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악전고투
인민군 2사단은 춘천전투에서 심대한 타격을 입은 관계로 춘천에서 서진하여 가평-경안리(서울 동남 30km)을 거쳐 용인(수원 동북 8km)로 진격하여 인민군 1군단 주력의 측면을 엄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최현은 신속하게 양수리의 한국군 2사단 패잔병을 격퇴하고, 7월 3일 용인 북쪽으로 진격하여 한국군의 주전선을 차단하고, 동시에 한국군 후방의 좌측 전선을 압박했다. 이 후, 서울-이천-진천-청주간 도로를 따라 계속 진군했다.
진천-청주일대에서는 한국군 1군단(수도사단, 1사단, 2사단, 경찰부대)이 방어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군단장은 김홍일(金弘壹, 1898-1980,평북 용천 출신)소장으로 중국 북벌전쟁 및 국민당의 항일전쟁에 참여한 실전 경험이 풍부한 중국군 출신이었다. 최현은 패배를 만회하려는 급한 마음에 사단을 지휘하여 맹렬하게 진격하였으나 고생만하고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7월 9일 우선 김홍일이 지휘하는 수도사단과 경찰부대는 진천에서 인민군 2사단에 대한 매복작전을 감행하여 대포 4문과 차량 27대를 노획했다. 이 것을 시작으로 진천 공방전이 개시되었다. 11일까지 전투는 결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서울-부산 도로상의 미군이 계속적으로 후퇴했기 때문에 7월 11일에 이르러서는 인민군의 일부 부대가 수단사단의 좌측전선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수도사단은 어쩔 수 없이 진천을 포기하고, 11일 저녁 청주로 철수 했다. 연일 계속된 행군과 전투로 진천에 입성한 인민군 2사단은 매우 피로한 상태였으나 최현의 독려하에 청주로 쉬지 않고 계속 진격했다. 인민군 2사단이 막 청주로 진입을 시도할 때 한국군 1군단 포병화력(11문)의 갑작스런 집중공격을 받아 순식간에 8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최현은 불가피하게 공격을 중지했다. 그러나 12일 미군이 조치원을 포기함에 따라 좌측에서 인민군 3군단 일부가 한국군 1군단을 공격함에 따라 한국군 1군단은 청주를 포기했다. 산악지대에서 계속된 공방전으로 양측 모두 심각한 손실을 입었는데, 한국군 수도사단은 겨우 1개 연대만 남았고, 1사단과 2사단도 합쳐도 5,000여명 정도였다. 그러나, 최현 사단의 더딘 공격 속도로 인민군 2사단은 미24사단 포위섬멸의 대전 전투에 참가할 수 없었다.
7월 23일 오후 일명 “셰퍼드”부대로 불리는 미25사단27연대가 황간에 도착하여 한국군 2사단이 담당하고 있던 보은-황간 도로상의 저지지연 임무를 넘겨받았다. 미25사단의 적수는 바로 최현의 인민군 2사단이었다. 7월 21일 최현은 청주에서 탱크 8대를 배속받아 보은을 점령하고 있는 한국군 2사단을 격파하였으며, 영동 방어에 돌입한 미1기병사단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곧장 황간을 향하여 신속하게 진격하였다. 최현은 미1기병사단이 빠른 기동력으로 안동에서 황간까지 약 180km의 산길을 따라 하루 주야로 행군하여 정시에 황간에 도착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그는 힘겨운 싸움에 직면한 것이다.
비록 동일한 미군 장비일지라고 미군의 화력은 한국군에 비해 훨씬 막강했다. 셰퍼드 부대는 105mm곡사포 12문과 탱크 9대외에 언제든지 공군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27연대장 마이켈리스 중령은 인민군의 전술을 연구하고 인민군의 우회전술에 대비하기 위해 대종심 방어전술을 채택했다. 즉 제2대대를 제1대대 후방에 배치하고 대낮엔 우세한 화력을 이용하여 맹렬하게 저항하고 밤에는 예비진지로 퇴각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인민군의 포위 돌파 전술에 효과적인 방어전술이었다. 최현은 어쩔 수 없이 미군과 정면 승부를 걸었다. 24일 인민군 2사단은 제1대대의 진지를 점령하였으며, 25일에는 2대대 진지도 점령하였다. 그러나 당일 미군 35연대 1개 대대 증원군이 도착하여 쌍방은 재차 대치국면이 형성되었다. 27일 새벽, 최현은 미군의 좌측을 주공방향으로 정해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결과 어떤 진지는 세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 28일 새벽, 미군진지가 돌파당하면서 연대의 좌측방어선이 붕궤되어 매우 위급해지자 마이켈리스 연대장은 저지지연 작전이 한계점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29일 새벽 황간 방어를 포기했다. 323명의 인명손실을 입은 미27연대는 왜관에 재집결하여 미8군 예비대로 배속됐다. 일찍부터 후퇴하고 싶어했던 미1기병사단은 후위 도로가 차단되고 27연대가 도착한 후 사단을 김천으로 철수시켰다. 그렇지만 이 때문에 워커 장군한테 호된 책망을 받았다.
