 다른 교인들과 함께 지내기도 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우리를 살려달라고, 이 나라를 살려달라고. 잘 때도 신발을 벗지 못했다. 봇짐을 베개로 사용했다. 잠결에 누군가가 “뛰어라!”라고 소리치면 영문도 모른 채 죽어라 도망을 치곤 했다.
세상은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재만 남은 거리엔 부서진 건물, 널려 있는 시체, 부모를 잃고 우는 아이들이 있었다. 이대로 전쟁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
석 달 뒤인 9월 28일 국군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날은 하늘이 참 맑았다. 비로소 불안감을 떨쳐버리고 푸른 하늘을 쳐다볼 수 있었다.
전쟁 전날 사라진 목사님들은 북으로 끌려갔다는 소문도 있고, 구덩이에 처넣고 생매장시켰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끔찍했다. 순천은 남쪽 끝이니 아무 일 없겠지 싶으면서도 불안을 떨치기 힘들었다. 어느 날 안용준 목사님이 우리 자취방에 오셨다. 목사님은 나를 보시더니 말을 못하시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 표정을 보는 내 가슴이 쿵하고 무너지는 것 같았다.
“동희야. 네 아버님마저 끝내….”
***[역경의 열매] 손동희 (14) 아버지, 서울 수복되던 날 공산군 총탄에 순교
나는 황 고모와 무작정 함께 걸어서 애양원으로 향했다. 발이 부르트고 입술이 벗겨졌지만 더 힘든 것은 끓어오르는 가슴 속 울분과 분노였다. 순간순간 치밀어 오르는 슬픔과 회한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길을 걸었다. 트럭이건 지프건 우마차건 닥치는 대로 얻어 타면서 겨우 애양원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1950년 9월 13일 공산 치하의 여수내무서 율촌분주소에 잡혀가 서울이 수복되던 날인 28일에 여수 미평과수원에서 총에 맞아 순교했다. 당시 48세였다.
호남 지역까지 인민군에 함락되자 주변 사람들은 아버지에게 피난을 권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애양원 식구에게 어느 때보다 지켜줄 사람이 필요할 때 어찌 나 몰라라 팽개치고 달아날 수 있겠소”라며 남았다고 한다. 안모 군도 아버지를 찾아와 “아버지, 이대로 있으면 죽는 건 뻔한 일입니다. 어서 저와 함께 피신해요”라며 애원했지만 일제도 꺾지 못했던 아버지의 고집을 당하진 못했다.
여수가 함락되자 군사반란 사건 당시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던 좌익 인사들이 다시 내려왔다. 반란 당시와 같은 흉흉한 일들이 속출했다.
아버지는 애양원에서 하루 세 번씩 종을 치며 부흥집회를 열었다. 나환자들과 함께 손뼉 치며 찬송가를 부르고 “첫째도 순교, 둘째도 순교, 셋째도 순교입니다. 순교를 각오합시다. 때가 왔으니 잘 살려고 노력 말고 잘 죽기를 기도합시다”라고 설교했다고 한다. 이것은 아버지가 평소에도 늘 하시던 말씀이었다. 대신 공산당이나 좌익을 거론하지는 않으셨다.
마침내 집에 들이닥친 이들에게 끌려갈 때에도 아버지는 양복을 차려 입고 교회에서 기도를 하고 계셨다. 여수 감방에서 보름 동안 갇혀 지내다 9월 28일이 되었다. 인천 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면서 순천의 인민군도 철수하게 되었다. 감방에 있던 이들까지 끌고 갔다. 인민군은 여수를 조금 벗어난 미평 지서 앞에서 10명씩 나누어 총살을 시켰다.
그곳에 같이 있었던 오빠의 친구 김창수씨에 따르면,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인민군과 감방 동료들에게 예수를 영접하라고 전도를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창수씨에게 마지막 남긴 말은 이랬다. “창수군, 기도하게. 어떤 순간에도 기도를 잊지 말게. 하나님께서 힘을 주실 것이네. 자, 우리는 천국에서 만나세.” 창수 오빠는 마지막에 끌려가던 순간 포승을 간신히 풀고 도망쳐 살아남았다. 그 길로 애양원으로 달려와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고 있던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아버지는 일제에 해방되어 감옥에서 석방될 때 걸어왔던 그 둑길을 따라 돌아왔다. 이번에는 남자 네 명이 든 들것에 실려 누운 채였다. 온 애양원 나환자들이 땅을 치며 울기 시작했다. 애양원 뜰 한복판에 놓인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이제 이곳은 걱정하지 말고 눈을 감고 가시오” 하며 아버지의 눈을 감겨드렸다. 안군은 장례식 내내 두건을 쓰고 삼베 옷을 입고 맏상주 노릇을 했다.