비록 황간 점령에 성공하고 미1기병사단을 후퇴시켰지만, 인민군 2사단은 여전히 힘겨운 싸움으로 사단의 손실이 매우 컸다. 김천에 진입한 후 정비 휴식 및 보충작업을 진행하게 되면서 8월 인민군의 낙동강 전에 대한 1차 공세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남하과정에서 인민군 2사단은 자주 정면공격노선을 채택했으나 물리적인 면에서나 심리적인 면에서 적군의 저항력을 분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의 저항력을 제고시켰다. 영국군 군사이론가Liddell Hart “이런 정면 공격은 잘해야 적을 긴장하게 만들 뿐 공포상황을 조성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런 공격은 최현 같은 전선의 지휘관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실상 인민군 전체 전선의 공격전략이 주력으로 하여금 정면에 맹공을 퍼붓게 하는 것이었다. 인민군 6사단의 우회 공격이 실패하자, 인민군의 돌격은 단일방향으로 정면 공격하여 밀어붙이는 식이 되었다.
남한에서 징집하여 병력을 보충한 후 인민군 2사단은 6,000여명 가량을 회복되었으며, 명령에 따라 낙동강 전선 2차 공세 작전에서 남측 전선의 보조공격 임무를 부여받았다. 즉, 신규로 전환 배치된 인민군 9사단과 협력하여 창녕 및 영산을 지나 밀양으로 진출한 후 부산-대구 도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남측 전선 인민군의 진격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낙동강 전선의 미2사단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카이저 사단장은 사단 진용이 둘로 쪼개짐에 따라 부사단장에게 포병지휘권을 주어 인민군의 확대 돌파지점 방어를 명령했다. 인민군 2사단은 38연대와 50미터 떨어진 현풍 남단까지 전진해 들어가면서 미군과 격렬한 수류탄 공방전을 가졌다. 그러나 현풍 서측 인민군 10사단은 오히려 병력을 천천히 전진시킴으로써 미군이 최강의 정예부대인 해병여단을 영산방면에 투입하여 반격함으로써 주공격 부대인 인민군 9사단은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이에 따라 최현 사단은 단독으로 공격 임무를 부담할 수 밖에 없었다. 9월8일,인민군 2사단은 창녕 정면에서 최후의 공격을 감행했다. 전투는 새벽에 시작하여 정오까지 계속되었다. 전체 병력이 38% 수준까지 감소한 미 23연대는 공군의 지원하에 타원형 진지를 끝까지 사수했다.
9월16일9시,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미8군이 모든 전선에서 전면적인 반격이 개시되었다. 최현 사단을 공격하던 미2사단은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비가 내림에 따라 항공화력지원이 불가능하게 되고 포병도 유효한 사격지원을 할 수 없어 미2사단의 공격은 별 진전이 없었다. 오후에 비가 그치고 날씨가 맑아지면서 항공화력지원이 개시되고 탱크부대도 활용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보병, 포병, 탱크, 항공기의 협동하에 잇달아 본소리, 성산리 나룻터, 구룡산(208미터) 고지를 점령했다. 사실 인민군 2사단은 이미 9월초 공격능력을 상실했으며 예하 보병연대 병력은 각각 700여명 수준으로 줄어있어 미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따라서 최현은 중화기 등 군수물자를 버리고 낙동강 서안으로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미2사단은 추격중에 대포 19문, 대전차포 18문. 박격포 13문, 그리고 125톤 이상의 각종 포탄을 노획했다.
그러나, 인민군 2사단은 여전히 낙동강 동안의 창녕-부곡 도하지점의 도로에 있는 수곡산을 점령하고 있어 미2사단은 주력부대는 도하작전을 펼칠 수 없었다. 미군은 19일 저녁때에야 겨우 수곡산을 통제하게 됨에 따라 미군 주력은 20일 새벽에 도하작전을 개시하여 정오쯤 도하작전 감제 고지인 227고지를 탈취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 인민군 1개중대가 다시 이 고지를 탈환하였으며 정오쯤 다시 미군이 점령했다. 다른 진지에서의 전투도 대체로 이와 유사한 형국이었다. 인민군은 계속해서 완강하게 저항하였으며 미군은 공군의 네이팜탄을 이용한 대규모 폭격으로 겨우 인민군을 격퇴시켰다.
비록 9월 21일 인천상륙작전의 소식을 들었지만, 인민군 2사단은 여전히 낙동강 진지를 사수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22일 새벽에는 특공대를 조직하여 미군 부대에 반격을 가했다. 9월 23일 김웅 제1군단장의 후퇴 명령에 따라 인민군 2사단은 군단의 후위를 담당하면서 철수했다. 최현이 지휘하는 2,500여명의 2사단은 합천-거창의 황강 하곡 도로를 따라 곳곳에 장애물을 만들고 도로를 파괴하여 미군의 추격을 최대한 지연시켰다. 또한 최현 자신의 주특기인 유격전의 전술을 발휘하여 수시로 미군을 습격함으로써 미군의 진격 속도를 지체시켰다. 9월 27일 새벽에는 미군 23연대 3대대가 안의에서 출발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주위 산에서 박격포 및 기타 화력의 집중공격을 받아 대대장을 포함하여 2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23연대는 저녁때에 인민군을 격퇴시킬 수 있었다.
경부도로를 따라 돌진하는 미1군단이 27일 새벽에 인천상륙작전 부대와 합류함에 따라, 진주-안의-거창지역에서 퇴각중인 인민군 1군단은 퇴로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이에 따라 김웅 군단장은 예하부대에 포위돌파 명령을 하달했다. 최현은 이때 이미 과로로 병을 앓고 있었지만 강철 같은 의지를 가진 그는 계속해서 부대를 인솔하여 태백산을 다라 북으로 철수했다. 험난하고 고생스런 노정과 무수한 전투로 인해 최현이 다시 38선을 돌파할 때 그 주변에는 겨우 200여명이 남아있었다.
10. 에필로그
정전후 최현은 과로로 인한 병으로 계속해서 고생하자 한때 군복을 벗을려고 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군부내의 각파 세력의 복잡성을 고려하여 가장 충성심이 강한 최현이 군을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그를 설득하여 군에 남게 했다. 이때 이후 군내부에 중대 변고가 발생시마다 최현은 군부에서 김일성을 지지하는 핵심세력이 되었다. 1956년 최현은 민족보위성 부상에 임명되면서 상장으로 진급했다. 또한 최현은 1956년 노동당제3차 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당선되었으며 1957년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당선되었다.
1958-1962년 체신상
1962년, 1967년 제3기, 제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64년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1966년 10월 조선노동당 정치위원
1968년 민족보위상, 대장승진
1970년 11월 인민무력부장(민족보위성 명칭변경)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1976년 5월 신병으로 인민무력부장 사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유지
1980년 10월 와병중 정치국원, 중앙군사위 위원 당선
1982년 4월 9일 지병으로 사망
5∼9장은 최현의 동부전선에서 유격전과 기동전, 철원-평강 방어전 내용이 나옵니다. 최현은 이때부터 자신의 주특기인 산악전 유격 매복전을 활용하여 초기 한국전쟁에서의 부진을 떨쳐버리고 수많은 전공을 세웁니다. 이부분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번역에서 올리고, 다음부터는 북한 정권 수립의 주역이자 김일성 주석의 동지요, 친구인 김책의 항일운동 및 북한정권 수립과정에 대한 내용을 번역해 올리겠습니다
첫댓글 항일명장 최현님의 가열찬 인생사도 알아야 하지만 수많은 군상들의 삶도 느껴집니다
좃선일보에 황군의 대표적인 김석원을 대비하니 씁쓸합니다 김책님 활약상도 기대 하겠습니다 ...