사람들은 말한다. 손양원 목사는 성자라고. 위대한 순교자라고. 나는 가끔 생각한다. 아버지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보통의 아버지였다면 우리 가정은 좀 더 행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극심한 불면증과 헛것에 시달렸다. 귓전에는 총소리가 맴돌았고, 길을 걸을 때면 어디에선가 총알이 날아올 것만 같았다. 길모퉁이를 돌 때면 맞은편에 빨치산이 숨어있을 것 같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을 원망했다. 방황했다. “하나님!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내버려두십니까. 왜 하나님을 믿고 따르겠노라 하는 오빠나 아버지 같은 사람들만 먼저 데려가십니까. 나도 데려가 주시오. 더 이상 이 땅에 살 수가 없소.”
안군도 그랬던 것 같다. 아버지의 배려로 부산 고려고등성경학교에 진학한 안군은 주일마다 부산역과 시장을 돌아다니며 노방전도를 할 정도로 신앙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언젠가부터 그도 심각한 회의에 빠졌다.
***[역경의 열매] 손동희 (15·끝) 아버지·두 오빠 순교 증언하는 삶… 주님, 감사합니다
안군은 군에서도 교회 일을 맡아 할 정도로 신앙이 투철했지만, 가는 곳마다 주변의 호기심과 입방아가 이어졌다. 평생을 그런 그늘에서 살았으니 어찌 생각해 보면 가여운 사람이다. 나중에는 아파트 경비 일을 하며 말년을 보냈다.
나도 심각한 신앙의 갈등에 빠졌지만, 큰오빠가 죽기 전 내게 피아노를 배우라고 독려해준 덕분에 매주 반주를 하기 위해서라도 교회를 빠질 수 없었다. 사실 피아노 덕분에 남은 우리 가족은 큰 어려움 없이 학창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나도 피아노 과외로 학비를 벌었고, 두 여동생이 모두 피아노를 전공해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교회에서 겉시늉으로만 찬송가 반주를 하고는 마지못해 설교를 듣고 있었다. 갑자기 목사님 말씀이 내 귓속을 파고들었다. 누가복음 12장 20절의 말씀이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아, 이대로 죽는다면 나는 오빠도 아버지도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다. 더 이상 이래선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주님, 저를 용서하시고 저를 천국에 받아주십시오.’ 작은 기도를 드리는 그 순간 내 마음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날 이후로 죽음의 공포와 신앙의 갈등이 조금씩 사라졌다.
갈등이 사라지면서 나의 소명도 깨달았다. 그것은 오빠들과 아버지의 순교를 증언하는 일이었다. 오래 전에 안용준 목사님께서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책을 쓰셨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지만 부분적으로 사실과 다른 점이 있어 안타까웠다. 영화는 더더욱 동떨어져 있었다. 주변 분들의 권고와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제대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라는 책을 1994년에 펴냈다. 책 내용을 계속 보완해 새로 찍어내고 있고, 지난해에는 책을 바탕으로 ‘오페라 손양원’도 만들어졌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국민일보에 실은 글에서 자세히 소개하지 못한 사연과 아버지의 설교와 기도, 주변 분들이 증언을 책에는 소상히 정리해 놓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안군, 안재선 오빠의 이야기로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보름 전에 나를 찾아왔다. 내가 서울의 동생 집에 갔을 때,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편도선암에 걸린 상태였다. 재선 오빠는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쏟았다. 비틀거리며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생전에 나를 그렇게 타일렀어도 나는 재선 오빠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는데, 그날 그 순간은 모든 무거운 마음이 바람에 날아가듯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미움이 애처로움으로 바뀌었다.
“동희야. 나 이제 곧 하늘나라로 간다. 내가 죽어 천국에 가면, 네 두 오빠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려 한다.”
그게 1979년의 일이었다. 아마 지금쯤 저 천국에서 내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동인 오빠와 동신 오빠는 재선 오빠와 함께 손을 맞잡고 있을 것이다. 재선 오빠가 젊은 시절 한 순간 잘못된 이념에 현혹돼 저지른 실수는 이제 잊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는데, 우리가 왜 남의 잘못을 기억하고 정죄하겠는가. 지금은 재선 오빠의 아들이 목회자가 되었고, 나의 아들 박유신 목사도 주의 종이 되어 외할아버지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 할렐루야!
돌이켜보면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놀랍고 신기하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 새로운 소망을 품는 시간이었고, 소중한 생명을 잃은 그 아픔은 더 많은 생명을 살리기 위한 일이 되었다.
지금 이 시대는 얼마나 예수를 믿기 좋은 시대인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누가 잡아가길 하는가,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는가. 아버지와 오빠가 살던 시대는 그러지 못했다. 그런 시대에도 순교를 각오하고 신앙을 지킨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과 같은 날이 온 것이다. 그것을 잊지 말기를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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